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21. 9. 1. 21:17

 

9호 태풍 루핏의 간접 영향인가? 추분이 하루 지난 날, 강원도 해안은 시간당 60mm가 넘는 비가 쏟아져 도로를 덮쳤고, 찜통이던 인천에 한바탕 소나기가 스쳤다. 맑은 하늘에 낮은 구름이 엄습하더니 아파트단지의 나무들을 뒤흔들며 별안간 퍼부었는데, 비가 그치자 동쪽 하늘부터 구름이 사라지며 쌍무지개가 떴다. 원고 실마리 찾느라 미처 하늘을 살피지 못했는데, 사회연결망마다 사진이 속속 올라왔다.

 

우여곡절 속의 “2020 도쿄올림픽을 마치는 날 자정, 일본 남부 규슈지방을 관통할 루핏은 어느 정도의 비를 뿌렸을까? 재해는 피했나 본데, 미국 캘리포니아는 최악의 가뭄으로 대형 수력발전소가 가동을 멈췄다는 보도가 나왔다. 1967년 완공 이후 처음이라는데, 그리스와 터키는 감당하기 어려운 산불로 고통받았다. 작년 여름 우리는 기상관측 이래 가장 긴 장마로 시달렸는데, 코로나19 속 올여름은 폭염경보가 30일 넘게 이어진다. 기상이변인가? 분명 정상은 아닌데, 우리나라는 다행히 감내할 범위 안이다. 한낮 폭염은 여전한데, 어두워지자 누그러졌다. 고맙다.

 

소나기 퍼붓기 전, 찜통더위를 뚫고 집에서 멀지 않은 시립박물관을 찾았다. “한국전쟁 이후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국민에게 구호품으로 미국이 제공한 밀을 제분하면서 덩치가 커진 회사와 손잡고 <52년 인천생 곰표>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연다기에 만보걷기를 겸해 찾은 것인데, 곰표 밀가루 생산 기업은 그간의 성취를 자랑하면서 새 상품도 홍보했다. 미국 밀 덕분에 허기를 면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분식이 일반화된 현상을 주목한 전시회는 우리 농촌이 밀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올여름 폭염은 관측 이래 얼마나 혹독했을까? 폭염주의보 기준인 하루 최고기온 섭씨 33도가 여전히 이어지는 상황이라 그런지 언론은 기록 경신 여부를 보도하지 않는다. 신혼 가전으로 등극한 지 오래된 에어컨이 웬만한 집에 설치된 마당이라 그런지, 폭염경보 기준인 35도를 초과해도 사람들은 경각심을 느끼지 못한다. 기술과 에너지 덕분에 견딜 만한데, 화석연료로 생산하는 전기는 실내를 시원하게 만드는 효과 이상으로 지구를 데운다. 에어컨을 켤 때 마음 무거워 입맛 잃는 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데, 다행히 아침저녁으로 시원해진다.

 

요사이 바깥에서 먹는 점심은 차가워야 했다. 냉면은 30년 전 생긴 메밀 알레르기가 거부하니 콩국수나 냉국수를 찾았는데, 소금을 적량 넘게 넣어 콩국물을 짜게 마시는 실수를 피하려고 냉국수를 주문하지만, 대체로 맵다. 젊은이 취향이 대세라 그렇다. 밀면이 만만한데, 멀리 떨어진 식당까지 동행하려는 이 드물다. 하는 수 없어 슈퍼마켓에서 밀면을 잔뜩 사놓았는데, 질리고 말았다. 선선해졌으니 바지락 칼국수를 도전해볼까?

 

슈퍼마켓의 밀면은 조리가 쉽다. 끓인 면을 수돗물로 식힌 뒤 별도 포장된 육수에 넣기만 하면 그만인데, 바지락 칼국수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면이야 특별할 게 없지만, 싱싱한 바지락과 입맛에 맞는 육수는 찾기 어렵다. 애호박과 감자까지 구하려면 배보다 배꼽이 크다. 식당을 찾는 게 편한데, 대부도의 이름난 식당은 지나치게 멀다. 동행할 차가 드물다. 바지락이 싱싱하다면 동네 식당도 괜찮다. 가격이 적당하다.

 

사진: 1990년대 말, 송도신도시를 위한 갯벌매립이 본격화되기 이전, 송도갯벌에서 동죽을 채뒤하는 모습. 비가 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누구나 1인 하루 60kg의 동죽을 채취했다.

 

왕만두를 포함해 4만 원이면 4명에게 충분한 맛과 양을 제공하는 바지락 칼국수의 원가는 얼마나 될까? 곰표 밀가루 20kg 한 봉지 가격이 25천 원 정도다. 몇 인분이 나올지 감을 잡지 못하지만, 무시할 만하겠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택배비 포함한 바지락 10kg6만 원이란다. 다짜고짜 바지락 칼국수 잘 끊이는 방법으로 검색하니 4인분에 1.5kg의 바지락이 필요하다고 귀띔한다. 산지와 바지락을 직거래하고 도매상에서 애호박과 감자를 수북이 가져올 테니, 식당 주인에게 부담을 줄 정도는 아니겠다. 입추와 말복까지 지나 선선해졌으니 바지락 칼국수가 삼계탕 바통을 받을 것인가?

 

복중에 주로 먹는 삼계탕은 흔쾌히 지갑 열기에 좀 부담스럽다. 뚝배기 안에 쏙 들어가는 냉동 닭의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다던데, 국물에 들어간 가는 인삼 두어 뿌리와 대추, 밤 때문일 리 없다. 무언가 바가지를 쓰는 기분이다. 그래도 더운 날 티셔츠 펑 젖을 정도로 땀 흘리고 나오면 몸이 시원해진다. 이열치열인데, 공장식으로 사육하는 닭은 병아리에서 냉동까지, 사람 손이 거의 필요 없다. 썰물 뒤를 따라 갯벌로 나간 아낙이 두어 시간 호미질로 채취하는 바지락이 더 비싸야 옳지 않나? 아니란다. 유전자 조작한 옥수수 사료를 주로 먹는 닭은 폭염과 조류독감에 쉽사리 죽어 나가니 그 비용도 추가해야 한단다.

 

지난 726, 44차 총회를 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갯벌을 세계 자연유산에 등재했다. 118종의 철새의 주요 기착지일 뿐 아니라 멸종 위기에 처한 세계적 희귀 조류 22종의 터전이 되는 서천, 고창, 신안, 그리고 보성과 순천만의 갯벌이 대상 지역이다. “지질학적, 해양학적, 기후학적으로 보존해야 할 가치가 크기에 자연유산에 등재한 유네스코는 탁월한 생물다양성을 주목했다. 2천여 동식물이 분포하는 갯벌의 생태적 가치를 국제사회가 뒤늦게 인식한 것이다.

 

칼국수에 들어가는 바지락을 채취하는 인천 일원의 갯벌은 포함되지 않았다. 천만다행일까? 꼭 그렇지 않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의 경험에 비추어, 호미 정도의 도구로 아낙이 채취하는 갯벌은 훼손되지 않는다. 고운 개펄보다 모래가 많은 갯벌에서 서식하는 바지락은 양식장에서 배양한 종패를 뿌린 뒤 2년이 지나야 채취한다. 인체의 콩팥처럼 온갖 생물이 육지에서 들어오는 유기물을 정화하는 갯벌은 2년이면 거뜬히 회복된다. 그뿐인가? 성장하는 바지락은 껍질에 탄산칼슘을 저장한다. 지구를 데우는 탄소를 그만큼 흡수한 것인데, 먹이사슬의 기반이 되는 플랑크톤은 갯벌 1g에 수억 분포하며 탄소를 흡수한다. 유네스코는 기후위기를 효율적으로 막아내는 천혜 갯벌의 가치를 비로소 파악했으리라.

 

우리 갯벌의 자연유산 등재 소식에 기뻐한 대통령은 지자체와 협력하여 갯벌의 생태계를 보전하고, 지역사회 발전, 더 나아가 세계인이 함께 공유하는 소중한 세계유산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현 정부와 이전 정부에서 무참하게 매립하며 파괴해온 갯벌의 막대한 손실에 대한 안타까움은 별도로 표시하지 않았다. 바지락보다 훨씬 맛나다 평가받는 백합의 주산지, 새만금 일원의 갯벌이 황당한 이유로 탐욕스럽게 오염되며 사라지는 현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바지락 칼국수의 주재료인 밀가루는 미국산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먹는 곡물의 80%는 대부분 미국에서 수입하는데, 역사적으로 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한 국가답게(?), 미국은 시방 기후위기의 복판에 있다. 사막화에 이어 감당할 수 없는 기상이변이 속출한다. 난방에 관심이 없던 텍사스에 분수가 겨울에 얼어붙더니 체온보다 높은 폭염이 에어컨 모르던 북부 도시의 여름을 강타했다. 강력한 기술을 동원해 서둘러 극복했지만, 임시방편이다. 더욱 가혹하게 번지는 산불과 경작지 사막화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미국의 밀을 안정적으로 수입할 날이 머지않아 종료된다는 엄중한 신호다.

 

세계 석유의 20%를 소비하는 미국은 공업보다 농업 분야에 더 많은 석유가 들어간다. 공장식 축산에 없어서 안 되는 옥수수를 재배하려면 옥수수 열량의 10배에 달하는 석유가 경운, 파종, 수확, 운송에 들어간다. 우리가 수입하는 밀과 콩도 마찬가지인데, 사막화되는 경작지의 농업용수를 위해 동원하는 에너지는 얼마나 될까? 기계화된 논밭에 저수지에서 물 끌어와야 하는 우리나라도 사정이 비슷한데, 바지락은 사뭇 다르다. 억척스러운 아낙의 정성이면 족하다. 물론 갯벌이 온전해야 가능한 이야기지만.

 

형벌 같았던 폭염이 슬그머니 물러간다. 짧아졌더라도 가을로 접어드는 걸 보니, 아직 우리는 살아 있고, 당분간 더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미인 모양이다. 희망을 버리지 말자. 이럴 때, 싱싱한 바지락 넣고 칼국수를 맛깔나게 조리하는 요섹남이 부러운데, 거대한 기계로 갯벌을 마구 흡입하며 잡아들이는 어린 바지락은 피했으면 좋겠다. 한데 우리 갯벌에 퍼지는 미세플라스틱은 어떻게 피해야 하나? 미세플라스틱 먹고 병치레하는 비용까지 원가에 포함되는 건 참을 수 없으므로.(작은책, 2021년 9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