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22. 6. 3. 21:18

 

칠 년 전의 일이다. 어린이나 어버이날은 아니었다. 가정 관련 기념일에 유명한 식당을 찾는 짓은 피하므로. 아무튼 그때, 인천에서 가장 고급이라는 식당에 갔다. 비용 걱정은 말라기에 초대에 응했건만 선의를 강조하며 작지 않은 찬조금을 요구해 불쾌했는데, 불편한 모습이 따로 있었다.

 

“6세 이하는 10만 원부터라는 안내판에 놀랐는데, 넓은 식당은 가족과 연인들로 빈자리가 없었다. 수입했을 신선한 재료의 음식을 소담하게 담는 연인들은 자신감 넘쳐 보였는데, 그 사이로 손주 투정에 애먹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수북이 담아온 음식을 먹이려는데, 입 앙! 다물고 고개를 흔드는 게 아닌가. 할아버지는 값비싼 음식을 거부하는 손주가 귀엽기만 했다. “우리 땐 구경도 못 한 음식인데, 세상 많이 좋아졌어!” 흐뭇해했는데, 동의하기 어려웠다.

 

세상이 진정 좋아진 걸까? 여유 넘치는 이의 식도락을 탓하려는 게 아니다. 기후위기를 앞두고, 과도한 석유에 의존해 재배했거나 사육한 수입 식자재로 호화스러운 식탁은 언제까지 유효할까? 스스로 밥 떠먹지 않는 응석받이는 짠지에 꽁보리밥은 구경 못했을 텐데, 투정은 언제까지 통할까? 식량자급률이 20%대에 머물고 석유는 고갈을 앞두었다. 생존 기반이 무너진 마당에 닥칠 기후위기는 코로나19 같은 감염병을 불러들이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기후변화를 연구하는 학자는 에너지 낭비하는 생활 방식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머지않아 위기가 일상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신기루 같은 풍요에 취한 어린이가 어른이 될 때의 일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가 아비규환에 휘말리는 걸 바라지 않는다면, 선행학습이나 고급 식당보다 어려움을 견뎌낼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는 글을 한 매체에 기고했다. 닥칠 위기에 대처할 행동에 시급하다고 썼는데, 봉변당했다.

 

<고급 식당에서 불안해지다> 제목의 글에 대한 댓글은 난폭했다. 민망해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7년 후 100회 어린이날이 지나갔다. 지난겨울 산불로 사상 최대 숯덩이가 된 울진 산록에 풀잎이 돋으며 온갖 봄꽃이 모습을 드러낸다. ‘계절의 여왕답다. 그을린 흙에 풀씨가 살았던 건데, 새 정부가 출범하는 5, 우리 사회에 청문회가 열렸고 아빠 찬스엄마 찬스가 난무한다. 그렇다. ‘가정의 달인데, 7년 전과 비슷한 글을 매체에 다시 투고하면 어떤 댓글이 이어질까?

 

201912월부터 지구촌을 두려움에 떨게 한 코로나19가 창궐 30개월 만에 세력을 잃어간다. 그리스 문자가 모자랄 지경으로 변화무쌍했어도 의료자본이 동원한 과학기술에 기세가 꺾였을까? 20년 전 몇몇 국가를 긴장시킨 사스와 달리 사라질 가능성을 낮게 전망하는 전문가는 독감처럼 예방주사를 맞아야 할 거로 예견한다. 5월 지나면 만 명 이하 확진자를 예상하던데, 백신 맞지 않은 북한은 괜찮을까? 걱정인데, 인도와 파키스탄은 벌써 섭씨 47도를 넘나든다고 한다. 6월 이후 얼마나 뜨거울까? 우리는 어떨까?

 

최근 6차 보고서를 채택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는 새삼스럽게 회복탄력성을 언급했다. 위기로 치닫는 온난화를 극복하려면 이산화탄소와 메탄가스 같은 온실가스를 대폭 줄여야 한다는 사실을 대부분 알고 있다. 에너지 낭비 없어도 건강한 삶의 방식을 아무리 제시해도 불편하다며 거부해서 그렇지, 기후변화를 부정하는 사람은 드물어졌지만, 코로나19를 초대한 생태계 교란의 실체는 대체로 모른다. 회복탄력성이 생태계를 염두에 둔 절박한 제안이라는 사실에 관심이 거의 없다.

 

미국을 움직인 여성으로 추앙되는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은 1962년 봄이 와도 새가 울지 않는 현상을 알렸다. 침묵의 봄을 펴내며 농약 남용으로 새가 울지 못하는 미국의 현실을 안타까워한 것인데, 이후 농약 생산량은 세계적으로 50만 배 증가했고 우리나라는 세계 평균보다 예닐곱 배 이상 농약을 뿌린다고 유기농산물 생산자는 주장한다. 그래서 그런가? 곡식의 80%를 수입에 의존하는 국가답게 봄이 왔는데 개구리가 울지 않는다. 그런데 아닌가? 논에서 시끄럽던 참개구리가 도시의 아파트단지에 나타났다.

 

드넓은 갯벌에서 조개 캐던 아낙의 터전이었던 아파트단지는 근린공원 아니라면 흙이 없다. 참개구리가 어떻게 나타난 걸까? 공사할 때 파낸 지하로 모자랐는지, 어디선가 흙을 가져와 근린공원에 나무를 심었고 작은 저수지도 꾸며놓았다. 그 흙에 참개구리가 있었을까? 저수지에서 외롭게 운다. 먹이가 주위에 부족할 텐데 견딜 수 있을까? 송도신도시의 달빛공원에 북방산개구리도 운다. 얼음이 녹을 무렵에 산촌의 습지에서 우는 종류인데, 저 넓은 갯벌을 어떤 흙으로 덮은 걸까? 흙을 잃은 지역은 봄에 개구리가 울까?

 

세계적으로 대부분 멸종 위기인 개구리들은 생태계 먹이사슬의 중요한 중간단계다. 우리는 국토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산지를 파괴했다. 세계 최고 밀도의 고속도로로 종횡무진 끊었고 수천 년 논밭은 투기로 매몰했다. 대형 댐과 보에 강은 흐름이 막혔고 갯벌은 매립돼 비행장, 공업단지, 신도시로 바뀌었다. 건강한 생태계를 뚫고 논밭을 덮은 도로는 개구리부터 일망타진한다. 산골에 바글거리던 무당개구리는 어디로 갔을까? 나무 잃어 햇살로 뜨거워진 계곡이 오염되자 일제히 떠났다. 개구리가 조절하던 곤충이 늘자 사람은 농약을 무섭게 사용한다. 개구리 찾던 새들이 외면하자 자연은 회복탄력성을 잃었다.

 

사진: 시베리아 영구동토가 녹자 드러나는 매머드의 모습. 오래 전 감염된 사체 안에 바이러스는 생태계에 번질 수 있다. (사진은 인터넷에서)

 

기후위기로 영구동토가 녹으며 얼어붙었던 포유류의 생소한 몸체가 드러난다. 몸체는 까마득히 전에 생명을 잃었어도 몸속 병균은 여태 살았을지 모른다. 유전자에 숨어들었던 바이러스는 분명히 살아 있다. 사람 조상과 같은 종이었을지 모르는 그 동물의 몸에서 스멀스멀 나올 병균과 바이러스는 코로나19 뒤를 이을 수 있다. 다채로운 미생물과 동식물이 생태계가 온전하면 창궐을 너끈히 막아내겠지만, 아니다. 사통오달 아스팔트와 세계를 잇는 비행장은 회복탄력성을 거침없이 짓밟는다.

 

직전 정권이 약속한 “2050년 탄소중립에 어렵사리 성공하더라도 평균 기온 1.5도 상승을 억제할 수 없을 것으로 기후학자는 진단한다. IPCC는 탄소중립을 2040년으로 앞당길 것을 권고하건만, 새 정권의 정책으로 우리는 3.0도 이상의 기온상승을 피할 수 없을 거라며 젊은 학자는 절망한다. 기준은 올해나 작년이 아니다. 1990년보다 1.5도 상승한다면 이번 세기 안에 파국을 맞을 확률이 높다는 IPCC의 경고는 사실에 접근한다. 10년 이내에 긴급한 정책 전환이 절박하다는데, 새 정권은 5년을 후퇴시킬 것이다.

 

올 가정의 달을 우리는 기상천외하게 맞는다. 자식 성공을 위한 새 정권 실세의 스펙’(아빠와 엄마 찬스)10년 뒤를 우울하게 만든다. 한데 생각해보자. 인간(人間)이라 칭하는 사람은 사회는 물론이고 생태계에서 결코 홀로 생존할 수 없는데, 독선적인 스펙으로 미국의 유명한 대학에 들어가면 뭐가 좋은가? 기후위기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 틀림없다. 미국의 회복탄력성이 우리보다 나을성싶지 않고, 위기가 빚는 기상이변에서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전에 없던 기상이변과 전염병이 속출하는 세상에서 에너지 낭비가 기반인 근대문명은 지속될 수 없다. 그때 미국 학력이 여전히 환영받을까? 현재 기득권은 영원하므로 파국에 예외일 거라 확신하는가?

 

60대 이상의 청중이 모인 강연장에서 젊은 기후학자는 자신의 내일을 부정하면서, 견뎌내려면 50년 뒤에도 유지될 산림 생태계를 지금부터 준비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현재 젊은 세대의 행복한 생존을 보장할 수 없더라도 안정적인 숲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눈물겹다. 국토 65%를 차지하는 산림 생태계가 존재한다면 생존이라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게 아닌가. 회복탄력성이다.

 

개발, 발전을 전제로 하는 새 정권의 정책은 핵과 수소로 기후위기를 대처하겠다고 주장한다. 주장이 아니다. 그렇게 가정한다. 50년 뒤 미래세대는 안중에 없지만, 2022년 우리는 5월을 맞았다. 가정의 달인데, 家庭인가? 생존을 假定하는 건 아닌가? 42년 전 가정의 달에 우리 사회는 광주항쟁을 불사해야 했다. 앞으로 40, 우리 미래세대는 어떤 가정의 달을 맞아야 할까? 지금 우리는 한가하지 않다. (작은책, 20226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