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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연기분석경(S12.2) 1,543자 외우기 대장정에 돌입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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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암송

2021. 11. 25.

십이연기분석경(S12.2) 1,543자 외우기 대장정에 돌입하며


빠띳짜사뭅빠다, 연기를 뜻하는 빠알리어다. 일반적으로 십이연기라고 한다. 이 말을 처음 접한 것은 2008년도의 일이다. 마하시사야도 법문집 제목이 빠띳짜사뭅빠다(paticcasamuppada)였기 때문이다.

십이연기를 빠알리어로 외우고자 한다. 불교인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무명, , ,..."으로 시작되는 십이지연기를 말한다. 그러나 십이지연기 연결고리를 모두 다 외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더구나 빠알리어로 외고 있는 사람은 더욱더 없는 것 같다. 십이지연기를 분석적으로 외고 있는 사람은 희귀할 것 같다.

십이연기 정형구는 초기경전 도처에 깔려 있다. 그런데 연기의 순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기의 역관도 반드시 함께 하고 있다. 연기의 순관과 역관이 항상 페어로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살아야 할까? 왜 사는가? 때로 근본적인 질문을 해 본다. 이렇게 질문하다 보면 "나는 누구인가?"라며 의문해 본다. 또한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라며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의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머리로는 알 수 없다. 대부분 "천당이 어디 있고 지옥이 어디 있어? 죽으면 끝나는 거지."라며 자신의 인생관을 말한다.

나는 부모로 부터 태어난 것은 분명하다. 부모의 성적결합으로 인하여 여기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대부분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죽으면 끝나는 것일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일생은 "자궁과 무덤사이에" 있을 것이다.

죽음이 끝이라면 애써 청정한 삶을 살 필요가 없을 것이다. 최대한 즐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감각을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즐기는 것도 한계가 있다. 먹는 것을 낙으로 사는 사람에게 위가 고장났다면 어떻게 될까? 삶의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얼굴 하나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 형편없이 늙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몸은 병들고 늙어간다. 자신의 것이라면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마음은 더욱더 자신의 것이 아니다. 자신의 의도대로 되는 것은 별로 없다. 마음은 제멋대로이고 통제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을 내것이라고 여겼을 때 괴로움이 생겨난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왜 나는 괴로운 삶을 살까? 즐거운 일도 있고 중립적 느낌도 있지만 인생은 근본적으로 괴로운 것이다. 누구도 생노병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노병사는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사고라고 한다. 이와 같은 괴로움의 발생과정을 밝혀 놓은 것이 십이연기이다.

나는 누구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수많은 현자들이 해법을 제시했다. 그러나 존재론적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존재론은 필연적으로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의로 귀결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게 된다.

존재론이 왜 영원주의가 되고 허무주의가 되고 감각주의가 되는가? 그것은 갈애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설명은 명쾌하다.

초전법륜경에 집성제가 있다. 집성제 정형구는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발생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바로 쾌락과 탐욕을 갖추고 여기저기에 환희하며 미래의 존재를 일으키는 갈애이다. ,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이다."(S56.11)라고 되어 있다.

집성제에 세 가지 갈애가 있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말한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간다. 여기서 존재에 대한 갈애는 영원주의에 대한 것이고, 비존재에 대한 갈애는 허무주의에 대한 것이다.

누군가 "나는 누구인가?"라며 존재의 근원에 대해 의문했을 때 필연적으로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의로 귀결된다. 이는 사성제에서 집성제를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며 의문해 보지만 답을 찾을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누구인 것을 알고자 한다면 나를 빼야 한다. 그런 나는 없기 때문이다. 있다면 언어적으로만 존재하는 나만 있을 뿐이다. 나는 토끼뿔이나 거북털처럼 언어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실제로 있다면 오온의 작용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우리 몸과 마음에 대하여 색, , , , 식 이렇게 오온으로 분석해서 설명했다.

누군가 "나는 누구인가?"라며 의문하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오온이다."라며 분석적으로 관찰하면 해법이 있다. 이를 부처님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설명했다. 매우 체계적이고 매우 분석적인 가르침이다. 그래서 불교를 과학이라고도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부처님 가르침은 매우 체계적이다. 마치 여러개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정교하다. 방대한 니까야를 보면 볼수록 더욱더 확신을 갖게 된다. 이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으로 요약된다.

부처님 근본가르침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사성제와 팔정도와 십이연기를 말한다. 그런데 이 세 가르침은 서로 맞물려 있다는 사실이다. 사성제에서 도성제는 팔정도에 대한 것이고, 팔정도에서 정견은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또한 십이연기에서 무명은 사성제를 모르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런 사실은 분석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경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래서 위방가숫따라고 하는데 이를 분석경 또는 분별경이라고 말한다.

사성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초전법륜경에 실려 있다. 담마짝깝빠왓따나경(S56.11)이라고 한다. 이를 수년전에 빠알리어로 모두 외운바 있다. 천수경보다 더 글자수가 더 많다.

팔정도경을 빠알리어로 다 외운 것은 작년 말이다. 빤냐완따 스님을 만나뵙고 자극받아 외운 것이다. 사띠하는 삶도 좋지만 더 좋은 것은 성찰하는 삶이라고 했다. 팔정도야말로 일생동안 추구해야 할 삶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팔정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팔정도분석경은 상윳따니까야 막가상윳따 위방가경(S45.8)에 실려 있다. 위방가는 분별 또는 분석의 뜻이다. 팔정도의 여덟 가지 고리에 대하여 분석적으로 해설해 놓은 경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800여자가량 되는 비교적 긴 길이의 경이다. 외우는데 한달 보름가량 걸렸다.

이번에는 십이연기를 빠알리로 외우고자 한다. 먼저 외우기 위한 자료를 만들었다. 우선 빠알리 원문을 확보해야 한다. 기본이 되는 경은 상윳따니까야 니다나상윳따에 실려 있는 위방가경(S12.2)이다. 팔정도경과 같은 이름이다.

 

니까야에는 위방가숫따라는 경이 다수 있다. 이는 부처님이 근본가르침에 대하여 분석적으로 설했기 때문에 위방가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다. 그래서 팔정도분석경도 위방가숫따(S45.8)라고 칭하고, 십이연기분석경도 위방가숫따(S12.2)이라고 칭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근본가르침을 분석적으로 설했다. 그래서 자신을 '위방가딘'이라고 했다. 이는 분별론자 또는 분석론자의 뜻이다. 선종에서는 분별하지 말라고 했으나 부처님은 오온에 대하여 분별 또는 분석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교학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로 요약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알려면 니까야를 보아야 한다. 그 중에서도 주제별로 구성되어 있는 상윳따니까야를 먼저 보아야 한다. 상윳따니까야를 보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대한 세 경이 있다. 진리상윳따의 초전법륜경(S56.11)은 사성제에 대하여 분별하여 설한 것이고, 막가상윳따의 위방가경(S45.8)은 팔정도경을 분별하여 설한 것이고, 니다나상윳따의 위방가경(S12.2)은 십이연기를 분별하여 설한 것이다.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대한 세 경, 즉 사성제의 초전법륜경과 팔정도의 위방가경, 그리고 십이연기의 위방가경은 외워야 한다. 이는 이해차원이 아니다. 분석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경을 외워서 내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불교인들은 사성제가 고집멸도인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내용인지 아는 사람은 드문것 같다. 설령 보았을지라도 암기하고 있는 사람은 희귀한 것 같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제자들은 근본가르침을 외웠을 것이다. 그래서 늘 암송하고 되새겼을 것이다. 가르침을 늘 기억하고 있는 것도 사띠에 해당된다.

이번에 십이연기분석경을 외우고자 한다. 먼저 빠알리원문을 입수했다. 위방가경에서 없는 것은 추가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에서 출간된 예경지송을 참고했다. 그래서 "에왕 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 사왓티양 위하라띠 제따와네 아나타삔디깟사 아라메"로 시작되는 부분을 추가했다. 또 하나 추가한 것은 연기송이다. 경의 말미에 연기의 순관과 역관이 시작되기 전에 "이띠 이마스밍 사띠, 이당 호띠이맛숩빠다 이당 웁빳자띠. 이마스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이맛사 니로다 이당 니룻자띠."라는 문구를 집어넣었다.

빠알리원문과 원문을 우리말로 음역한 것, 그리고 우리말 해석이 삼위일체가 된 암송용 십이연기분석경이 완성되었다. 모두 18개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석경 답게 십이연기 고리마다 설명이 되어 있다. 무명에 대한 것이라면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S12.2)라고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다름아닌 사성제에 대한 것이다. 이렇게 십이연기와 사성제는 맞물려 있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알아야 면장한다."라는 말이 있다. 불교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교학과 교리를 알아야 불교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와 같은 근본가르침을 모른다면 불교를 알 수 없다.

나는 누구인가? 이렇게 의문하면 존재론이 되어 영원주의자나 허무주의자가 되기쉽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라면 연기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존재론이 아니라 사건발생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연기법이다.

연기법의 대명사는 십이연기이다. 이는 사건의 발생에 대한 것과 같다. 이를 달리말하면 조건발생이다. 연기를 뜻하는 빠띳짜사뭅빠다라는 말자체가 조건발생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진리를 보는 자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본다."(S22.87)라고 했다. 또한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M28)”라고 했다.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나를 찾는 여행은 그만 두어야 한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수행승들이여, 거룩한 제자들은 이 연기와 연생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써 관찰하기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나는 전생에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없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어떻게 있었는지, 나는 전생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었는지숙세로 거슬러 올라가 가거나

나는 내세에 있을지, 나는 내세에 없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을지, 나는 내세에 어떻게 있을지, 나는 내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될 것인지내세로 달려가거나

나는 현세에 있는지, 나는 현세에 없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는지, 나는 현세에 어떻게 있는지, 나는 현세에 무엇으로 있다가 무엇이 되는지현세에 의혹을 갖게 되거나 하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고귀한 제자는 있는 그대로 이 연기와 연생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올바른 지혜로서 잘 관찰하기 때문이다.” (S12.20)


부처님은 나를 찾지 말라고 했다. 그런 나는 없기 때문이다. 오온에 대하여 존재론적으로 본다면 나를 찾을 것이다. 그 결과는 영원주의 아니면 허무주의이다. 그러나 존재에서 사건으로 바라보면 해법이 보인다. 그것이 연기법이다.

연기법은 사건과 사건에 대한 것이다. 오온이 조건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성을 관찰하면 허무주의가 무너지고, 생성을 관찰하면 영원주의가 무너진다.

십이연기는 삶에 대한 것이다. 삶은 근본적으로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런데 십이연기는 괴로움의 발생과 소멸구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건과 사건으로 연결되어 있는 십이지연기의 고리를 보면 알 수 있다. 조건발생하여 상속되는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매일매일 삶을 살고 있다. 매일매일 삶은 사건의 연속이다. 매순간 오온은 조건발생하고 소멸한다. 소멸할 때는 과보가 상속된다. 그래서 연기법은 인연과로 설명된다. 그런데 연기를 알면 진리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연기를 보는 자는 진리를 보고, 진리를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M28)”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를 찾을 것이 아니라 연기(
緣起)를 보아야 한다.

십이연기분석경을 외우기위한 자료를 만들었다. 십이연기 연결고리를 다 외우기도 쉽지 않은데 각 고리에 있는 분석의 가르침까지 외우고자 한다. 그렇게 해서 빠알리 원문을 음역해 보니 모두 1,543자 인 것을 확인했다. 이는 천수경의 1300여자 보다 더 많은 글자수이다.

십이연기분석경 외우기 시동을 걸었다. "에왕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에서 부터 "에왕 땃사 께와랏사 둑캇칸닷사 니로도 호티띠"에 이르기까지 1,543자의 대장정에 들어간다. 외우고 나면 부처님의 근본가르침 3, 즉 초전법륜경(S56.11), 팔정도분석경(S45.8), 십이연기분석경(S12.2)을 다 외우게 된다.


2021-11-25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