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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맛에 수행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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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기

2022. 1. 12.

이런 맛에 수행하는 것 아닐까?


지금 시각은 3 10, 대단히 이른 시각이다. 그러나 수행처 기준으로 따진다면 일어나기에 적당한 시각이다. 새벽 4시에 첫번째 좌선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시간을 알 수 없다. 자는 둥 마는 둥 수면의 질이 좋지 않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서 가볍게 걸었다. 그래 보았자 좁은 방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이다. 일종의 몸풀기이다. 상태를 바꾸어야 한다. 암송하는 것처럼 좋은 것은 없는 것 같다.

십이연기분석경(S12.2)을 암송했다. 한구절한구절 암송하면 그 다음 구절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의미와 뜻을 새기면서 천천히 빠알리 경을 암송한다. 암송이 끝날 때 쯤 되면 이전과는 다른 기분이 된다. 이를 암송의 효과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신을 집중하면 전과는 완전히 다른 상태가 된다. 몸과 마음의 상태가 변한 것이다.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른다. 이때 행선을 하면 잘 된다. 십여분 암송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집중은 이루어져 있는 상태가 되었다. 이 상태에서 행선을 하면 집중이 잘 된다.

발을 들어서 올리고 나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6단계 행선을 해본다. 이때 각단계를 알아차려야 한다. 발을 뗄 때는 떼는 것을 알아차리고, 발을 올릴 때는 발을 올리는 것을 알아차린다. 이렇게 6단계 행선을 반복적으로 지속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집중이 된다. 여기서 알아차림이라는 말은 복합적 의미가 있다. 알아차림은 사띠(정념)와 삼빠자나(정지)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행선에서 사띠와 삼빠자나는 동시에 일어난다. 사띠는 6단계 행선 전과정을 잊지 않고 아는 것이고, 삼빠자나는 생멸현상을 아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사띠는 기억에 대한 것이고 삼빠자나는 지혜에 대한 것이 된다. 이렇게 두 가지는 엄격하게 구분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구분하지 않고 때로 '사띠'라고 말하고 때로 '알아차림'이라고 말한다. 구분없이 사용하는 것이다.

오늘 새벽 행선을 했다. 암송한 후 했기 때문에 암송으로 인한 집중을 이어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암송이나 행선이나 사띠를 요한다는 사실이다. 암송은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이어서 사띠가 된다. 행선은 수행이기 때문에 삼빠자나가 함께한 사띠가 된다.

행선을 할 때 사띠와 삼빠자나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발을 뗄 떼 행위를 아는 것은 바른 기억, 즉 사띠에 해당된다. 그런데 발을 들어서 올렸을 때 가벼운 느낌을 알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대에서 풍대, 즉 바람의 세계를 아는 것이다. 우리 몸에 바람의 요소가 있음을 아는 것이다.

발이 바닥에 닿을 때는 딱딱함을 느낄 것이다. 이는 지대, 땅의 세계를 아는 것이다. 우리 몸에 딱딱하거나 부드러운 요소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사대는 무상한 것이다. 조건이 바뀜에 따라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된다. 이와 같은 생멸현상을 아는 것이 삼빠자나이다.

행선을 하면 6단계의 경계는 모호하다. 호흡을 관찰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서 행선을 하면 순간적인 집중을 요한다. 이를 카니까사마디, 즉 순간삼매 또는 찰나삼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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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계 행선에서 각단계를 알아차리는 것은 쉽지 않다.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발을 떼는 순간부터 시작하여 발을 들어서 올리고 나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과정을 반복하게 되면 집중이 된다. 집중이 되면 각 단계는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행선은 느릿하게 하는 것이다.

수행을 왜 하는 것일까? 집중하기 위해서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송하는 것도 집중해야 가능한 것이다. 암송하는 과정자체가 집중이기 때문에 집중의 집중이 된다. 행선을 하면 각단계를 알아차려야 한다. 이는 고도의 집중을 요한다.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움직임 하나하나 기억해야 한다. 사띠를 해야 하는 이유에 해당된다.

호흡관찰할 때 호흡을 따라가야 한다. 호흡이라는 기둥에 마음을 묶어 두는 것이다. 이것이 사띠이다. 통증이 발생하면 통증의 느낌에 마음을 묶어 두어야 한다. 통증이 기둥이 되는 것이다. 통증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느낌을 잊지 않고 관찰하는 것도 사띠하는 것이다. 행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띠에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호흡관찰하면 신념처가 되고 통증을 관찰하면 수념처가 된다. 관찰대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구분된다.

호흡이 몸관찰인 것은 호흡이 신체적 형성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흡관찰은 신념처에 해당된다. 그런데 관찰대상은 호흡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통증이 발생되면 대상을 바꾸어야 한다. 호흡보다 더 강한 대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손님이 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응대해야 하는 이유와 같다. 호흡관찰에서 느낌관찰로 바뀌는 것이다.

수행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일어나고 사라짐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집중이 되어야 한다. 집중이 되어야 미세한 것을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생멸을 관찰해서 얻는 이득은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의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런가? 생멸을 관찰하다 보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혜의 영역에 해당된다. 그래서 삼빠나자나라고 한다.

사띠는 대상을 한정하여 전과정을 빠짐없이 잊지 않고 관찰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른기억(정념)이라고 힌다. 삼빠자나는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래서 바른앎(정지)이라고 한다. 행선이든 좌선이든 사띠와 삼빠자나는 항상 함께 한다. 이 두 가지를 한데 묶어 알아차림이라고 한단어로 말하기도 한다. 또 사띠라고 간단하게 말하기도 한다.

행선을 하면 사띠와 삼빠자나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6단계 행선할 때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각단계를 알아차렸을 때 집중이 된다. 이는 번뇌에서 자유롭다는 말도 된다. 발의 움직임에 집중했을 때 잡념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발의 움직임에 집중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수행서적을 보면 마치 구름위를 걷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기도 하다. 마치 지표면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된다는 것이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아직 그런 단계는 아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행선 할 때 매우 경쾌하다는 것이다. 몸도 가볍고 마음도 가벼워진 것 같다. 전의 상태와는 완전히 다른 상태가 된 것이다.

편하자고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행선이든 좌선이든 집중이 되면 몸과 마음이 편해진다. 대상에 집중된 마음에서는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은 한순간에 하나의 일 밖에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순간에 두 가지 마음이 있을 수 없음을 말힌다.

지금 분노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먼저 가슴으로 오는 것이다. 가슴의 콩닥거림을 보는 것이다. 이는 다름 아닌 호흡관찰이다. 몸관찰하면 분노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려서 분노라는 번뇌에서 해방될 수 있다. 이런 분노는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다.

분노는 하나의 현상이다.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것이다. 분노가 일어날 조건이 갖추어졌기 때문에 발생된 것이다. 이를 조건발생이라 해야 할 것이다. 조건발생한 것은 조건을 바꾸면 해소된다. 관심을 돌리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화가 나면 숫자 셋을 세라고 말하기도 하고 콩닥거리는 가슴으로 오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이다.

위빠사나 수행은 오온의 생멸을 관찰하는 것이다.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다리에 통증이 있어도 마치 남의 다리 보듯 관찰하는 것이다.

통증의 생멸을 관찰했을 때 통증에는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된다. 조건발생한 것일 뿐이다. 통증은 파도같은 것이다. 파도는 연이어 밀려오지만 물거품처럼 부서진다. 통증도 연이어 발생한다. 그런데 통증을 관찰하면 부서진다는 사실이다. 마치 비가 억수로 내리지만 땅바닥에 닿으면 물거품과 함께 사라지는 것과 같다. 모든 현상이 다 그럴 것이다.

오늘 새벽 일찍 깨서 경을 암송하고 행선을 했다. 하고 나니 몸과 마음이 가볍다. 그것은 집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암송하면 집중을 하지 않을 수 없고 행선하면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집중하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 , , 치에서 일시적으로 해방되었을 때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런 맛에 수행하는 것 아닐까?


2022-01-12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