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浮石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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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영주

2022. 5. 7.

부석사( 浮石寺.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북지리 148))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관련항목 보기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

부석사(浮石寺)는 676년(문무왕 16)에 의상(義湘)이 왕명을 받아 창건했으며,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부석사는 한국 10대 사찰의 하나로, 한국 불교사상의 맥을 이룬 화엄사상의 산실이며, 한국 불교문화의 성지이다. 부석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다.

부석사는 676년 의상이 문무왕의 명을 받아 창건하였다.

『송고승전(宋高僧傳)』과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부석사 창건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의상은 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나라에 갔는데, 그곳 등주(登州)에서 선묘(善妙)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선묘는 의상을 사모하게 되고, 의상이 신라로 떠나자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었다.

귀국 후 의상이 봉황산에서 절을 지으려 하자, 도둑 무리가 방해하였는데, 이 때 용이 된 선묘가 큰 바위로 변하여 도둑 무리를 위협하였다. 이에 도둑의 무리는 달아나게 되고, 마침내 의상이 절을 짓게 되었다.

의상은 선묘를 기리기 위하여 절의 이름을 ‘부석(浮石)’이라고 하였다.

현재 부석사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이라 불리는 바위가 있다.

부석사는 1043년(정종 9) 원융국사(圓融國師)가 중건했고, 1376년(우왕 2) 무량수전(無量壽殿), 1377년 조사당(祖師堂)이 각각 중건되었다.

조선시대에 부석사를 중수한 기록은 자주 발견된다.

1490년(성종 21) 조사당을 중수하였고, 1493년 조사당에 단청을 칠했다.

1555년(명종 10) 화재로 인해 안양루(安養樓)가 소실되었으며, 1573년(선조 6) 조사당 지붕을 개수하였다.

1576년(선조 9)부터 1578년(선조 11)까지 석린(石麟)이 안양루를 중건하고 단청을 칠했다.

1611년(광해군 3)에는 폭풍우로 인해 무량수전의 중보(中樑)가 부러져 이듬해인 1612년에 중수하였고, 1723년(경종 3)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을 개금하였다. 1746년(영조 22)에 화재로 승당(僧堂)·만월당(滿月堂)·서별실(西別室)·만세루(萬歲樓)·범종각 등이 소실되었으나 1747년에 중수하였다.

1768년(영조 44)에는 무량수전 본존불을 개금하였다.

부석사가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18세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물론 19세기 후반에 편찬된 『영남읍지(嶺南邑誌)』와 『교남지(嶠南誌)』에도 기록되어 있어 개항기까지 사세가 계속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6년 무량수전과 조사당을 해체·수리하였으며, 무량수전 서쪽에 있던 취원루를 동쪽으로 옮기고 ‘취현암(醉玄庵)’이라 하였다.

현재 취현암은 1997년에 조사당 옆쪽에 중건하였다.

1967년에 부석사의 동쪽 옛 절터에서 쌍탑을 옮겨 범종각 앞에 세웠고, 1969년에는 무량수전 기와를 갈았다.

1977년부터 1980년에 걸쳐 전체적으로 정화하면서 일주문·천왕문·승당 등을 신축하였다.

주지인 근일(勤日)은 1990년에 부임하였으며, 지장전·관음전 등을 중창하고, 2011년 부석사박물관을 신축·개관하였다.

영주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부석사 일대에서는 2003년부터 2010년까지 ‘부석사화엄축제’를 개최하였으며, 지금은 ‘영주사과축제’가 매년 개최되고 있다.

부석사는 불전, 석탑, 석등, 당간지주, 비석, 부도, 불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전으로는 무량수전, 조사당, 자인당, 응진전, 취현암, 지장전, 관음전, 삼성각, 응향각, 선묘각, 단하각, 화엄선원, 장경각, 선열당, 삼보실, 부석사박물관, 안양루, 범종루, 원융국사비각(圓融國師碑閣), 천왕문, 일주문 등이 있다.

부석사는 통도사·봉정사·법주사·마곡사·선암사·대흥사와 함께 2018년 6월 30일 ‘산사, 한국의 산지 승원(Sansa, Buddhist Mountain Monasteries in Korea)’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향토문화전자대전)

 

일주문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榮州 浮石寺 幢竿支柱. 보물.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17 부석사))

절에 행사가 있을때 절의 입구에는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장대를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부석사 입구에 1m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마주보는 안쪽 옆면과 바깥 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양쪽 모서리의 모를 둥글게 다듬었다.

기둥 윗부분은 원을 2겹으로 경사지게 조각하였고, 옆면 3줄의 세로줄이 새겨져 있다. 기둥머리에는 깃대를 단단하게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 모양의 홈이 파여 있다.

기둥 사이에는 한 돌로 된 정사각형의 받침 위에 원형을 돌출시켜 깃대를 세우기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이 주변에는 연꽃을 장식하고, 윗면 중앙에는 구멍을 뚫어 당간의 밑면을 받치고 있다.

대체로 꾸밈을 두지 않아 소박한 느낌을 주는 지주이다. 또한 가늘고 길면서도 아래위에 다소 두께 차이가 나 있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을 주며, 간결하고 단아한 각 부분의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 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천왕문
사천왕상
사천왕상
사천왕상
사천왕상
석축石築

석축石築 :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 비탈을 깍고 평지를 고르면서 만등 것으로 돌의 자연 생김새를 그대로 이용해 잘 짜 맞추면서 쌓은 것이 특징이다. 극락에 이를 수 있은 16가지 방법 중 마지막 세 방법인 3품 3배관의 9품 만다라를 형상화 한 것이다. 부석사를 찾는 이는 상징화 된 돌계단과 석축을 지나면서 극락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범종루梵鐘樓

범종루梵鐘樓 : 일주문. 천왕문. 회전문 다음으로 맞이하게 되는 문으로, 누각식 문이다. 아래층은 통로이고, 2층은 운판. 목어 법고가 놓여있다. 법종은 옆에 따로 종각을 지어 달아 놓았다.

 

부석사삼층석탑(浮石寺三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북지리))

부석사 삼층석탑은 동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탑이다. 두 개의 탑은 처음부터 함께 만든 것처럼 크기와 모양이 매우 비슷하다.

원래 부석사에서 동쪽으로 200m 정도 떨어진 절터에 있었는데, 1966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 왔다.

부석사 삼층석탑은 무량수전 옆에 있는 보물 제249호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과도 크기와 모양이 비슷하다. 다만 지붕돌받침이 4단이고 바닥돌 크기가 작다는 점에서 무량수전 옆의 삼층석탑보다 조금 늦게 만들어졌다고 판단된다.

바닥돌은 각 면의 모서리와 중앙에, 몸돌은 모서리에 기둥 모양 장식을 하였다.

지붕돌의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양 끝에서 살짝 치솟아 경쾌한 느낌을 준다. 머리 장식부는 없어져서 새로 만들어 얹었다.

전체적으로 비율이 좋으면서 짜임새가 있어 통일 신라 후기의 석탑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자료이다.(출처 : 문화재청)

 

범종루梵鐘樓

부석사에는 2개의 누각이 있는데 안양루와 범종각이다. 문의 성격을 겸한 안양루가 석축 위에 작고 날아갈 듯하게 지은 누각이라면 대석축단과 안양루 석축으로 구분되는 공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범종각은 지반에 견고 하게 버티고 선 안정감 있는 건물이다. 특히 이 범종각은 그 건물의 방향이 여느 건물과는 달리 측면으로 앉아있다.

건물의 지붕은 한쪽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치기 쉽다.

팔작지붕을 한 쪽이 정면을 향하고 있고 맞배지붕이 뒤쪽을 향하고 있는데 무량수전 앞에서 바라보면 왜 목수가 지붕을 그리했는지를 알 수 있으며 그 지혜에 절로 감탄이 난다.

부석사가 소백산맥을 향하여 날아갈 듯이 앉아있는데 범종각이 정면을 향하고 있으면 건물이 전반적으로 무거워보인다. 따라서 범종각을 옆으로 앉혀놓고 뒷쪽을 맞배로 처리하여 건물이 전반적으로 비상하는 느낌을 주고 답답해 보이지 않아 좋다.

 

안양루安養樓

안양루安養樓 : 조선 후기의 목조 건축물로서 범종루를 지나 누각 밑을 통과하여 무량수전으로 들어서게 하는 건물이다. 정면3칸 측면 2칸인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의 2층 누각 건물로서, 석축 위에 세워져 있다.

 

부석사浮石寺 현판은 이승만대통령 글씨라 전한다.
안양루 공포栱包 사이의 공간이 부처님 모습이다.(공포栱包: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려고 기둥머리에 짜맞추어 댄 나무쪽)
안양루 계단에서 바라본 석등
안양루
안양루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들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 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외부 공간은 확장되어 다가온다. 부석사 전체에서 가장 뛰어난 경관이다. 그래서 예부터 많은 문인들이 안양루에서 바라보는 소백의 장관을 시문으로 남겼고 그 현판들이 누각 내부에 걸려 있다.

 

안양루에 걸린 金笠(김삿갓. 김병연)의 한시漢詩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앞 石燈. 국보.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로 345 (부석면,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 앞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으로 부처의 광명을 상징한다 하여 광명등(光明燈)이라고도 하며, 대개 대웅전이나 탑과 같은 중요한 건축물 앞에 세워진다.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4각 바닥돌은 옆면에 무늬를 새겨 꾸몄으며,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기둥을 받치고 있다.

전형적인 8각 기둥형태인 이 기둥은 굵기나 높이에서 아름다운 비례를 보이는데, 위로는 연꽃무늬를 조각해 놓은 윗받침돌을 얹어놓았다.

8각의 화사석은 불빛이 퍼져 나오도록 4개의 창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세련된 모습의 보살상을 새겨놓았다. 지붕돌도 역시 8각인데, 모서리 끝이 가볍게 들려있어 경쾌해 보인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얹었던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출처 : 문화재청)

   

 

배례석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국보.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사로 345 (부석면, 부석사))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는데, 『송고승전』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 앉았다고 전한다.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 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하였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구조를 간결한 형태로 기둥 위에만 짜올린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세부 수법이 후세의 건물에서 볼 수 있는 장식적인 요소가 적어 주심포 양식의 기본 수법을 가장 잘 남기고 있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 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식 팔작지붕 구조로 부석사의 중심 건물이며 국보인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을 봉안하고 있다.

              

무량수전 처마선
무량수전 현판(공민왕 글씨) :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물 때 쓴 글씨라 전힌다.
부석사 무량수전 귀공포
무량수전 내부가구
무량수전 닫집과 내부가구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榮州 浮石寺 塑造如來坐像. 국보.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얼굴은 풍만한 편이며, 두꺼운 입술과 날카로운 코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옷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고 있는데, 평행한 옷주름을 촘촘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릎 아래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런 형태의 옷주름은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국보)에서도 보이는 것으로 이 작품이 고려 초기 불상들과 같은 계열임을 알 수 있다.

손모양은 석가모니불이 흔히 취하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의 손끝이 땅을 향하고 있다. 하지만 불상을 모신 장소가 서방 극락정토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라는 사실과, 부석사에 있는 원융국사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불상은 아미타불임이 확실하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상징하는 광배(光背)는 불상의 뒤편에 나무로 따로 만들어 놓았는데, 가장자리에 불꽃이 타오르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머리광배와 몸광배는 원형으로 표현하고 그 안에는 화려한 꽃무늬를 장식하였으며, 작은 부처를 달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온화함이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평행의 옷주름 등에서 형식화된 모습이 보이지만 고려시대 불상으로서는 상당히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며, 특히 소조불상이란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출처 : 문화재청)

            

부석사 무량수전소조여래좌상
부석사 무량수전 소조여래좌상 손 부분
부석浮石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榮州 浮石寺 三層石塔. 보물.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부석사 무량수전 동쪽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래층 기단은 가운데에 2개씩의 조각을 두고, 위층 기단에는 하나씩을 두었다. 탑신의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있는데,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으로 통일신라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문무왕 16년(676) 부석사를 창건할 당시에 만들어진 것으로, 아래층 기단의 너비가 매우 넓고, 1층 몸돌 또한 높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서 장중해 보인다.

1956년 해체하여 복원할 때 철제탑, 불상의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고 이 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이나 이 석탑은 법당의 동쪽에 세워져 있어 눈길을 끈다.(출처 : 문화재청)

                  

선묘각 :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구조인 선묘각에는 전설로 전해오는 선묘의 화상이 있다.

『송고승전(宋高僧傳)』과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부석사 창건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의상은 불교를 배우기 위해 당나라에 갔는데, 그곳 등주(登州)에서 선묘(善妙)라는 여인을 만나게 된다.

선묘는 의상을 사모하게 되고, 의상이 신라로 떠나자 바다에 몸을 던져 용이 되었다.

귀국 후 의상이 봉황산에서 절을 지으려 하자, 도둑 무리가 방해하였는데, 이 때 용이 된 선묘가 큰 바위로 변하여 도둑 무리를 위협하였다. 이에 도둑의 무리는 달아나게 되고, 마침내 의상이 절을 짓게 되었다.

의상은 선묘를 기리기 위하여 절의 이름을 ‘부석(浮石)’이라고 하였다.

                

영주 부석사 조사당(榮州 浮石寺 祖師堂. 국보.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북지리))

봉황산 중턱에 있는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의상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화엄의 큰 가르침을 펴던 곳이다.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는데, 『송고승전』에 있는 설화를 보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여인 선묘가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앉았다고 전한다. 또한 조사당 앞 동쪽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의상대사가 꽂은 지팡이였다는 전설도 있다.

조사당은 의상대사의 초상을 모시고 있는 곳으로 고려 우왕 3년(1377)에 세웠고, 조선 성종 21년(1490)과 성종 24년(1493)에 다시 고쳤다.

앞면 3칸·옆면 1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처마 내밀기를 길게하기 위해 올린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며, 건물 자체가 작은 크기이기 때문에 세부양식이 경내에 있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보다 간결하다. 앞면 가운데 칸에는 출입문을 두었고 좌우로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한 광창을 설치해 놓았다.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부석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의상대사상
조사당에 있는 선묘상

부석사 조사당 벽화(浮石寺 祖師堂 壁畵. 국보.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이 벽화는 부석사를 창건하고 우리나라에서 화엄종을 처음 시작한 의상대사를 모시고 있는 부석사 조사당(국보) 안쪽 벽면에 사천왕과 제석천, 범천을 6폭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이다. 현재는 일제강점기에 해체 분리된 벽화를 별도로 보관하고 있다.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백색·금색 등으로 채색하였으며, 각각의 크기는 길이 205㎝, 폭 75㎝ 가량이다.

양쪽의 두 천부상은 우아한 귀족풍으로 양감이 풍만하며, 가운데 사천왕은 악귀를 밟고 서서 무섭게 노려 보는 건장한 모습이다.

훼손된 부분이 많고 후대에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사라졌지만 율동감 넘치는 유려한 선에서 고려시대 불화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건물에서 발견된 기록을 통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을 알게 되었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벽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회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선비화(골담초)

골담초(骨擔草. 학명:Caragana sinica)는 콩과에 딸린 갈잎떨기나무이다. 중국이 원산지이며 경기도 이남의 산중턱의 양지에서 잘 자란다.

원산지가 중국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도 군락지가 경북 및 중부지방의 산지에서 발견되어 원산지로 들고 있다.

키는 1~2m쯤이며, 더부룩하게 나고 잔가시가 많다. 잎은 깃꼴겹잎이고, 잔잎은 넓은 타원 모양이다. 봄에 황색에서 적황색으로 변하는 길이 2.5cm~3cm인 나비 모양의 누른 꽃이 잎겨드랑이에서 하나씩 핀다.

비옥한 사질양토에서 잘 자라나 토박지에서도 잘 자란다. 튼튼하고 내한성과 내건성이 강하며 생장이 빠르고 위로 자란다. 양수이나 반그늘에서도 잘 견딘다. 내조성이 강하여 해변이나 공해가 심한 도심지에서도 잘 자란다.

꽃은 5월에 피고 단생하며 길이가 2.5~3m로서 처음에는 황색으로 피어 후에 적황색으로 변하고, 아래로 늘어져 핀다.

열매는 길이가 3~3.5cm로서 원주형이고 털이 없으며 9월에 익지만 결실이 드물다. 줄기는 위를 향한 가지는 사방으로 늘어져 자란다. 가지는 5개의 능선이 있고 회갈색이며 털이 없고 가시가 있다. 뿌리는 잔뿌리가 길게 자란다.

사찰이나 마을에서 관상용으로 재배하며 뿌리는 한약재로 쓴다.

꽃이 아름답고 잎의 모양이 기이하여 정원수나 공원수로 이용하고 생울타리로 유망한 수종이다. 도로변 절개지용으로 이용하며 뿌리는 술에 담가 신경통약으로 이용한다.

조사당(祖師堂) 건물의 처마 밑에는 스테인리스 철망 안에 손가락 굵기 남짓한 작은 나무가 자라고 있다.

신선神仙 집 꽃이란 의미의 선비화(仙扉花. 仙:신선 선. 扉:문짝 비. 花:꽃 화)이다.

선비화는 “전설에 의하면 이 나무는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이곳 조사당 처마 밑에 꽂았더니 가지가 돋아나고 잎이 피어 오늘에 이르렀다. 비와 이슬을 맞지 않고도 항상 푸르게 자라고 있다. 일찍이 퇴계 이황 선생이 부석사를 찾아와 이 선비화를 바라보며 시를 짓기도 했다. 이름은 골담초라 한다.”라고 하여 이 나무의 의미가 심상치 않음을 알 수 있다.

퇴계 선생은 조사당 앞 선비화를 바라보며 부석사비선화시(浮石寺飛仙花詩)를 지었다.

浮石寺飛仙花(부석사비선화)

擢玉森森倚寺門(탁옥삼삼의사문)

옥같이 뽑혀서 무성한 모습으로 가람에 의지해

僧言卓錫化靈根(승언탁석화령근)

탁석(卓錫)에 신령스런 뿌리가 내렸다고 스님들은 말하네

杖頭自有曺溪水(장두자유조계수)

지팡이 위에는 조계수(曺溪水)가 스스로 있어

不借乾坤雨露恩(불차건곤우로은)

자연의 이슬비 은혜는 빌리지도 않았네

      * 卓錫(탁석): 승려가 지팡이를 꽂고 머무르는 것(駐錫:승려의 우뚝한 수행)

      * 曺溪一滴水(조계일적수)로 선(禪)의 본류(本流)를 뜻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1730년경 조사당의 선비화를 보고 적어둔 기록이 나온다. “지팡이에 싹이 터서 자란 나무는 햇빛과 달빛은 받을 수 있으나 비와 이슬에는 젖지 않는다. 지붕 밑에서 자라고 있으나 지붕은 뚫지 아니한다. 키는 한 길 남짓하지만 천년 세월을 지나도 한결같다”라고 하였다.

                   

선비화(골담초) 꽃
자인당과 응진전
자인당

영주 북지리 석조여래좌상(1963-1)(榮州 北枝里 石造如來坐像(1963-1). 보물.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1 부석사))

원래 부석사 동쪽 산 너머 절터에 있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서 양식상 동일한 조각가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동쪽의 여래상은 얼굴이 타원형이며,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흔적이 있다. 두 손은 없어졌으나 두 팔이 가슴 쪽으로 올라가 있어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쥔 손모양을 취하고 있는 비로자나불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당시 유행하던 얇게 빚은 듯한 촘촘한 평행의 옷주름이 표현되었다.

대좌(臺座)의 가운데 부분은 8각인데 각 면에는 공양보살상을 조각하였다. 서쪽의 여래상은 동쪽의 여래상보다 좀 더 당당하며 불신의 선들도 부드러운 편이다.

이 불상들은 9세기 후반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의 예로서 단아하면서 인간적인 형태, 평행의 옷주름선, 몸의 자세 등에서 당대 불교사상의 특징과 불상양식의 특징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영주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榮州 浮石寺 石造釋迦如來坐像. 보물.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부석사 자인당에는 거의 같은 규모의 여래삼존상이 봉안되어 있다. 2구는 지권인의 비로자나불상이며, 1구는 항마촉지인의 석가모니불의 도상특징을 보여준다.

이 불상은 1958년 11월 부석사 동쪽의 약사곡에서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인당에 이미 보물로 지정된 두 구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이 석조여래좌상은 동그란 얼굴, 항마촉지인의 수인과 꽃문양이 조각된 승각기, 부드러우면서도 사실적인 옷주름의 표현, 높은 삼단대좌에 부조된 향로와 7사자, 합장 한 보살상 등에서 통일신라 9세기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특히 대좌 뒷면에 조각된 지장보살상은 특이한 예로 주목되며, 높고 화려한 대좌는 양감이 강조된 불상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수준 높은 작품이다. 거의 훼손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삼단대좌와 불상은 다소 장식화 경향을 보이는 통일신라 9세기의 전형양식을 보여주고 있다.(출처 : 문화재청)

                

응진전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인 응진전에는 석가여래상과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다.

                        

응진전 나한상
응진전 나한상
단하각 :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구조인 단하각에는 생쥐를 잡는 나한상이 있다.
생쥐를 잡는 나한상

단하천연, 목불을 쪼개서 불을 피우다

‘반권위 허상 타파 운동’에 나선 선승은 ‘단하소불(丹霞燒佛, 단하선사가 목불을 태우다)’로 유명한 단하천연(丹霞天然, 739-824)이다. 그의 이름은 멋있다. ‘붉은 저녁 놀/노을)[丹霞].’ 석두희천의 제자로 백장회해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선승이다. 그 계통들이 조동종이다.

그가 어느 날 운수행각(만행)을 하다가 낙양에 있는 혜림사(慧林寺) 객실에서 하루를 묵게 되었다. 당시 낙양은 장안과 함께 양경(兩京, 수도가 두 개) 체제의 당나라 도읍이었다. 아마도 동안거 해제를 하자마자 만행을 떠났던 모양이다. 추운 겨울, 객실은 차가운 냉골이었다. 그는 대웅전에 올라가서 금색 목불(木佛)을 들어다가 도끼로 쪼개서 불을 피웠다. 불꽃이 한창 좋을 때 쯤 원주스님이 맨발로 쫓아 나왔다.

“이봐요, 객승! 불상을 쪼개서 불을 피우다니 미쳤소?”

이때 단하선사가 막대기로 재를 뒤지면서 말했다.

“목불을 다비(화장)해서 사리를 얻고자 해서입니다.”

원주스님이 다시 노발대발 말했다.

“정신이 나갔소. 목불인데 어떻게 사리가 나올 수 있겠소?”

“사리가 없다면 나무토막이지 어찌 부처라고 할 수 있겠소? 원주스님, 좌우 두 보처불(補處佛)도 마저 불 때 버립시다.”

그가 혜림사로 가서 목불을 쪼개서 불 피운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당시 낙양 일대는 많은 불교 종파와 사찰이 집중해 있었는데, 일년내내 수륙제, 천도재 등 각종 행사로 해가 저물고 있었다.

단하소불은 이에 대한 경종(警鐘)을 울려 주기 위한 의도된 행동이었다. 선불교가 율종 사찰로부터 독립하여 시주 단련을 하지 않고 울력으로 자급자족을 하고자 했던 이유도 당시 낙양 사찰들의 모습에 기인한다.

단하천연이 목불을 쪼개서 불을 땔 수 있는 행동의 사상적 바탕은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 그 사상적 정신적 뒷받침은 〈금강경〉, 〈화엄경〉, 〈유마경〉 등 대승경전에 바탕하고 있다. 그리고 문화적 뒷받침은 ‘중국문명의 자부심’ 즉 ‘중화주의’라고 할 수 있다.

‘단하소불(丹霞燒佛)’ 공안은 소설가 김동리의 ‘등신불’을 통해서 일찍부터 우리에게 알려진 문학작품이기도 하다. 필자는 15세 때 어느 스님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는 마음이 두근거린 적이 있어서 잊지 못한다.(출처 : 현대불교신문)

                       

생쥐를 잡는 나한상 부분

부석사 경내에 가장 높은 곳에 홀로 선 단하각에는 작은 나한상을 봉안해 놓았는데 왼쪽 무릎 위에 쥐 한 마리를 손으로 잡고 있는 형상이다.

봉황산의 봉황의 알을 쥐들이 훔쳐갈까 봐 단하각을 지어 나한상을 모셨다는 이야기와 영험한 봉황산에 모여든 무당들을 쫓아냈더니 쥐들이 들끓어, 단하각을 세웠더니 쥐들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출처 : 영주시민신문)

    

원융국사비각 ( 圓融國師碑閣 )

부석사원융국사비(浮石寺圓融國師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부석사로 345, 부석사경내 (북지리))

부석사 한켠에 지어진 비각 안에 놓여 있는 비로, 고려시대 승려인 원융국사 결응을 기리고 있다.

결응은 12세에 출가하여 복흥사에서 승려가 지켜야 할 계율을 받았으며, 28세에 대덕(大德:덕이 높은 승려를 가리킴)이 되었다. 고려 정종 7년(1041) 부석사로 들어와 화엄종의 법통을 이어받았고, 문종 7년(1053) 4월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왕은 그의 시호를 ‘원융’이라 내리었다.

비는 바닥돌 위에 거북받침을 마련하여, 비몸을 세운 후 머릿돌을 얹은 구조로, 거북받침은 원래의 것이 아니며, 비몸은 깨어지고 갈라져 있는 것을 이어 붙인 것이다. 바닥돌은 옆면에 안상(眼象)을 옅게 새기고, 그 안에 꽃무늬를 두었다.

거북받침돌은 많이 닳긴 하였으나 조각솜씨가 훌륭하며, 머리가 용 머리화 되었으나 마치 돌사자처럼 보인다. 등에는 선명한 6각무늬가 덮혀 있으며, 무늬마다 ‘王’자가 희미하게 보인다.

비를 세운 시기는 정확하지 않지만, 결응이 문종 7년(1053)에 입적하였으므로 그 즈음에 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비몸의 파손으로 첫머리와 끝부분의 비문내용을 살피기 힘드나,『조선금석총람』에 그 전체가 실려 있어 내용 파악은 가능하다.(출처 : 문화재청)

                

원융국사비圓融國師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