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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일 죽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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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강독

2022. 1. 31.

나는 매일 죽는 사람

 

 

나도 승리자가 될 수 있을까? 인생의 승리자를 말한다.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만 늘 패배하기만 했다. 언제까지나 패배할 것인가? 나는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승리할 수 없을 까?

 

불교는 승리의 종교

 

불교는 승리의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런가?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고 난 다음 다섯 수행자를 만나로 갔다. 도중에 외도 유행자 우빠까를 만났다. 우빠까는 부처님의 상호를 보더니 벗이여, 그대의 감관은 맑고 피부색은 청정하다. 벗이여, 그대는 누구에게 출가하였으며, 그대의 스승은 누구인가? 누구의 가르침을 즐겨 배우는가?”(M26)라며 물어보았다.

 

막 정각을 이룬 부처님의 상호는 맑고 깨끗했을 것이다. 어쩌면 광채가 났는지 모른다. 외도 유행자의 눈에 범상치 않아 보였을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한 자, 일체를 아는 자”(M26)라고 했다.

 

부처님은 왜 스스로 승리자라고 했을까? 이는 부처님이 번뇌가 부수어지면 그들도 나와 같은 승리자가 되리.”(M26)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번뇌를 부수어 승리자가 되었다. 그래서 승리자를 뜻하는 지나(jina)는 부처(the Buddha)와 동의어이다. 나도 번뇌를 부수어 승리자가 될 수 있을까?

 

왜 '승리'라고 번역했을까?

 

금요니까야 모임이 128일 한국빠알리성전협회(KPTS) 서고에서 열렸다. 이날 승리에 대한 세 개의 경을 합송했다. 앙굿따라니까야 머물지 않음의 경(Anavatthitasutta)’(A6.102), ‘칼을 뽑아든 자의 경(Ukkhittāsikasutta)’(A6.103), 그리고 애착을 지니지 않음의 경(Atammayasutta)’(A6.104)이다.

 

세 경은 무상, , 무아에 대한 것이다. 공통적으로 경이 시작하기 전에 승리라는 말이 나온다. 그래서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승리를 올바로 관찰하면이라며 경이 시작된다. 이렇게 본다면 승리의 경이라고 볼 수 있다.

 

경에서 승리를 뜻하는 빠알리어는 ānisasa’이다. 이는 ‘profit; merit; good result’의 뜻이다.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이득으로 번역했다. KPTS에서 승리로 번역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는 서원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취하고자 하는 것에 대하여 하리라.”라는 식의 서원을 말한다. 또 하나는 빠알리사전 PCED194에 따르면 ānisasa’에 대하여 ‘m. [ā-ni-sasa, BSk. ānuśasa, anuśasa] , 利益, 勝利라고 설명해 놓았다. 승리의 뜻도 있는 것이다. 먼저 무상(無常)에 대한 서원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일체의 형성이 나에게 머물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리라.

2) 일체의 세계에 나의 마음이 즐길 것이 없으리라.

3) 일체의 세계에서 나의 정신이 벗어나리라.

4) 열반으로 나의 마음이 향하리라.

5) 결박이 나에게 제거되리라.

6) 최상의 수행자의 삶을 갖추리라.”(A6.102)

 

이와 같은 여섯 가지는 수행승이 일체의 형성에서 무한하게 무상에 대한 지각을 일으킬 때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키워드는 머물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경의 제목도 머물지 않음의 경(Anavatthitasutta)’(A6.102)이 된 것이다.

 

닙비다(nibbida: 厭惡)에 대하여

 

다음으로 고()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칼을 뽑아든 살인자 앞에 있는 것처럼이라는 표현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서 칼을 뽑아든 살인자는 오온을 말한다. 오온이라는 칼 든 자 앞에서 어떻게 승리해야 하는가? 여섯 가지 법은 다음과 같다.

 

 

“1) 일체의 형성에서 나는 싫어하여 떠남의 지각을 일으키리라.

2) 일체의 세계에서 나의 정신이 벗어나리라.

3) 열반에서 적정을 발견하리라.

4) 경향은 나에게 제거되리라.

5) 해야 할 일을 해 마치리라.”(A6.103)

 

 

여기서 싫어하여 떠남의 지각‘nibbidasaññā를 번역한 것이다. 그런데 닙비다는 항상 비라가 니로다와 함께 쓰인 다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경전을 보면 싫어하여 떠나, 그것이 사라져 소멸하도록”(S12.16)이라는 정형구가 도처에 등장한다. 이는 닙비다 비라가 니로다(nibbida virāga nirodha)’를 번역한 말이다.

 

빠일리어 닙비다 비라가 니로다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에서는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위해서”(S12.16)라고 번역했다. 이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유튜브 동영상이나 글에서 염오, 이욕, 해탈이라고 설명했다.

 

형성된 세계에서 떠나라면 먼저 싫어 하는 마음이 일어나야 한다. 이를 닙비다 (nibbida)라고 한다. 한자어로는 염오(厭惡)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초기불전연구원의 각주를 보면 “ ‘염오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염오의 관찰을 얻기 위해서”(초불연 상윳따 2106번 각주)라고 설명해 놓았다.

 

각묵스님은 유튜브 동영상 강의에서 염오에 대하여 전봇대 옆에 토해진 토사물로 비유했다. 구역질이 날 정도로 오온을 염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재성 선생은 이와 다르게 설명했다. 상윳따니까야 각주를 보면 독일 가이거의 견해를 인용해서 “nibbidayanibbindanatthaya의 뜻으로 발생하자 마자 소멸해 버리는 경험적 사실에 대한 혐오”(KPTS 통합본 2360번 각주)라는 뜻이라고 했다.

 

왜 찰나멸(刹那滅)이라고 했을까?

 

형성된 것은 발생하자 마자 소멸하는 것이라고 했다. 오온이 그렇다는 것이다. 잠시도 머물지 않고 곧바로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머물지 않고 곧바로 사라지는 것에 애착이 있을 수 있을까? 머물지 않고 곧바로 사라져 버리기 떄문에 싫어하여 떠남의 지각(nibbidasaññā)’(A6.103)을 일으키라고 했다. 이는 찰나멸(刹那滅)로도 설명된다.

 

형성되는 것은 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사라지는 것에는 조건이 필요 없다.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소리가 좋은 예이다.

 

흔히 법사들이 법을 설명할 때 책상을 탕탕 치거나 종소리를 들려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법이 머물지 않음을 말한다. 발생 즉시 사라지는 것이다. 이는 경전적 근거가 있다.

 

어느 날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에게 물었다. 아난다 존자는 세존이시여, ‘소멸, 소멸이라고 하는데, 세존이시여, 무엇이 소멸하면 소멸이라고 합니까?”(S22.21)라며 물었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다여, 느낌은 무상하고 조건지어지고 연기된 것으로 부서지고야 마는 것, 무너지고야 마는 것, 사라지고야 마는 것, 소멸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것이 소멸하면 소멸이라고 말한다.”(S22.21)라고 답했다.

 

부처님은 조건발생에 대해서 “1)무상하고, 2)조건지어지고, 3)연기된 것”(S22.21)이라고 했다. 그러나 소멸하는 것에 대해서는 “1)부서지고야 마는 것, 2)무너지고야 마는 것, 3)사라지고야 마는 것, 4)소멸하고야 마는 것”(S22.21)이라고 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발생하는 것에 대해서는 조건이 있지만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는 조건이 없음을 말한다. 생겨나자 마자 머물지 않고 곧바로 사라지는 것이다.

 

조건발생은 있지만 조건소멸은 없다. 책상을 탕탕 쳤을 때 나는 소리와 같고 두손바닥을 부딪쳤을 때 나는 소리와도 같다. 오래 머물지 않고 곧바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를 찰나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찰라멸에 대해서는 청정도론 20장 도비도지견청에서도 볼 수 있다. 이는 "일출시의 이슬방울처럼, 물거품처럼, 물위에 그은 막대기의 흔적처럼, 송곳끝의 겨자씨처럼, 번개처럼, 잠시 지속하는 것으로 나타나거나, 환술, 아지랑이, , 선화륜, 신기루, 파초 등으로 견실하지 않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Vism.20.104)라는 게송으로도 확인된다.

 

찰나멸은 괴멸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괴멸해야 할 것들만이 생겨나고, 생겨난 것은 괴멸에 이른다.”(Vism.20.104)라고 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독일의 빠알리어 학자 가이거는 닙비다에 대하여“nibbidayanibbindanatthaya의 뜻으로 발생하자 마자 소멸해 버리는 경험적 사실에 대한 혐오라고 해석했을 것이다.

 

모든 현상이 조건발생하는 것임을 알면

 

마지막으로 무아(無我)에 대한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애착을 지니지 않음으로 설명했다. 그래서 경의 제목도 애착을 지니지 않음의 경(Atammayasutta)’(A6.104)이다. 무엇에 대한 애착의 지니지 않음인가? 이는 다음과 같은 여섯 법으로 알 수 있다.

 

 

“1) 일체의 세계에 나는 애착을 지니지 않으리라.

2) 나는 나를 만드는 것을 삼가리라.

3) 나는 나의 것을 만드는 것을 삼가리라.

4) 나는 탁월한 지혜를 갖추리라.

5) 원인은 나에게 바로 드러나리라.

6) 원인에 의해 나타난 현상도 바로 나에게 드러나리라.”(A6.104)

 

 

여기서 일체는 육처를 말한다. 확장하면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계이다. 내가 만든 세계이다. 이런 세계는 괴로운 세계이다. 왜 괴로운가? 애착으로 형성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애착이란 무엇일까? 주석에 따르면 갈애와 견해에 속하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견해는 나를 만드는 것(ahakāra)’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나를 만드는 것을 삼가리라.”라고 서원하는 것이다. 또 갈애는 나의 것을 만드는 것(mamakāra)’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것을 만드는 것을 삼가리라.”라고 서원하는 것이다.

 

초기경전에서 늘 보는 정형구가 있다. 특히 오온에서 보는 것이다. 이는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이것은 내가 아니고,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여기서 나의 것은 갈애의 뜻이고, ‘는 자만의 뜻이고, ‘자아는 유신견의 뜻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나를 만든다는 것은 자만의 뜻도 있을 것이다. “내가 누군데라는 자만을 말한다.

 

나의 것을 만드는 것을 멈추라고 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연기법을 알아야 한다. 왜 그런가? 5번항을 보면 원인은 나에게 바로 드러나리라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연기법의 조건이 됩니다.”라고 했다.

 

모든 현상은 조건발생한다. 모든 현상은 원인이 있어서 발생한다. 이에 대하여 경에서는 원인에 의해 나타난 현상도 바로 나에게 드러나리라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전재성 선생은 조건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에 대하여 담마()이라고 했다.

 

연기법을 알면 더 이상 나에게 대하여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일체가 조건발생하는 것으로 무아인 것을 알게 된다면 오온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오온이 조건발생하는 것을 알면 무아임을 알게 될 것이다. 연기의 고리에서 어느 것이 나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행위의 행위자는 없고, 또한 이숙의 향수자도 없다. 단지 사실만이 일어난다.”(Vism.19.20)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매일 죽는 사람

 

불교에서 승리라는 말은 익숙하지 않다. 특히 대승불교에서 그렇다. 그러나 초기불교 경전을 열어 보면 승리 또는 승리자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승리자를 뜻하는 지나(jina)는 부처(the Buddha)와 동의어이다.

 

부처님은 승리자이다. 모든 곳에서 승리자이다. 이는 일체의 세계에서 승리자라는 말과 같다. 더 자세하게 말한다면 오온, 십이처, 십팔계 세계에서 승리자이다. 어떤 승리인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자를 말한다.

 

법구경에 이런 게송이 있다. “전쟁에서 백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기는 것보다 하나의 자신을 이기는 자야말로 참으로 전쟁의 승리자이다.”(Dhp.103)라고 했다. 어떤 전쟁일까? 오염원과의 전쟁, 번뇌와의 전쟁이다.

 

숫따니빠따에 승리의 경(Vijayasutta)’(Sn1.11)이 있다. 무엇에 대한 승리인가?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승리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욕망과 탐욕을 떠난 그 지혜로운 수행승만이 불사와 적멸, 곧 죽음을 뛰어넘는 열반의 경지에 도달한다.”(Stn.204)라고 했다.

 

수행자는 매일 전쟁아닌 전쟁을 한다. 그것은 감각적 욕망과의 전쟁, 번뇌와의 전쟁을 말한다. 나 역시 전쟁을 한다. 그러나 매번 패한다. 이긴 적이 드물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매일 죽는 사람이다.

 

매일 매번 매순간 수많은 전투가 벌어진다. 그때마다 이기는 경우보다 지는 경우가 많다. 나는 언제나 전쟁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을까? 부처님은 번뇌가 부수어지면 그들도 나와 같은 승리자가 되리.”(M26)라고 했다.

 

 

2022-01-31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