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임청각(安東 臨淸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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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안동

2021. 10. 26.

안동 임청각(安東 臨淸閣. 보물. 경북 안동시 임청각길 53 (법흥동))

임청각은 형조좌랑(刑曹佐郞)을 지낸 바 있는 이명이 1515년(중종 10)에 건립한 주택이며,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의 집이기도 하다.

이 집은 영남산(映南山) 동쪽 기슭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 한 명당에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중앙선 철도부설 때 50여간의 행랑채와 부속채가 철거되어 현재의 규모로 줄어들기는 하였으나, 길에서 보면 맞담 너머로 보이는 웅장한 모습의 행랑채가 이 집이 소위 말하는 99간 집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 중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보물로 지정된 군자정은 임청각의 별당으로 조선 중기에 지은 ‘丁’자 평면의 누각형 건물이다.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이고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중심은 남향의 대청이고, 그 서쪽에 이어서 지은 T자형의 온돌방이 부설되어 있다. 내부는 4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물 둘레에는 툇마루를 돌려서 난간을 세웠으며, 출입은 두 군데에 마련해 놓은 돌층계를 이용하게 되어 있다.(출처 : 문화재청)

 

안동 임청각은 세종 때 좌의정을 역임한 이원(李原, 1368~1429)의 여섯째아들 이증(李增, 1419~1480)이 건축한 조선 중기의 종택 건물과 이증의 셋째 아들 이명(李洺)이 중종 때 세운 별당형 정자인 군자정(君子亭)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해 임시 정부의 초대 국무령(國務領)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은 이명의 17대 주손(冑孫)이다.

군자정은 목조 건물로는 보기 드물게 임진왜란을 겪은 오래된 건물이다.

군자정 대청에는 이현보(李賢輔) 등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으며, 안동 임청각의 현판은 퇴계 이황(李滉)의 친필로 알려져 있다.

군자정은 ‘丁’자형의 누각으로 된 별당 건축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된 대청이 남향으로 앉아 있고, 그 왼쪽에 온돌방 4칸이 연접하여 ‘ㅏ’자 모양을 취하고 있다.

온돌방의 한 부분은 각주를 세워 굴도리를 얹은 간단한 구조로, 홑처마로 구성하였다. 그러나 대청은 원주를 사용하였고, 그 위에 이익공 계통의 공포(栱包)와 그 사이에 화반을 1개씩 배치하였으며, 겹처마로 만들었다.

공포는 건물의 외면에서는 쇠서의 형태를 갖추지 않고 간소하게 초공으로 꾸며져 있다.

벽은 회벽을 치고 대청 주위에는 판문을, 온돌방에는 빗살문을 달아놓았다. 처음에는 대청 전체에 단청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내부에서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서쪽에 위치한 본채는 양지 바른 산기슭에 자리 잡았는데, 총 50칸이 넘는다. 앞면 아래서부터 동서 길이로 12칸의 행랑채가 있고, 그 뒷면에 다시 같은 길이로 두 채씩 병행시켰는데, 제일 뒤쪽 건물의 중앙에 대청을 두었으며, 그 앞면 좌우에는 앞뒤채를 연결하는 방이 있어 안마당이 세 구역으로 구분되었다.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으로서 안채와 대청은 굴도리집이고 나머지는 방주를 사용한 납도리집이다. 건축 양식상으로는 대청 종량 위의 포대공이 눈에 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이상룡(李相龍. 이칭異稱 : 만초(萬初),석주(石洲),이상희(李象羲),이계원(李啓元·李啓源). 일제강점기 안동 출신의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만초(萬初)이며, 호는 석주(石洲)이다. 초명은 이상희(李象羲)이나, 1911년 만주 망명 이후 이상룡(李相龍)으로 개명하였으며 계원(啓元·啓源)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1858년 지금의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서 이승목(李承穆)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학문적으로는 퇴계 학통을 계승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제자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과 종고모부인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친족인 평담(平潭) 이전(李銓)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특히 19세에 서산 김흥락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학문을 계승하며 안동 지방의 거유(巨儒)로 성장하였다.

서간도로 망명한 1911~1918년에는 이곳으로 이주해 온 우리 민족의 경제적 안정을 도모하면서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고, 1930년 초까지 중국 각지에 흩어진 독립운동 세력의 통합과 결속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상룡 관련 항목 보기은 1900년대 초반까지 주로 스승·동문들과 성리철학 문제에 대해 깊이 토론하며, 강회 개최, 향음주례 시행, 향약 제정과 시행 등 성리학적 질서를 향촌에 뿌리내리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본격적으로 의병 활동에 나섰다. 1905년 겨울 영해 출신인 매제 박경종(朴慶鍾)과 함께 1만 5000냥을 모아 가야산에서 거병한 은표(隱豹) 차성충(車晟忠)을 지원하는 한편, 신돌석(申乭石)·김상태(金相台) 등과도 연대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차성충의 기병이 실패로 끝나자 의병 항쟁이 가지는 한계를 깊이 인식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한 끝에 계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에 이상룡은 1909년 4월 계몽운동 단체인 대한협회 안동지회를 결성하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1911년 1월 5일 가솔과 가까운 친척을 이끌고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망명 직후인 1911년 4월 유하현(柳河縣) 삼원포에서 경학사(耕學社)를 설립하고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서간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청년들을 모아 경학사 부속 기관으로 설치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통해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1919년에는 만주 한인 사회의 자치기구인 한족회(韓族會)를 조직하였다.

한족회는 경학사(1911~1913), 공리회(1913~1916), 부민단(1916~1919)의 정신을 계승하여 결성된 만주 한인 사회의 민정기관이었다. 여기에서 이상룡은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4월 군정기관으로 조직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최고 대표인 독판에 선임되었다.

이상룡은 서로군정서의 독판으로 일제에 계속 항쟁하면서 국내에 조직된 의용단(義勇團)과 연결을 꾀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1921년 북경군사통일회의에 참석하였고, 이어 남북만주와 연해주에 각기 일어나고 있던 독립군단과 항일 단체들의 통합을 시도하여 1922년 6월 서로군정서와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을 비롯한 8단 9회의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성립시켰다.

1925년 9월 이상룡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에 추대되었다.

국무령에 취임하여 당시 만주와 중국 대륙에서 독립군을 이끌며 항일 투쟁에서 큰 성과를 올리고 있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조각(組閣)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세력을 조정·통합하려는 노력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1926년 봄 국무령 직책을 사임하였다.

1926년 2월 다시 만주로 돌아온 뒤 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참의부(參議府)를 비롯한 만주 지역 광복 단체의 통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만주에서의 항일 운동이 매우 어려운 국면을 맞았던 1932년 5월 길림성 서란현(舒蘭縣)에서 74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저서로는 『석주유고(石洲遺稿)』가 전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임청각 대청
군자정 계단
군자정 뒷편
군자정 가구
임청각 행랑채
임청각 앞 낙동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