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2. 12. 5. 00:51

    내년 김장도 올해 같기를

 

하늘이 파랗다. 분명 11월이건만 주말마다 비가 내렸는데, 모처럼 구름 한 점 없다.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농사를 가르치는 장 선생은 정작 자기 밭의 수확과 파종이 늦어 안타까워하던데, 주말농장을 다니는 이도 오늘 같은 가을을 기다렸으리라. 주말농장이야 잘 여문 배추와 무를 뽑으면 빈터로 한겨울을 보내겠지만, 장 선생의 밭은 오늘 양파와 우리밀이 가지런히 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농약 전혀 없는 빵과 튼실한 양파를 내년이면 맛보겠지.


밖으로 열리는 유리창에 성에가 좀처럼 끼지 않는 도시에서 시민들은 희한해하겠지만, 갈무리를 마친 농경지에 하얀 서리가 아침이면 내릴 것이다. 배추와 무는 커다란 트럭에 실려 도시의 농산물시장으로 떠났으니 바야흐로 김장철이 되었다. 마당이 없는 도시는 김장독을 대신하는 냉장고를 비워둘 테고, 농민들은 주문에 맞게 배추를 소금에 절여놓을 것이다. 염전은 여름 땡볕에서 굵은 땀방울을 연실 흘렸고, 어부들은 가을에 잡아올린 새우들을 충분히 염장했을 것이다.


어려서 본 김장은 일종의 축제 같았다. 가깝게 지내는 이웃 사이에서 기대에 찬 우리는 마냥 즐거웠다. 집안의 추레한 모습을 가리는 담장의 높이만큼 쌓아올린 배추는 근 200포기는 되었던 거 같다. 남자들은 김장독을 묻으면 그만이었는데, 여자들은 바빴다. 절이고, 무 채 썰고, 양념 준비하고, 양념과 버무린 무채를 배춧잎 사이에 넣고, 깊은 김장독에 차곡차곡 김치를 넣어 뚜껑을 닫는다고 일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뒷정리도 많았지만, 아까부터 기다리는 남자들에게 소주에 곁들인 보쌈을 내놓아야 했다. 마냥 뛰어다니던 아이들에게 몇 점 먹였고.


그때 대부분의 가정은 12월 중순에 김장을 했는데, 요즘은 11월 찬바람이 불면 시작한다. 양념과 젓갈류는 물론 배추와 무도 시장과 쇼핑몰의 식품매장에 사시사철 준비돼 있지만, 무엇보다 김치냉장고가 있으니 계절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역시 김장은 김장철에 해야 제 맛이다. 김치에 깃드는 유산균도 계절에 따라 다른 건지, 보통 한두 포기, 많아야 예닐곱 포기에서 그치는 김치는 아무리 맛이 좋아도 김장김치 같지 않다. 북적거리며 준비하는 분위기에서 기대가 증폭돼 그랬을까. 마치면 한겨울이 넉넉해져 그런 건 아닐지.

 


과학기술이 개입하는 우리네 요즘 김장

 

몇 해 전인가. 늦은 겨울 강화의 한 호텔에서 회의를 할 때였다. 저녁 만찬에 나온 순무김치는 특별했다. 순무 사이에 간간이 보이는 밴댕이는 강화 특유의 향취를 입 안 가득 전해주었다. 김장철에 밴댕이는 잘 잡히지 않지만 그래도 갯벌이 넓은 만큼 없지는 않을 터. 속알지를 때내고 머리를 잘라낸 밴댕이를 순무김치와 버무리면 봄철 입맛 돋게 하는데 그만이었을 것이다. 특히 강화에서.


순무는 강화에서 재배해야 독특한 향이 분명해지는데 밴댕이가 많이 잡히는 곳이라서 그런가, 가을 밴댕이는 꼭 순무에 넣었다. 밴댕이가 적당히 발효된 순무김치 맛이 얼마 전까지 강화를 대표할 수 있었는데, 인천은 갈치를 김장배추에 버무려 넣었다. 지금이야 제주도 인근 바다에서 커다란 상태로 잡아 올리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인천 앞바다에 갈치가 흔했고, 살을 발라내기 어렵게 작은 갈치는 그대로 토막을 내 양념에 넣었다. 2월 김장독 깊은 곳에서 꺼낸 김치 사이에서 찾아내는 갈치는 쫀득쫀득, 바다가 살아 있음을 단박에 알려주었는데, 갯벌이 거의 사라진 지금은 아니다.


취향에 따라 다소 다르겠지만, 요즘 인천에서 담그는 김장의 젓갈은 다채롭지 않다. 가을에 잡은 새우로 만든 추젓이나 1년 이상 백령도나 대청도 인근에서 숙성한 까나리액젓이 주종을 이룬다. 까나리액젓은 최근 일이고, 육젓은 전부터 김장에 넣었는데, 매립이 광범위하게 진행된 인천 앞바다는 갯벌만 잃은 게 아니다. 모래도 막대하게 사라졌다. 수도권의 하늘 모르게 치솟는 건물을 위해 퍼올려진 모래의 양이 어마어마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모래는 매립하는 갯벌의 위에 쏟아 부어졌다. 그래서 모래가 쓸려나간 해안은 좁아지고 방풍림은 뿌리를 드러냈으며 세계적으로 인천 이외에 그 유래가 없는 풀등도 자취를 잃어간다. 바닷물이 썰어 낮아져도 모래가 나타나지 않는 거다. 그러자 새우가 전처럼 잡히지 않는다.


바닷모래로 세워 올린 아파트마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인천에 인구는 급증했고 그들 모두 김장을 담근다. 새우젓이 그만큼 필요하다는 뜻인데, 갯벌이 명맥만 유지하는 소래포구에 넘쳐나는 새우젓은 어디에서 왔을까. 새우젓만이 아니다. 인천 앞바다에서 드물어졌거나 아예 잡히지 않는 생선과 여러 젓갈들이 승용차 몰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화려하게 유혹한다. 바닷모래가 넉넉했던 덕적도 인근에서 주머니 긴 그물로 연실 잡아올리던 새우들은 어느새 추억이 되었건만 소래포구와 연안부두는 새우젓을 산더미처럼 쌓았고, 강화는 해마다 새우젓 축제를 준비한다.


과학기술 덕분이다. 인공위성으로 새우 집단을 미리 파악할 수 있는 동력선과 잡아둔 새우를 얼려두는 냉동시설, 그리고 바닷물에서 소금을 얼른 추출할 수 있는 건조시설이 준비돼 있는 한, 새우젓은 사시사철 넘친다. 어디 새우젓뿐인가. 장마철 지나야 파종하던 김장용 배추와 무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산간에서 일 년 내내 심고 수확할 수 있다. 비닐멀칭과 화학비료와 제초제와 농기계가 있고, 커다란 트럭이 농산물시장으로 즉각 배달하기 때문으로, 모두 석유를 펑펑 소비하는 과학기술이 뒷받침한다. 다시 말해보자. 과학기술이 돕지 않는다면 이맘때 몰리는 김장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 석유가 모자란다면 김장 비용은 반비례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가전회사에서 열심히 개발해 텔레비전으로 광고하는 김치냉장고가 없다면 김칫독을 묻을 수 없는 아파트는 김장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과학기술의 찬란한 승리다.


 

걱정스런 내년 이후의 김장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는 농토와 바다가 있기에 오래 전부터 적응해온 우리는 제철에 김장을 담가 겨울을 지낼 수 있었는데, 과학기술의 덕분에, 그리고 값싼 석유 덕분에, 우리는 제철보다 앞당겨 김장김치를 먹는다. 생활협동조합이 아니라면 김장용 양념 무채에 양식 굴을 넣고 가을부터 호강할 수 있지만 요즘 과학기술은 과도하다. 차라리 지나치다. 내의 차림으로 겨울을 지내게 해줄 정도로 에너지를 풍부하게 만들어내는 발전소마다 바다의 온도를 높여놓았다. 이산화탄소를 내뿜는 화력발전소는 공기의 온도까지 높이는데, 같은 용량의 화력발전소보다 2배나 많은 온배수를 쏟아내는 핵발전소는 바다의 생태계를 크게 흔든다. 새우잡이 그물이 찢어져라 올라오는 해파리는 바다 수온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이젠 그 수준을 넘어선다. 수온변화는 애교가 되었다. 이맘때 제주도 모슬포에서 성황리에 잡아 올리는 방어를 삼가는 게 좋은 이유는 회유하는 방어의 특성 상,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로 분출된 방사성 물질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장에 넣는 멸치젓이 걱정인 이유 역시 후쿠시마 해역을 멸치가 회유하는 탓이다. 김장에 꼭 넣는 젓갈에 방사성 물질까지 포함시킬 수는 없건만, 우리는 안심할 수 있을까. 아직 갯벌에서 잡히는 해산물은 괜찮다고 하므로. 영광 핵발전소가 갯벌을 향해 막대한 온배수를 토해내지만 방사성 물질이 포함된 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걱정이다. 들리는 소문이 흉흉하다.


수명을 다해하는 핵발전소에 엉터리 부품을 사용했다는 의혹은 사고를 연상케 한다. 자연재해가 사고로 이어진 후쿠시마는 지진대 위에 지었는데, 어떤 전문가는 후쿠시마 핵발전소보다 우리 핵발전소의 위험 요소가 훨씬 크다고 주장한다. 후쿠시마 정도의 사고가 난다면 인천 앞바다의 갯벌마저 광범위하게 오렴시킬 게 분명한 영광 핵발전소도 예외가 아니다. 영광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한다면, 우리는 갯벌에서 건져올리는 어떤 어패류도 먹을 수 없다. 어쩌면 젓갈이 없는 김장김치를 맹맹하게 먹어야 할지 모른다. 우리 서해안에 세운 핵발전소만이 아니다. 중국 동해안, 다시 말해 우리 서해안을 바라보는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한다면 어떨 것인가. 우리는 핵발전소를 감시하는 환경단체와 주민들이 있지만 중국엔 없다. 감시 없다면 어떤 시설도 안전하지 않다.


     그렇더라도, 김치냉장고를 구비한 덕분에, 생활협동조합에서 절인배추를 공급하는 덕분에, 아니 배추를 절여서 전해주는 유기농민 덕분에, 그리고 첨가물 없이 추젓을 담은 어민 덕분에, 11월 중순, 우리집은 김장을 일찍 마칠 수 있었다. 지구로 쏟아지는 태양의 입사각도가 좁아지면서 기온은 조금씩 내려가지만 햇빛이 드는 한낮은 따사롭다. 적당하게 익은 겉절이와 생굴로 버무린 김장용 무채로 휴일의 늦은 아침을 넉넉하게 먹은 오늘, 파란 하늘 아래 잎사귀를 잃은 가로수는 파리해보이지만, 깊어진 가을이 한결 여유롭다. 이런 호강, 내년에도 이어질 수 있을까. (푸른두레생협, 2012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