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경사(寶鏡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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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포항

2011. 7. 3.

 

 보경사 일주문

보경사는 웅장하고 수려한 내연산 연봉에 둘러싸여 있으며, 12폭포로 이름난 그윽한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맑은 시냇물을 껴안고 포근하게 배치되어있다. 신라 진평왕 25년(602)에 진나라에서 유학하고 온 대덕지명 법사가 왕께 아뢰어 「동해안의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불당을 세우면 왜구의 침략을 막고 장차 삼국을 통일하리라」하자 왕이 기뻐하며 포항을 거쳐 해안을 타고 올라가는데 오색구름이 덮힌 산을 보고 찾은 곳이 내연산이며 그 연못을 메우고 팔면보경을 묻고 절을 창건하여 보경사라 하였다 한다. 서운암, 청련암, 문수암, 보현암이 있다.

 내연산 보경사

 

 해탈문

 

 설산당 장욱선사 공덕비(雪山堂壯旭禪師功德碑) 비각

설산당 장욱선사 공덕비(雪山堂壯旭禪師功德碑) : 설산 장욱선사 공덕비각 1916년에서 192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설산 장욱(雪山壯旭) 스님이 금당의 계단과 탑을 중수한 내용 등이 기록

 

 

사천왕문 향우측의 신방목(사자상 : 신방목(信枋木) : 문간이 따로 없이 양쪽에 기둥을 하나씩 세워서 문짝을 단 문이 넘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기둥 밑에 가로 끼어 댄 나무)

사천왕문 향좌측의 신방목(사자상)

 사천왕상

 사천왕상

사천왕문을 통하여 본 보경사오층석탑과 적광전 

보경사오층석탑(寶鏡寺五層石塔.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3호.경북 포항시 북구 송라면 중산리 622)

보경사 경내에 있는 석탑으로, 1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의 네 면과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는 약간 들려있다.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 받침)과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이 남아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높고 날렵한 느낌을 준다.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지만, 지붕돌받침이 3단으로 줄어드는 등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일명 ‘금당탑(金堂塔)’이라고도 부르는데,『보경사금당탑기(寶鏡寺金堂塔記)』에는, 도인(道人), 각인(覺人), 문원(文遠)이 고려 현종 14년(1023) 3월에 이 탑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일층탑신의 자물쇠(적광전 쪽)

일층탑신의 자물쇠(사천왕문 쪽)

 보경사오층석탑 앞 석등 하대석

보경사적광전(寶鏡寺寂光殿.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4호. 경북 포항시 송라면 중산리 622)

신라 진평왕 25년(603년)에 창건되었으나 현존 건물은 조선 숙종 3년(1677년)에 중건한 것이며, 그 후 몇 차례의 중수(重修)가 있었다. 기단(基壇)은 외벌대로 아주 낮게 조성하였는데 기단상면(基壇床面)에는 전을 깔고 원좌(圓座)가 있는 방형(方型)의 주초를 놓았다. 주초 위에는 원주(圓柱)를 세웠는데 우주(隅柱)의 안솔림과 귀 솟음이 뚜렷하다. 하방 밑에는 쇠시리한 화강석으로 고막이벽을 대신 막았다. 전면 어칸(御間)의 하방 양쪽에는 동물 형상을 한 신방목을 설치하였다. 공포는 내외 2출목(出目)이며 2개의 앙설(仰舌)은 단부(斷部)가 사절(斜截)된 형태이고 주두상부(柱頭上部)에는 봉두(鳳頭)로 장식(粧飾)하였다. 내포(內包)에는 교두형의 첨차단이 있으며 가구(架構)는 5량가(樑架)인데 다포(多包)집임에도 불구하고 우물반자는 설치하지 않고 불단(佛壇) 상부에는 종량(宗樑) 사이에 붉은천으로 막아 두었다. 측면 상부에는 보 방향으로 뜬장혀를 걸어 이 위에 당초각(唐草刻)의 부재를 중앙과 앙귀에서 얹었는데 이러한 것은 반자가 없으므로 해서 생기는 허실감을 메우려는 의도인 것으로 생각된다.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개수된 것이며 문비(門扉)는 정면 각 칸마다 3분합(分合)의 교살문과 뒷면 중앙에 외여닫이를 두었으나 역시 개수된 것이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맛배지붕의 목조와가로 되어 있다. 적광전(寂光殿)은 다포집 임에도 불구하고 연등천장인 점 등 몇 가지 특색이 있고, 치목수법이 건립연대와 부합된다.(포항시청 자료) 

 전면 어칸(御間)의 하방 양쪽에는 동물 형상을 한 신방목을 설치하였다

 

 

 옥돌로 만든 주춧돌(마모된 부분에는 색깔이 푸르게 빛남)

적광전 비로자나불상과 문수.보현보살상 

다포(多包)집임에도 불구하고 우물반자는 설치하지 않고 불단(佛壇) 상부에는 종량(宗樑) 사이에 붉은천으로 막아 두었다. 적광전(寂光殿)은 다포집 임에도 불구하고 연등천장인 점 등 몇 가지 특색이 있고, 치목수법이 건립연대와 부합된다. 

보경사 대웅전(寶鏡寺 大雄殿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31호 )

대웅전은 조선후기 목조 불전(佛殿)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인 다포계(多包系)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 위에 자연방형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운 다음 기둥 윗몸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둘렀다. 평방 위에는 가운데 칸에 2구, 협칸(夾間)에 1구씩의 공간포(空間包)를 배열하였다. 공포는 안팎이 모두 3출목(三出目)의 포작(包作)으로 되어 있으며, 건물 외부로 튀어나온 제공(諸工)의 살미첨차 끝은 앙서 모양으로 만들고 그 위에 연꽃 봉오리를 조각하였다. 처마는 겹처마로서 서까래와 부연을 달아 지붕 틀을 구성하였고, 네 귀의 추녀밑에는 활주(活柱)를 세워 추녀의 처짐을 방지하였다. 건물 내부는 바닥에 마루를 깔았고 가운데 칸 뒤편에 불단(佛壇)을 놓고 삼존불상(三尊佛像)을 모셔 놓았다. 천장은 우물반자이며 가구형식은 무고주7량가(無高柱七樑架)이다. 건물의 형식이나 세부 기법으로 보아 19세기 전형적인 불전형식(佛殿形式)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677년 중건하였고, 1932년에 중수하였다.(포항시청 자료)

 대웅전 내부

 구시 

포항보경사괘불탱(浦項寶鏡寺掛佛幀.보물 제1609호 )

보경사 괘불탱은 1708년(숙종 34)에 조성되었지만, 17년 뒤인 1725년(영조 원년)에 중수하였다. 화원은 의균(義均)·석민(碩敏)·성익(性益)·지붕(智朋)·체환(體環)·쾌민(快敏)·삼학(三學)인데, 모두 대구 팔공산 동화사와 파계사의 불화 조성에 참여한 화사로 주로 경상도에서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이 괘불탱은 10m에 이르는 대형의 화면에 연꽃줄기를 든 보살형의 여래만을 단독으로 그렸는데, 의균의 작품 중에서 최대의 역작이다. 대형의 화폭에 단독의 존상만을 그린 구성은 매우 단순하지만 홍색과 녹색, 청색계열의 색만을 이용해 조화와 대비를 훌륭하게 처리하였고, 여래가 입고 있는 가사의 조(條)에 금 바탕에 녹색으로 문양을 내는 장식이나 끝단의 세부 문양 등 세부장식에도 소홀함이 없다. 보경사 괘불탱같이 5여래가 표현된 화려한 보관과 연꽃을 들고 있는 괘불도상은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 경상도지역에서 유행한 괘불형식으로 괘불 도상의 계승을 연구하는 데 의미 있는 작품으로 생각된다.(문화재청 자료)

 대웅전 우측의 석탑

 원진각

 

 명부전

명부전 지장보살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浦項 寶鏡寺 圓眞國師碑.보물 제252호)

보경사에 있는 고려 중기의 승려 원진국사의 탑비이다. 원진국사(1171∼1221)는 13세에 승려가 되어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도를 하기도 하였고, 왕의 부름으로 보경사의 주지가 되었다. 51세로 입적하자 고종은 그를 국사(國師)로 예우하고, 시호를 ‘원진’이라 내리었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간결한 모습으로, 비몸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넓다란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거북받침돌은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를 하고 있다. 등에는 6각형의 무늬마다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으며,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몸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몸의 둘레에는 덩굴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비문에는 원진국사의 생애와 행적이 기록되어 있으며, 글은 당시의 문신이었던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의하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이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다. (문화재청 자료)

 

 

 

 

 

 

 

 포항 보경사 승탑(浦項 寶鏡寺 僧塔.보물 제430호)

보경사 뒷산의 중턱에 서 있는 묘탑으로, 원진국사의 사리를 모셔두고 있다. 원진국사 신승형(申承逈)은 고려 중기의 승려로, 51세에 입적하자 고종이 그를 국사로 추증하고 ‘원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기단부(基壇部)의 아래·중간·윗받침돌 가운데 3단으로 이루어진 8각 아래받침돌은 맨윗단에만 연꽃조각이 둘러져 있다. 중간받침돌은 8각의 모서리마다 기둥모양의 조각을 새겨두었다. 윗받침돌에는 솟은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꽃잎의 끝이 뾰족하고 중앙의 세로선이 볼록하게 돌출되어 당시로서는 드문 모습이다. 탑신(塔身)은 몸돌이 매우 높아 마치 돌기둥처럼 보이며, 한 면에만 자물쇠모양을 새겨놓았다.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느리고, 모서리에서 뻗어나가는 곡선의 끝마다 꽃장식이 조그맣게 솟아있다. 처마의 곡선은 양쪽 끝에서 가볍게 들려있고, 추녀는 두터워 보인다. 지붕돌 위의 머리장식으로는 활짝 핀 연꽃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을 올리고, 연꽃조각이 새겨진 돌을 놓은 다음,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얹어서 마무리 하였는데 보존이 잘 되어 원래의 모습을 잘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8각형을 기본으로 삼고 있으나, 몸돌이 지나치게 길어 전체가 길쭉해 보이며 너비도 좁아 안정감이 적다. 각 부분의 조각에도 생략이 많아 단순한 감이 들고 밋밋하다.(문화재청 자료)

 

 

 

 

 

 보경사의탱자나무(寶鏡寺의탱자나무.경상북도 기념물 제11호 )

탱자나무는 주로 영·호남지방에 분포하며 일본·중국에서도 자란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나무는 중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열매와 껍질은 약재로 사용되며 줄기에 가시가 나 있어 과수원 울타리용으로 적합하다. 보경사의 탱자나무는 보경사 경내 천왕문 우측 동편 종무소를 사이에 두고 두 그루가 마주보고 있다. 대웅전 쪽의 나무는 지상 160㎝ 위치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원형으로 왕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맞은편의 나무는 지상 40㎝ 위치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자라고 있다. 이 나무는 탱자나무로는 보기 드물게 오래된 것으로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문화재청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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