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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투쟁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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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강독

2022. 5. 27.

인정투쟁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

 

 

내가 그동안 너무 자만했던 것 같다. 경전읽기가 그렇다. 경전은 필요할 때만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경전은 필요한 부분만 보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이제까지 이런 세월을 살아왔다. 무려 십년 넘게 그랬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태도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경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아야 한다. 마치 소설 읽듯이 읽는 것이다. 소설을 중간부터 읽을 수는 없지 않은가! 경전은 소설과 달리 중간부터 읽어도 된다. 어느 곳을 읽든지 부처님의 무상, , 무아의 가르침은 변함없다. 그러나 경전도 처음부터 읽어야 맛이 난다는 것이다.

 

머리맡의 맛지마니까야

 

머리맡에 맛지마니까야가 있다. 머리맡에 있어서 틈만 나면 들여다본다. 진도는 많이 나가지 않는다. 하루 한두경이 고작이다. 어느 날은 한경도 못 나갈 때도 있다. 진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기억하고 싶은 구절을 얼마나 많이 새기느냐가 문제이다.

 

머리맡에 맛지마니까야를 놓고 읽은지 이제 두 달이 되었다. 맛지마니까야 총152개 경에서 현재 77번 경을 읽고 있다. 딱 절반을 읽었다. 이런 추세라면 앞으로 두 달 후에는 다 읽을 것이다.

 

경을 읽으면서 오자나 탈자 등 오류가 발견된다. 맛지마니까야가 출간된지 20년 가까이 되었는데 사소한 오류가 발견되는 것이다. 교정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오류가 발견되면 지체 없이 전재성 선생에게 알려 준다.

 

오류가 발견되면 해당부위를 분홍 메모리펜으로 표시하고 스마트폰 카메라로 찍는다. 수정해야 할 내용에 대하여 변경전과 변경후로 구분하여 문자 메시지로 발송한다.

 

 

오류는 대부분 사소한 것들이다. 거의 대부분 각주에서 발견된다. 한자어를 사용했는데 한글로 표현이 안되어 있는 것, 쉼표를 써야 하나 되어 있지 않는 것, 빠알리어 알파벳 철자 하나가 빠진 것, 표현이 약간 어색한 것, 토씨가 틀린 것 등 매우 다양하다. 발견된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사진과 함께 내용을 써서 문자로 발송한다.

 

맛지마니까야 읽기를 하면서 동시에 교정작업도 하는 식이 되었다. 전재성 선생은 날 잡아 한꺼번에 처리한다. 보내온 메세지를 보면 모처럼 시간을 내서 모두 고쳤습니다.”로 시작되는 문자를 보내온다. 말미에는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멘트를 달아 놓는다.

 

흔히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라고 말한다. 문제점이나 불가사의한 요소가 세부사항 속에 숨어 있다는 뜻이다. 맛지마니까야를 읽으면서 아주 작지만 사소한 오류를 발견할 때 디테일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특히 작은 글씨로 되어 있는 각주에서 디테일의 중요성을 실감한다.

 

세부사항이 중요하다. 토씨 하나가 잘못되면 마치 흰옷에 잉크 방울 하나가 묻은 것과 같다. 수천페이지가 되는 방대한 경전에서 오류가 없지 않을 수 없다. 경전을 읽으면서 동시에 오류도 잡아 나가면 읽는 보람을 느낀다. 다음 개정판에서는 반영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신은 디테일에 있다. (God is in the detail)”라고 말하는 것이 더 나을 듯하다.

 

아누룻다의 경(A8.30)에서

 

서설이 너무 길었다. 금요니까야모임 후기를 써야 한다. 5월 첫번째 모임에서 두 개의 경을 합송했는데 두 번째로 합송한 경에 대한 후기를 말한다. 두 번째로 합송한 경의 제목은 위대한 사람의 사유란 어떠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는 앙굿따라니까야 아누룻다의 경’(A8.30)을 말한다.

 

아누룻다의 경은 꽤 긴 길이의 경이다. 모두 11페이지에 달한다. 읽는 데만 시간이 꽤 걸린다. 그러나 한번 읽지 않고서는 내용이 파악되지 않는다. 참석자들은 모두 소리 내서 합송한다. 모두 여덟 가지 법수가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이 가르침은 욕심이 없는 자를 위한 것이다.

2) 이 가르침은 만족할 줄 아는 자를 위한 것이다.

3) 이 가르침은 멀리 여의는 자를 위한 것이다.

4) 이 가르침은 열심히 정진하는 자를 위한 것이다.

5) 이 가르침은 새김을 잃지 않은 자를 위한 것이다.

6) 이 가르침은 집중하는 자를 위한 것이다.

7) 이 가르침은 지혜를 갖춘 자를 위한 것이다.

8) 이 가르침은 희론의 여읨을 즐기고 희론의 여읨을 기뻐하는 자를 위한 것이다.

 

모두 여덟 가지 키워드가 있다. 무욕, 만족, 여읨, 정진, 새김, 집중, 지혜, 무희론에 대한 것이다. 여기서 1번부터 7번항 까지는 아누룻다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아누룻다의 앎에 대하여 추인하고 희론의 여읨을 하나 더 추가하여 여덟 가지 법수로 설명했다.

 

크고 작건 간에 자신의 소유에 만족하는 것

 

흔히 소욕지족(小慾知足)을 말한다. 이에 법정스님의 무소유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무소유는 물질적 무소유만을 말하지 않는다. 정신적 무소유도 해당된다.

 

부처님 당시 출가수행자들은 탁발로 살아 갔다. 그래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세 벌의 가사와 발우, 와좌구, 필수약품과 같은 사대필수품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거의 무소유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그에게 번뇌가 가득하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물질적으로 많은 것을 소유했을지라도 번뇌가 없다면 무소유라고 말할 수 있다. 물질적으로 아주 적게 소유한 자일지라도 번뇌가 많다면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소유의 개념이 반드시 물질적인 것이 아님을 말한다.

 

법정스님은 글에서 소욕지족 소병소뇌(少欲知足 少病少惱)’를 말했다. 이 말은 적은 것으로써 넉넉할 줄 알며, 적게 앓고 적게 걱정하라.”라는 뜻이다. 소욕하면 번뇌도 적어짐을 말한다.

 

초기경전에는 소욕지족과 관련하여 수많은 가르침이 있다. 법구경에서는 어떠한 것에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다. (Tuṭṭhī sukhā yā itarītarena)”(Dhp.331)라고 했다. 크고 작건 간에 자신의 소유에 만족하는 것만이 행복이라는 가르침이다.

 

행복은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에 있지 않다. 적게 소유해도 만족하면 그것이 행복이다. 많은 것을 소유했음에도 번뇌가 많다면 그는 불행한 자이다. 많은 것을 소유했어도 번뇌가 없다면 그는 만족할 줄 아는 자이고 행복한 자이다.

 

적게 소유한 자가 있다. 그는 큰 것 한방을 노리고 있다. 그것이 로또가 될 수도 있고 경마장의 마권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주식도 될 수 있고 비트코인도 될 수 있다.

 

그는 주식을 하고 있다. 그는 하루종일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다. 그는 홈트레이딩 시스템을 깔아 놓고 실시간 단타매매를 수시로 하고 있다. 그는 돈을 벌어야 겠다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가 욕망으로 주식을 하는 한 잔고는 점점 바닥날 것이다. 번뇌 또한 깊어 질 것이다. 적게 소유한 자가 번뇌로 가득하다면 그는 많은 것을 소유한 자가 된다.

 

소욕지족의 출처가 되는 가르침

 

부처님은 위대한 사람의 사유에 대하여 설했다. 여덟 가지로 요약되어 있다. 그 중에서 첫번째 법수와 두번째 법수를 보면 소욕지족에 대한 것이다. 소유가 많건 적건 건에 만족할 줄 알면 행복인 것이다. 재산과 관계없이 번뇌가 없는 삶이 최상인 것을 말한다.

 

부처님은 첫번째 법수에서 무욕에 대하여 말했다. 부처님은 이 가르침은 욕심 없는 자를 위한 것이지, 이 가르침은 욕심 있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A8.30)라고 했다. 이를 소욕(小慾)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처님은 두번째 법수에서 만족을 설했다. 부처님은 이 가르침은 만족할 줄 아는 자를 위한 것이지, 이 가르침은 만족을 모르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A8.30)라고 했다. 이를 지족(知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부처님은 소욕지족의 가르침을 펼쳤다. 소욕지족은 재산이 많고 적음과 상관이 없다. 재산이 많아도 소욕지족자라면 행복한 자이다. 재산이 없는 빈털터리가 욕망으로 산다면 많은 것을 소유한 자가 된다.

 

행복은 재산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은 욕망을 얼마나 줄이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 그래서 행복지수 공식이 있다. 행복지수 공식은 분모가 욕망이고 소유가 분자로 되어 있다. 그래서 행복=소유/욕망이라는 등식으로 표현된다.

 

행복지수 공식에서 소유는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설령 재산이 적을지라도 만족할 줄 알면 행복지수는 높아질 것이다. 반면 천문학적 재산을 가졌더라도 만족할 줄 모르면 분모가 커지게 되어 있어서 행복지수는 낮아 진다.

 

행복을 바라거든 지금 주어진 여건에 만족해야 한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것이다. 더 잘 살기 위해서 욕망으로 산다면 불행한 삶이다. 주식으로 대박을 터뜨려보겠다고 큰 것 한방 노리고 밤샘 했을 때 욕망으로 가득 찬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행복지수는 낮아질 수밖에 없다.

 

재산을 늘리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근면한 노력으로 이마의 땀과 팔의 힘으로 재산을 모으는 것에 대해서는 부처님도 장려했다. 그러나 그것이 탐욕에 따른 번뇌에 가득 차 있다면 그는 이미 많은 것을 소유한 것이 된다. 번뇌를 소유한 것이다.

 

무소유는 재산의 유무와 크게 관련이 없다. 번뇌가 많으면 많은 것을 소유한 자가 된다. 설령 그가 많은 재산을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나누고 베풀 줄 알면 그는 무소유자가 된다. 아름다운 마음에는 번뇌가 있을 수 없다. 무소유는 재산이 아니라 번뇌에 달려 있다.

 

인정욕구가 발동했을 때

 

공자의 인생삼락이 있다. 이는 1)“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2)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니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3)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라는 말이다. 이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세 번째 말이다.

 

공자는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은 것을 인생삼락 중의 하나로 보았다. 어찌 보면 대단히 파격적이다. 상상도 못한 말을 한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인정받기 위해서 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자가 말한 것과 유사한 가르침이 초기경전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이 가르침은 만족할 줄 아는 자를 위한 것이지, 이 가르침은 만족을 모르는 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떠한 것을 조건으로 하는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이 욕심이 없으면서 욕심이 없다고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 만족할 줄 알면서 만족할 줄 안다고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A8.30)

 

 

여기 욕심 없이 사는 자가 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욕심 없음을 세상이 알아주기를 바란다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일종의 인정욕구가 작동했을 때 그는 욕망으로 사는 것이 된다. 그는 더 이상 욕심 없는 자가 아니다.

 

소욕지족으로 사는 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소욕과 지족을 타인이 알아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열심히 홍보한다. 요즘 같으면 에스엔에스로 알릴 것이다. 특히 페이스북처럼 실시간 소통이 가능하고 불특정다수를 대상으로 했을 때 그는 소욕지족의 삶을 사는 것일까?

 

부처님은 여덟 가지 법수에 대하여 알아주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다. 수행승이 무욕, 만족, 여읨, 정진, 새김, 집중, 지혜, 무희론으로 사는 것에 대하여 알아주기를 바라지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인정투쟁을 한다면 그는 더 이상 무욕, 만족, 여읨, 정진, 새김, 집중, 지혜, 무희론으로 사는 자가 아닌 자가 될 것이다.

 

목숨을 건 나의 인정투쟁

 

매일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면 동시에 페이스북에도 올린다. 또한 관련 있는 카톡방에도 공유한다. 이런 것도 인정욕구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글을 아무리 잘 써도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실망할 때가 있다. 실망을 넘어서 분노가 일어날 때도 있다. 특히 알 만한 사람이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을 때 은근히 부화가 치밀어 오른다.

 

페이스북에 글을 올릴 때는 많은 사람들이 글을 봐주기를 기대한다. 특히 이 땅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봐주기를 기대한다. 그들 중의 일부가 좋아요라며 공감해 주면 글 쓴 보람을 느낀다. 댓글이라도 달아 주면 날아 갈 것 같다. 그럼에도 무시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 사람은 공감을 해줄 법하다.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이다. 많이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공감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인색한 것 같다. 별 생각을 다해본다. 혹시 내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개인적으로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생각을 꼬리를 문다. 마침내 오해의 단계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아마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발동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인정받으려면 인정투쟁을 해야 한다. 그런데 최근 유튜브에서 인정투쟁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알게 되었다. 김필영 선생이 진행하는 ‘5분 뚝딱 철학채널에서 본 것이다. 이에 대하여 목숨을 건 나의 인정투쟁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나는 어쩌면 인정받기 위해서 글을 쓰는지 모른다. 인터넷에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독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문학작품은 독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 아닌 것이 없다. 모든 문화활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나의 인정욕구는 당연한 것이다.

 

인정욕구가 지나치면 인정투쟁이 된다. 그렇다고 스토커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유튜브에서 본 인정투쟁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정반대 개념이다. 어떤 개념인가? 이에 대하여 블로그에 다음과 같이 써 놓았다.

 

 

매일매일 블로그와 에스엔에스에 글을 올리고 있다. 이것도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욕설을 퍼붓는가 하면 모욕을 주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는 없다. 그런 사람들은 인정욕구에서 배제된다. 가볍게 무시하면 그뿐이다.” (목숨을 건 나의 인정투쟁, 2022-04-28, https://blog.daum.net/bolee591/16161404 )

 

 

인정욕구와 인정투쟁은 다른 것이다. 인정욕구는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정투쟁은 나를 알아주지 않는 자를 무시하는 전략이다. 인정해 달라고 애걸복걸할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쩌면 그런 것인지 모른다.

 

인정투쟁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가르침

 

공자는 인생삼락에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닌가.(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라고 했다. 부처님은 욕심이 없으면서 욕심이 없다고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appiccho samāno ‘appicchoti ma jāneyyu’ nti na icchati”(A8.30)라고 말씀 하셨다. 이런 진술은 만족, 여읨, 정진, 새김, 집중, 지혜, 무희론에 모두 똑같이 적용된다.

 

경전을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운다. 물질문명이 아무리 발달해도 무상, , 무아의 가르침을 벗어날 수 없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담마는 부처님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설령 미래 에이아이(A.I)시대가 된다고 해도 변함없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지혜는 경전에 있다. 부처님이 설한 팔만사천 법문 안에 진리가 있다. 이런 진리가 있다는 것을 몰랐다.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모르고 산 것이다. 설령 알았다고 해도 읽어 보지 않으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설령 읽어 보았다고 해도 필요한 부분만 드문드문 읽는 다면 극히 일부만 아는 것이다.

 

경전을 읽을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아야 한다. 각주까지 세세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삼장에 통달한 주석가들이 달아 놓은 것이다. 본문과 주석을 읽어 날 때 읽는 맛이 난다.

 

요즘 머리맡에 맛지마니까야를 읽고 있다. 진즉 이렇게 했어야 했다. 나의 자만 때문에 십년 세월을 허송한 것 같다. 그러나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다. 지금이라도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읽듯이 읽어 나가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경전을 열어 보면 놀라운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이 세상에 궁금했던 것이 다 들어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경전에는 놀라운 것들로 가득하다.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가르침으로 가득하다. 그런 가르침 중의 하나가 이번 금요니까야모임에서 합송한 아누룻다의 경에 실려 있다. 그것은 인정욕구에 대한 것이다.

 

부처님은 자신을 드러내지 말라고 했다. 소욕지족의 삶을 산다고 해서 알리지 말라는 것이다. 자신이 수행한 것도 드러내지 말라고 했다. 자신의 지혜도 드러내지 말라고 했다. 부처님은 무욕, 만족, 여읨, 정진, 새김, 집중, 지혜, 무희론 이렇게 여덟 가지 법수에 대하여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appicchoti ma jāneyyu)”라고 했다.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말은 나를 알아 달라고 인정투쟁하지 말라는 말과 같다. 인정투쟁하는 순간 더 이상 여덟 가지 법수, 즉 무욕, 만족, 여읨, 정진, 새김, 집중, 지혜, 무희론은 없는 것이 된다.

 

매일 글을 쓰고 있다. 글을 써서 블로그에도 올리고 동시에 페이스북에도 올린다. 관련 카톡방에도 올린다. 이렇게 글을 인터넷에 올리는 것은 일종의 인정욕구가 발동된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아무리 글을 잘 써도 인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향해서 인정해 달라고 인정투쟁할 수 없다. 그들이 무시했듯이 나도 무시하면 그뿐이다. 이것이 나의 인정투쟁이다.

 

 

2022-05-27

담마다사 이병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