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22. 4. 30. 14:04

 

대통령 부인의 옷이 한때 세간의 관심사가 되었다. 옷과 액세서리 가격을 높고, 국고 낭비 운운하면서 합리적 의심을 소환한 정치권 인사도 있었다. 실상이 알려지자 의혹은 슬그머니 가라앉았지만, 의혹부터 부풀리며 합리성에 방점을 찍었던 정치인은 사과하지 않았다. 진영논리에 파묻힌 그가 거론한 합리성의 근거는 불합리였다.

 

지난 43, 묵념 분위기를 뚫고 4.3 추념식을 찾은 대통령 당선인은 “4·3의 아픔을 치유하고 상흔을 돌보는 것은 4·3을 기억하는 우리의 책임이며, 화해와 상생, 그리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대한민국의 몫이므로 온전한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하겠다.” 밝혔다고 언론이 전했다. 제주도에서 잔혹한 살상을 주도한 정치권력과 뿌리를 공유한 군사정권 시절, 누구도 입 밖에 꺼내지 못하던 4.3의 실상은 어느 정도 정리되어 가는데, 그렇다면 온전한 명예 회복은 무엇이고 누가 어떻게 합리성을 담보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가해자였던 정부가 주체가 아니라는 점이다.

 

보편적 상식에서 벗어날수록 합리성은 판단하기 어렵다. 역사도 과학도 마찬가지다. 암모니아를 냉매로 누구나 사용할 무렵 세상에 나온 프레온가스는 상식을 벗어나는 물질이었다. 일설에 따르면, 프레온가스를 입에 물고 후 불어서 촛불을 껐는데 실험자의 입 안이 멀쩡할 뿐 아니라 입회한 사람에게 어떤 악취도 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획기적이었다. 누출로 인명사고를 일으키던 냉매를 대체한 프레온가스를 사용하는 건 상식이 되었는데, 그 무렵, 오존층 파괴에 이은 피부암을 걱정한 과학자는 없었다. 오존층 파괴와 프레온가스의 상관관계가 과학적으로 규명되자 상식이 변했다. ‘몬트리올 의정서가 채택되고 프레온가스 생산이 중단되었지만, 그 과정은 길고 복잡했다.

 

영국의 역사학자 E.H. Carr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로 역사를 해석했다. 왕권의 신성불가침을 의심하지 않던 시절에 단죄되던 시민의 주장과 행동은 이제 통제되지 않는다. 계몽주의를 넘어 민주주의가 정착된 지역에서 왕권 시대의 상식은 이제 통용되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 시절 금기였던 말과 행동은 요즘 거리낌이 없다. 1970년대 귀를 덮는 머리를 휘날리는 청년이 명동에 나가면 영락없이 커다란 가위를 든 경찰이 불렀고, 머리카락이 듬성듬성 잘렸다. 합리성을 독점한 독재의 망동이었는데, 요즘 비슷한 일이 다시 생긴다면 MZ세대는 받아들일까? 과거와 현재의 수많은 대화는 어떤 합리성을 소환할까?

 

최근 대통령 인수위원회에서 올바른 역사의식이 소환되었다. 경직된 한일관계의 전망을 물은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을 텐데, 되묻는 기자가 없어 흐지부지 지나갔다. 대변인은 기자를 돌아보며 올바른 역사의식을 새삼 강조했다. 그가 생각하는 올바른의 정체는 무엇일까? 섬뜩했는데, 캐묻는 기자가 없다는 사실이 암담했다. “올바른 역사의식은 가해자인 일본이 여태 되뇌는 용어가 아닌가!

 

한 표 차이로 정권 잡았다는 히틀러의 만행은 어떤 역사의식으로 뒤안길이 되었나? 사실을 왜곡하거나 피해자가 사망할 때를 기다리며 막무가내 잡아떼었다면 독일이라는 국가 이미지는 역사와 현실에서 부정적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다. 피해자의 처지에서 학살의 역사를 끊임없이 반추하는 독일은 사과와 배상을 멈추지 않지만, 일본은 어떤가? 합리성 없이 올바른 역사의식을 앞세우는 일본의 태도는 피해자의 굴욕을 요구한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끊임없이 부정하는 일본의 구호를 우리가 되새길 때, 역사는 하찮아지면서 진정한 반성과 배상은 물 건너간다.

 

그림: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를 태평양에 버린 이후애 발생할 상상. 최병수 화백 작품으로, 1950년대 미나마타 만에서 발생한 유기수은 중독 사건을 연상하게 한다. 인터넷에서 받았음.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의 힘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는 조금도 생산할 수 없다. 우라늄이나 플루토늄 같은 방사성 금속의 핵이 파괴되면서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하고 그 에너지로 전기를 생산한다. 그러므로 원자력이라는 용어는 부당하건만, 이제까지 6차례 폭발사고를 일으킨 핵발전을 여전히 옹호하는 사람은 안전을 되뇐다. 그들은 안전을 합리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권력을 등에 업고 으름장 놓는 합리성은 없다.

 

핵발전이 화력발전을 대체하면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합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핵발전소마다 치명적인 사용 후 핵연료가 발생한다. 최소 10만 년 이상 안전하게 관리해야 하는 사용 후 핵연료를 안전하게 처리할 기술은 현재 없다. 핵발전소를 보유하거나 보유한 경험이 있는 국가는 사용 후 핵연료를 임시로 저장하면서 안전을 관리할 따름인데, 장차 파이로프로세싱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핵발전소를 막무가내 옹호하는 사람들로, 안전성을 확보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무시한다. 한데 대통령 당선인은 그들의 주장을 근거로 핵을 추진하겠단다. 기후위기 극복의 방법으로 거론하지만, 합리성은 없다.

 

2050년까지 탄소중립과 기후위기 극복 가능성을 모색한 책 미래의 지구가 최근 번역 출간됐다. 미국의 환경운동가 에릭 홀트하우스는 부자와 권력자의 희망 사항을 인가해주는 장치가 아니라 활발한 시민집회를 통한 자기 결정권의 엔진인 민주주의로 반드시 기후위기를 극복해야 한다고 독자에게 호소한다. 멀지 않은 미래세대의 생존을 위한 현세대의 의무라는 건데, 우리가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파국을 피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핵발전을 확대하거나 자동차 연료를 수소와 배터리로 바꾸는 눈요기가 아니다, 무척 어렵더라도 획기적인 불편으로 감당해야 미래세대가 생존할 수 있다고 강조하는데, 그의 목소리는 공허하다. 합리적 연구가 뒷받침하건만, 귀담아듣는 이 드물다.

 

소통은 힘 있는 자의 요구를 받드는 행위가 아니다. 질문 없는 기자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내세운 당선인은 소통을 위해 집무실을 바꿔야만 한다고 막무가내였다. 바뀐 집무실과 주위 공간에서 누구와 무슨 소통을 어떻게 수행하겠다는 것인지, 그 계획은 합리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다. 청와대는 소통이 어려운 구조라고 주장하지만, 구조를 개선할 궁리는 생략했다. 이전할 공간이 청와대나 광화문보다 소통에 유리하다며 으름장 놓을 뿐, 소통과 거리가 멀었다. 소통 거부하는 영화 속 조직의 왕초에 가까웠다.

 

도로가 막히는 이유는 좁기 때문일까? 자동차가 늘어나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은데, 자동차를 줄이지 않고 도로를 넓히면 해결되는가? 주차장이 모자라면 민원이 커진다. 주차 공간을 늘리면 해결되던가? 프랑스 파리는 도로와 주차면을 줄이는 정책으로 산뜻하게 해결했다. 주차장이 필요 없는 대중교통과 시민의 건강을 도모하는 자전거로 대체하면 시민의 이동이 원활해진다는 연구와 경험이 뒷받침된 합리적 결과였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사고 이후 자국 핵발전소 17기 중 9기를 즉각 폐쇄한 독일은 남은 3기마저 예정대로 종료할 계획이다. 푸틴이 일으킨 우크라이나 침략전쟁으로 천연가스 가격이 폭등했고, 전기료가 유럽 최고의 오르더라도 약속을 지키는 이유는 고집이 아니다. 핵발전 없이 산업을 이어갈 수 있다는 연구가 합리적으로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화력과 자동차 내연기관을 없애려는 노력도 멈추지 않는다. 우리보다 강하지 않은 햇빛과 바람으로 대안을 일찌감치 마련했다. 물론 합리적으로.

 

소통이 으름장과 다르듯, 합리성은 권력자의 희망 사항으로 창안할 수 없다. 핵발전소의 안전성은 소형원자로를 대안으로 주장하는 사람의 희망으로 연출되지 않는다. 핵발전소 폐쇄를 공개 논의하는 자리에 독일은 과학자만 초대하지 않았다. 전기 공급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세대의 행복을 위해, 인문, 역사, 문화계 인사가 구속력 있게 참석했을 뿐 아니라 많은 여성이 적극적으로 참석할 수 있었다. 반면, 핵발전 관계자는 논의에 제외되었다. 사업자의 의견에서 안전과 대안에 대한 합리성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고속도로 개설의 합리성은 건설 사업자에게 물을 수 없다. 주택 정책을 건설업계에 묻는다면 아파트는 초고층으로 빼꼭하게 솟고 도로는 항상 막히며 온실가스는 거리를 뒤덮는다. 핵발전? 온실가스와 더불어 핵폐기물이 미래세대를 위협하겠지. 기후위기 대책이든 역사의식이든 합리성은 올바른 논의에서 나올 텐데, 올바른 논의는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지 않아야 한다. 정치학자 더글러스 러미스는 말했다. 민주주의는 과정이 시끄러워야 한다고. (작은책, 20225월호)

 

 
 
 

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22. 4. 26. 10:19

 

흉악범은 대개 흉기를 휘두른다. 흉기를 파는 곳은 따로 없다. 범죄자가 만들지 않았다면, 대개 슈퍼마켓이나 편의점에서 과도는 구했을 텐데, 흉기로 돌변했다. 과도가 범죄 목적에 적합할 리 없다.

 

폭력배가 휘두른 과도의 장인을 생각해보자. 공범이 아니므로 입건되지 않지만, 장인은 마음이 아플 것이다. 가끔 흉기로 전용되는 망치와 야구 배트는 억울하겠다. 집안의 필수 도구이거나 운동선수의 필수 장비가 아닌가. 망치와 야구 배트 제작자는 외치고 싶다. “흉기로 사용한 자가 문제지 만든 사람에 무슨 죄가 있는가!” 도구와 장인은 가치중립이라는 거다.

 

오존층을 파괴하는 냉매, ‘프레온이라는 상품명을 달고 세상에 나온 그 화학물질은 한동안 절찬을 받았다. 위험한 암모니아를 안전하게 대체하지 않던가. 오존층을 파괴해 지표면에 자외선이 늘어나게 만드는 물질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밝혀졌다. 생태계 교란과 피부암 발생의 원인이므로 이제 프레온가스는 아무도 생산하지 않지만, 애초 예견할 수 없었다. 오존층도 몰랐던 시절이 아닌가. 여전히 생산한다면 지탄받을 것이다.

 

사진: 현재 전쟁 참화에 당장 안전이 염려되는 체르노빌 핵발전소. 방사능 누출을 막고자 거대한 철관을 뒤집어 씌웠지만 100년 이상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다. 오만한 과학이 빚은 참상으로 한국에서 재현될 수 있다. (사진은 인터넷에서)

 

가습기 살균제는 어떤가? 살균제가 물때를 예방한다지만 생명체인 물속 곰팡이를 독으로 죽인다는 의미다, 과학자가 모를 리 없는데, 적량 사용하면 안전하다 믿었을까? 유전자 조작 농산물에 주로 뿌리는 농약, ‘라운드업의 주요 물질, ‘글리포세이트는 맹독성이다. 기준치 이하로 사용하면 안전하다 홍보했지만, 사실과 달랐다. 과학자를 고용한 회사는 위험성을 숨겼고, 드러나자, 소송에 휘말렸다.

 

과학은 가치중립일까? 당시 수준으로 안전을 확신해도 위험이 드러나는 경우가 많은데, 책임을 물을 수 없나? 일찍이 과학사회학자 로버트 K. 머튼은 4가지 규범, 공유주의, 보편주의, 사적 이익배제, 그리고 조직된 회의주의를 과학자에 요구했다. 신성불가침이 아닌 과학지식은 공동체에 보편적으로 공유되어야 하며 객관적 검증이 필요하다는 제언인데, 잘 지켜질까?

 

새 정권은 과학기술 진흥을 앞세운다. 가슴이 뛰어야 할까? 불안해하면 불온한 걸까? 과학과 과학기술은 다르다. 사실을 밝혀내던 과학과 손재주 영역이던 기술이 만났다. 자본과 권력의 공개 또는 은밀한 후원으로 거대해진 과학기술은 이익을 후원자에게 몰아주는 대신 드러나는 위험과 불이익을 시민과 소비자, 그리고 미래세대에 전가하곤 한다. 부작용 전에 없이 커졌다. 공적 자금으로 수행된 과학기술은 아니 그럴까?

 

거대하고 복잡할수록 부작용이 심각한 과학기술의 정책 결정은 과학자가 전담할 몫이 아니다. 정책 결정과전에 시민사회의 검증과 통제, 그리고 결과에 대한 평가가 필수다. 바로 시민참여인데, 차기 정권은 받아들일 용의가 있을까?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서 보았듯, 시민참여 없는 거대과학은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불렀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인터넷판 갯벌과물떼새, 20224월호)

 

 
 
 

생태계·동물

디딤돌 2022. 4. 18. 17:42

 

겨울가뭄으로 산천초목이 목이 탔고 울진에 사상 초유의 산불이 발생했지만, 천지사방이 봄을 알린다. 봄은 본다는 의미라는데, 마른 대지에서 봄소식이 들려 마음이 벅차다. 근교에 딱새가 둥지를 치고 저어새가 멀리서 찾아왔다. 고마울 따름이다.

 

봄비가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해갈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감지덕지, 시커멓게 타들어 간 산록이 푸릇푸릇하고 마음을 다시 잡은 농부는 쟁기를 들었으리라. 고층빌딩과 이웃한 텃밭에 몸과 마음이 건강한 도시농부들도 삽을 들었다. 4계절이 아직 명확한 나라에 사는 건, 행복이다. 봄비가 대지를 적시면 메마른 땅이 조금씩 회복되겠지.

 

양철 지붕이 녹을 정도로 뜨거운 산불에도 풀씨가 싹을 틔우는 건, 표토, 다시 말해 땅 가장자리의 흙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겨울가뭄이 아무리 심각해도 다채로운 식물의 씨앗들이 표토에 남아 있다면 자연은 거뜬히 회복한다. 건강한 생태계의 모습이 그렇다. 사시사철 순환하는 대자연은 생태계의 숨결이고 인간도 덕분에 숨 쉬고 밥 먹을 수 있다.

 

바다도 마찬가지다. 바다 바닥의 생태계가 살아 있어야 해양생태계의 순환이 자연스럽고 건강하다. 바닷물의 순환이 활발한 대륙붕, 그중 조간대 갯벌 생태계가 특히 그렇다. 육지에서 풍화된 흙이 화강암 모래와 적당한 비율로 섞여 오랜 세월 쌓이고 쌓여 형성된 갯벌은 해양생태계의 기반이다. 수많은 어패류는 갯벌에 알을 낳고 성장하는 덕분에 바닷가에 터전을 잡은 인간은 삶과 문화를 엮어올 수 있었다.

 

사진: 아파트 공사와 갯벌 매립을 위해 인천 앞바다를 분별 없이 채취한 결과 섬지방 해안의 모래가 2m  가까이 사라진 현상. 그만큼 어패류의 산란장과 생활터전이 줄었고 사람은 먹을거리와 문화를 잃었으며 해난재해에 취약해지고 말았다. (사진은 인천환경운동연합 제공)

 

한데, 어느 순간, 풍요롭고 아름다운 해안과 바다가 엉망이 되었다. 갯벌을 매립하고 그 위에 콘크리트를 뒤덮은 인간의 지독한 탐욕의 결과다. 비행장과 신도시, 발전소와 공업단지를 위해 갯벌을 거듭 매립한 인간은 늘어나는 수익에 눈이 멀었다. 자신과 후손의 생존 기반인 갯벌을 거의 남기지 않고 매립했건만, 모자라는지 바다의 표면, 모래를 한정 없이 긁어낸다. 콘크리트에 섞어야 초고층빌딩을 손쉽게 돋아 세울 수 있다며 앞뒤 가라지 않는다.

 

송도신도시의 휘황찬란한 철근콘크리트가 탐욕의 모범사례다. 해운대는 물론 화성과 영종도의 신도시도, 새만금도 신기루 같은 초호화 철근콘크리트의 꿈에 사로잡혔다. 특별하다는 서울시가 50층이 넘는 아파트로 빈 땅을 모조리 채우겠다고 아우성치자 인천을 비롯한 도시마다 50층이 기본으로 여긴다. 송도신도시 해안에 103층 빌딩을 짓겠다고 하니 너무 낮다고 목청 돋우는 인간도 있으니 잇속 챙기려는 자본은 바닷모래를 열심히 긁어댄다. 후손이 살든 죽든 상관없는데, 생태계는 오죽하랴.

 

참다못한 환경단체가 성명서를 썼다. “굴업·덕적지역 해사 채취 재추진하려는 옹진군은 각성하고, 인천시는 해당 계획 반려하라!” 바닷모래 채취로 급변하는 해저지형은 회복 불가능하고 모래 속 생물이 감소하면 해양생태계 파괴는 불가피하다고 소리쳤다. 바다에 생존을 기대는 주민이 파탄하므로 일부 자본의 이익을 위해 미래를 내다 파는 행정행위를 중단하라고 요구했는데, “환경특별시를 자처하는 인천시는 묵묵부답이다. 바닷모래 추가 채취를 통제하겠다는 2019년 약속을 어긴 인천시와 옹진군은 기후위기를 부채질한다.

 

최근 6차 보고서를 채택한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2040년까지 탄소중립을 이루지 못하면 이번 세기에 90cm 이상의 해수면 상승을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곧 등장할 정부는 엉뚱하게 전기요금 상승과 GNP 하락을 걱정하며 탄소중립에 명백히 역행할 계획을 내놓는다. 절박하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해수면이 90cm의 배 이상 상승할 거라 IPCC가 경고했건만, 미래세대의 생존을 노골적으로 위협한다. 태풍과 해일이 극심하고 산불이 더욱 가혹해지겠군! 그 상황에 인천시는 바닷모래 채취를 중단하지 않겠다고?

 

화사해지는 봄에 마음이 울적해진다. 뉴스를 피한다고 기후위기가 완화될 리 없는데, 자신의 생존 기반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입시와 취업에 목을 매는 젊은이에게 미안하게 짝이 없다. 춘래불사춘(來不似春)이라 했던가? 봄이 왔건만 봄을 느끼지 못한다. 내일을 살아갈 세대의 건강과 행복을 보장해주지 못하니. (지금여기, 2022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