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황산대첩비지(南原 荒山大捷碑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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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2021. 6. 14.

어휘각(御諱閣)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뚜렸하였던 성적(聖跡)이 일제의 한민족 문화 말살 정책에 따라 비전을 폭파하고 철정으로 쪼아버려 현재 그 잔영만이 남아있는 것을 1973년 어휘각(御諱閣)을 건립하여 보호하고 있다.

남원 황산대첩비지(南原 荒山大捷碑址. 사적 제104호.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가산화수길 84)

고려 말에 도순찰사였던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군을 무찌른 사실을 기록한 승전비가 있던 자리이다.

황산대첩은 역사적으로도 매우 유명한 싸움으로, 당시의 승리 사실을 영원히 전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10년(1577)에 대첩비를 세우게 되었다. 비석이 처음 세워질 당시에는 비각·별장청 등의 건물을 지어 비석을 보호하도록 하였으나, 1945년 일본인들에 의하여 파괴되어 파편만 남게 되었다.

지금의 비석은 1957년에 다시 만들어 세운 것이다. 1973년에 비석이 보관되어 있는 비전·홍살문·삼문·담장, 그리고 부속건물들을 새롭게 단장하였다.(출처 : 문화재청)

 

이곳은 고려말 이성계가 왜구와 싸워 대승을 거둔 전적지이다. 금강어귀에서 퇴로가 막힌 왜구는 이곳에 주둔하면서 장차 바다로 달아나려 하였다. 고려 군은 이성계를 최고지휘관으로 삼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성계가 먼저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투구를 떨어트리고 뒤이어 이두란(李豆蘭)이 쏜 화살이 그의 머리를 맞혔다. 이에 힘들어 고려군은 지휘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왜구를 완전히 섬멸하였다.

선조 때 왕명을 받아 김귀영(金貴榮)의 글, 송인(宋寅)의 글씨로 대첩비를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부수었다. 광복 후 옛 비석을 복구하였다가 1972년 신석호가 한글로 글을 지어 새롭게 세웠다. 왜구의 침탈에 맞서 우리 선조들이 꿋꿋하게 일구어낸 역사의 향취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출처 : 남원시청)

 

고려 우왕 6년(1380) 9월에 이성계와 이두란이 왜구와 싸워 왜장 아지발도의 군을 이 곳 황산에서 물리쳐, 화수리 강변에 대첩시 대승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이 곳에 보호각을 세우고 대첩지로 보존하고 있다. 당시에 장군들의 이름을 활촉으로 새겼다는 암벽이 있으나 글씨를 알아볼 수 없이 흔적만 남아있다. 규모는 7,121평 정도이다.(참고자료 : 전라북도, 1990, <<문화재지>>)

 

황산대첩비

고려말 왜구는 우리나라 각지를 침략하고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는데 우왕 6년(1880) 왜구부대가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를 휩쓸자 배극렴 등 구원수는 이들과 싸워 전사하였다. 이성계가 지휘를 맡아 팔령치전투에서 왜구를 섬멸하였는데 이를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선조 10년(1577)에 당시 호조판서인 김귀영(金貴榮)이 왕명으로 비문을 짓고 여성군 송인의 글씨로 비를 세웠으며 다시 운봉현감 박광옥이 구체적인 전투경과를 기술한 황산대첩 사적비를 세웠는데 중일전쟁시 이 비를 파손도괴한 것을 광복 후 재건하였고 1972년에 신석호씨에 의하여 국문으로 사적을 기술한 기념비를 세웠다.(참고자료 : 전라북도, 1990, <<문화재지>>)

                              

파비각(破碑閣)
남원 황산대첩비지 파비석
남원 황산대첩비지 파비석
남원 황산대첩비지 파비석
남원 황산대첩비지 파비석
남원 황산대첩비각(南原 荒山大捷碑閣)
귀부(원래의 것을 수리 보완)
사적비각(事跡碑閣)
사적 파비석
황산대첩지 피바위(血岩)

명석치에 얽힌 유래(출처 : 남원시청-운봉읍-비전마을 전설)

운봉 여원치를 올라서면 운봉의 물줄기가 모두 합류하여 흘러 나가는 좁은 목을 마치 움켜쥐듯 지켜선 황산(荒山)이 있다. 바로 호남과 영남의 관문인 이곳 길목은 예로부터 왜구나 조정 반란군을 진압하던 요새지이기도 하였다. 황산 오른쪽 물줄기를 건너 맞은 편으로 해발 1,150 m의 덕두산이 천혜의 요새지인 운봉 길목을 마주 지키고 있다. 황산은 695m의 비교적 낮은 산이지만 지리적으로 호.영남의 중요한 길목에 위치한 만큼 많은 전란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황산을 사이에 두고 현재 남쪽에는 포장된 아스팔트 길이 훤히 뚫려 있고, 반대쪽인 서북쪽에 지금은 사람들이 겨우 오갈 정도의 소롯길이 있다. 이 곳을 사람들은 울도치, 또는 명석치라고 부른다. 옛날의 우리나라 도로 사정은 우마차가 다닐 수 없는 좁고 구불거리는 소롯길이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가장 편리한 길은 역시 빠른 지름길일 수 밖에 없었다. 옛날부터 울도치는 운봉과 동면의 사창 부락과 인풍리 등지 사람들이 남원을 오가는 중요한 지름길이었다. 지금도 폭이 2∼3m가 넘는 옛날 길의 흔적이 보인다. 운봉 황산 대첩비지에서 현재 오씨와 정씨 두 집이 살고 있는 양지촌을 지나 방현 쪽으로 100여 m 정도 올라가면 정유재란 때 민씨의 열녀비를 만난다. 그 곳에서 오른쪽 양지제 길을 자동차로 오르다보면 왼편에 파평윤씨 제각 '명석재(鳴石齋)'가 있고, 다시 200여 m 더 오르면 고개 정상 부근에 20여 년간 살다가 지난해 타계한 유씨의 외딴집이 보인다. 그 집 왼 편 고개 정상에는 길 양편에 큰 바위가 대문 지주처럼 놓여 있다. 이 고개 마루에 서면 남쪽으로 지척에 황산의 가파른 봉우리와 북쪽에 아곡리 천황산 줄기가 성벽처럼 가로 막고 있다. 동쪽으로 아영과 동면의 넓은 들은 물론 팔랑치 고개를 훤히 관망할 수 있다. 또한 서쪽으로는 운봉 들녁과 여원치를 멀리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늦은 봄과 한겨울에 남원과 함양쪽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이 이곳 높은 재에서 바위와 부딫혀 소리 지르며 멈추곤 한다.

때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잦아 백성들의 재산과 피해가 말로 다 할 수 없던 때였다. 우왕 6년(1380) 8월 추수가 거의 끝나갈 무렵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대마도를 출발한 왜구는 진포로 상륙하였다. 허술한 해안 방비 탓으로 무인지경처럼 우리 국토로 쳐 들어온 왜구는 충청·전라·경상도 연해 지역을 약탈하고 주민들을 살상하여 그 참상은 극에 달하고 있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최무선을 토벌 대장으로 삼아 파병하였다. 최무선은 고려의 우수한 화약 발명술을 이용한 화포로 500여 척의 왜구 함선을 불태웠다. 배를 잃은 왜구들은 육지로 도망하였는데 이 왜구들은 잔여 세력을 규합하여 상주·함양 등지를 휩쓸며 더욱 악랄한 분탕질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함양 동쪽 16리 사근내 역까지 진출하여 진을 쳤다. 이 때 왜구의 숫자는 수천 명을 헤아렸다.

조정에서 서둘러 파병한 배극렴 등 여러 장수가 이곳 왜구를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500명의 군사와 두 명의 장수가 전사하는 패배를 당하였다. 사기 충천한 왜구는 그해 9월 남원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물러나 운봉현을 불사른 뒤 인월역에 진을 치고 있었다. 더구나 이들은 "장차 광주 땅의 금성(담양)에서 말을 먹인 후 곧 북상하리라"는 소문을 냈다. 나라 안팎의 민심은 더욱 흉흉하였다. 마침내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 장군으로 하여금 적을 섬멸토록 파병하였다. 이성계 장군은 고려군과 귀화한 여진족으로 편성된 1천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배극렴과 남원에서 합류한 뒤 여원치를 넘어 운봉의 황산 서북쪽 울도치에 도달하였다. 고개 마루에는 크고 작은 바위와 돌들이 많이 쌓여 있었다. 이성계 장군은 이곳 고개 마루에서 돌무더기를 쌓아 진을 치고 적정을 살펴보았다. 수천의 적은 인월역에 진을 치고 일부는 황산 기슭에 복병을 숨겨 놓은 듯 하였다. 그동안 여러 곳을 약탈하며 고려 산세를 익혀둔 적은 황산을 이용해 군세를 잘 정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성계 장군도 쉽사리 적을 공격할 수 없었다. 이쪽의 방비를 튼튼히 하면서 적의 헛점을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군사 전략회의를 마치고 잠을 자던 이성계 장군의 꿈에 쌓아둔 바위들이 통곡을 하며 울어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바위가 울며 통곡을 하다니? 바위들은 장군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장군님, 지금 장군님은 무엇을 망서리고 계십니까? 인월에 진을 친 적들은 우리 죄없는 백성들을 마구 살상하며 온갖 만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왜적의 장수가 어린 아이를 잡아다 배를 갈라 내일 승전의 제물로 제사를 지내는가 하면, 어린 아이와 성인 남자의 귀나 심지어는 국부를 소금에 저려 본국으로 보내는 등 천인 공노할 만행을 서슴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또한 겁탈당한 부녀자가 젖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하였습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적정만 살피고 계시니 그동안 늘어나는 우리 백성의 피해는 어찌하겠습니까. 이렇듯 지체해서는 죄없는 죽음만 늘어나게 됩니다. 이제 우리들이 적을 막아낼 것이니 내일 당장 출전하소서."

장군은 간밤의 꿈을 기이하게 여기며 전략에 골몰하였다. 그러다가 새벽녁 참모들을 집합시켜 오늘의 일진을 보도록 하였다.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퉁두란을 시켜 100보 앞 바위 위에 투구를 놓아두게 하였다. 그리고 유엽전(화살) 3개를 뽑아 하나씩 투구를 향해 쏘았다. 세 개 모두 백발백중이었다. 전투 일진이 좋다고 판단한 이성계 장군은 공격을 명령하였다. 진군하던 군사들은 지금의 사창마을을 지났다. 사창은 이미 약탈 당하고 비어 있었다. 왜구는 창고에 들어 있던 모든 곡식을 가져다 군량으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계 장군은 사창마을 앞 우뚝 돌기한 앞산에 올랐다. 지금의 정산봉(鼎山峰)이다. 서무리 너머로 왜구의 진지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군사들에게 명하여 솥을 걸어 아침을 짓도록 하였다. 후에 이 산의 이름이 솥정(鼎)를 쓴 정봉(鼎峰)이 된 연유이다. 정봉에서 식사를 마친 이성계 장군은 전군에게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우리 군사들은 왜구에 대한 분노로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마자 물밀 듯 왜구를 향해 돌진하였다.

이 날 이성계 장군은 다리에 화살을 맞고 말이 거꾸러지는 등 여러번 위험한 고비를 넘기면서 결국 역사에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두었다. 적장 아지바두는 퉁두란과 함께 이룬 협공(協攻)으로 전사하고 적군은 오합지졸이되어 이리저리 쫒기다가 거의 전멸하고 70여명 만이 지리산으로 도주하였다. 황산천은 피로 물들어 물을 떠서 7일 동안 가라앉힌 뒤에야 식수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바위마저 붉게 물들어 오늘날 피바위(血岩)를 만들었다.

수천명이 넘는 적의 시체는 아영면 봉화산에서 흘러 내리는 풍천의 서쪽과 동쪽에 묻었다. 그래서 지금의 서무(서무덤)와 동무(동무덤)의 지명이 생겨났다. 대승을 거둔 그날밤 이성계 장군의 꿈에 바위들이 또 나타나 엎드려 통곡하기 시작하였다. 전날 밤에 일도 있고 해서 이번에는 침착하게 물었다.

"이번에는 무슨 일로 이렇게 내 심기를 어지럽히느냐?"

장군은 의아해 하며 소리쳤다.

"장군님의 지략과 용맹으로 왜적을 물리쳐 우리 백성이 편안해졌습니다. 다만 장군님의 승리로 우리들의 역할을 다하지 못함을 한탄하여 이렇게 통곡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충정을 헤아리소서."

그래서 이 고개를 돌이 울부짖는다 해서 '울독치' '웃도치' '명석치'라 명명하게 되었다. 그 후에도 많은 전란을 당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이곳 바위들이 밤새 울었다고 한다.

지금도 명석치 정상에 서면 여원치를 넘어오는 바람과 함양을 거쳐 매치를 넘어오는 바람의 거센 바람소리가 조석으로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이 고개에서 아영면 방면으로 내려다 보이는 마을을 인풍리라 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지봉유설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나던 해에는 피바위에서 피가 흘렀다고 한다.

피바위(血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