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천

디딤돌 2021. 9. 30. 23:15

 

경인국도가 관통하는 주안사거리 일원은 어릴 적 기억이 오롯한, 나름 고향이다. 1980년 이전 모습을 남긴 사거리를 가끔 지나가지만, 분주히 오가는 이 중에 얼굴을 서로 기억하는 이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두리번거리는데, 최근 재개발 분위기가 감돈다. 주안초등학교가 헐린 자리를 치솟는 아파트와 상가는 입주 전부터 높은 프리미엄이 붙었다는 소문이 돈다. 살갑던 기억이 희미해진 요즘, 낯설다.

 

대보름 쥐불놀이하던 들판은 어느 이웃의 밭이었다. 하지감자를 갈무리하면 배추와 무를 심었을 텐데, 그때를 위해 농부는 구덩이에서 묵히던 거름을 밭고랑에 부었고, 우리 집 변소도 거름에 일조했다. 김장철이면 거름 냄새가 코를 찌르던 밭에서 수확한 배추와 무가 우리 집 마당에 쏟아졌고, 동네 아낙이 모여 왁자지껄 김장김치를 담갔다. 조무래기들은 괜스레 몰려다녔고.

 

배추와 무를 뽑은 밭은 우리 놀이터였다. 자치기와 구슬치기, 배드민턴 경기장이었다. 판자로 만든 라켓으로 깃 떨어진 셔틀콕을 금 너머로 남겼고, 겨우내 고랑의 눈이 얼어붙으면 외발썰매를 탔다. 대보름 저녁, 구멍 낸 깡통 속 나뭇가지는 벌써 타버렸다. 그러자 어떤 재주꾼이 주변 집의 판자 울타리를 뜯어냈다. 바싹 마른 판자는 잘 탔다. 놀란 집주인이 소리 지르며 뛰어나오기 전까지 연실 뜯었을 게 틀림없다.

 

김장하던 아낙 중에 판자 울타리 집에 살던 분도 있었을까? 그랬을지 모른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집주인의 고함에 놀라 모두 깡통을 내버리고 달아났지만, 동작이 둔한 나는 엉거주춤, 잡혔다.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던 여인은 아이들 달아난 방향을 물었고, 나는 다른 방향을 가리켰겠지. 냅다 소리 지르며 엉뚱한 쪽으로 달리던 분, 이후 주안사거리를 떠났다. 공업단지로 바뀐 주안역 뒤. 염전 쪽 노동자를 위한 주택이 천편일률로 들판을 차지한 이후의 일이다. 중학생 이후 나는 그 놀이터를 잊었다.

 

욕망하는 식물에서 마이클 폴란은 1630년대 네덜란드의 튤립 광풍을 들췄다. 터번 비슷한 튤립은 유럽에 없었지만, 네덜란드에 들어가 투기의 대상이 되었다. 알뿌리로 판매하는 튤립을 집안의 보석처럼 여기던 네덜란드인은 조바심이 컸을까? 시장에 알뿌리가 선보이면 인기 품종을 사재기했고 알뿌리 심을 때 가격은 정정이었는데, 1637년은 광기에 가까웠다. 60길드인 한 뿌리에 1800길드, 당시 가치로 우리 돈 1억 원에 가깝게 치솟았다는데, 더 오를 거라 기대한 탓이리라, 정작 튤립이 꽃으로 나오자 원래 가격으로 곤두박질했다.

 

사진: 수요를 무작정 창츌하는 도시 재가발은 투기를 부추긴다. (사진츨처는 인터넷)

 

식구 똥이 감자와 배추로 되돌아오던 주안은 지금 없다. 60년대의 허름했던 노동자 주택은 우후죽순 들어선 단독주택에 자리를 내주었지만, 노태우 정권의 주택 200만 호 공급 정책으로 대부분 헐렸다. 대신 다세대주택이 다닥다닥 이어졌는데, 다세대주택도 운명을 다한 모양이다. 멈칫하던 재개발이 다시금 꿈틀거린다. 다세대주택으로 채워졌을 때, 주안사거리의 주민은 서로 얼굴을 알고 지냈다. 무단 주차한 승용차를 피해 다니는 세입자도 소외되지 않고 탁주 잔 기울이며 고단한 하루를 다독였지만, 요즘 불안하다. 프리미엄 소문이 불 지핀 재개발 열풍으로 언제 떠밀려야 할지 모른다.

 

10년 전? 인천시 도시공원위원회 위원일 때, 주안사거리의 18개 중 먼저 재개발에 나선 지역의 업체가 어린이공원 계획안을 심의에 올렸다. 40층을 넘나드는 아파트를 요령 있게 배치한 평면도는 반드시 조성해야 하는 어린이공원을 자투리에 처박았다. 있으나 마나일 정도로 푸대접했는데, 대안이 보였다. 비록 의무일지라도 18군데 재개발 지역의 어린이놀이터를 재개발 지역의 녹지와 체계적으로 연결하면 근사할 거라 판단했다. 마음 모은 위원들은 심의안을 부결하며 설계 수정을 권고했다. 이후 위원회에서 빠졌는데, 설계가 수정되었다는 소식은 여태 듣지 못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회원국뿐 아니라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낮은 우리나라일지라도 주택보급률은 현재 100%를 뛰어넘는다. 일인가구를 따지면 여전히 모자란다는 주택업계의 주장은 어처구니없는데, 시골은 물론이고 도시 곳곳에 빈 주택이 널렸다. 대부분 낡았어도 사유재산이라 이러지 저러지 못한다고 지방자치단체의 실무자마다 하소연한다. 제도와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아 재개발이 어렵다는데, 관심이 없는 건 아닐까? 정작 아파트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는다. 일인가구의 수요 때문일까? 투기를 방조하는 제도와 자금 흐름, 그리고 내일 더 오를 거라는 기대심리가 조바심을 일으키는 건 아닐까?

 

집만 남는 게 아니다. 집안의 공간도 남아돈다. 내 집은 어떤가? 직장 근처에 작은 터를 마련한 큰애의 방이 비었다. 식당과 거실은 낮에 텅텅 빈다. 세탁기는 일주일에 몇 시간 사용하지 않고, 사방의 책장에 겹겹이 꽂아둔 책은 혼자 읽을 따름인데, 이사할 적마다 골머리를 앓아야 한다. 버리지 못하는 건 책만이 아니다. 옷도 신발도 남고 냉장고를 어둡게 만드는 식재료도 넘친다. 이웃과 나누면 숨은 가치를 발할 수 있는 물건이고 공간이다. 공유하면 훨씬 효율적일 테고 이웃은 더욱 돈독해질 텐데.

 

최근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회(IPCC)는 경각심을 한층 끌어올린 ‘6차 보고서를 펴냈다. 안전의 마지노선이라 믿는 산업화 이전보다 섭씨 1.5도 상승하는 시기2050년에서 10년 이상 앞당겼는데, 우리의 대응은 한가하기 짝이 없다. 때를 같이 해 국회를 통과한 탄소중립기본법은 경각심은커녕 나락의 길을 재촉한다. 그에 발맞춘 걸까? 3기 신도기를 계획하는 국토교통부는 국토의 콘크리트 칠갑을 부추긴다. 제조 과정에서 비슷한 무게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하는 시멘트로 수도권의 그린벨트와 농경지를 남김없이 뒤덮으면 탄소중립은 물 건너간다. 후손의 생존은 더욱 불투명해질 것이다.

 

선출된 단체장마다 낙후되었다 푸념하는 인천 동구를 얼마 전에 다녀왔다. 낙후되어 걱정이라기보다 인근 중구와 통폐합될까 두려운지, 단체장은 고층 아파트단지에 반색하지만, 많은 주민은 시큰둥했다. 세입자가 대부분이라 그랬을까? 확인하지 않았는데, 일제강점기부터 군수공장이 들어선 동구에 노동자로 찾아와 삶터를 마련한 주민들은 상부상조하며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이어간다. 누가 붙였는지, “재개발을 환영한다!” 현수막 아래의 골목을 오가며 눈길 마주치는 주민은 음료수 캔 나누며 이야기하다 헤어지는 모습을 연출했다. 10년을 넘게 살아도 위아래와 앞집 옆집 이웃에 무관심한 고층 아파트에서 상상하지 못한 다정함이었다.

 

고단하던 인천 동구 역사와 쾌를 이어오는 인천산업선교회는 일제강점기부터 군사정권까지, 노동자에게 서슬 퍼렇던 독재에 저항했다. 민주화 성지라 그런 걸까? 재개발 세력은 헐어내겠다며 기세등등하다. 희생과 투쟁의 중심인 기억의 장소이기에 반드시 보전해야 옳지만, 투기에 눈먼 자에게 가시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그 교회 주변에 어깨를 오순도순 기대는 주택들은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공유하며 우정을 나눈다. 재개발로 파괴할 대상일 수 없다. 좀 낡긴 했어도 고층 아파트로 망가뜨릴 수 없다. 아파트 이외의 대안은 없을까?

 

독일 서베를린 복판을 차지한 우파 공동체(Ufa fabric)는 히틀러의 영화사 터였지만 전쟁 뒤 히피에 점유된 이후 바꿨다. 물과 전기, 그리고 텃밭과 터전을 주민과 공유하는 장소로 자리매김한다. 재개발이 인천 동구에 한정된 문제는 아니다. 수도권을 비롯해 전국 대도시가 비슷한데, 투기를 조장하는 아파트에서 벗어나 원주민이 떠나지 않는 공동체 공간으로 가꾸어낼 대안은 없을까? 주택이 남아돌고, 아파트 입주할 청년은 점점 줄어드는 상황에서.

 

우물 ‘() 자를 참고하면 어떨까? 외곽의 8개 구역은 방해받지 않는 개별 공간으로 사용하고 가운데 넓은 구역은 이웃과 함께 공유하는 공동체 마당으로 활용하자는 상상이다. 한꺼번에 철거한 뒤 건물 높게 짓는 폭력적 재개발에서 탈피해, 세입자도 소외되지 않는 공동체를 현재 공간에서 우물 정() 개념으로 구상하는 대안은 불가능할까? 심화되는 기후위기 시대에 우파 공동체는 좋은 참고가 될 텐데. (작은책, 202110월호)

 

 
 
 

서평·추억

디딤돌 2021. 9. 30. 23:05

생물학 밖에서 만난 생태주의자

 

과학적 진리는 유행에 민감할까? 터무니없다. 열역학이나 만유인력의 법칙이 때와 장소에 따라 바뀐다던가? 과학은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사회 분위기에 흔들리는 이론이 아니다! 하지만 과학계 현실은 어떤가? 전부는 아닐지라도 많은 과학자는 거대자본이 저지른 환경오염의 현장이나 권력이 추진하는 개발 앞에서 침묵하거나 엉뚱한 논리로 진실을 덮으려 했다. 1994년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운동의 현장에 나타난 당시 과학기술부 차관은 엉겁결에 과학은 정치의 시녀라고 실토했는데, 일찍이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은 과학도 주도권 경합으로 이론이 바뀔 수 있다고 주장했다.

 

찬란했던 과학 성과도 당시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프레온이란 상표명으로 등장한 염화불화탄소가 호흡기에 치명적인 냉매, 암모니아 가스를 안전하게 대체한다는 사실에 환호했지만, 장차 그 물질이 오존층을 파괴하리라 당시 과학은 짐작하지 못했다. 현재 코로나19 백신을 안전하게 냉각하는 냉매는 프레온과 달리 오존층 파괴의 주범은 아니라던데, 내내 안전할까? 1970년대 도입한 황소개구리가 양식장을 빠져나와 고유 생태계를 교란할 가능성을 과학자는 예측 못 했을까? 알 수 없는데, 수달이 황소개구리를 잡아먹으며 늘어날 거라 예상했을 리 없다.

 

수돗물에 불소를 적당량 섞으면 이를 튼튼하게 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확인한 미국의 치과의사가 환호했다고 했다. 그들은 과학이라 믿었다. 엄혹하던 시절 민주화운동을 지원한 치과의사도 그리 믿었다. 생물학을 전공해 그랬는지 불소라는 물질에 관심 기울이지 않았는데, 민주화운동에 부채 의식이 있던 차에 후배인 치과의사가 내민 서명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군사정권 시절 치도곤당한 사실도 있다. 모든 약은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건 진리다. 그 진리를 이해하기에, 독극물인 불소도 희석하면 이를 튼튼하게 한다는 그의 논리를 믿기로 했는데, 곤란한 상황을 만났다.

 

과학을 공부한 탓인지, 근거를 확인하지 않으면 행동하지 않는 습관이 생겼다. 다양성을 이해하므로 생명공학을 받아들이면 장차 위태로운 환경을 만날 수 있다는 걸 직감하고 행동에 나섰지만, 평소 생각해본 적 없는 과학기술 분야를 만나면 바로 반응하지 못했다. 거대자본과 권력이 중앙에서 지배하는 핵발전과 석탄화력발전을 반대하는 데에 큰 고민이 필요 없었지만, 수소연료는 그렇지 못했다. 평소 신뢰하는 활동가의 행동에 대한 확신이 생길 만큼 공부가 필요했는데, 수돗물 불소화는 뜻밖이었다.

 

사진: <녹색평론> 발행인 고 김종철 선생. (출처는 인터넷)

 

과학 중에 말랑말랑한 생물학, 생물학 중에 말랑말랑한 생태학이 좋았다. 표현된 유전자를 조사해 진화 관계를 생태학과 연계하며 검토하는 전공은 논란이 많은 만큼 주장하는 목소리가 커야 효과가 있는데, 논란을 허용하지 않는 진리도 있다. 어떤 종이든 타고난 유전자의 다양성을 잃으면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한데 생명공학이 근사하게 그린 성과는 유전자를 단순화해야 가능한 과제였다. 기후변화로 기상이변이 속출하는 환경에서 치명적인 기술이건만, 생명공학자는 눈을 감았다. 감언이설로 자본과 권력을 등에 업었다.

 

학술적 증거를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언론이 돌연히 부각한 생명공학자의 주도로 2000년 전후 세계 최초라는 수식어가 우리 사회에 남발되었고, 생명공학에 열광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졌다. 유사 이래 최대의 국가 자산으로 등극할 거라 믿는 정치 권력의 지원으로 생명공학 연구비가 거침없이 확대될 때, 녹색평론에 원고를 보냈다. 절박한 마음이 앞서 중언부언했지만, 녹색평론은 흔쾌히 게재를 허락했다.

 

환경단체와 종교단체, 그리고 여성단체가 연대한 생명안전윤리연대모임의 사무국장으로 행동하던 199811월이었다. 그 무렵 무리했는지, “원인 불명 혈흉이라는 진단으로 입원해 재채기는커녕 하품도 할 수 없었을 때, 김종철 선생의 전화를 받았다. 숨이 가빠 긴 통화는 어려웠는데, “명민한 글을 보내주어 고맙다고 했다. ‘명민의 판단기준은 인문학자마다 다를 텐데, 선생은 문장보다 내용에 무게를 두었을 게 분명하다. 골치 아픈 과학 이론을 시시콜콜 이해하지 않아도 인문학자의 직관으로 생명공학에 거부감이 들었나 보다. 수돗물 불소화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군사독재정권은 다른 의견을 폭력으로 억압했다. 건강한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건강한 사회도 다양성이 근본이거늘, “건강한 사회를 위한다는 명분을 자랑스러워하던 치과의사들은 왜 수돗물 불소화에 대한 김종철 선생과 녹색평론의 부정적 의견에 진저리쳤을까? 치과의사 중에 지배 권력의 일방주의를 경계하는 녹색평론을 구독하는 독자도 많았을 텐데, 배신감이었을까? 기득권을 쥔 과학자라도 새롭게 전개되며 설득력을 갖추는 과학적 논리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고 토머스 쿤이 지적했지만, 수돗물 불소화 주장은 억지에 가까웠다. 밀어붙이려는 세력에 의해 검증은 등한시되었고, 결론은 왜곡되었다.

 

김종철 선생은 영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다. ‘생태시를 호의적으로 바라보는 그는 현장을 외면한 시어를 높게 평가한 적이 없다. 기득권의 탐욕을 견인해온 효율화는 화석연료 과소비를 불러들였고 기후변화는 위기로 치달아가는데, 우리 사회는 군사정권 이후 노골적으로 개발, 발전, GNP, 선진국 타령에 젖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선생이 녹색평론을 발행하지 않았다면 미쳐버리거나 열병에 걸렸을지 모른다.”하고 토로한 계기는 끊임없는 공부였다. 해외에서 발간하는 숱한 자료를 눈여겨본 생태적 시각이었다.

 

평소 탐탁하게 여겼던 사람들과 얼굴을 붉히지 않고 논쟁하려면 충실한 논리가 기반이어야 한다. 김종철 선생은 골치 아픈 과학 이론에 접근했지만, 수돗물 불소화 논리는 허술했다. 누가 이빨을 이야기하자 했나? 수돗물에 넣으면 불소가 몸에 들어가 축적된다는 건 과학적 사실이다. 화합력 높은 불소가 체내 세포와 엉뚱하게 결합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지 살펴야 옳지 않은가? 뼈에 불소가 축적돼 치명적 질환이 발생한 사례는 해외에 넘쳤다. 인문학자도 확인한 과학적 검증인데, 불소화 사업을 추구하는 측은 보건사업이라고 우겼다. 아이 양치시킬 여유가 없는 맞벌이 가족을 배려한다지만, 과학적 논리가 아니었다. 불소 마시지 않아도 이를 깨끗하고 단단하게 만들 대안이 제시되었건만, 한사코 외면했다. 보건과 거리가 멀었다.

 

우리 의학계가 지금도 창피하게 생각하는 연탄가스 중독에 대한 빙초산 처방처럼, 근거 없이 앞세우는 복잡한 용어와 수치는 과학과 거리가 멀다. 환호에 정신 못 차리는 과학은 교활한 정치를 이길 수 없다. 미국이 그랬고, 우리의 많은 치과의사가 미국에 유학했다. 우연한 발견과 관계없이, 수돗물 불소화를 과학적 행동으로 인정하기 어렵다. 저열한 논리보다 과정의 비과학과 비민주성에 경악한 김종철 선생은 현장에서 행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다소 거칠었던 논쟁은 전국 상수도 사업장에 불소 설비를 거듭 제거하는 결과로 이어졌고 김종철 때문비타민F”로 추켜세우려던 불소가 위험한 독성물질로 환원되었다.

 

 

 

앞으로 누가 강에서 시를 쓸 수 있단 말인가!” 이명박 정권이 ‘4대강 사업을 밀어붙일 때, 김종철 선생의 일갈이었다. 토목공학자가 포함된 반대 토론회에서 거론했더니,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긴급한 순간에 과학자가 영문학자와 시를 언급하다니, 한가롭지 않은가? 하지만 생각해보라. 다채로운 생물로 어우러진 생태계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할 수단을 잃은 사회는 얼마나 삭막한가. 공정하든 공정하지 않든, 경쟁의 승리가 권리를 독점하는 사회는 다양한 의견의 소외로 이어질 것이다. 아름다운 모습을 아름답게 이야기할 기회가 차단된 사회, 배려를 잃은 사회에 사이코패스는 만연한다. 기후위기를 부른 개발독재는 어떤 내일을 구상할까?

 

2005104주 차 <PD수첩>은 황우석 전 교수의 연구 부정을 특집으로 편성했다. 1년 가까운 심층취재의 결과였건만, 근거 없는 열광에 휩싸인 우리 사회는 당시 MBC<PD수첩>에 저주를 퍼부었다. 불매운동을 선동하자 광고주를 거푸 잃은 <PD수첩>은 급기야 방송에서 제외되기에 이르렀다. 그때 김종철 선생은 사비를 털어 <PD수첩>의 광고주를 자청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평소 상품광고에 관심이 없었으니 텔레비전 광고가 제작돼 송출되는 복잡한 절차를 생각하지 않은 실수였다. 광고가 대폭 줄어도 준비한 영상을 몇 차례 방영한 <PD수첩>의 담당 PD는 선생의 마음을 깊이 고마워했다.

 

요즘 과학은 이론을 밝히는 과정에 머물지 않는다. 기술과 결합해 과학기술로 거대해지더니 청부과학으로 훼손되고 말았다. 청부과학은 이권을 노리는 자본과 패권을 원하는 권력에 아첨한다. 이익의 부작용인 손실과 패권의 대가로 발생하는 고통은 사회와 후손에게 전가된다. 청부과학으로 인한 폐해가 참기 어렵게 확대되자, 사회 일각에서 새로운 과학기술 정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진다. 과학기술을 사회에서 통제하자는 시민의 요구인데, 다양성을 존중하는 인문적 사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녹색평론이 지향하는 생태적 상상력이다.

 

최고위 선출직 공직자를 원하는 어떤 비과학자는 젊은이 앞에서 인문학은 과학의 보조 역할이면 충분하다는 취지로 이야기했지만, 인문학 잃은 사회는 삭막할 뿐 아니라 위험하다. 생태적 다양성을 잃은 콘크리트 도시에 코로나19는 비행기와 고속도로를 타고 확산한다. 다양성을 잃은 사회는 독재를 초대할 가능성이 큰데, 청부과학은 어떤 역할을 자청할까? 기후위기는 다양성을 잃을 때 심화하고, 미래세대의 생존은 그만큼 위태로워진다.

 

선배 생태학자의 서고에서 녹색평론을 꺼내지 않았다면 과학은 정치의 시녀라는 자괴감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녹색평론을 정독하지 않았다면 생명공학을 비판하는 생물학자의 길로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녹색평론을 읽고 두 달마다 마음을 다시 잡는 생물학자는 김종철이라는 비빌언덕을 잃었다. 이제 미래세대의 생존을 위한 비빌언덕으로 거듭나야 하기에 녹색평론과월호를 뒤적인다. (프레시안, 2021.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