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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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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암송

2021. 12. 6.

인생을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고 하지만

 

 

십이연기분석경(S12.2)을 외우고 있다. 십이연기를 해석한 경을 말한다. 그런데 각 연결고리에 대한 분석을 보면 역순으로 되어 있다. 자라마라낭(늙음-죽음)에서부터 분석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십이연기에서 환멸연기에 대한 것은 소멸구조에 대한 것이다. 반대로 십이연기에서 순환연기에 대한 것은 발생구조에 대한 것이다. 발생연기에 대한 것을 보면 무명에서 시작하여 죽음으로 끝난다. 그런데 빠알리 십이연기를 보면 붙는 것이 있다. 그것은 괴로움과 관련된 것이다.

 

 

인생은 괴로움의 다발

 

반야심경에서 십이연기는 노사로 끝나 버린다. 그러나 십이연기 정형구에서는 노사 다음에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S12.2)라는 구절이 붙는다. 이와 같은 정형구는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정형구에서 괴로움의 다발(dukkhakkhandha)’이라는 말이 크게 와 닿는다. 괴로움이 다발을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이는 앞서 언급된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라는 말과 관련 되어 있다. 빠알리어로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에 대한 것이다.

 

청정도론에서는 슬픔(soka), 비탄(parideva), 고통(dukkha), 근심(domanasa), 절망(ūpāyās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있다. 가장 강도가 심한 것은 절망일 것이다.

 

죽음보다 더 절망적인 상황이 어디 있을까? 그래서인지 십이연기분석경에서는 십이지고리에서 가장 먼저 자라마라낭(늙음-죽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죽음에 대한 것을 보면 낱낱의 뭇삶의 유형에 따라 낱낱의 뭇삶이 죽고 멸망하고 파괴되고 사멸하고 목숨을 다하고 모든 존재의 다발이 파괴되고 유해가 내던져진다.”(S12.2)라고 했다. 이것을 죽음이라고 한다.

 

죽음은 최종적으로 유해가 던져지는 것으로 끝난다. 생명기능이 단절된 육체는 나무토막 같은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에서는 ! 머지않아 이 몸은 아! 쓸모없는 나무조각처럼 의식 없이 버려진 채 실로 땅 위에 눕혀질 것이다.”(Dhp.41)라고 했다. 그렇다면 죽는다고 다 끝나는 것일까?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데

 

유행가 중에 하숙생이 있다. 최희준이 부른 것이다. 가사를 보면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로 시작된다. 대단히 불교적 노래이다. 그런데 가사 중에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인생을 살고 있다. 언젠가는 죽어야 할 운명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빈손으로 왔으니 빈손으로 가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불교적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물질적인 것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갈 수 있는 것이지만 정신적은 것은 빈손으로 오지 않았고 빈손으로 가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질적인 것은 가져 갈 수 없지만 정신적인 업은 가져 가는 것이다.

 

인간을 물질적으로 보면 유물론에 기반한 것이다. 인간의 몸은 물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유물론적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정신마저 유물론적으로 본다는 것이다. 유물론자들은 정신도 물질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과학의 시대이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과학의 시대는 유물론적 시대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오늘날 과학문명시대에서는 과학적유물론의 시대가 되었다.

 

과학만능시대에서는 정신도 물질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사조는 부처님당시에도 있었다. 아지따 께싸깜발린과 같은 육사외도 스승이 대표적이다. 과학이 발달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물론은 강세를 보이고 있다.

 

뇌과학자들은 생각이 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유물론적 발상에 따른 것이다. 뇌라는 물질에서 생각이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도 물질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없다는 유물론자

 

정신이 물질에서 파생된 것이라면 정신도 유물론의 범주에 들어간다. 인간을 물질로 보는 유물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정신도 물질에서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육체가 죽으면 정신도 따라 죽게 되어 있다. 그래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 유물론자 아지따 께싸깜발린은 이렇게 말했다.

 

 

보시도 없고, 제사도 없고, 헌공도 없고, 선악의 행위에 대한 과보도 없고,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화생하는 뭇삶도 없다.”(S24.5)

 

 

유물론자 아지따 께싸깜발린은 모든 것을 부정했다. 이것도 없고 저것도 없어서 마치 무()자 행진을 보는 것 같다.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끝나버리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아지따 께싸깜발린은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라고 했다. 이는 무슨 뜻일까? 각주에 설명이 되어 있지 않다. 윤회와 관련해서 추론해 보니 태생과 난생에 대한 것이다. 인간을 예로 든다면 태생이 되는데 이는 부모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라고 말하는 것은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유물론자들은 내생을 말하지 않는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리기 때문에 당연히 윤회도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육도윤회를 말씀하셨다.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 인간, 천상을 말한다. 이중에서 인간과 축생을 제외하고 아지옥, 아귀, 아수라, 천상은 화생한다. 그런데 아지따 께싸깜발린은 화생하는 뭇삶도 없다.”라고 했다. 이는 내생과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길흉화복은 왜 일어나는가?

 

최희준의 하숙생은 불교적 노래라고 볼 수 있다. 가사 중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가라는 구절은 동아시아불교에서 회자되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연상케 한다. 이런 말은 인생의 무상과 허무를 일컫는 말이다.

 

불교는 허무주의 종교일까? 이제까지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는 것 같다. 이는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의 영향도 크다고 본다. 그런데 잘 따져 보면 이는 물질에 대한 것이다. 육체뿐만 아니라 돈이나 재물 같은 것도 해당된다. 육체를 가지고 가지고 가지 못하듯이 재물도 가져가지 못함을 말한다. 더 나아가 지위와 명예 조차 가지고 가지 못함을 말한다.

 

부처님은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올 때도 빈손으로 오지 않았고, 저 세상으로 갈 때도 빈손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물질적인 것 너머에 정신적인 것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행위이다. 다른 말로 업이다.

 

행위를 하면 업을 짓는다. 그런데 업은 반드시 과보를 산출한다는 사실이다. 업이 익으면 업의 과보, 업보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업이 익는 시기는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그래서 업이 달리 익는다고 하여 업이숙(業異熟)이라고 한다. 빠알리어로는 깜마위빠까(kammavipaka)이다.

 

불가에 흔히 이런 말이 있다. 개인이 지은 업은 부처님도 어찌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개인이 지은 업은 타인이 업장을 소멸해 줄 수 없음을 말한다. 이에 대한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앙굿따라니까야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경을 보면 행위의 과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니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서는 안되는데, 만약 생각한다면 미치거나 곤혹스럽게 된다.”(A4.77)라고 했다.

 

사람의 업은 알 수 없다. 업에 대하여 알고자 한다면 미쳐 버릴 것이라고 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는 과거 전생에 어떤 업을 지었는지 알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모른다.

 

인간의 수명은 알 수 없다. 이 말은 인간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왜 그럴까? 인간은 업생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른다. 그때 저지른 행위가 조건이 맞아 떨어졌을 때 과보로 나타난다. 인간의 길흉화복은 어쩌면 업 때문인지 모른다.

 

행운을 바라며 불운이 닥치지 않기를

 

흔히 사주팔자를 이야기한다. 명리학을 공부하면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진다고 한다. 아직까지 사주나 명리학 공부를 해 보지 않았다. 심지어 점집에서 점 한번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운명은 믿는다. 그것은 다름 아닌 행운과 불행에 대한 것이다.

 

현재 이 위치에서 내가 있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기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서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다. 만일 내가 축생으로 태어났다면 내가 누구인지 조차도 모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항상 운이 좋을 수 없다. 항상 불운은 도사리고 있다. 오늘 안전하다고 하여 내일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있다. 그것은 나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나의 죽음은 확실하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나의 죽음은 확실하기 때문에 나의 운명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다만 삶의 과정에서는 행운과 불운이 교차한다.

 

사람들은 가능하면 행운을 바란다. 불운은 닥치지 않기를 바란다. 사람은 운으로 사는 것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미래가 정해지지 않았음을 말한다. 과거의 행위가 현재 삶에 강하게 영향을 주고 있다는 말도 된다.

 

인생을 나그네길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행가 가사처럼 공수래공수거는 아니다. 인생을 유물론적으로 본다면 공수래공수거인 것이 맞지만, 인생을 연기론적으로 본다면 공수래공수거가 될 수 없다. 지은 업대로 왔다가 지은 업을 가지고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을 업의 관점에서 본다면 유수래유수거(有手來有手去)’가 될 것이다.

 

인생을 육십년 이상 살아왔다. 이렇게 오랜 세월 살아왔지만 인생에 대해서 잘 모른다. 특히 죽음에 이르면 답이 없다. 결국 죽어야만 하는 인생이라면 애써 힘들게 사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 되어 버리기도 한다. 단멸론 내지 허무주의로 빠지기 쉽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 허무주의적 견해를 가지고 있다. 유행가 가사 에서도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고 했는데 이는 인생이 무상하고 허망한 것임을 노래한 것이다. 인생인 이런 것이라면 굳이 애써 힘들게 살 필요도 없고 더구나 청정한 삶도 필요 없을 것이다.

 

인생이 원타임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면

 

부처님 당시에도 허무주의는 크게 유행했다. 아지따 께싸깜발린의 유물론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유물론에서는 모든 것이 없다고 했다. 보시를 해도 보시공덕이 없음을 말한다. 이렇게 되었을 때 보시는 바보나 하는 것이 된다. 더구나 부모도 없다고 했다. 이는 내세와 내생, 윤회를 부정하는 것이다.

 

악행을 한 자가 과보를 받지 않는다면 세상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악행을 했음에도 과보를 받지 않는다면 세상은 약육강식의 짐승의 세상이 될 것이다. 이는 부끄러움과 창피함을 모르는 세상이다.

 

악인악과이고 선인선과이다. 이는 인과에 대한 것이다. 어느 것이든지 인과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부처님은 인과에다 조건을 하나 추가했다. 그래서 인--과가 된다. 행위를 하면 과보를 받는데 반드시 조건이 성숙되면 과보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십이연기의 구조이다.

 

인생이 원타임에 지나지 않은 것이라면 대충 막살아도 될 것이다. 허무주의자들이 막행막식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에 따르면 인과는 엄중하다. 뿌린대로 거두는 것이다. 행위를 하면 과보를 받는 것이다.

 

인간은 본래 괴로운 존재

 

십이연기는 인연과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이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난다.( Jātipaccayā jarāmaraa, sokaparidevadukkhadomanassūpāyāsā sambhavanti.)”(S12.2) 라고 했을 때, 여기서 태어남은 늙음과 죽음의 조건이 된다. 태어남 이전의 것은 원인이 된다. 그래서 괴로움이라는 결과를 갖게 되었다.

 

모든 존재는 죽음으로 끝난다. 그런데 살아 있는 모든 존재는 괴로운 상태라는 것이다. 이는 십이연기정형구에서 이 모든 괴로움의 다발들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S12.2)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어떤 이는 인생을 행복한 것이라 말한다. 괴로움이 있기는 하지만 행복한 상태가 더 많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결국 죽을 운명이기 때문에 인생은 괴로운 것이다.

 

인생이 괴로운 것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같다. 괴로울 때만 괴로운 것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괴로운 존재이다. 이러한 사실은 초기경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인생은 왜 괴로운 것인가?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은 괴로움이 생겨나는 원리에 대하여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생겨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이것이 괴로움의 생겨남이다.”(S35.106)라고 했다.

 

부처님은 세상이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6처로 설명하고 있다. 여섯 가지 감각접촉으로 인하여 세상이 생겨남을 말한다. 그런데 세상이 생겨나는 원리를 보면 조건발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끝은 어디일까? 경에서는 갈애가 생겨나는 것에 대하여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했다.

 

인생 육십년 살아 보니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이다. 육십년 살아 보니 인생이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더 잘 알게 되는 것 같다. 이는 존재 자체가 괴로운 것임을 말한다. 모든 존재는 죽을 운명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부처님은 연기법을 설했다. 이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동시에 괴로움의 극복에 대한 것이다. 십이연기분석경(S12.2)에서는 죽음과 괴로움의 극복방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분석은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십이연기분석경에서는 죽음에서부터 역순으로 분석해 나간다. 그러다 보니 가장 마지막에는 무명에 이른다. 무명이야말로 괴로움의 시작이고 죽음의 원인이 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명이란 무엇일까? 이는 다음과 같은 가르침으로 알 수 있다.

 

 

그리고 수행승들이여, 무엇을 무명이라고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고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에 대해 알지 못한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무명이라고 한다.”(S12.2)

 

 

부처님이 말씀하신 무명은 사성제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는 괴로움, 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소멸, 괴로움의 소멸 방법에 대한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 핵심가르침이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은 모두 사성제의 가르침으로 포섭된다.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죽음을 극복하고자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괴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성제 중에서 가장 먼저 괴로움에 대하여 설했다.

 

사성제에서 고성제는 결과에 대한 것이다. 원인에 대한 것은 집성제이다. 부처님이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하여 사고와 팔고를 먼저 설한 것은 이유가 있다. 이는 우리가 괴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라는 말과 같다.

 

만일 누군가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사성제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죽음으로 귀결되는 운명이기 때문에 우리는 괴로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괴로움에 대하여 알려면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괴로움에 대하여 명쾌하게 정의해 놓았다. 싱윳따니까야 초전법륜경에 실려 있는 고성제가 그것이다. 다음과 같은 사고와 팔고에 대한 것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고 늙는 것도 병드는 것도 괴로움이고 죽는 것도 괴로움이고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도 괴로움이다. 사랑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고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고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줄여서 말하지면 다섯가지 존재의 집착다발이 모두 괴로움이다.”(S56.11)

 

 

여섯 종류의 열차가 있는데

 

나는 매일매일 삶을 살고 있다. 그런 삶은 기본적으로 괴로운 것이다. 지금 행복한 순간을 맞았다고 하더라도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싫어 하는 대상을 보았을 때, 싫어는 대상을 들었을 때 괴로움으로 바뀐다. 이는 조건에 따른 것이다.

 

괴로움은 조건 발생한다. 그 끝은 죽음이고, 이는 절망이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절망의 열차를 타고 간다. 언젠가 종착지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가 끝이 아니다. 행위를 한 것이 있기 때문에 과보를 받아야 한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가 아니다. 죽으면 여섯 방향의 열차가 대기하고 있다. 지옥열차, 축생열차, 아귀열차, 아수라열차, 인간열차, 천상열차 이렇게 여덟 종류의 열차가 있다.

 

나는 어떤 열차에 탑승해야 할까? 가장 좋은 것은 열차를 타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나는 오늘도 십이연기분석경을 외운다. 이제 자라마라낭(늙음-죽음)이 끝났기 때문에 다음 외울 것은 자띠(태어남)에 대한 것이다.

 

 

2021-12-06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