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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법이 변질되면 나타나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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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마의 거울

2022. 5. 24.

정법이 변질되면 나타나는 현상


정법은 언젠가 사라지게 되어 있다. 부처가 출현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과거에 수많은 부처가 출현했다. 부처가 출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법이 오래 가지 않기 때문이다. 정법은 후대로 갈수록 변질되고 오염되어서 결국 사라져 버린다.

"
병이 없음이 최상의 이익이고
열반이 최상의 즐거움이고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은
불사의 안온에 이르는 길이네."(Dhp.204)

 


법구경에 실려 있는 게송이다. 이 게송은 맛지마니까야 '미간디야의 경'(M75)에도 인용되어 있다.

병이 없음이 최상의 이익이라고 했다. 건강이 최상의 행복이라는 말과 같다. 재물을 얻는 것도 행복이고 명성을 얻는 것도 행복이다. 아들을 얻는 것도 행복이다. 그럼에도 병이 없음이 행복이라 한 것은 그것들 가운데 다른 것 보다 더 낫다는 것이다. 그래서 최상의 이익이라고 했다.

최상의 행복은 열반이다. 열반은 궁극적 행복이다. 그러나 열반은 지각할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그래서 최상의 행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열반의 행복은 팔정도를 닦음으로서 성취된다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것이야말로 궁극적 행복이고 최상의 행복이다. 그래서 불사의 안온함이라고 했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경지에 이르지 않아 열반의 행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것인지는 추론으로 알 수 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감각적 욕망을 여의는 것이다. 선정에 들면 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
마간디야여, 참으로 그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악하고 불건전한 것들을 떠나면, 천상을 능가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나는 그 속에서 기쁨을 누리므로 그 보다 못한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 속에서 즐거워하지도 않습니다."(M75)

감각적 쾌락은 오욕락에 대한 것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즐기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오욕락보다 더 즐거운 것이 있다고 했다. 역설적이게도 오욕락을 떠나는 것에 오욕락보다 더 즐거운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정의 즐거움이다. 선정중에서도 네번째 선정을 말한다. 청정하고 새김이 있고 평정한 상태의 즐거움을 말한다.

선정의 즐거움은 천상락과 비교할바가 아니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천상락은 욕계 육욕천을 말한다. 욕계의 즐거움은 감각의 즐거움이다. 그런데 감각을 여읜 즐거움이 훨씬 더 수승한 즐거움이라는 것이다. 색계나 무색계 천상의 즐거움을 말한다.

정법이 살아 있다면 열반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팔정도 수행이 있기 때문이다. 팔정도 수행이 있으면 사향사과와 열반도 있다. 팔정도 수행이 없으면 사향사과와 열반도 없다. 그런데 부처가 출현하여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정법은 변질되고 오염되고 잊혀진다. 이는 법구경 204번 게송에서도 알 수 있다.

법구경 204번 게송은 과거 부처가 츨현 했을 때 온전한 상태로 있었다. 그러나 부처가 열반에 들자 이 게송은 변질되었다. 외도 유행자들에게 이 게송이 알려 졌는데 그들은 온전히 수용하지 않았다.

외도들은 전송만 취했다. 그들은 "병이 없음이 최상의 이익이고 열반이 최상의 즐거움이다."라는 전송만 가져 간 것이다. 왜 그랬을까? 그들에게는 팔정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은 불사의 안온에 이르는 길이네."라는 후송을 빼버린 것이다.

팔정도가 빠진 불교를 상상할 수 없다. 팔정도 수행이 없는 불교는 불교가 아니다. 외도들이 그랬다. 그들은 부처님 가르침을 입맛대로 취사선택했다. 그런 것 중의 하나가 법구경 204번 게송이다. 외도들은 전송만을 취해서 열반에 이르고자 했다.

외도들은 감각을 즐겨서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다. 이를 현법열반이라고 한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
자아가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대상을 갖추고 구족하여 그들 속에서 나타날 때, 그 점에서 자아는 지금 여기에서 최상의 행복을 누린다."(D1)

현법열반은 지금 여기에서 오욕락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이는 가짜열반이다. 본래 열반은 감각될 수 없는 것이고 느껴질 수도 없는 것이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시각, 청각 등 감각적 즐거움에 대하여 열반으로 본다면 현법열반론은 가짜열반, 유사열반, 짝퉁열반이 된다.

외도들은 부처님에 대하여 성숙의 파괴자라고 했다. 그리고 재수 없다고 했다. 여기서 성숙은 "예전에 결코 경험하지 못한 어떤 감각대상을 경험함으로써 여섯 감역에서 지혜의 성장을 이룰 수 있다."(M75)라는 외도의 견해를 말한다.

외도들은 부처님에 대하여 왜 성숙이론의 파괴자라고 했을까? 외도들은 오욕락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그러나 부처님은 오욕락의 여읨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이런 이유로 외도들은 부처님에 대하여 성숙이론의 파괴자라고 말한 것이다.

외도들은 오욕락을 즐겼다. 오욕락을 즐기는 것을 열반으로 보았다. 한상 가득 포만감으로 먹었다면 행복할 것이다. 술을 마셔 취기가 올랐다면 열반주를 마신 것이다. 외도들은 지금 여기에서 감각을 즐기는 삶을 살았다.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을 여의는 가르침을 설했다.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여의면 욕계천상보다 더 수승한 즐거움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사랍들은 이런 부처님의 가르침을 모른다.

비법이 득세하는 세상에서는 감각적 욕망을 최상의 행복이라고 여긴다. 감각을 최대한 즐기는 세상을 말한다. 그런데 부처님은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은 괴로움만 일으킬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나병환자의 비유를 들었다.

나병에 걸리면 상처난 부위를 불에 지진다. 그때 시원한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정상적인 사람과 정반대의 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모든 감각능력이 손상되었습니다. 그래서 불이 실제로 닿으면 괴로울텐데 즐겁다고 느끼는 거꾸로된 지각을 갖고 있습니다."(M75)라고 말했다.

부처님은 일반사람들은 나병환자와 같다고 했다. 나병환자처럼 거꾸로된 지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
이들 뭇삶들은 감각적 쾌락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의 갈애에 사로잡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타는 듯한 고뇌에 불타, 모든 감각능력이 손상되었습니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이 실제로 닿으면 괴로울텐데 즐겁다고 느끼는 거꾸로된 지각을 가지고 있습니다."(M75)

부처님은 일반사람들에 대하여 전도된 지각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나병환자처럼 감각능력이 손상되었기 때문에 감각적 쾌락을 즐기는 것에 대하여 나병환자가 상처난 손을 불에 지지며 시원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눈이나 귀나 코, , 몸이 있는 것은 필요가 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감각기관은 즐기기 위해서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 마치 욕망이 생기면 욕망을 해소하라는 말과 같고 화가 나면 화를 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감각기관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감각적 욕망은 재난과 같다고 했다.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
뭇삶들은 감각적 쾌락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감각적 쾌락의 갈애에 사로잡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타는 듯한 고뇌에 불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추구할수록, 점점 더 그들 뭇삶들에게 더욱 더 감각적 쾌락의 갈애가 증가하고, 점점 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의 타는 듯한 고뇌에 불타게 되지만, 다섯 가지 감각적 쾌락의 욕망 때문에 그 쾌감에만 몰두하는 것입니다."(M75)

사람들이 감각적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그 쾌감에만 몰두하는 것"이라고 했다. 쾌감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눈 있는 자가 보았을 때는 마치 나병환자가 상처 난 손을 불에 지지며 쾌감을 느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초기경전을 읽어보면 놀라운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맛지마니까야 75번 경에 있는 나병환자의 비유도 그렇다. 감각적 욕망으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하여 나병환자처럼 전도된 지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감각을 즐기는 것은 마치 손을 불에 지지는 것과 같다. 손을 지지면 아플텐데 오히려 시원하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나병환자처럼 감각능력이 손상된 것으로 본다.

가려운 곳을 긁으면 일시적으로 시원하지만 결국 괴로움으로 귀결된다. 감각적 쾌락도 그렇다는 것이다. 심지어 감각적 쾌락을 열반이라고 말한다. 이는 정법이 변질됐기 때문이다. 이는 법구경 204번 게송을 보면 알 수 있다.

현재 한국불교는 비법이 득세하고 있다. 이는 부처님 가르침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니까야를 읽어 보면 얼마나 많이 벗어나 있는지 알 수 있다. 팔정도 수행이 없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팔정도 수행이 없으면 사향사과와 열반도 없다. 법구경 204번 게송에서 후송이 탈락한 것과 같다. 전송만을 취했을 때 오욕락을 추구하는 것을 열반으로 인식할 수 있다. 이 모두가 부처님 원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한국불교가 환골탈태하려면 니까야부터 읽어야 한다. 부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알아야 한다. 늦게나마 맛지마니까야 읽기 하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2022-05-24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