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6. 5. 12:35

 

어느새 아련해진 고향

 

얼마 전의 극장가에 <워낭소리>가 단연 화제였다. 저 예산 독립영화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제치고 연일 최대의 관객을 끌어들이기 때문이었는데, <워낭소리>가 인기몰이를 한 이유를 분석할 능력이 없지만, 경제와 정치, 그리고 이웃에게 소외돼 한없이 고독한 시민들에게 아련했던 고향의 푸근함이 가슴 절이게 전달된 게 원인의 하나가 아니었을까.

 

<워낭소리>의 인기가 폭발하자 부작용도 생기곤 했다. 할리우드 영화에 대해 토 달지 않던 이도 독립영화가 벌어들인 돈의 알량한 액수를 천박하게 추측하고 불법으로 영화의 파일을 만들어 돌린 인터넷 공간의 소영웅주의도 철딱서니 없었지만 정작 터무니없는 부작용은 영화의 무대가 된 지방자치단체의 행태에서 나왔다. <워낭소리>의 배경이 된 노인의 농가를 관광코스로 개발하겠다는 발상이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서도 철회되지 않았던 거다.

 

고향의 아늑한 정취나 풍경은 영화의 화면에 충분히 녹여냈는데, 생면부지의 외지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들여다보는데 진저리치는 노인을 무슨 호기심으로 구경하러 가겠다는 거였을까. 제발 참아달라고 이충렬 감독이 여러 차례 당부한 바 있지만, 막무가내였다고 한다. 굳이 찾아가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며 노인에게 농을 던지는 이도 얄밉기 짝이 없는데, 관광버스로 몰려가려고 했다니. 그 지방자치단체가 생각하는 고향이라는 게, 그저 원숭이 바라보듯 사진 찍고 휑하니 지나가면 그뿐인 앵벌이에 불과했던가. 노인과 기념사진 촬영하고 싶은 이가 한둘 아니었을 텐데, 새로 들인 황소를 끌며 논일과 밭일하는 모습을 박제처럼 카메라에 담겠다는 거였을까. 고향은 뿌리내리는 곳이지 구경거리가 아니건만.

 

해마다 두 번 씩, 전국 고속도로는 귀성과 귀경차량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찾아갈 고향이 있다는 거. 생각만 해도 가슴 설레는 일인데, 역귀성 차량이 점차 급증하는 세태를 맞아 언제까지 그런 현상이 지속될 수 있을까. 설날이나 추석이 아니라도 마음먹으면 언제라도 다녀올 수 있는 조그만 땅덩어리에서 고향은 사실 그리 멀지 않다. 머지않아 고속전철이 전면 개통되면 점심 때 부산 근처의 고향에 모였다 저녁은 수도권의 집에서 각자 해결할 수 있겠지만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건, 회색도시에서 심신이 지쳐 고향에 대한 애틋한 기억마저 퇴색되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직 고향을 떠나지 않은 어떤 시인은 “그리운 것은 산 뒤에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틈 날 때마다 거울보고 여드름 짜던 이웃의 누님도, 보리밥 한 사발을 얻어먹고 방귀를 연실 뀌어대던 형님도 마을에 없다. 모내기 마친 어른들이 돼지 잡으며 떠들썩하던 모습은 오간데 없고, 여름철 멱 감던 시내도 겨우내 썰매 따던 무논도 적막하기만 하다. 아기 울음소리마저 사라진 고향에 도무지 사람이 없다. 아스팔트가 동네를 끊고 가로지른 이후 시도 때도 없이 몰려드는 도시의 자동차는 한집 걸러 초상 치르게 했다. 이제 몸은 남아 있어도 고향은 아련해졌다. 그리운 고향은 저 산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사이코패스의 원천

 

최근 우리 사회에서 사이코패스가 새삼스러워졌다. 제 터전에 남으려는 이와 그들을 몰아내려는 경찰의 충돌로 6명의 목숨이 처참하게 희생된 용산사태를 의도적으로 희석시키려고 청와대에서 활용하려했다는 의혹이 짙은 강호순 사건이 기폭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이전의 유영철과 지존파 사건들을 떠올리고 외국의 사례까지 긴급 편성한 언론들은 사회가 각박해지면서 증가한 사이코패스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데 어느 정도 기여했지만 그 원인에 대한 근원적 분석에 인색했다.

 

범죄의 잔인함에 혀를 내두른 언론은 겉은 멀쩡하면서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반사회적 성격장애자’를 전문가의 정의를 빌려 사이코패스라 한다고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사회생활이 깍듯한 까닭에 주변 사람은 그에게 범죄 충동이 잠재되었다는 걸 전혀 짐작할 수 없지만 그런 자일수록 저지르는 범행이 끔찍할 때가 많다고 덧붙였다. 그렇다고 예의바른 이웃을 사이코패스로 단정할 수 없는 노릇인데, 요즘 세상에 사이코패스가 자주 나타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그 방면에 과문해 추론할 능력이 없지만 분명한 것은 고향에 뿌리를 남기고 있던 시절, 그런 사회 병리현상은 벌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빤히 바라본다는 이유로 다짜고짜 칼부림이 벌어지는 곳은 어김없이 도시다. 녹지 공간이 태부족한 도심의 빌딩 뒷골목일수록 버젓이 발생한다. 덩치 큰 후배에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왜소한 중학생이 지나가는 초등학생을 불문곡직 두드려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도 도시의 후미진 곳에서 발생했다. 술집에서 드잡이하는 풍경이 낯설지 않은 도시는 낯선 이로 가득한 익명의 공간이다.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내리라는 운전기사를 마구잡이로 때려 심장 패혈증으로 사망케 한 최근의 사건은 만취한 초급장교의 소행이었다. 깨웠다는 이유로 제 아비보다 나이든 이를 때리는 젊은이의 무도함. 사이코패스가 배양되는 도시의 익명성이자 자화상이다.

 

온수배관의 물이 아래층으로 새야 비로소 현관을 노크하는 공동주택에서 주차 문제로 멱살잡이는 가능해도 이웃에 대한 애틋함은 배어날 수 없다. 걸어 잠그고 외출하면 그만인 아파트에서 앞집에 누가 사는지 그들의 희로애락이 무엇인지 거주 기간과 관계없이 알기 어렵다. 함 팔러왔다고 외치는 신랑 친구들을 향해 베란다 열고 시끄럽다며 욕설해대는 동네에서 정다운 이웃을 찾기 어렵다. 1층에서 20층, 30층, 심지어 80층까지, 익명의 밀집 공간이 뿌리 없이 둥둥 떠 있는 공간 구조에서 공동체의 가치는 실현되기 어렵다.

 

흙이 사라진 도시에서 뿌리내리기는 쉽지 않다. 모든 걸 돈으로 환산하는 도시에서 보살핌도 서비스 산업이 되었다. 아기는 산후조리원에 맡겨야 하고 노인은 실버타운에 의뢰하는 편이 서로 속편하다. 요즘 이삿짐을 친구와 꾸리고 나르는 시대착오적인 이웃을 찾기 어렵지만, 익명의 사회에서 선의는 화근을 자초할 수 있다. 이삿짐을 날라준 아이 친구들에게 맥주 마시라며 금일봉을 전달하는 모습이 폐쇄회로 카메라에 잡힌다면 당장 민사소송이 들어올지 모른다. 이삿짐센터의 업무를 방해한 게 아닌가. 목욕탕에서 낯모르는 이웃의 등 밀어주고 내 등 슬며시 돌려대는 일은 이제 미풍양속이 아니라 피차에 낯붉히게 만드는 결례가 되었다.

 

 

소통을 잃은 도시

 

백화점 명품매장을 구경한 적이 없어 그런 곳을 어슬렁거리는 소비자의 행태를 짐작하지 못하지만 명품이라는 벼슬을 쓴 물건은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의 행복과 무관할 것 같다. 품질보다 상표, 실용보다 과시를 위해 만든 물건은 익명사회에서 천박한 가치를 잠시 발할 뿐, 개성을 속속 깊이 이해하는 이웃이 서로 배려하는 공동체에서 거추장스러울 것이므로. 소비자의 자극적 취향에 배타적으로 봉사하는 고가 상표의 물건은 위화감을 촉발할지언정 사회에 대한 연대나 책임의식과 관계가 거의 없을 것이다. 팔면 끝인 상품일 뿐이다.

 

한 경제학자는 일반 시민이 느끼는 소득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전한다. 소득이 미화 1만 달러까지 오르는 동안 사바세계의 행복은 대체로 비례하지만 소득 1만 달러를 넘으면 정체되던 행복이 4만 달러가 넘어서면서 오히려 줄어든다는 것이다. 필요보다 과시, 과시보다 질시가 소비를 부추기는 까닭이란다. 이른바 명품이라는 물건들이 그런 천박한 소비의 경쟁을 부추길 텐데, 최근 시민의 의지를 묻지 않고 도시축전을 준비하는 인천은 온통 ‘명품’ 타령이다. 명품이라. 역사와 문화가 삶 속에 뿌리 내리고 이웃 사이에 우정이 숨 쉬는 공동체를 지향해야 할 도시가 과시를 목적으로 하는 한낱 상품이 되었다. 도시는 투기장이고 시민은 익명의 소비자인가. 투기장이 된 도시에서 시민들은 뿌리 내리지 못한다. 정주의식은 싹트기 어렵다.

 

먹고 튄다고 해서 이름붙인 이른바 ‘먹튀현상’은 헐값으로 인수한 은행을 고가로 팔고 나가면서 세금 한 푼 내지 않은 외국의 투기자본에 한정되지 않는다. 익명의 도시에서 먹튀현상은 아주 자연스럽다. 투기 목적으로 거래되는 아파트가 대개 그렇다. 프리미엄을 노리는 전매가 횡행하는 분위기에서 실수요자의 고충은 배려되지 않는다. 먹고 튀면 그만이다. 주택경기라는 신기루는 대개 먹튀현상을 기반으로 유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통이나 학군의 차별성은 물론이고 수려한 조경이나 따사로운 햇살은 주거보다 프리미엄의 조건일 따름이다. 그런 주택에서 가슴 따뜻한 이웃을 만나기 어렵다.

 

주거 시설이 오래되면 많은 주민은 재개발을 원하는데, 기준은 단연 부가가치다. 재개발할 때 포함되는 공간이나 시설은 주민 사이의 소통과 거리가 멀다. 내 집의 가격이 상승되는데 기여할 것인가를 면밀하게 따질 뿐이다. 건물의 남은 수명과 관계없이 다세대주택과 저층아파트는 고층으로, 고층아파트는 초고층을 지향한다. 부식된 배관과 구식 전기통신 설비를 교체하거나 건물의 내부를 수선하면 얼마든지 더 지낼 수 있건만 그건 고려 대상이 아니다. 오로지 유명 건설회사의 상품명이 아로새긴 명품 아파트로 재개발하길 바란다. 재개발하면 떠날 수밖에 없는 세입자의 고충은 당연히 아랑곳하지 않는다.

 

익명의 사회는 범죄의 온상을 제공하니, 은행은 물론이고 현금지급기와 아파트 주차장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야 안심이 된다. 그렇게 감시가 번득이지만 범죄는 줄어들지 않는다. 옆 사람의 숨소리가 들리는 지하철이든, 옷깃이 부딪히는 양판점의 지하 식품매장이든, 민원인이 몰리는 관공서든, 눈에 띄는 이는 대개 낯설다. 건물이 높은 만큼 그늘이 깊은 회색도시가 그렇다. 위아래는 물론 앞집과 인사가 없는 도시의 주거공간도 마찬가지다. 익명의 사회에서 마음 터놓고 지낼 이웃을 만나기 어렵다.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몰려다니지만 눈길을 서로 외면하는 사람들은 이웃의 관심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도시에서 작은 공동체를

 

싫든 좋든 수많은 시민들이 머물 수밖에 없는 곳이 도시라면, 소통을 배려하는 생태적 공간을 곳곳에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시민들은 자신이 사는 도시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비로소 마주보게 된다. 더 근사한 상품이 출시되는 순간 가치를 잃고 마는 명품보다 역사와 문화가 보전되는 도시에서 시민은 정주의식을 함양하게 된다. 꽁꽁 닫힌 아파트에서 마음 맞는 이에 인터넷으로 접속하기보다 실제 공간에서 이웃과 반갑게 만날 수 있는 도시라야 시민들은 숨쉴만하다. 바로 다양성이 소통되는 생태도시다.

 

뒷골목에서 서로 외면하던 사람들도 나무가 우거진 숲이나 잔디가 펼쳐진 녹지에서 이웃과 눈길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하게 된다. 그때 이웃의 나이나 성별, 외양의 행색은 그리 문제되지 않는다. 아이나 애완동물이 매개하여 두 번, 세 번 눈인사 나누면 친해지고, 친해진 이웃은 직장이나 아파트의 차이, 월급 높낮이나 아파트 평수를 비교하기보다 같은 취미나 관심사로 끈끈한 우정을 유지한다. 도시 곳곳에 마련된 녹색공간도 시민의 훌륭한 소통공간이 된다. 그런 공간이 많은 도시일수록 범죄 발생이 적다. 마음을 나눌 이웃이 자랑스러운 시민은 정든 도시를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도심에 녹지가 풍부할 뿐 아니라 시민에게 텃밭을 저렴하게 임대해주는 유럽의 많은 도시들이 그렇다. 그런 도시의 시민들은 자긍심을 주는 자신의 마을을 외관이 명품이라며 과시하지 않는다.

 

거품이 꺼지면 부담으로 남는 주거공간을 공동체로 가꿀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 투기를 조장하는 건설업체의 감언이설에 속아 창문너머 냄비 주고받던 다세대주택을 허문 자리에 세입자 내쫓는 고층 아파트를 천편일률적으로 줄 세우기보다 세입자도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소통 공간으로 꾸밀 방안을 머리를 맞댄 이웃들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논의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무척 어렵고 고단한 시간이 흐를지라도 세입자는 물론이고 다음세대도 당연히 포함된 이웃이 제안한 다양한 의견을 함께 검토하고 수정하면서 합의에 이른다면 그 논의과정에 참여한 주민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열린 공동체를 가꿀 수 있을 것이다.

 

요사이 프리미엄에 눈먼 초고층이나 고층아파트는 이미 틀렸다. 명품이라 거들먹거리는 재개발은 소통하는데 관심이 크지 않을 것이니 일단 생각을 접기로 하자. 헐어내야 할 정도로 낡은 아파트나 다세대주택부터 떠올려보자. 주민들은 문 닫힌 고층아파트에 비해 잘 알고 지낼 뿐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조금이나마 도와주려 노력해왔을 것이다. 그들 스스로 자신의 마을을 소통이 활발한 공동체로 바꾸면 어떨까. 가족과 부부의 독립 공간을 배려하면서 이웃과 어울리는 공간도 어느 정도는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노력하기에 따라 난방과 전기와 물 소비를 줄이거나 효율화하는 친환경적 도시 공동체로 얼마든지 승화할 수 있을 텐데.

 

 

마을에 뿌리 내리기

 

언젠가부터 골프장 반대운동이 어려워졌다. 환경단체에서 지원하려해도 환영받지 못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뼈를 묻을 고향을 더럽힐 수 없다는 촌로들이나, 지하수가 고갈되고 지독한 농약으로 농사짓는데 불편을 주는 골프장을 동네에 들어오게 할 수 없다는 청장년들의 움직임이 전처럼 감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골프장을 유치하려는 주민들이 ‘빨갱이’ 취급하며 환경단체를 경원하는 분위기가 완연할 때가 많다. 팔고 뜨면 그뿐인 부동산으로 고향이 버림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억측일까.

 

뼈 빠지게 농사지어도 남는 것은 빚이니 보람을 찾을 수 없다. 선조가 물려준 내 땅에서 여전히 농사짓지만 법적 소유는 이미 외지인의 수중에 넘어간 마당이다. 일찌감치 도시로 떠난 아이들은 명절이 아니면 얼씬도 하지 않는다. 사업에 실패한 큰아이를 생각해서 시세보다 더 쳐주겠다는 골프장 사업자에 마음 빼앗기는 노인들이 남은 땅 넘기고 속절없이 떠나는 시골일수록 고향의 정취는 예전 같지 않다. 이제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농촌에도 골프장이 수두룩하다.

 

고향을 잃는 마음은 휑하다. 돌아갈 곳이 없다. <워낭소리>는 뿌리 뽑힌 우리의 마음을 적셨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주인공 스카렛 오하라로 분한 비비안 리의 마지막 멘트, “내겐 타라가 있다!”에서 타라는 고향, 자신의 뿌리인 땅이다. 경제 위기를 맞아 낙담하거나 분노하기 전에 고향을 떠올리고, 찾아가 뿌리내리는 걸 고민하면 어떨까. 도시의 익명성을 치유하는 방법은 없을까. 담장을 헐어낸 자리에 긴 의자와 작은 원탁을 놓고 이웃과 찻잔 기울이는 마을을 도시에서 만들어갈 수 없을까.

 

대구에서 비롯돼 전국의 도시로 확산된 마을의 ‘담 허물기 운동’이 최근 위기를 맞았다고 한다. 재개발 투기 열풍이 모처럼 뭉친 이웃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는 거다. 그렇다면 흩어졌던 이웃을 다시 모이도록 마을을 재개발할 방법은 없을까. 집주인은 물론, 세입자도 소외되지 않는 공동체를 익명의 도시에 지친 시민들의 마음을 모아 만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마음만 모은다면 나무와 꽃도 심을 정원과 간단한 채소를 나눌 수 있는 텃밭도 얼마든지 조성할 수 있을 텐데.

 

텃밭은 어떤가. 텃밭과 녹지는 물론이고 작은 도서관과 회의실을 겸한 식당과 놀이터와 노인정을 두루 갖춘 작은 마을을 도시 곳곳에 만든다면 이웃사촌이 생긴 아이들은 더는 제 방에 갇혀 컴퓨터게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사소한 일로 낯붉히며 싸우는 이웃은 줄어들 텐데. 정주의식이 높아진 시민들은 이사 가고 싶지 않을 텐데. 천박한 명품을 과시하기보다 개성을 배려하는 이웃을 자랑스러워할 텐데. 그 모든 게 모이면, 참여로 한층 끈끈해진 공동체에서 민주주의는 꽃을 피울 텐데.

 

옛말에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다. 만나면 웃으며 인사 나누던 이웃을 해코지하려는 이는 매우 드물다. 이웃과 일구거나 가꾼 정원에서 찻잔을 기울이는 동네에 사이코패스와 같은 범죄자가 발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어려운 일을 나누며 소통할 테니까. 요는 뿌리내림이다. 땅에 뿌리내린 삶은 이웃의 삶을 배려한다. 이웃에는 조상이 물려준 문화와 역사, 후손의 행복한 삶이 마땅히 포함된다. 사이코패스는 뿌리 뽑힌 삶이 만들어낸 필연적인 자해다. 뿌리내리는 삶, 더는 미룰 수 없는 이 시대의 치유책이 아닐 수 없다. (인천문화비평 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