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정몽주유허비 (圃隱鄭夢周遺墟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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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천

2022. 1. 17.

포은정몽주유허비 (圃隱鄭夢周遺墟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경북 영천시 임고면 우항리 1044-5번지)

유허비란 한 인물의 옛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우는 비로, 이 비는 포은 정몽주 선생의 효행을 기리고 있다.

정몽주 선생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며 삼은(三隱)의 한사람이다. 공민왕 5년(1355) 부친상을 당하여 묘 곁에서 3년상을 치르고, 그후 공민왕 14년(1365) 모친상까지 당하여 역시 3년상을 지내였다. 이토록 지극하였던 그의 효성이 조정에 보고 되자, 출생지인 이곳 우항리 마을에 비를 세워두도록 하였다.

비는 반듯하고 널찍한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모습이다. 앞면에는 효행을 행한 마을이라는 뜻의 ‘효자리(孝子里)’라는 글귀를 세로로 큼직하게 새겼다. 공양왕 원년(1389)에 세운 것으로, 그후 잃어버렸던 것을 조선 성종 18년(1487) 땅속에서 찾아내어 비각을 세워 모시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출생지에 세워진 효자리비 이야기

정몽주가 태어난 우항리에는 정몽주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비가 남아 있다. 『고려사』에 보면, 당시 초상이 나면 100일 만에 부모상을 벗었는데, 정몽주는 부모상에 분묘를 지키고 애도와 예절을 모두 극진히 하여 왕이 그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1389년(공양왕 원년)에는 마을에 ‘효자리(孝子里)’라는 글귀를 새긴 정몽주의 유허비를 세웠는데, 이 비는 원래 생가 인근에 세워졌으나,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참변을 당한 후 비석 또한 땅속에 묻히는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그러다 조선조에 들어와 1487년(성종 18) 손순효(孫舜孝)에 의해 다시 세워지게 되는데, 그 내용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아래와 같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성종(成宗) 때 손순효가 일찍이 이 도의 안찰사가 되어 순시하러 군경(郡境)을 지나던 중, 술에 취하여 말 위에서 졸다가 정신없이 포은촌(圃隱村)을 지나갔다.

꿈결에 머리털과 수염이 희고 의관이 점잖은 한 노인을 어렴풋이 보았는데, 그 노인이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포은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거처하고 있는 곳이 퇴락해서 비바람을 막을 수 없다.’ 하며 부탁하는 기색이 있었다. 순효가 놀라고 괴이쩍게 여겨, 그 지방 사정을 잘 아는 노인들에게 물어 사당 옛터를 찾아 군민들을 독려해서 다시 짓도록 하였다.

사당이 완성되자, 순효가 몸소 전(奠 : 제사 지낼 전)을 드리고 낙성잔치를 베풀었다. 스스로 큰 잔을 기울여 술을 마시고 취한 채로 사당의 벽에 글을 쓰기를,

 

‘문승상(文丞相)과 충의백(忠義伯), 이 두 선생은 간담이 상조(相照)하였네.

자기의 한 몸을 잊고 인간 기강을 확립하였으니, 천만세에 크게 우러러 마지 못하네.

고금의 사람들이 오직 이익만을 좇아 분주한데, 이 두 선생은 청상(淸霜) 백설(白雪)에 송백(松柏)이 창창하듯 하였네.

이제 한 칸의 집을 지어 드리니,그것으로써 바람을 막을 수 있으리. 공의 영혼이 편안함에 저의 마음도 편안합니다.’


하였다.[「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후에 관리 정거(鄭琚)가 사당이 너무 궁벽진 곳에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당시 큰길가인 현 위치로 옮겨 세웠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임고서원이 처음 창건된 부래산(임고중학교와 포은정몽주선생 생가 중간 쯤에 위치)

임고서원이 처음 창건된 부래산浮來山은 야트막한 작은 언덕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어느 해 7월 붕어같이 생긴 작은 산이 운주산(雲住山) 기슭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별안간 천지가 진동하는 벼락이 치고 소나기가 내려 산이 홍수에 떠내려 오다가 지금의 자리에 이르러 마을 아낙네가 그것을 발견하고, ‘저기 산 떠내려 온다!’라고 고함을 지르자, 산이 멈추어 섰다.”고 하여 떠내려 온 산[浮來山]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아무리 볼품없이 작은 산이라 할지라도 임고 서원을 창건한 중요한 곳이기에 그 이름이 아직까지 전해지는 것일 것이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