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05. 6. 23. 08:37
 

불치병에 걸린 시아버님의 치료를 위해 “아기는 또 낳을 수 있지만 하나 뿐인 아버님을 잃을 수 없잖아요.” 하고 남편을 설득한 아내가 태아를 꺼내 삶아드렸다면 남편은 아내의 효성에 눈물 흘릴까. 아기의 개성과 인권은 대상화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웃들은 탄복해줄까. 수정 후 8주가 채 안 된 배아 단계라면 이웃의 눈을 속일 수 있는데, 괜찮을까. 서슬이 퍼런 형사법이 배아 생명을 비록 보호하지 않아도 8밀리미터의 발바닥이 몹시 귀여울 텐데. 시험관에서 갓 수정되어 겨우 10여 일 분열된 현미경적 크기의 초기 배아라면 어떨까. 움직이지도 자극에 반응하지도 않는다.


생명은 언제부터 시작되는가. 다분히 철학적인 질문이다. 진화생물학자는 원시 대양에 복제 가능한 유전자가 등장했을 지점부터 생명을 찾을지 모른다. 민법은 태어난 이후부터 생명이라고 주장하나보다. 배속의 아기가 사고로 죽어도 배상은 필요 없단다. 형법은 수정 후 8주부터 생명으로 보는 듯하다. 8주 이후 태아를 지우면 낙태로 처벌 가능하지만 8주 이전인 배아에겐 무관심하다. ‘시험관 아기’를 시술하는 불임클리닉은 착상 이후부터 생명으로 논하자고 부추긴다. 그래야 착상 이전의 배아를 다룰 때 윤리적 저항을 덜 느낄 것이다.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생명공학자는 ‘윈시생식선’ 운운하며 수정 후 14일이 지나야 생명이라고 눈을 부릅뜬다. 원시생식선은 발생과정에 잠시 나타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데.


환자는 누가 만드나. 오염된 환경이 질병을 유발하지만 환자의 정의는 의료산업이 담당한다. 그 역효과를 보라! 아이를 낳는 환자와 유치를 뽑아야 하는 환자들이 병원마다 북적이지 않는가. 쌍꺼풀이 없는 환자를 넘어 키 작은 환자, 지능이 높지 않은 환자, 치매에 걸린 환자, 심지어 머리까락과 눈동자 색이 파랗지 않은 환자들이 인간의 선호 유전자를 분리 배양 치환하는 생명공학 덕분에 양산될지 모른다.




배아로 줄기세포를 유도하려는 생명공학자들은 원시생식선이 출현하기 전인 수정 후 14일 이전의 배아는 생명이 아닌 ‘세포덩어리’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수정 이후 자연스레 분열하면서 개체로 탄생하는 배아는 원식생식선이 나타나야 자격이 생기는 예비 생명이 아니다. 그럴싸한 이용 목적에 따라 세포덩어리로 간단히 규정되는 의학용 연구재료는 더욱 아니다. 수정란에서 배아, 배아에서 태아, 태아에서 신생아, 신생아에서 성체로 자연스레 이어지는 생명은 공리주의로 대상화되어 존엄성을 잃어도 무방한 존재가 아니다. 사람 생명에 존엄성이 사라지면 어떤 과학기술이 대두될까.


수정란부터 사망할 때까지, 세포분열이 왕성한 곳에는 줄기세포가 있다. 면도하다 지칠 정도로 끈질기게 같은 세포를 분열시키는 줄기세포도 나이가 들면 피로해진다. 새치가 어느새 백발로 변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처가 아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릴 때 우리는 노화를 느낀다. 줄기세포가 더욱 피로해지면 퇴행성질환을 앓는다. 환경 영향에 따라, 개개인에 따라, 장기 또는 조직에 따라 퇴화 정도는 일정치 않아 증세는 다양하다. 근육이 약해지거나 호흡량이 줄어들고, 혈관의 탄력이 줄어 뇌나 심장 혈관에 이상이 발생하며, 신경세포가 급격히 줄어 치매로 접어들 수 있다. 그럴 때 줄기세포로 만든 신선 세포를 질환 부위에 정확히 보충하거나 아예 젊은 줄기세포를 퇴행하는 장기에 주입하면 질환이 치료될지 모른다. 줄기세포를 다루는 생명공학은 그 부분을 착안한다.


신선한 줄기세포라 해도 다른 이의 것이라면 거부반응을 피할 수 없다. 형제 사이의 조직적합성도 2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생명공학은 1997년 이안 윌머트가 소개한 체세포 핵이식복제를 응용하고자한다. 환자의 체세포 핵을 이용해 배아를 복제하여 줄기세포를 유도하고, 그렇게 얻은 줄기세포로 신선한 세포조직을 분화시켜 처방하면 부작용 없는 치료가 가능하지 않을까 상상하면서.


새벽에 출근해 밤중에 퇴근하면서 기존 의료기술로 치료할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는 환자와 그 가족의 애타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아파하던 의사들도 생명공학자들이 제시하는 이론에 희망을 품었다. 어디 의사뿐이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환자도, 보호자도, 그 가족과 친지들도 환호하고, 질병에 예외가 아닌 보통 시민들까지 작약한다.




태아 이후 성체의 몸에 존재하는 줄기세포는 매우 안정적이다. 고집스레 흰 머리카락만 내놓는다. 한데, 분화의 스펙트럼이 다양한 배아에서 유도한 줄기세포는 어디로 튈지 모른다. 그래서 어떤 연구자는 ‘럭비공’으로 표현했다. 심장조직과 섞어 배양하면 배아줄기세포는 심장조직으로 분화하여 박동도 한다. 마리아생명공학연구소의 박세필 박사가 그렇게 분화된 줄기세포가 박동하는 동영상을 보여주자 청중들도 가슴이 뛴다. 그런데 시험관의 인체에 들어간 뒤에도 심장조직으로 유지될지 청중은 물론 박세필 박사도 모른다. 주위 여건에 따라 엉뚱한 세포조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암세포로 변할 가능성은 아주 높다. 그래서 ‘안정성’이 없고, 임상에 응용할 수 없다. 초기 배아로 유도한 줄기세포인 까닭이란다. 배아줄기세포를 모두 특정 세포조직으로 분화시키는 기술도 없다. 환자의 몸에 줄기세포를 넣으면 위험천만하다. 원치 않는 세포조직으로 분화되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 그래서 ‘안전성’도 없다.


배아줄기세포는 두 가지 방식으로 유도할 수 있다. 박세필 박사가 시도하는 냉동잔여배아를 사용하는 경우와 서울대학교 황우석 교수가 주로 실시하는 체세포 핵이식 복제 방식이 그것이다.  5년 이상 얼려둔 잔여배아를 줄기세포로 활용하자는 제안이다. 이런 배아줄기세포는 공히 안정성과 안전성이 없다. 황우석 교수는 핵을 제거한 난자에 환자의 체세포 핵을 대신 밀어넣고 전기 자극을 가하여 배아를 복제 창출한다. 자연에 없는 방식으로 억지 수정돼 배아의 모습을 갖춘 복제수정란은 엉겁결에 분열을 시작하는데, 체외에서 줄기세포로 유도하는 방식이다. 연구자들은 인력과 장비와 연구비가 확대 지원되면 안정과 안전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장담하지만 아직 막연한 희망사항일 뿐이다. 따라서 배아줄기세포로 불치병과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주장은 현재, 분명한 허구다.


지난 5월 31일자 뉴욕타임스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황우석 교수는 자신은 생명을 죽이지 않았다고 강변했다. 핵이 없는 난자에 체세포 핵을 넣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 발언은 듣는 이에게 섬뜩한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하기에 충분하다. 난자는 자체로 생명체는 아니나 생명체로 분화할 능력을 가진 아주 특별한 세포다. 체세포도 생명체는 아니지만 생명은 있다. 난자와 체세포로 유도한 복제배아이므로 생명체가 아니라는 논리는 멀쩡한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 수정 이전의 난자와 정자도 생명체는 아니지 않은가.


연구단계인데 배아를 굳이 복제해야 할까. 어차피 폐기될 운명으로 합리화하며 수행하는 냉동잔여배아 연구도 윤리 문제가 없는 게 아닌데, 배아를 일부러 복제한 다음 죽여야 옳을까. 아무리 고쳐 생각해도 연구를 위해 배아를 복제하는 행위는 결코 윤리적일 수 없다. 환자의 체세포를 이용하는 까닭에 거부반응이 없을 거라는 믿음도 확실한 게 아니다. 복제에 사용한 난자의 세포질에 존재하는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는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거부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이미 피로한 노인의 체세포는 줄기세포의 효용이 낮을 것이다.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의 거부반응도 냉동잔여배아로 연구할 수 있는데 밑도 끝도 없는 희망사항을 미끼로 연구비는 거듭 증가하고 감시는커녕 사후 검증도 없다.


최근 우리나라에 줄기세포 은행을 설립한다는 보도가 나왔고, 황우석 교수는 우리나라가 불치병과 난치병을 치료하는 메카로 등극하게 될 것이라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성체줄기세포 은행이라면 모를까, ‘맞춤 치료’를 강조하는 배아복제줄기세포 은행은 모순이다. 안정과 안전성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메카부터 운운하는 모습을 보니 여성의 몸이 심히 걱정이다. 자칫 비윤리적 메카로 손가락질 받을까 두렵다.


박세필 박사는 배아줄기세포로 200여 가지 ‘장기’를 만들 수 있다는 상상력을 과시한 적 있다. 터무니없는 선동이다. 줄기세포는 뇌 또는 심장으로 정교하게 성형되지 않는다. 심장근육이나 뇌신경세포조직의 덩어리 상태로 양이 단순하게 늘어날 따름이다. 무작위로 성장하는 줄기세포는 복잡 미묘한 장기로 분화 성형될 수 없다. 자체 혈관이 없는 줄기세포는 영양이 외부에서 공급되는 까닭에 부피가 얇거나 작게 늘어날 뿐이다.


엽기적 발상이지만, 생명의 시작을 태아로 정의한다면? 후기 배아 몸속의 작은 장기를 적출해 애지중지 배양하면 장기 생산도 가능할지 모른다. 그러자면 자궁이 필요한데, 과학기술은 인공자궁을 귀띔한다. 그런데 노인성 질환은 특정 세포조직이나 장기를 일부 교환한다고 치료되는 질병이 아니라는 점은 외면한다. 노화된 몸에 심장 기능이 갑자기 강해지면 나머지 장기가 위험할 수 있다. 차라리 새 몸에 머리를 바꿀까. 그를 위해, 생명의 시작을 태어난 후라고 규정한다면? 공리주의 윤리학자인 피터 싱어의 이론을 빌려, 통증을 느끼지 않으면 이용해도 좋다고 규정한다면? 뇌 없는 허우대를 성숙시켜 머리를 교환하자고 주장할까 겁난다.


하지만 안심하시라. 피로도가 심한 퇴행성질환 환자의 체세포로 분화시킨 세포조직도, 장기도, 허우대도 소용없을 것으로 예상하므로. 복제 양 ‘돌리’가 한창 나이인 6살에 늙어 연구소 측은 안락사 시켰다. 돌리에게 체세포 핵을 제공한 암양의 나이가 6살이었고, 태어나자마자 6살로 시작한 돌리는 6년 만에 12살의 나이로 늙었다는 해석이었다. 그렇다면 퇴행성질환을 배아복제줄기세포로 치료할 수 있을까.




황우석 교수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어도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고 파스퇴르의 언설을 차용하며 민족주의의 심금을 울린다. 눈물겹다. 그런데 황우석 교수는 국가 부가가치 또는 차세대 국가성장동력을 후렴처럼 내세운다. 언제는 불치병과 난치병 환자를 위한다더니, 환자의 고통을 미끼로 돈벌이하자는 건가. 그런데 불치병과 난치병은 대부분 퇴행성질환이다. 유전병을 제외한 암, 백혈병, 당뇨병, 치매와 같은 퇴행성질환은 나이들어 발생하는데, 노인들을 환자로 규정해도 좋을까. 좋다. 노인들의 환자이라고 치자. 노인성질환의 치료를 위해 거액을 지불할 효자가 많을까. 아이 과외공부도 마다하고 늙은 부모를 치료하려 해도 아마 노인들이 거부할 공산이 크다. 내리사랑이 생명의 본성이므로.


젊은이들도 간혹 불치병과 난치병으로 고통을 받는다. 그들도 치료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국가 성장동력이 발생할 정도로 젊은 환자의 숫자가 많을 것 같지 않다. 한데 젊은이들의 질병은 예방이 가능하다. 농축되는 대기와 수질오염물질, 독성물질로 오염된 농작물과 그 가공식품, 넘치는 방사성물질, 질주하는 속도와 속도에 맞춘 업무량에 지쳐 쌓이는 스트레스, 그 스트레스를 잠재우는 약품들은 유전병을 비롯하여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각종 불치병과 난치병을 양산하지 않던가. 하지만, 예방하기 비교적 쉬운 교통사고도 줄어들지 않는다. 공급자 편의의 획일적 산업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젊은이들의 불치병이나 난치병을 방관하자는 뜻은 아니다. 치료보다 예방이 선행되어야한다는 요청이다. 아울러 성체줄기세포의 활력이 좋은 젊은이에게 배아줄기세포 치료의 환상을 심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이다. 다행스럽게 최근 성체줄기세포의 연구가 활발하다. 체외에서 특정 세포조직으로 재분화할 경우 안정성과 안정성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인데, 배아줄기세포에 목매는 우리나라의 사정은 아니다. 배아를 죽이지 않아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으므로 성체줄기세포 기술은 종교계들도 환영하고, 미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엄청난 국가 연구비를 투여하고 있지만 우리는 조용하다.


성체줄기세포가 배아줄기세포의 대안일 수 있지만 먼저 혜택에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필시 거액의 치료비가 들어갈 텐데, 국가 연구비로 획득한 기술인만큼, 경제적 부담으로 치료를 포기해야 하는 위화감을 사회적으로 제거해야 한다. 또한 성체줄기세포 역시 부피가 많이 요구되는 질병의 치료는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한계가 있다. 환자의 몸을 다루는 까닭에 임상에 적용할 때 윤리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헌데 그 정도의 문제는 기존 방식으로 충분히 극복 가능한 범주 내에 있다.


유전병의 경우 치료가 막막한 게 현실이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 유전병 인자가 있는지 미리 파악하면 인권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사랑하는 사이의 철석같은 약속이 깨지는 것은 물론, 직장 선택이나 보험에도 차별받을 수 있다. 영화 <가타카>처럼 특정 유전자가 있다는 이유로 사회적 낙인이 찍히는 사태가 생길 수 있다. 성체줄기세포를 타진해볼 필요도 있겠지만 유전병이 만연될 정도로 오염된 우리 주변의 환경을 먼저 개선해야 마땅하다.


아무리 양보해도 기존의 불치병과 난치병을 치료하는 줄기세포로 차세대 국가성장동력을 도저히 끌어갈 것 같지 않다. 부가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이려면 거액을 지불할 환자를 그만큼 늘여야 하는데 그게 쉬운가. 혹시 지금도 고부가가치를 약속하는 미용과 성형을 꿈꾸는 것은 아닐까. 바로 피부와 연골이다. 안전하지도 안정적이지도 않은 배아줄기세포는 일단 제외하고, 성체줄기세포로 다양한 피부조직과 연골을 분화시켜 은행에 냉동시켜 보관한다면 환자라기보다 고객은 부작용 없는 젊은 피부와 코와 귀를 취향에 따라 언제든지 골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피부의 탄력을 잃은 30대 미시족부터 유인하면 어떨까. 줄기세포는 반도체 사업을 능가할지 모른다.




환자의 체세포로 배아를 복제함으로써 “철문 4개를 한꺼번에 열었다! 이제 사립문만 남았다!”고 포효한 황우석 교수는 “지나친 기대는 금물”이라며 환자들에게 모순어법을 구사했건만, 우리의 한결같은 언론들은 황우석 교수를 끝 모르게 자랑스러워한다. 전 세계가 떠들썩하다며 더 떠들썩한 우리 언론은 윤리적 우려를 표명하거나 ‘민족주의적 집단현상’이라며 우리를 비아냥하는 서방 언론들의 보도에는 일제히 눈을 감는다. 덕분에 황우석 교수는 성역 속의 영웅이 되었다.


황우석 교수의 결과에 높은 관심을 표명하는 외국의 어떤 과학자는 연구 여건이 좋은 제 나라는 놔두고 굳이 한국에 오려고 성화다. 왜 그럴까. 난자 채취가 터무니없이 쉬운 우리의 생명윤리 토양과 관계없을까. 우리보다 영악한 자본주의 국가들은 배아복제 영역에 왜 투자를 삼갈까. 쇠젓가락을 쓰지 않기 때문일까. 그들의 연구 능력과 자금과 인력이 우리보다 부족하기 때문일까. 최근 지구촌의 건강한 시민들은 반환경이나 비윤리적으로 생산한 제품의 교역을 거부하는 운동을 펼치는데, 성체줄기세포에 적극적인 국제사회는 무엇을 웅변하는 것일까.


앞으로 10년 동안 비행기 일등석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특혜도 마다하지 않은 황우석 교수는 국가원수 급 경호를 받는다. 불치병과 난치병을 치료할 수 있는 계기를 구축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차세대 성장동력을 독점한 국보급 ‘애국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연구는 혼자 일구는 것이 아닌데, 아이디어는 물론 기술과 제품도 마찬가지인데, 좀 지나치다 싶다. 남들이 외면하는 연구에 단독 대쉬하는 우리의 국보급 연구자는 조용한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 대스타로 등극했고 우리는 행복을 강요당한다.


“10년 뒤 나의 결정이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국민이 판단한다면 미련 없이 연구를 포기하고 한국을 떠나겠다.”고 배수진을 친 황우석 교수는 사석에서 “복제인간을 시도하는 자에겐 사형을!” 언도해야 한다며 자신의 연구에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사이언스에 실린 최근 연구에 앞서 ‘사망과 불임 가능성’을 난자기증자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점이 국내외 언론들에 공개된 바 있다. 의료용을 연구용으로 전용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조용하기만 하다.


가톨릭 주교회의 관련 위원회와 불교생명윤리연구소는 최근 인간 생명을 파괴하는 배아연구의 비윤리성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고 기독교 생명윤리협회도 배아복제는 언제든지 인간복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며 성체줄기세포의 적극적 연구를 주문했다. 그런데 주지하다시피 배아복제는 윤리 문제만 극복하면 용인되는 정도를 넘어선다. 과학사회학을 전공하는 국민대학교 김환석 교수는 대부분의 불치병과 난치병 환자에게 신기루에 불과한 배아복제줄기세포는 부자의 생명연장을 배려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를 당장 섬뜩하게 하는 것은 배아줄기세포와 황우석 교수에 대한 성역화다. 작은 비판도 전혀 수용되지 않는 맹목적 사회분위기다. 쇼비니즘을 연상하게 하는 집단 민족주의 현상이다. 독일 뮌스터 대학의 송두율 교수는 다수 부풀려진 감이 있는 황우석 교수에 대한 찬양 일색을 걱정한다. “국위를 선양한 한 과학자에 대한 찬사는 이 연구가 가진 위험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충분”하더라도 “분명히 한국 언론들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라고 지적한다. 비판 없는 과학기술은 안전할 수 있을까.


최근 아이의 80퍼센트가 아토피를 갖고 태어나고 입대 군인의 40퍼센트에서 정자 기형이 나타난다는데, 퇴행성질환이 만연되는 환경을 그대로 두고, 그래서 나타나는 말초적 현상을 치료하려고 후손을 희생시킬 수 없다. 윤리는 과학기술의 발목이나 잡는 훼방꾼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기반이며 정언명령이다. 생명을 다루는 분야일수록 더욱 단단한 윤리기반 위에서 엄격히 다루어져야 옳다. 그런데 우리 기반은 왜 이리 허술한 것인가. (누가들의세계, 2005년 7월호)

황우석교수님에 대해 보도하기에 앞서, 기자들이 꼭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박병상박사님 홧팅!!!
그렇게 생명 윤리가 소중하다면 제발 낙태 문제부터 다루어 주세요. 과학 기술을 따라잡지 못하는 윤리는 결국 발목을 잡는 훼방꾼 노릇만 하게 됩니다.
결국은 윤리성을 앞세워 황교수를 견제하는 것 같군요
황우석 교수의 성역화라...비약적 상상이 아닌지
글을 읽다보니 결국은 황우석 교수 죽이기랑 비슷한 맥락으로 가는군요
다 짜여진 각본처럼 100분 토론에서도 짜여진 각본으로 하셨는지 궁금하네요
80퍼센트가 아토피를 가지는 것은 위생상태가 개선되서 면역학적 발달이 불충분하기 때문이고 정자기형이 나타나는 건 스트레스나 각종 환경호르몬 영향 때문이지 생명공학이랑은 아무 상관없습니다. 퇴행성 질환이 만연되는 것 역시 의학이 발달해서 인간의 평균수명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었기 때문입니다. 의학과 과학이 없었던 시절에는 아토피질환 따위가 생기기도 전에 대부분의 영아와 신생아들이 사망했고 퇴행성 질환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습니다. -_- 곡학아세 하지 마세요. 누가들의 세계? 차라리 보살들의 세계가 당신네 누가들의 세계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고고한 세계입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아래로 중생을 계도하기 전에 위로 보리를 먼저 구하시죠. 아무데나 아무 말 같다 붙이면 다고 문장이 됩니까? 명확한 근거를 가져야죠? 무식하면 공부하세요 공부, 당신은 생물학도지 의학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인간에 대해 얼마나 아시나요? 정 궁금하면 알레르기 질환이나 퇴행성 질환에 대한 책이라도 좀 읽어보시든가요. 의학자들이 보는걸루요. 알지보 못하면서 마구잡이로 가져다 붙이는 꼴이라니, 교수로써 부끄러운 줄 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