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천

디딤돌 2021. 4. 20. 18:40

 

20년 넘게 살던 아파트에서 새집으로 이사한 지 1년이 넘었다. 맨손으로 조개 캐던 인천의 아낙들이 옹기종기 모이던 마을인데, 고층 아파트단지로 번듯해졌고, 입주했다. 고가로 이어지는 간선도로 옆 아파트는 언제나 시끄러웠고 먼지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여름 뙤약볕은 형벌 같은 더위를 안겼고 난방 온도를 한껏 올려도 겨울이면 엄동설한이었는데, 바꿨다. 앞뒤 창문으로 맞바람이 시원한데, 조용하다. 전과 비슷한 면적인 집안은 밖이 제법 쌀쌀해도 따뜻하고, 관리비는 훨씬 저렴하다. 부족한 대중교통이 아쉽지만, 일찍 나서 걸으니 딱히 불편한 게 없다.

 

전 아파트와 마주하던 집은 세입자였는지 알 수 없는데, 세 차례 바뀌는 동안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다. 위아래층과 인사 나눴지만, 바빠 그랬는지 왕래하는 관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위층 아이들은 개구쟁이였다. 친구 모일 때 특히 쿵쾅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더 준비한 요리를 겸연쩍게 건네주곤 했는데, 중단됐다. 중학생이라 의젓해졌다고 했다. 학원 때문인지 모르는데, 아래층은 우리 난방 배관의 물이 새면서 부인네끼리 가까워졌다. 하지만 그 집은 정들기 전에 소리 없이 이사했다.

 

신축 아파트는 현관을 마주하지 않고 나란히 놓았는데, 입주 초기 옆집과 엉겁결에 인사를 나눈 이후 마주친 적이 없다. 아래층에 실수했다. 좀 많이 걸어 피곤한 날이었을까? 계단으로 오르다 그만 아래층 번호키를 누른 것이다. 다른 반응 보이는 번호키에 의아해하다 꽁지 빠지게 한층 더 올라갔는데, 얼마 안 가 관리사무실에서 실수를 확인하는 전화를 했다. 그것참! 작은 실수도 숨길 수 없는 세상이다. 며칠 뒤, 한 층 먼저 내려 승강기 왼편으로 가는 이웃을 얼핏 보았다. 언제 사과를 하나.

 

코로나19 여파로 배차간격이 늘어나, 버스 놓치면 찬바람 속에 오래 기다려야 한다. 그래도 승용차 이용에 불편이 없어 그런가? 아파트 가격이 제법 올랐다고 맘카페 회원들이 흐뭇해한단다. 엄마들의 주요 관심이 집값인 세상에서 승용차로 나갔다 들어오면 그만인 단지 주변은 대체로 썰렁하다. 상가 건물도 새로 지었지만, 거의 비었고,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니다. 익숙지 않은 콘크리트 공간에서 마음을 나눌 시간과 살가운 이웃은 만나기 어렵다.

 

대도시처럼 고층 아파트가 솟아오른 요즘은 다르겠지만, 한 세대 전 농촌은 공동체의 모습을 간직했다. 늦은 밤에 불쑥 찾아가자 강화의 사촌 형은 장독대에 올라 냅다 소리를 질렀다. 야간 생태조사를 마치고 아침까지 쉬려던 참이었는데, 사촌 형은 인천에서 동생이 왔으니 모이라고 적막을 깼고, 자리 앉기 무섭게 술과 안줏감을 챙긴 청년 대여섯이 모였다. 빠듯한 일정을 늦춰야 했지만, 도시에서 잊었던 푸근한 정을 느꼈다. 어릴 적 주안도 그랬다. 어느 집에서 재배했는지 잘 아는 배추를 담벼락까지 쌓고 담그는 김장은 동네잔치였고 조무래기들은 마냥 신났다.

 

사촌 형과 술잔 기울이던 마을은 공동체의 흔적이 사라졌다. 거대한 물류센터를 쉴 틈 없이 드나드는 트럭은 노인에게 위협으로 다가왔지만, 지금은 노인도 농촌도 농민도 들판도 없다. 직선으로 확장된 도로는 경관을 독점하는 맨션과 카페를 오가는 승용차로 항상 막힌다. 일찍 장가드는 친구의 처가였던 김포의 마을도 아파트단지로 변했다. 함 팔던 도시 청년들의 섣부른 치기를 보며 유쾌하게 참견하던 마을 사람들은 어디로 흩어졌을까? 친구 처가와 같은 마을에 사는 오랜 친구라 했는데.

 

사진: 독일 남부 프라이부르크의 보봉 신도시의 부러운 모습. 과거 프랑스 주둔군 기지를 활용해 조성한 신도시는 지형을 그대로 살렸다. 미끄럼틀은 어린이 뿐 아니라 출퇴근하는 어른이 즐겹게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재개발이 예정된 동구 어느 골목에서 따뜻한 모습을 보았다. 아파트단지로 변했으니, 10여 년 전 일이다. 재개발 승인을 자축하는 현수막이 펄럭이는 골목을 지나는 주민은 만나는 이웃과 반갑게 인사를 했고, 구멍가게에서 음료수를 사곤 나누는 게 아닌가! 잠깐 본 모습이지만 부러웠고, 사라질 풍경이라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20년이 훌쩍 지난 21세기 인천에 그런 동네는 남았을까? 드물지만 남았다. 이웃이 반가운 마을이 분명히 있다. 부평도 있다. 승용차 흐름이 편안한 콘크리트 공간은 아니다. 자동차 통행이 불편한 골목일수록 이웃 사이에 정이 따뜻하게 흐른다.

 

도로는 꼭 사통오달이어야 하나? 대형 아파트단지가 주도권을 쥔 장소일수록 그렇다 강변한다. 청라국제도시는 서울로 빠르게 연결되는 도로가 최우선이지만 출퇴근 시간이면 늘 막힌다. 그런 장소의 주민은 아파트나 승용차 안에서 고립감을 감수해야 한다. 사통오달 아스팔트와 달리 주민의 마음이 흐르는 길은 구불구불하다. 모름지기 동서고금의 남녀노소는 길에서 만나며 마음을 나눈다. 일직선으로 사통오달 되는 도로는 예나 지금이나 낯설다. ‘리바이어던’, 살갑지 않은 괴물이 엄습하는 통로다. 삶의 뿌리를 흔들 수 있다.

 

나지막한 산에서 기원해 들판을 적신 굴포천은 부평 기억의 오랜 원형질이다. 스스로 부평 사람이라 생각하는 이에게 굴포천은 추억의 장소를 넘는다. 무언가 연결된 마음속 뿌리다. 복개돼 눈앞에서 한동안 사라졌어도 가슴 한구석에 아스라하게 남은 굴포천이 다시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완전하지 않더라도 콘크리트를 철거해 복원하겠다고 한다. 복원된 굴포천은 부평의 기억을 재현할 것인가?

 

승기천이 흐르던 주안의 인주대로는 사통오달 도로로 복개되었다. 주안 사람의 기억에 아스라한 겨울철의 신기촌 스케이트장은 주변의 논이 온통 단독주택과 다세대주택으로 개발되면서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복원 가능성은 남았다. 하지만 다닥다닥하던 주택이 50층을 넘나드는 초고층 아파트단지로 맹렬하게 재개발되면서 가물가물한 기억은 머지않아 작별을 고할 것이다. 하늘 비좁게 재개발된 아파트단지에 모일 입주민에게 승기천 기억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직장까지 사통오달 이어질 도로를 요구하겠지.

 

천만다행으로 굴포천은 신기루 같은 도로의 미망에서 깨어날 예정이다. 예산이 이어진다면 겉모습은 쉽게 재현할 것이다. 맑은 물이 다시 흐르면 사람이 모여들어 흥청거릴 수 있겠지. 복원한 굴포천으로 일자리도 창출하고 지역의 상권도 활성화하겠다는데, 그것으로 충분할 수 없다. 마음이 흐르는 길로 거듭나야 한다. 사통오달 도로 옆의 고층 아파트를 주목했던 부평 사람들이 이윽고 지역 문화와 기억의 터전, 이웃의 희로애락에 마음을 기울이는 공동체의 뿌리를 가꾸기 시작할 것인가?

 

산은 강을 막지 않고 강은 산을 넘지 않는다. 넘으면 파탄인데, 대형 댐과 4대강의 대형 보, 그리고 전국을 바둑판처럼 가르는 고속도로가 굽이치던 생태계를 파탄을 냈다. 산을 뚫고 강을 가로막은 콘크리트는 생태계만 파국으로 몰아넣은 게 아니다. 길의 흐름을 차단하면서 이웃을 멀어지게 했다. 생태적 완충력을 파괴하는 콘크리트는 감염병 전파를 촉진한다. 고속도로와 국제공항을 타고 세계 곳곳에 창궐하는 코로나19만이 아니다. 2002년과 2015년 우리를 긴장하게 만든 사스와 메르스도 마찬가지였지만 앞으로 더욱 무섭게 변형될 코로나바이러스도 무시할 수 없다. 온난화된 지구에 나타날 감염병의 목록은 길다.

 

신체에 대동맥이 중요하지만, 정작 생명현상은 실핏줄에 있다. 국가적으로 고속도로가 필요하겠지만, 터전까지 사통오달일 필요는 없다. 실핏줄로 세포들이 영양분을 주고받듯, 터전은 마음의 길로 구불구불 이어져야 건강하다. 그런 마을이라면 코로나19에 휩쓸리지 않는다. 감염된 이웃이 있다면 마을에서 적극적으로 보살핀다. 이웃 마을로 번지지 못하게 막아낼 게 틀림없다. 마음이 이어진 공동체에 코로나19보다 위험한 감염병이 닥치더라도 마찬가지다.

 

일자리를 창출과 지역 상권을 활성화로 부족하다. 공동체에서 돈벌이는 그리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부평 사람에게 중요한 가치는 뿌리에 대한 기억이다, 굴포천 복원을 계기로 회복할 수 있다. 괴나리봇짐을 맨 나그네가 지친 몸을 이끌고 마을에 당도하면 바로 집으로 달려가지 않는다. 어귀에서 마음이 놓이며 비로소 쉬기를 청한다. 기억이 되살아나며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굴포천이 부평에 그렇게 자리하길 희망한다. 머리를 맞대보자.

 

굴포천은 맑은 물만 아니라 마음이 흐르는 공동체 터전이어야 한다. 복원 이후 부평에 뿌리를 내리려는 이웃의 삶과 연결해야 한다. 복개 뒤 떠났던 사람들이 돌아오도록.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고 이웃 사이에 기억이 굽이굽이 흐를 수 있어야 한다. 멀리서 방문한 친구와 흔쾌히 찾을 수 있도록. (다시 부평, vol.2, 2021년 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