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10. 11. 12:13

 

지금은 많은 조합원이 활발하게 움직이지만 첫 문을 열 때 참 초라했던 인천의 한 생활협동조합이 연수구에 있다. 그 조합을 정착시키는데 무척이나 애를 썼던 어떤 목사는 지금은 강화에서 유기농을 고집하는 농사꾼이 되었다. 아이들에게 독이 들어간 음식을 줄 수 없다는 신념의 연장선이었는데, 그는 같은 신념으로 닭을 키운 적 있다. 알 낳는 효율이 떨어졌다고 양계장에서 내다버린 생명이었다.

 

4층 이상으로 쌓인 철망상자에 24시간 갇혀 항생제와 여성호르몬이 섞인 사료와 물을 먹으며 계란만 낳아야 하는 닭은 깃털이 거의 다 빠진 채 제명에 훨씬 못 미친 상태에서 죽어버리고 만다. 기진맥진해 숨넘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알 낳는 효율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인부의 억센 손아귀에 잡혀 계사 밖의 구덩이로 다짜고짜 던져져 죽는다. 차가운 공기에 갑자기 노출된 쇼크로 죽거나 사나운 이빨을 드러낸 개들에 물어뜯겨 죽는 건데, 강화의 농사짓는 목사는 하필 그 닭들을 걷어 마당에서 다시 키웠다.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를 잠시 만끽하다 망가진 몸을 미처 추스르지 못해 죽는 닭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 깃털이 새로 나오며 금방 활발해졌다고 했다. 가는 철망보다 흙 마당에 어울리는 발을 가진 닭들은 처음 서로 쪼아대며 서열을 정하더니 흙을 파헤치며 활발하게 벌레를 잡아먹기 시작했고 수컷의 휘하에 편입돼 영양분은 물론 껍질까지 튼실한 유정란을 낳더라는 게 아닌가. 밤낮 없는 실내 계사의 비좁은 철망 속에서 먼지와 악취에 절었다 자연으로 풀려나오자 억압되었던 본성을 비로소 되찾은 것이리라.

 

그 닭을 키우는데 인천의 일부 시민들도 한몫했다. 마당의 채마밭과 풀숲에서 쪼아먹는 벌레만으로 부족하니 모이를 별도로 주어야했는데, 유전자를 조작한 게 분명한 수입 사료는 싫어 도시인의 가정에서 발생하는 음식 찌꺼기를 내준 것이다. 강화의 목사에게 제 집의 음식 찌꺼기를 보낸 시민들은 가족과 강화로 가서 계란을 가져갔다. 닭이 뛰노는 마당에 둘러앉아 짚으로 꾸러미를 만든 뒤 나누었던 건데, 아쉽게도 그 실험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무리 뜻이 좋아도 개개의 시민이 음식 찌꺼기와 계란을 가지고 꾸준히 왕복하기에 인천과 강화는 거리가 너무 멀었기 때문이었다.

 

지금 그 목사는 닭을 키우지 않지만 계란 이외의 농약 대신 땀으로 생산한 농산물들을 중간상인의 개입 없이 시중보다 저렴하게 도시의 아이들에게 직접 전달하는 운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 같은 뜻을 가진 농사꾼들이 의기투합해 이룬 성과인데, 한 개인의 끊임없는 노력이 그렇게 빛을 발한 것이다. 만약 생활협동조합이 팔 걷어붙이고 나섰다면 도시의 음식 찌꺼기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결하던 그 특별한 계란은 시골과 도시의 거리를 좁히며 찾아오는 도시의 아이들에게 고향의 정취까지 심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초심을 잃지 않는 생활협동조합이라면 다음세대와 땅의 건강을 도모하는 사업의 범위를 적극적으로 확대할 필요가 충분하게 있지 않을까 싶다.

 

소비처와 가까운 곳에서 농사를 짓는다면 농작물의 이동은 물론이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도 짧아진다. 이른바 ‘푸드 마일리지’가 짧은 농산물, 다시 말해 ‘로컬푸드’다. 대개의 로컬푸드는 농약 사용을 자제할 뿐 아니라 이동하는데 들어가는 화석 연료가 아주 적거나 아예 없다. 그만큼 친환경이다. 지구온난화와 에너지 위기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농업이다. 그런 맥락으로, 푸드 마일리지가 긴 농작물은 농약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유기농이 아니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손수레로 이동할 수 없을 정도로 떨어진 곳에서 생산한 농작물은 유기농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렇다면 배나 비행기로 수입된 유기농산물은 높은 가격의 화려한 상표와 관계없이 결코 유기농일 수 없을 것이다.

 

엄밀한 기준을 적용한다면 로컬푸드는 제 지역 뿐 아니라 제철에 생산해 먹는 농산물이어야 한다. 비닐하우스나 온실에서 제 철 이전에 생산한 농작물이나 냉동창고에서 제 철 이후까지 저장한 농작물은 불필요한 화석에너지를 소비했으므로 유기농산물의 범주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소비자는 로컬푸드 생산지를 지나다니면서 재배되는 과정을 눈으로 보며 수확할 때를 손꼽아 기다리게 될 테고, 수확의 기쁨을 생산자와 그때마다 나눌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우리 도시에서 로컬푸드, 다시 말해 제 철 제 고장 농산물을 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도시농업이 그 대안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주변에서 햇빛에 노출된 흙을 드물지 않게 찾을 수 있는 쿠바의 수도 아바나는 집이나 동네의 자투리땅에 자그마한 농장을 만들어 과일과 채소의 자급자족을 꾀하고 있다. 그들의 농작물은 농약이 없어서라기보다 직접 재배했으므로 안전하고, 농작물을 심은 땅도, 그 농작물을 먹는 이의 몸도 건강하다. 그에 반해 우리의 도시는 구조적으로 도시농업이 활발해지기 어렵다. 아파트와 다세대주택이 마당이 있던 단독주택을 밀어낸 도시는 농사를 원천적으로 거부한다. 눈에 띄는 주변의 바닥이 온통 콘크리트나 아스팔트가 아닌가. 게다가 도시농업의 가치를 인식하는 시민도 그리 많지 않다. 동네에 섣불리 밭이랑을 팠다가 이웃 사이의 갈등으로 민원이 생길 소지가 다분하다.

 

조건이 비록 열악하지만 그렇다고 도시농업이 우리나라에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울타리 쳐진 개발 예정지에 슬며시 들어가 “사유지이므로 농사짓지 말라!”는 팻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밭을 일구거나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자연공원 구석에 푸성귀를 심는 이도 없지 않지만 단독주택의 현관 앞 작은 마당이나 옥상, 심지어 아파트 베란다에 나란히 놓은 화분이나 상자에 흙을 담아 몇 가지 채소를 재배하는 시민도 분명히 있다. 하지만, 음식 쓰레기를 먹여 얻는 지렁이 분변토를 산에서 떠온 흙에 섞는 성의를 다한다 해도 이른바 ‘상자농업’은 꾸준히 농사짓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육식은 거의 불가능하고 재배할 수 있는 농작물의 양이나 종류가 한정되니 자급자족은 언감생심인데, 그나마 일상에 치여 일회성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도시농업의 한계가 분명한 우리 사회에서 로컬푸드는 그 도시와 가장 가까운 농촌에서 대안을 찾을 필요가 있다. 생활협동조합은 물론이고 대형마트의 식품매장이나 동네의 재래시장도 가까운 농촌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특별하게 취급해 소비자에게 공급하도록 하는 운동을 전개하는 거다. 물류체계를 정비한다면 비용이 절약되는 만큼 소비자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고, 어디에서 어떤 방법으로 누가 언제 생산했는지 아는 만큼 안심할 수 있으며, 화석연료의 사용이 줄어드는 만큼 환경에 유리할 수 있다.

 

로컬푸드의 활성화를 바란다면 단체 급식의 식재료를 로컬푸드로 공급하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교육 목적으로 운동장 한쪽에 농토를 만드는 학교를 포함해 도시의 각 급 학교들이 가까운 농촌과 관계를 맺고 급식의 식재료를 로컬푸드로 대체한다면 학생과 교직원의 건강은 물론이고 땅도 살고 교육 효과도 챙길 수 있을 것이다. 일손이 부족할 때 도와준다면 내가 먹는 밥이 어떻게 식탁에 오르는지 이해하며 농민에게 고마운 생각을 품게 될 것이다. 기업이나 공장, 관공서나 종교단체의 식당도 로컬푸드로 가까운 농촌과 관계 맺을 수 있다. 식구와 가끔 찾아가 일손을 도우며 고향의 정취를 구하는 도시인은 신선한 공기를 맡으며 농촌에서 지친 몸에 재충전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이언스올, 20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