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20. 12. 23. 00:44

 

지난 518. 망월동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제창되는 모습을 벅찬 마음으로 시청한 일단의 인천시민들이 삼삼오오 답동성당 교육관으로 모였다. 살벌했던 군사정권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던 이, 군사정권이 막을 내린 세상에서 환경운동에 투신했던 이들이 먼저 떠난 선배를 추모하는 자리였다. 조금만 더 견디면 그토록 염원했던 세상, 나라다운 나라가 시작되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텐데, 모인 사람들은 먼저 떠난 선배를 기리며 무척 아쉬워했다.

 

1994518, 당시 세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인터넷을 들춰보았다. 광주항쟁 14주기를 맞은 통일 시대 민주주의 국민회의 추진위는 김영삼 정권을 향해 학살 책임자들의 공소시효가 끝나기 전에 공정한 수사와 소추를 요구했다는 짤막한 기사가 올라 있다. 그로부터 4일 뒤 나락 한 알에 우주가 있다고 설파한 장일순 선생이 6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년 전 수술했던 위암의 재발이 원인이었다. 지금까지 건재하다면 우리 나이로 90. 연로하더라도 기뻐했을 텐데, 장일순 선생은 아쉽게도 생전에 당신이 염원하던 민주주의를 우리와 더불어 체감할 수 없다.

 

병세가 악화되어도 병상에 누워서도 기력을 모아 이현주 목사와 노자 이야기를 마무리한 장일순 선생은 원주에 대성학원을 설립한 교육자이자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활발한 생활협동조합인 한살림을 창설한 생명운동가다. 그는 몸에 좋은 유기농산물만 골라서 먹는 짓은 하지 말라고 제자들에게 당부하면서 솔선했다. 자신의 몸과 땅을 위해 유기농산물을 재배하고 싶어도 당장 실행하기 어려운 농민의 처지를 이해하고 배려하자는 당부였는데, 위암이라니. 어쩌면 순교한 건지 모른다.

 

사진: 녹색연합 작은것이아름답다에서 2020년 11월 30일 간행한 책. <지구별 생태사상가>

 

 

나와 너는 천지만물과 더불어 하나

 

장일순 선생은 생전에 이렇다 할 논문이나 원고, 번듯한 책 한 권 남기지 않았지만 많은 이는 생태 사상가로 생각하며 그의 정신을 기린다. 대학에 적을 두고 정규적인 강의를 맡지 않았어도 제자를 자임하는 이가 많다. 내 땅에서 함께 살아온 어른을 기억하는데 인색해야 하는 분위기가 은근히 강요되는 세월이 최근까지 이어져왔다. 핸드폰 문화는 집안의 어른도 무시하지만,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가까워도 많은 사람들이 장일순 선생을 잊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신을 기리고 싶은 생태 사상가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먼발치에서 만난 적 있는 이라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다정다감할 뿐 아니라 따뜻하다고.

 

장일순 선생은 진정 책 한 권 글 한 줄 남기지 않았을까? 서점가에 분명 장일순이라는 저자의 책이 버젓이 진열돼 있는데. 하지만 장일순 선생은 자신의 이름으로 책이 발간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분명한 자신의 말이 세상에 나오면 출판사와 출판인이 치도곤을 당할 수 있기에 글쓰기를 억제했고 출판을 한사코 만류했다. 녹색평론사에서 발간한 나락 한 할 속의 우주는 어렵게 찾아낸 강연이나 대담의 기록을 나중에 묶었고 삼인 출판사의 노자 이야기세 권은 공저자인 이현주 목사가 주로 정리했다.

 

우리 현대사는 얼마 전까지 엄혹했다. 장일순을 두려워하는 자는 입을 봉쇄하려 들었다. 군사정권을 진두지휘하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자, 장일순 선생에 눈을 부라린 자는 얼마 전 탄핵된 박근혜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였다. 정통성 없는 폭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자에게 민중은 무서운 존재다. 도산 안창호의 맥을 잇는 대성학원을 세우고 사회대중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한 그는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빌미로 3년 동안 옥고를 치렀지만 박정희 정권은 탄압을 이어갔다.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이니 태어나 살아오던 원주에서 멀리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군사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를 마냥 바라볼 수 없는 노릇이었다.

 

1970년대 초 원주교구 지학순 주교와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며 가두시위를 주도한 장일순 선생은 독재정권의 눈에 가시였는데, 홍수로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의 복구와 농민의 생존을 도모하면서 장 선생은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궁극적으로 건강한 사회의 실현을 생각한다면 투쟁에서 머물 수 없다는 걸 체득하고 공생의 논리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생명운동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각오로 이어졌다. 19831029일 도시와 농촌을 직접 연결하는 한살림을 원주에서 창립하기에 이른다. 이후 선생은 생명운동에 남은 생을 헌신했다.

 

한살림과 같은 생활협동조합은 농촌의 생산자 조합원과 도시의 소비자 조합원이 유기농산물을 직거래한다. 유기농산물은 원칙적으로 농약을 사용하지 않지만 유기농업은 농사 방법의 차이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유기농산물은 땅과 하늘과 사람, 생산자와 소비자, 사람과 땅속의 미물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는 농업으로 생산한 농작물이고 그렇게 짓는 농업이 유기농업이다. 유기농업은 지금 우리의 삶에 조상의 삶과 얼이 깃들어 있다는 걸 반영해야 할 뿐 아니라 후손의 행복과 건강하게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땅 속의 미물을 죽이는 농약은 결국 사람의 건강을 해친다. 다채로운 생태계의 얽히고설킨 조화를 단조롭게 만드는 농약은 결과적으로 이웃과 허물없이 나누던 음식을 거대한 기업이 지배하는 상품으로 바뀌게 했고 그 과정에서 농민과 노동자는 소외되고 말았다. 다국적기업의 손아귀에 들어간 식량산업은 막대한 자금 이상으로 석유가 동원되지 않으면 절대 유지될 수 없다. 다국적기업의 돈벌이를 위해 씨앗이 단순화된 농작물인데, 그 농작물의 유전자마저 조작하며 규모를 키운 자본은 농산물 독점에서 그치지 않았다. 가축의 유전자까지 획일화해 공장식으로 사육하기 시작하자 세상은 조류독감, 구제역, 광우병 들로 돌이킬 수 없게 온통 오염되고 지구는 걷잡을 수 없게 온난화되었다.

 

삼라만상은 그물망처럼 연결돼 있다. 한 그루의 장대한 나무도 눈에 띄지 않는 씨앗에서 움트고 나무는 자라는 과정마다 미생물과 곤충은 물론 거대한 동물의 터전이 된다. 곤충이 낳은 알은 애벌레가 되어 딱따구리의 몸으로 들어가고, 딱따구리는 나무를 쪼아대면서 미생물을 밀어넣는다. 미생물이 들어간 나무는 늙으면 쓰러져 흙으로 되돌아간다. 참나무 한 그루는 700종류의 곤충에게 터전을 내어주는데 농약 세례를 받는 근린공원의 꽃나무는 나비 한 마리의 접근을 가로막으니 새들이 외면한다. 그 아래 뛰어노는 우리 아이들의 코는 농약을 피하지 못하고 아토피에 시달린다. 그래서 장일순 선생은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있다고 일찍이 설파했는지 모른다.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장일순 선생은 붓의 달인이다. 표정이 있는 난을 치고 의미를 담은 서화를 남겼다. 선생은 당신이 지원하는 단체를 도우려 여러 차례 전시회를 개최했지만 자신의 붓을 결코 자랑하지 않았다. 봉산동 자택에서 시내까지 천천히 걸어도 30분이면 족했지만 반나절이나 걸었다고 장일순 선생을 잘 아는 이는 회고한다. 눈을 마주치는 주민과 반갑게 인사하며 안부를 묻고 헤어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라는 건데, 하루는 군고구마 장수가 쓴 군고구마 팝니다. 글씨에 탄복했다고 한다. 투박하지만 가족을 먹여 살리려는 간절한 마음이 고스란히 깃들었다는 아닌가.

 

아들의 등록금을 간신히 마련한 할머니가 원주역에서 소매치기당한 사연을 들은 장일순 선생은 무작정 대합실에 나가 몇 날을 앉아 있었다고 한다. 어디로 가려는 것은 물론이고 누굴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앉아 있기만 하니 궁금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초지종을 들었고 이내 소문은 원주 시내에 퍼졌다고 한다. 그렇게 원주역에 앉아 있길 일주일. 고개를 숙이고 찾아온 소매치기는 남은 돈을 내놓았고 할머니에게 돌려주었다는데, 다음날 그 소매치기를 찾아 나선 선생은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지? 용서해주게.”하며 소주잔을 권했다고 한다.

 

소매치기와 대학생, 할머니와 군고구마 장수를 다르게 생각하지 않은 장일순 선생에게 양주나 맥주보다 누구나 마음 편하게 기울이는 소주나 막걸릿잔이 어울렸겠다. 개구리와 메뚜기와 거미, 그리고 모든 유충들이 우글거리는 논밭이 비옥한 소출을 내주고 그런 논밭에서 생산한 농작물이 우리를 건강하게 한다고 생각하는 선생은 조그만 엘리트 의식도 갖지 않았다. 자신을 한 알의 씨앗으로 생각한 장일순 선생은 후배에게 나대지 말고 기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런가? 선생의 제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도무지 자신을 앞세우지 않는다. 그래서 등 떠밀려 시작한 추모 사업은 소박하고 더디다.

 

위암으로 누웠을 때 노자의 도덕경을 함께 읽으며 물 흘러가듯 나눈 이야기를 이현주 목사는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정리했다. 그 무렵 명절을 맞아 고향으로 나서려는 목수에게 장일순 선생은 노자 있나?” 물었고, 책은 있지만 읽지 않은 목수가 머뭇거리자 선뜻 여비를 내주었다는 일화를 최성현은 좁쌀 한알에서 소개했다. 장일순 선생 10주기를 맞아 장일순을 기리는 모임에서 장 선생과 얽힌 이야기들을 나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네에 엮었다. “속지 마시오들. 세상에 글한테 속는 것만큼 맹랑한 일도 없으니까라 말했던 장일순 선생의 책은 대략 그 정도에 그친다.

 

군사정권 시절의 진정한 언론인이었던 리영희 선생은 201012월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쳤다. 리영희 선생이 지금 생존해 있다면 작금의 사태를 어떻게 분석할까? 세월호 침몰 뒤의 기자들의 행태를 기레기라 비판한 민중과 촛불을 들었을 텐데, 바뀐 정권에게 어떤 충고를 아끼지 않을까? 장일순 선생과 비슷한 연배이지만 깍듯이 선배로 모셨던 리영희 선생은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잇는 군사정권에 어려 차례 고초를 겪고 4차례 옥고를 치렀다. 리영희 선생은 마음이 울적하거나 허전할 때 훌쩍 원주로 떠난 것으로 유명하다. 파킨슨씨병으로 말년에 고생하다 유명을 달리한 리영희 선생이 장일순 선생과 이 시간 생존한다면 원주로 떠나 기쁜 마음 나누고 싶지 않을까?

 

장일순 선생이 떠난 원주. 하지만 체취가 남은 원주는 여전히 성지 같은 곳이다. 생전에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거나 말씀을 들은 적 한 차례 없지만, 만났다면 무척 반갑게 맞아주셨을 거 같다. 그래서 자택이 있는 자리에 가면 마음이 편안해질 거 같다. 요즘 말로 힐링될 성싶은데, 게을러서 여태 찾지 못했다. 집터는 제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자신을 한없이 낮춘 선생이니 개발광풍에서 집터를 보전하기 위해 자손이 애를 썼을 거 같지 않은데. 핑계를 앞세운 처지가 못내 아쉽고 송구스럽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다시금 제창되었는데.

<지구별 생태사상사> 260-269쪽, 작은것이아름답다 2020년 11월 30일 펴념.

작은것이아름답다, 2017년 6월호, 78-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