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인종대왕 태실』보물 지정 예고- 조선 12대 임금 인종(仁宗)의 태를 봉안한 태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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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6. 24.

문화재청(청장 최응천)은 2022년 6월 23일 경상북도 영천시에 위치한 「영천 인종대왕 태실(永川 仁宗大王 胎室)」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 예고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왕실의 자손이 태어날 때 태(胎)를 깨끗이 씻어 태항아리에 봉안하였다. 그 후, ▲ 태항아리를 봉안할 장소를 정하고, ▲ 궁궐에서 태를 옮긴다는 의미의 태봉출(胎奉出) 의례를 행한 후, ▲ 태항아리를 모신 행렬이 태봉지에 도착하면, 지방관의 지원을 받아 태를 봉안하였다.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조선 12대 임금인 인종대왕이 태어난 지 6년이 지난 1521년(중종 16)에 의례에 따라 건립되었으며, 태를 봉안한 태실(胎室)과 1546년(명종 1) 가봉(加封) 때 세운 비석 1기로 이루어져 있다. 인종은 임금으로 즉위한 이후 재위 기간이 짧아 곧바로 가봉하지 못하였다.

* 가봉(加封): 자손이 왕위에 오를 때 태실의 위엄을 더하기 위해 격식을 높이는 것

* 인종(仁宗): 조선 제12대 임금, 재위기간 1544년 11월 28일~1545년 8월 3일(음력, 9개월)

 

인종대왕 태실은 태실봉 정상부에 비교적 넓게 형성된 편평한 대지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시대 왕실 의궤에 묘사된 격식에 따라 전체 평면은 8각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앙에 태가 안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중동석(中童石)을 놓았다.

바닥에는 중동석을 중심으로 방사형의 판석이 여러 매 놓여 있으며, 태실의 가장자리에는 석조 난간을 둘렀는데, 이러한 형식은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태실의 양식이다. 가봉비(加封碑)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龜趺), 몸체인 비신(碑身), 비신 위에 놓인 장식인 이수(螭首)로 구성하고 있다. 비신 앞면에는 ‘仁宗大王胎室’(인종대왕태실), 후면에는 ‘嘉靖二十五年五月日建’[가정25년(1546년)5월일건]이라고 새겨져 있어, 태실의 주인과 태실비 건립 시기를 알 수 있다.

* 중동석(中童石): 태실 조성시 사용된 사각 받침석 위에 올린 동그란 돌

 

인종대왕 태실은, ▲ 1680년에 파손된 부분에 대한 수리를 거쳐 1711년에 태실비가 재건되면서 태실로서의 격식을 되찾았고, ▲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이 고양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이후 태실은 방치되었다가, ▲ 1960~70년대 매몰된 석재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 1999년 발굴조사를 진행하여 2007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원형을 회복하였다.

* 태지석(胎誌石): 태의 주인에 대한 인적사항이나 태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돌이나 도판

 

인종대왕 태실은 조선시대 태실 의궤에 따른 격식을 갖추고 있으며, 태실의 규모가 크고 석물의 치석기법이 우수하다. 또한 설치 과정과 내력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전해져,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기술적 가치가 높다. 태실은 가봉된 이후 파손된 적도 있었으나, 처음 설치되었던 원 위치에서 비교적 원형이 잘 유지되고 있으며,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볼 때, 인종대왕 태실은 국가지정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문화재청은 이번에 보물로 지정 예고한 「영천 인종대왕 태실(永川 仁宗大王 胎室)」에 대하여 30일간의 예고 기간 중 수렴된 의견을 검토하고, 문화재위원회 심의 절차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할 예정이다.

 

□ 종 별: 보물

□ 문화재명: 영천 인종대왕 태실(永川 仁宗大王 胎室)

□ 지정내용

ㅇ 지정현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현 영천치일리인종태실)

ㅇ 명 칭: 영천 인종대왕 태실(永川 仁宗大王 胎室)

ㅇ 소유자(관리자): 영천시

ㅇ 소 재 지: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산24번지

ㅇ 조성연대: 조선시대

ㅇ 구성형태: 태실 1기, 가봉비 1기, 기타 석재

ㅇ 지정면적: 40.74㎡(태실 38.37㎡, 비 2.37㎡)

ㅇ 구조/형식/형태: 석조/석실/석함 및 비석

ㅇ 재 질: 석재(화강암)

□ 지정사유

ㅇ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조선 왕실이 태를 봉송(奉送)하여 태실에 봉안하는 의례에 따라 1521년(中宗 16)에 처음 설치되었다. 이후 인종이 즉위하면서 1546년(明宗 1)에 가봉(加封)공사가 완료되었으며, 1680년(肅宗 6)에 개수되었고, 1711년(肅宗 37) 태실비에 대한 재건이 이루어졌다. 이후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전국에 소재한 54개소의 태실에서 태항아리와 태지석 등을 서삼릉으로 이안하고 석물을 폐기하면서, 영천 인종대왕 태실의 태항아리도 1928년 서삼릉으로 이안되었다. 이후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방치되었다가 1960~70년대 매몰된 석재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고, 1999년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이후 2007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정비되었으며, 현재는 태실 1기, 비 1기 및 기타 석물로 이루어져 있다.

ㅇ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위에서 볼 때 8각형의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주변에 난간석을 두고 중앙에 태가 안치된 승탑(僧塔)형태의 중동석(中童石)이 놓여 있다. 중동석은 연화문(蓮花紋)으로 장식된 네모난 큰 돌 위에 놓여 있으며, 중동석 위에는 두툼한 처마를 지닌 옥개석 형태의 개첨석(蓋檐石)을 얹었다. 개첨석 위에는 연주문(蓮珠紋)이 2단으로 장식된 보주(寶珠)를 올렸다. 중동석 주변으로는 여러 매의 방사형(放射形) 석재를 놓아 8각형의 평면을 구성하고, 바깥 주변으로 석조 난간을 둘렀다. 전면에 위치한 가봉비(加封碑)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인 귀부(龜趺), 비신(碑身) 그리고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다. 비신의 앞면에는 ‘仁宗大王胎室’, 후면에는 ‘嘉靖二十五年五月日建’(1546년)이라고 새겨져 있어, 태실의 주인과 태실비의 건립 시기를 알 수 있다.

ㅇ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설치 과정과 내력을 알 수 있는 관련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게 전해지고 있으며, 전체적인 조영기법과 구조 등은 조선왕실의 태실 의궤의 내용에 부합된다. 또한 태실과 태실비의 전체적인 조영기법이 우수하며, 태실을 구성하는 석물의 세부 치석이나 장식기법이 정연하고, 문양과 조각 기법이 우수하여,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기술적 가치가 높다고 평가된다.

ㅇ 『영천 인종대왕 태실』은 처음 설치된 이후 원 위치를 유지하고 있으며, 전체적인 구성과 입지 등은 원래의 조영 의도와 가치를 보존하고 있다. 또한 태(胎)를 안치하는 당대의 문화적 전통을 잘 반영하고 있으며, 현존하는 조선왕실의 태실 가운데 규모가 크고, 문화유산으로서 지녀야할 보편적 가치와 함께, 완전성과 진정성도 구비하고 있어,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될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

 

영천 치일리 인종태실(永川治日里仁宗胎室)

- 2009. 12. 7. 답사 -

운부암. 중암암. 은해사 삼거리에 있는 이정표

 은해사.운부암.중암암 삼거리(신일지 못뚝. 인종태실 이정표(안내판))에서 인종태실 가는 길

(다음 지도 스카이뷰에서 캡쳐)

인종태실 올라가는 길

영천치일리인종태실(永川治日里仁宗胎室.시도유형문화재 제350호 (영천시).경북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산24 )

인종태실은 중종 16년(1521)에 조성되었다. 이후 인종이 죽고난 후 명종1년에 가봉(加封) 공사가 있었고 숙종 37년(1711)에는 수개(修改)가 있었다.

1928년에 일제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태실의 관리가 어렵다는 명목을 내세워, 54기의 태실을 경기도의 서삼릉으로 이봉하였는데, 이때 인종태실도 태호(胎壺)를 경기도 서삼릉으로 이봉하였다. 이때 옮겨진 것은 태항아리, 지석 1점 등이다.

현재 남아있는 석물은 귀롱대와 가봉비를 비롯한 석물들이 완형 혹은 파손되 상태로 남아있다. 인종태실은 가봉된 다른 어떤 태실보다 그 규모가 크고 각종 석조물의 장식이 화려하며 웅장하다. 또한 조성연대가 분명하여 태실 조성양식과 조각기법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문화재청 자료) 

인종(仁宗, 1515-1545. 재위1544 ~1545)은 조선의 제12대 임금. 중종의 장남으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며, 비는 첨지중추부사 박용(朴墉)의 딸인 인성왕후(仁聖王后)이다

인종의 태실은 산중돌혈(突穴)의 전형적인 형태로 조선의 왕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로 조성됐다
복원전 귀부 모습(문화재청 사진)
복원전 이수 모습(문화재청 사진)

    복원 후 남은 석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