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속의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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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자기표절하는 글쓰기를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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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흙속의연꽃

2021. 11. 26.

매일 자기표절하는 글쓰기를 하며

 

 

마흔 번째 책 서문을 쓰고 있다. 책의 이름은 ‘40 담마의 거울 2012 VI’이다. 교리와 교학에 대한 것이다. 2012년에 담마에 대하여 쓴 것으로 여섯 번째 책이다. 기간은 2012929일부터 20121112일까지 기록을 모아 놓은 것이다. 책의 목차는 모두 23개에 달한다. 참고로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목차

 

1. 적멸이야말로 지복(至福)일세

2. 열등감과 죄의식을 심어 주는 법문

3. 삶의 족쇄와 윤회의 감옥

4. 칠각지와 현법열반론

5. 세상보기를 물거품처럼

6. 거미줄로 비유한 심장토대설

7. “아~알 쑤 없는 의심으로…” 이뭐꼬(是甚麽) 화두

8. 공짜밥은 없다, 스리랑카의 청식(請食)제도

9. 부처님의 즉문즉설, 빠따짜라(Patacara) 수행녀 이야기

10. 1973년 태국계맥의 전수, 쾌거인가 헤프닝인가

11. 부처님의 하루일과

12. 초기불전연구원 번역서 특징 세 가지

13. 빠알리 독송용 초전법륜경

14. 하느님(梵天)도 환희용약한 불사(不死)의 진리

15. 머물지도 애쓰지도 않으면서, 부처님의 중도사상

16. 성철스님의 돈오돈수와 부처님의 돈오점수

17. 그 때 그 마음이 누구 마음이냐?

18. 염오-이욕-해탈론과 사띠(sati)

19. 두려움과 전율과 감동의 부처님 사자후

20. 내 등에 짐이 있기에

21. 부처님에게 청원한 하느님(梵天)

22. 부처님 말씀도 상품화 하다니!

23. 16단계 호흡수행과 사마시사(samasisa)

 

40 담마의 거울 2012 VI_211126a.pdf
2.59MB

 

담마에 대한 다양한 글이 있다. 그날그날 가장 인상깊었던 사건이 대상이 된다. 반드시 경전의 문구를 삽입하여 글을 썼기 때문에 담마에 대한 글이 된다. 특히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을 참고해서 썼기 때문에 교학과 교리에 대한 글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이런 글을 쓰지 말라고 한다. 재가자가 교리와 교학에 대하여 글 쓰는 것에 대하여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차라리 경을 그대로 올리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의 생각을 쓰라고 말한다. 경을 근거로 쓰면 자신의 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것에 장단을 맞추어야 할까? 누가 뭐라하든 말든 내 스타일대로 쓸 뿐이다.

 

목차를 보면 10번 글에 ‘1973년 태국계맥의 전수, 쾌거인가 헤프닝인가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이 글은 마성스님의 기고문을 근거로 나의 생각을 곁들여 작성한 것이다.

 

마성스님의 글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1973년도에 우리나라 이름 있는 스님들이 태국스님들로부터 비구계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테라와다 삼국은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을 말한다. 세 나라는 특징이 있다. 스리랑카는 교학의 나라이고, 미얀마는 수행의 나라이고, 태국은 계행의 나라라고 말한다. 이런 전통이 있어서일까 1973년에 통도사의 홍법·상우, 부산 선암사의 석암, 쌍계사의 고산, 송광사의 보성·학산, 해인사의 혜암·도견·일타·종진·운산·현우·도성, 대구의 수산, 법주사의 혜정 스님 등 무려 40여명이나 되는 스님과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고승들이 태국율사로부터 비구계를 받은 큰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불교에서는 이런 사실을 어떻게 생각할까?

 

불교신문에 태국율사들로부터 계를 받은 사실이 보도된 바 있다. 불교신문 20121016일자 기사에 따르면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한국의 고승들이 남방불교 계를 받은 사실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측과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측이 있다는 것이다.

 

1973년에 분명히 불교계에 커다란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한국불교 불교인들은 대부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그때 계를 받은 스님들 대부분은 쉬쉬하며 숨기고 있고 심지어 일부 스님들은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불교는 태국으로부터 분명히 계맥을 이어받았다. 이는 불교신문에서 각묵스님이 당시 율사 스님들은 태국 승단으로부터 37증을 초빙했고 종단 주요 스님들은 정식으로 비구계를 받았다.”(불교신문, 2012-10-16)라고 말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1973년에 한국의 중진스님들이 앞다투어 태국비구계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아마도 1962년에 출범한 통합종단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비구승이 대처승과 싸움에서 도덕적으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 기획한 것인지 모른다. 계를 받은 스님들 중에는 나중에 총무원장이 된 스님도 있고 방장이 된 스님도 있고, 심지어 종정이 된 스님도 있다.

 

한국불교는 태국율사들로부터 계를 받은 것에 대하여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부처님 당시부터 유지되어 오던 계맥이 스리랑카, 태국을 거쳐서 마침내 불교가 전래된지 1600년 만에 정식으로 계맥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1973년 당시 계를 받은 스님 중에는 도성스님도 있다. 테라와다 법명은 뿐냐산또 스님이다. 현재 한국테라와다불교 종정이라고 볼 수 있는 상가라자의 자리에 있다. 그런데 유일하게 도성스님만이 가사를 태국가사로 바꾸어 입고 지금까지 계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테라와다불교야말로 한국불교의 계맥을 유지해 오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목차 20번을 보면 내 등에 짐이 있기에가 있다. 이는 어느 단체에 갔을 때 액자로 걸어 놓은 시를 보고 느낌을 적은 것이다.

 

이 시는 매우 유명하다. 시는 내등에 짐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을 바로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로 시작된다. 글을 쓸 때 종종 활용했다. 누가 지었을까? 인터넷에는 정호승 시인으로 되어 있다. 복지단체 액자에도 그렇게 쓰여 있다.

 

2021106일에 정호승 시인으로부터 메일을 하나 받았다. 시인은 이 시는 제가 쓴 시가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 어디에도 이런 제목을 시를 쓰거나 발표한 적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이에 대하여 시인은 다만 제 산문집 <내 인생에 힘이 되어준 한마디> (2006, 김영사 비채 )에 위 게시글의 내용의 극히 일부분을 누구의 글인지 모른다고 분명히 밝히면서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라고 써 놓았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이제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은 이런 사실을 바로잡고자 올린 글에 대하여 정정을 요구했다. 이에 블로그 내에 있는 검색창을 이용하여 시인의 이름을 모두 지웠다. 무려 8년전 쓴 글도 이렇게 수정이 가능한 것이다.

 

목차 23번 글에 ‘16단계 호흡수행과 사마시사(samasisa)’라는 제목의 글이 있다. 이는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서 완전한 열반에 든다는 가르침에 대한 것이다. 이런 사실이 니까야에 있다는 것이 놀랍니다.

 

한번에 두 가지 일을 성취하는 것에 대하여 겟투(Get two)라고 한다. 담배이름이기도 한다. 그런데 불교에도 겟투가 있다는 것이다. 죽음과 동시에 아라한이 되어 완전한 열반을 성취하는 것을 겟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주석서에서는 사마시시(samasisis)라고 했다.

 

사마시시에 대한 많은 글을 썼다. 사마시시는 죽음과 관련이 있다. 죽으면 끝이 아니라 남아 있는 업 때문에 윤회한다. 그런데 청정한 삶을 살다가 자결한 자는 죽음과 동시에 윤회가 끝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를 수명의 사마시시라고 한다. 고디까와 박깔리와 찬나가 이런 케이스에 해당된다.

 

사마시시에는 수명의 사마시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주석에 따르면 질병의 사마시시도 있고, ‘느낌의 사마시시도 있고, ‘자세의 사마시시도 있다.

 

질병에 사마시시의 경우 어떤 질병에 걸렸다가 질병의 치유와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질병의 치유와 아라한과가 동시에 이루어진 것이다. 마치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라는 말이 연상된다.

 

느낌의 사마시는 어떤 것일까? 이는 어떤 느낌을 느끼다가 느낌의 지멸과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자세의 사마시시는 어떤 자세를 취하며 통찰하는 자가 자세의 종료와 더불어 번뇌의 소멸이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마치 깨달음의 기연을 보는 것 같다.

 

사마시시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무명에 대한 관찰의 경에서그는 앞도 뒤도 아니고 동시에 번뇌의 종식과 목숨의 종식이 이루어진다.”(A7.16)라는 말로 알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수행자에게 있어서 죽음은 희망의 메세지와 같다. 호흡을 관찰하여 임종에 든다면 아라한이 됨과 동시에 완전한 열반에 들기 때문에 두 가지를 한꺼번에 성취하는 것과 같다. 겟투가 되는 것이다.

 

나에게 블로그는 삶의 행적과 같은 것이다. 동시에 데이터베이스가 된다. 왜 그런가? 글을 쓸 때 이전에 써 놓은 것을 참고하기 때문이다. 애써 찾은 경전문구를 한번만 써먹는 것 보다는 종종 소환하여 자주 써먹는 것이다.

 

흔히 반복학습을 말한다. 선생이 했던 말 하고 또 하는 식이다. 법사가 이전에 했던 말을 반복하는 것도 해당된다. 회사에서 사장이 직원에게 반복해서 전달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한번에는 전달되지 않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전달하는 것이다. 이럴 때 사장님, 전에 했던 말입니다.”라며 누군가 이의를 제기한다면 메시지가 성공적으로 전달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말한다. 글을 다시 활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십년전에 써 놓았던 글도 소환하여 써먹는다. 앞서 언급된 세 가지 경우도 그렇다. 이후에도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런데 담마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사실이다.

 

담마는 반복해서 사용해도 질리지 않는다. 왜 그런가? 진리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에 써 놓은 글을 종종 다시 활용한다. 이는 엄밀히 따지면 자기표절이다. 내 글에서는 얼마든지 자기표절할 수 있다. 자주 표현하여 그 의미가 전달되었다면 성공적으로 본다. 그러고 보니 나는 매일 자기표절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다.

 

 

2021-11-2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