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4. 3. 3. 19:46

 

이번에는 오리다. 철새에서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발견되었다는 신호성이 울리자, 인부를 동원하는 공무원들이 오리들을 죽이느라 구슬땀을 흘린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가. 200312월부터 반복되는 살육의 현장. 무려 2500만 마리의 가금이 죽었단다. 가금? 닭과 오리가 대부분이고 메추리와 어쩌다 칠면조도 섞였다. 그들을 살처분이라는 중립적 용어를 구사하지만 생매장이다. 눈 껌뻑이는 닭과 오리를 켜켜이 우겨넣은 마대자류를 얼기설기 묶어 구덩이에 던졌다. 그리고 흙을 두껍게 덮어 눌렀다.


난생 처음 밖으로 나온 어린 오리들. 추웠을 거다. 농장은 내내 따뜻했는데, 찬란한 햇살이 내리 쬐이고 흩뿌려진 눈이 하얀 마당을 처음 디딘 오리들도 병아리처럼 노랗고 삐악거렸다. 뒤뚱뒤뚱. 호기심에 넘치는 어린 오리들. 판때기로 몰아대는 인부의 성화에도 하늘을 보고, 쌓인 눈도 보며 떠밀린 곳은 커다란 구덩이. 돈이 없었나? 시간이 부족했나? 인부가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마대자루에 담을 필요도 없다고 본 걸까. 커다란 구덩이에 어리둥절 들어가고 또 들어가, 다섯 겹, 여섯 겹으로 겹쳐서 삐악삐악 허둥대는 오리의 머리 위로, 눈과 코로, 등과 가슴으로, 숨도 쉬지 못하게, 깜깜하게, 그 무거운 흙이 쏟아지고 또 쏟아졌다.


비분강개한 이는 새삼 3년 전 사진을 페이스북에 꺼내 놓았다. 분홍색이 완연한 작은 돼지들을 구덩이에 쏟아붓는 모습이다. 어린 돼지들을 짐칸에 두 겹, 세 겹 실은 트럭이 구덩이에 뒤꽁무니를 대고 서자, 방호복 입은 인부들이 목숨 붙은 돼지들을 사납게 몰아붙인다. 깊은 구덩이를 본능적으로 외면하는 돼지를 장화로 밀어댄다. 그렇게 돼지들은 살해되었다. 아직 어려 공포에 질린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한 채, 생매장되었다. 살해 현장에 있던 인부들은 구토를 해야 했을 것이다. 몇날 며칠, 어쩌면 몇 달. 아니 요즘도 잠을 이루지 못할지 모른다. 흙 속에서 삐악 거리던 소리는 공포에 몸을 떠는 꿀꿀 소리로 들릴 테니.


가족 같이 키운 소, 돼지, 오리, 닭을 모조리 죽음으로 몰아가는 농부의 심정. 참을 수 없는 고통이라고? 그런 농부도 분명 있겠지만, 뉴스 화면 속의 농장주도 그럴까? 외양간에 한두 마리 소와 돼지 먹이고 마당에 닭 여남은 마리 풀어놓는 농부라면 그런 감정에 눈물 쏟겠지만, 텔레비전 뉴스에 모습 드러내지 않는 대형 목장의 주인, 어쩌면 현장에 나타나지 않은 축산자본은 어서 처리하기만 기다릴지 모른다. 그는 차가운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다. 차가운 건 은행이다. 투자하겠다며 빌린 돈과 그 이자를 제때 내지 않으면 자본주를 파산시키지 않던가. 축산자본은 가축 한 마리 한 마리에 관심을 쏟을 겨를이 없다. 애초 생명이라 생각한 적도 없다. 그러니 농장주는 며칠 키우면 얼마에 팔아넘길 수 있는지 살필 뿐이다.


가족 같이 키우는 소는 축사에 송아지도 자란다. 외양간에 새끼 돼지들도 돌아다녀야 한다. 하지만 비닐하우스로 만든 양계장 안에 빼곡한 닭과 오리는 모두 같은 시간에 들여왔다. 같은 시간에 부화시켰다. 삼계탕을 위한 닭? 아니 병아리는 4주 이상 먹이지 않는다. 4주 동안 정해진 사료로 똑 같은 크기와 무게로 키운 뒤 일제히 내다 판다. 그렇게 계약돼 있다. 과학축산이 개발한 닭과 오리와 돼지와 소는 일정한 크기와 조건을 가진 축사에서 규정에 따라 사료와 항생제를 먹이며 일정 시간이 지나면 전부 같은 크기와 무게가 된다. 그런 가축은 가족처럼 키우면 안 된다. 키울 수도 없다. 적어도 가족이라면 한 마리 한 마리 구별하고 이름이나 별명도 있겠지만, 없다. 그저 몇 킬로그램의 살코기나 몇 개의 계란, 그리고 몇 리터의 우유일 따름이다.


가족처럼 키워 크기와 무게가 들쭉날쭉한 가축은 축산자본이 외면한다. 그렇게 키운 닭은 하루 100만 마리 자동으로 도축 포장하는 기계를 고장나게 하지 않던가. 중복이면 전국의 모든 군인의 점심상에 삼계탕 한 그릇이 올라가야 하는데, 들쭉날쭉한 닭이 뚝배기에 들어가면 난리가 난다. 작은 고기를 받은 고참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할지 모른다. 닭을 가족처럼 키우는 이가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마당에서 키운 닭을 잡아먹는 일은 축산자본이 살코기와 계란 시장을 점유하기 전까지 일반적이었다. 사위 오면 씨암탉 잡지 않았나. 그런 닭은 대체로 질겼으니 밤과 대추도 넣어 푸욱 삶았다. 요즘처럼 토막 내 튀기지 않았다. 식구와 이웃이 나누다 돈이 필요하면 시장에 내놓았던 시절, 손님이 지목한 닭을 보는 앞에서 잡아주었던 시절, 조류독감은 없었다. 물론 예방적 살처분이라는 그악스런 폭력도 없었다.


2014년 올해는 유엔이 정한 가족농의 해라고 한다.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2014년을 지구와 인류를 살리는 가족농의 해로 선포했다는 거다. 우리는 웬만한 국가보다 자본 규모가 큰 미국계 다국적기업을 기억하고 그들에게 식량의 4분의3을 수입해 의존하지만, 아직 세계는 5억 명에 이르는 가족농이 분명히 먹여살린다. 가족농은 가축을 가족처럼 키운다. 농경지에 다가오는 생태계의 이웃을 살충제로 씨 말리며 죽이려 들지 않는다. 남보다 더 많은 살코기를 더 빨리 생산해 더 큰 돈을 벌어들이려 농장을 확장하지 않는다. 이웃 사이에 음식을 나누고 힘도 보탠다. 우리도 그랬다. 논밭에 대형 농기계가 들어오기 전까지 그랬다. 여드름 짜던 아랫집 누나와 솥을 끌어안고 밥 퍼먹던 윗집 형이 도시로 떠나기 전까지 적어도 수 천 년을 그리 살았다. 그때 하늘은 높았고 물은 맑았다. 생태계는 아름다웠다.


70억이 넘은 인구를 가족농이 전부 먹일 수 있을까? 우리 생각에 어렵게 느낀다. 하지만 공장식 농업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한 해 걸러 수백만의 가축을 살해하는 농업은 저주의 막장이다.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의 예방적 살처분을 당하면서 공포에 질리는 가축과 가금은 공장식 축산에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공포에 질려 죽는다. 태어나서 먹고 죽을 때까지 학대당한 가축과 가금의 살코기, 계란, 우유가 진정 안전할까? 사료가격이 치솟고 석유위기로 냉난방 갖춘 축산의 유지비용이 턱없이 늘어나는데, 탐욕스런 농업이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아직 가족농으로 돌이킬 가능성이 남았다고 유엔이 조심스레 선포했으니,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가족농의 해에 고기 소비부터 줄여보자. (작은책, 20143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