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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에서 두려움을 본다면 누구나 수행승(bhikk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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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기

2022. 5. 17.

윤회에서 두려움을 본다면 누구나 수행승(bhikkhu)


새벽 1시 반, 참으로 어중간한 시간이다. 잠에서 깨었는데 더 자기도 그렇고 무엇을 하기도 그렇다. 멍때리고 있기 쉬운데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을 잠으로 보낼 수 없다. 잠은 꼭 자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잠은 잠이 와야 자는 것이다. 일어나서 경행을 했다. 한발한발 떼며 움직임을 관찰했다. 행선은 정신과 물질, 그리고 원인과 결과를 관찰하기에 좋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훈련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 2시가 되었다. 잠은 달아났다. 무엇을 해야 할까? 잠을 청하기 위해 멍때리기할 필요 없다. 경전을 보고자 했다. 머리맡 맛지마니까야를 말한다. 머리맡에 있어서 틈만 나면 읽어 보는 경전이다.

맛지마니까야를 열어 보았다. 65번 경을 읽다가 "반복과 지속적인 훈련으로"라는 문구가 와닿았다. 말을 훈련시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온 것이다. 수행승도 거친 야생마와 같아서 지속적인 반복과 훈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행의 진척이 없다. 행선을 해도 오래 가지 못하고 좌선을 해도 끈기 있게 하지 못한다. 마하시 전통에서는 한시간 좌선에 한시간 행선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한시간 채우기가 쉽지 않다.

한시간 앉아 있기가 쉽지 않다. 고역중의 고역이고 고행중의 고행으로 본다. 그럼에도 견디어 내라고 한다.

선원에서는 짝수 타임이 좌선시간이고 홀수타임이 행선시간이다. 하루 일과 중에 좌선과 행선을 반복하다 보면 좌선은 4번 이상 해야 한다. 행선 역시 4번 이상 해야 한다. 합하면 8시간이다. 실제로 이렇게 하면 녹초가 될 것이다.

수행은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노동일 것이다. 초기경전을 보면 바라문이 놀고 먹는 듯이 보이는 부처님에게 퉁명스럽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신처럼 밭가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이 씨앗이고, 감관의 수호가 비며,
지혜가 나의 멍에와 쟁기입니다.
부끄러움이 자루이고, 정신이 끈입니다.
그리고 새김이 나의 쟁기 날과 몰이막대입니다.”(stn77)

몸을 수호하고 , 말을 수호하고,
배에 맞는 음식의 양을 알고,
나는 진실을 잡초를 제거하는 낫으로 삼고,
나에게는 온화함이 멍에를 내려 놓는 것입니다.”(stn78)

속박에서 평온으로 이끄는
정진이 내게는 짐을 싣는 황소입니다.
슬픔이 없는 곳으로
도달해서 가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stn79)

이와 같이 밭을 갈면
불사의 열매를 거두며,
이렇게 밭을 갈고 나면
모든 고통에서 해탈합니다.”(stn80)

 


부처님은 마음의 밭을 간 것이다. 마음의 밭을 갈기가 쉽지 않다. 노동하는 사람이 볼 때 좌선이나 행선이 쉬워 보이지만 실제로 해보면 가장 힘든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번 하고, 하루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한다고 했을 때 배겨날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람은 자극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향상이 있다. 지난주 토요일 한국마하시선원에 갔었다. 붓다의 날 행사에 참석한 것이다. 그때 김선량 선생을 만났다. 김선생과 이야기하면 언제나 자극받는다. 수행에 대한 자극을 말한다.

김선생은 가정주부이다. 나이가 70이 다 되었으니 할머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수행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다. 집에서 하루에 세 번 좌선한다고 한다. 매 분기마다 호두마을 가서 십일 집중수행하고 한달 머물 때도 있다고 한다. 대체 수행에 대한 이러한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김선량 선생은 미얀마를 수없이 다녔다고 한다. 해마다 다닌 것이다. 한번 가면 세 달가량 머물렀다고 한다. 어떻게 가정주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윤회 때문이라고 했다. 윤회할 것을 생각하면 가만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윤회를 끊어 버리기 위해 수행한 것이다.

김선생에 따르면 어느날 삶이 고통인 것을 알았다고 한다. 똑같은 삶을 반복하기 싫어서 수행을 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2000년 이전 부터 시작했으니 수행경력이 20년 넘은 것이다.

김선생은 처음에는 사마타 수행을 했다고 한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게 된 것은 2002년부터라고 한다. 이전에 사마타 수행한 것이 있어서 그 힘으로 위빠사나 수행했을 때 잘 적응했다고 한다.

김선생은 2006년에는 호두마을에서 우 에인다까 사야도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통역은 혜송스님이 했다고 한다. 이후 해마다 미얀마에 가게 되었는데 주로 담마마마까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담마마마까는 혜송스님이 창건주이다. 우 에인다까 사야도가 선원장으로 있다.

김선량 선생 얘기를 들으면 흐트러진 마음을 다잡게 하기에 충분하다. 먼저 앉는 힘이 있어야 하고 걷는 힘이 있어야 한다. 마하시 전통에서 좌선 한시간과 행선 한시간 하라고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한시간 정도 관찰해야 법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 갈애의 소멸로 설명했다.

김선량 선생 얘기를 들으면 수행은 결국 갈애의 소멸과정에 대한 것이다. 갈애가 아주 조금씩 소멸된다는 것이다. 아주 작은 갈애라도 소멸되기 전에는 저항이 있는데 이를 수행의 힘으로 극복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앉아 있는 힘을 길러야 하고 걷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 가지고만 갈애를 극복할 수 없을 것이다.

김선량 선생의 수행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다시는 윤회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본다. 이것이 가정주부로 하여금 수행의 길로 가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수행하기가 쉽지 않다. 수행은 폼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은 남보기 좋으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수행하려면 목표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마음을 향상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해 수행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김선량 선생의 케이스를 보면 그것 가지고 부족하다. 이번 생에서 윤회를 끊어 버리겠다는 마음 가짐을 갖지 않으면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 생에서 윤회를 끊을 수 있을까? 더 이상 윤회하지 않으면 좋을 것 같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부족하다. 이번 생이 마지막으로 생각하고 다음 생은 없다라고 생각했을 때 다급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승부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수행을 방해하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갈애이다.

갈애는 윤회의 원인이 된다.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대한 갈애, 존재에 대한 갈애,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말한다. 이러한 갈애는 세세생생 윤회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갈애를 끊어야 윤회를 멈출 수 있다. 눈곱만큼이라도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이 있다면 그것을 원인으로 해서 다시 태어날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삶을 반복할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갈애를 끊어 재생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갈애의 족쇄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갈애의 족쇄는 수행으로 끊어야 한다. 좌선과 행선을 통해서 정신과 물질, 원인과 결과를 아는 것부터 시작된다. 위빠사나 16단계에서 1단계와 2단계를 말한다. 이후 생멸의 단계 등 단계별로 진행된다. 마침내 도와 과를 이루었을 때 성자의 흐름에 들어갈 것이다.

성자의 흐름의 단계는 수다원으로서 견도단계이다. 이 단계가 되면 완전한 열반이 보장 된다. 아무리 못잡아도 일곱생 이내에 윤회를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수행을 잘 할 수 있을까? 윤회의 고통에 대하여 뼈저리게 느끼는 자라야 수행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욕망과 갈애로 사는 사람들에게는 수행은 의미가 없다. 한시간 앉아 있는 것과 한시간 거니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수행한다고 비난 받지 않으면 다행이다.

한시간 좌선과 한시간 행선은 힘들다. 마음의 밭을 가는 것이 어떤 중노동보다 더 고된 것이다. 처음부터 잘 되지 않는다. 마치 조련사가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처럼 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에 진척이 없는 수행승에게 이런 말을 해 주었다.

"
그 말은 고삐를 쓰고 훈련을 받을 때 예전에 해본 일이 아니기 때문에, 뒤틀고 몸부림치고 요동하지만, 마침내 지속적인 반복과 점차적인 훈련으로 그 상태에 적응하게 된다."(M65)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수행에 대한 가르침이다. 야생마와 같은 수행승을 길들이는 방법에 대한 것이다. 키워드는 "지속적인 반복"이다.

행선을 하면 지속적인 반복이 요청된다. 발을 떼고, 들고, 밀고, 내리고, 딛고, 누르는 과정을 면밀히 관찰하는 것이다. 좌선도 마찬가지이다. 한시간 동안 호흡이나, 느낌, 마음, 현상을 지속적으로 지켜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동작을 수도 없이 반복한다. 남이 보기에 무의미하고 쓸데 없는 일처럼 보인다.

수행은 세상사람들과 정반대의 일이다. 세상사람들 대부분은 감각을 추구한다. 그러나 수행은 욕망을 버리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이는 갈애를 줄이는 것이다. 갈애를 조금씩 줄이다 보면 어느 때 많이 줄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갈애가 완전하게 소멸되었을 때 다시는 윤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수행은 왜 하는가? 그것은 명백하다. 윤회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청정도론에서는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기 때문에 수행승이라고 한다. (Samsara bhayam ikkhati bhikkhu)”(Vism.1.7)라고 했다.

윤회에서 두려움을 본다면 누구나 수행승(bhikkhu)이다. 반드시 머리깍고 가사를 걸쳤다고 해서 수행승이 아니다. 가정주부라도 윤회에서 두려움을 보았다면 비구이다. 김선량 선생 같은 분이다. 김선량 선생과 법담을 하면 늘 자극 받는다. 새벽 4시가 되었다. 잘 시간이다.


2022-05-1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