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21. 2. 15. 18:40

오래전에 본 중국 기예단의 접시돌리기는 인상 깊었다. 작대기 끝에서 뱅글뱅글 도는 접시가 떨어지지 않게 하려면 얼음판 팽이에 채찍질하듯 손바닥으로 접시 가장자리를 채주어야 했다. 돌아가는 접시가 하나라면 쉽지만 대여섯 개로 늘자 곡예사는 무대에서 바빠졌다. 한데 거듭 늘어나니 허둥거리던 곡예사는 화가 났다. 돌아가는 속도가 줄어드는 접시를 모조리 떨어뜨렸는데, 비슷한 일이 산후조리원에서 벌어졌다.

 

20051월 서울의 한 산후조리원에서 생후 21일 아기가 질식해 죽은 일이 발생했다. 새벽이었다. 20명의 신생아를 돌보던 직원은 서너 명. 밤낮없이 아기 보살피느라 지친 직원이 요령을 피웠나 보다. 수건을 고이며 신생아 스스로 젖병을 빨도록 유도했는데, 그만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엄마처럼 품에 안아 먹였다면 없었을 사고는 없었을 터. 산모의 항의가 이어지자 2013년 모자보건법 개정 움직임이 있었지만 2020년에 개정되었다. 이른바 셀프 수유를 시도하다 발각되면 200만 원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지만. 일손이 모자라는 현장은 법률과 거리가 있다고 한다.

 

잊을만하면 터지는 유치원의 폭력은 보육교사의 자질 문제일까? CCTV가 촬영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도 감행한 교사는 타성에 젖었을지 모른다. 제멋대로인 아이들을 고분고분하게 길들이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닌가. 뻔한 간식을 먹이려 할 때 투정하며 거부하고, 나란히 낮잠 잘 시간에 잠든 친구들 깨우며 장난하는 아이들을 한두 명의 보육교사가 감당하는 게 어디 쉽겠나. 보육교사를 더 채용하면 해결되지 않을까? 채용기준이 허락하지 않겠지. 기준을 바꾼다면? 유치원장은 그런 것 원할 리 없다. 로비력 강한 한유총의 비리와 추태는 무엇을 방증할까?

 

사진: 편협한 예산과 제도가 만든 유아원과 유치원에서 혹사당하는 직원들은 폭력의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사진은 인터넷에서).

 

유치원이나 유아원, 그리고 산후조리원은 CCTV보다 부모가 감시하므로 부조리와 비리가 이따금 발각되지만, 두리번거릴 때마다 보이는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은 어떨까? 심신이 허약해진 부모를 모시던 아들딸은 낯 모르는 이에게 지극정성을 의뢰한다. 비용이 들어가지만, 국가에서 어느 정도 보조해준다. 거리가 멀면 관심도 멀어진다. 간혹 처방전을 살피는 자식이 있지만,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다. 바쁜 자식들은 발길이 더디다. 요양원에 맡겼으니 잊고 싶을지 모른다. 그럴 때 고귀한 마음에 틈이 생길 수 있다. 여기저기 흉흉한 소문이 끊이지 않는다. 한유총 일부의 일탈보다 양심적일 거라 믿기 어렵다.

 

농촌을 지원하는 예산이 늘어나도 농민의 애환이 그치지 않는다. 예산에 비례해 농민을 위한다는 기관과 단체가 늘어나지만 정작 농민들은 힘겹다. 지원금은 어디로 가는 걸까? 농촌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겠다고 나서는 단체에 제공하는 예산을 농민에게 직접 전달하면 무슨 큰 문제라도 생길까? 유아원이나 유치원, 그리고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전달되는 국가와 지방정부의 예산을 아이 부모나 노인에게 직접 제공한다면 부조리와 비리가 지금보다 커질까?

 

지원금을 몰아가는 바우처 제도의 한계를 본다. 자격을 내세우며 돌봄을 체계적으로 제공한다는 단체가 예산을 독점한다. 외주화된 돌봄이다. 사실상 차갑고 무책임한 돌봄의 영역이 탄생한 셈인데, 돌봄 단체의 규모가 커질수록 부조리와 비리도 늘어나는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돌봄의 외주화를 개선해야 한다. 그를 위해 로비력 높은 단체나 관련 전문가와 아무리 의논해도 소용없다. 예산만 늘어날 뿐이다. 아이와 부모의 행복을 먼저 생각하는 시민과 논의해야 한다. 세금은 시민이 낸다.

 

그림: 요양원의 체계적이고 상습적인 비리를 보여주는 모식도(출처는 인터넷).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라는 격언이 있다. 최소 3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이 일상이던 시절에 아이들을 즐거운 마음으로 보살피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마을에 많았고, 실수를 이해하며 도전을 격려하던 삼촌과 이모가 한 집 걸러 살았다. 오빠와 형, 누나와 동생이 어울리던 마을에서 돌봄은 모든 이의 권리이자 흔쾌한 의무였다. 위아래는 물론, 앞집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아파트로 파편화된 요즘, 각자도생해야 한다. 핵가족 시대에 돌봄은 자연스레 외주화되었다. 흔쾌하든 그렇지 않든, 남에 맡기며 적지 않은 돈을 지불하고, 돈을 벌려고 바쁘다.

 

인간은 본디 격리돼 살지 않았다. 마을을 소환해야 한다. 아파트단지라 해도 공동공간이 있다. 최신 아파트단지가 아니라도 지하 공간은 비어 있다. 방치된 공간을 돌봄 공간으로 활용하는 방법은 어려울까? 바우처 기관으로 제공되는 예산을 활용할 수 있다. 주민이 마음을 모으면 가능하지 않을까? 사회복지 전공 경력을 활용하지 못하는 주민이 나설 수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돌봄에 특별한 자격이 있는 건 아니다. 공간을 잘 활용하면 옆집이 이웃으로 살가워진다. 낯모르던 아이와 어른이 가깝게 다가온다. 제도가 가로막는다면, 마을의 의지로 얼마든지 개선할 수 있다.

 

코로나19는 요양원의 부모를 만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효심 깊은 자식은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려는 보모를 배웅하지 못해 서글퍼했다. 멀지 않은 시절, 어른 한 분을 보내는 데에도 온 마을이 필요했다. 장례는 축제였다. 마을에서 돌봄이 자연스럽고 살갑다면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이 쉽싸리 전파되지 않는다. 돌봄마저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하자 감염병이 날개를 달았다. 우리도 그랬지만, 먼저 외주화한 유럽과 미국은 심각했다. 전에 없던 기상이변은 더욱 고약한 감염병을 부를 것이다. 가족과 마을 품으로 돌봄을 어서 되돌려야 하지 않을까? (지금여기, 202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