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04. 3. 8. 19:08
1980년대 초반, 1학기말 고사를 마친 생물학과 대학생은 산으로 이른바 '합동채집'을 떠난다. 아직 피서인파가 드문 계절, 비록 장마철이지만 그때가 한가해서 좋다. 장마철이라고 허구헛날 하늘만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일주일 중 적어도 삼사 일은 날씨가 맑고, 하루 이틀은 햇볕이 쨍하다. 축축한 사이 햇살이 내리 쬐는 날에는 채집할 생물들도 많다. 산록과 이어진 양지바른 개활지 야생화 사이에 온갖 나비가 나풀나풀 수를 놓고, 어슴푸레 저녁이면 물기를 머금은 음지에 두꺼비와 도롱뇽이 길을 나선다.

비가 그치면 본격적인 채집이 시작된다. 한 겨울에 벌거벗겨 놓아도 얼지 않을 정도로 탄력이 넘치는 학생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천지사방에서 포충망 휘두르는 가운데, 좀 진중한 학생들은 쌍안경이나 돋보기를 챙기고 조심스레 숙소를 나선다. 쌍안경을 맨 학생들은 새를 보겠다며 산등성이로 오르고, 돋보기를 든 학생들은 수서곤충을 찾겠다며 계곡을 뒤지는데, 일단의 무리는 어항과 떡밥, 그리고 족대와 투망을 들고 물살이 빨라진 시내로 몰려나간다. 담수어류 채집을 빙자한 천렵에 나서는 것이다.

조교가 보는 앞에서 담수어류의 다양도를 조사하는 양 수선을 떨던 학생들이 갑자기 부산해지기 시작한다. 하천의 생태조건에 따라 여기저기 여러 가지 채집도구를 사용하며 무언가 열심인 듯한 학생들은 뒷짐지며 참견하던 조교가 멀리서 손짓하는 교수를 따라 막걸리 집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다음, 눈 여겨두었던 곳으로 냅다 투망을 던져대는 것이다. 아마 누구에게 무언가 은밀한 당부를 단단히 받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몇 안 되는 여학생들에게 작황을 자랑하고 싶었겠지.

쉬 잡히는 피라미와 갈겨니는 초장에 식상하고 쉬리와 모래무지도 곧 시들해진 학생들은 매운탕 감으로 그만인 동자개와 쏘가리를 목표로 첨벙이는데 그게 어디 쉬운가. 포인트를 향해 보름달처럼 펴서 멀리 던져도 워낙에 빠른 물고기들은 추가 떨어지기도 전에 휙 빠져나가고 마는데, 반달처럼 펴지는 투망은 아무리 휘둘러도 발아래 떨어지기 일쑤다. 어쩌다 왕종개와 꺽지만 잡다 흘린 땀을 닦는데, 저만치 깊은 여울에 웬 사람들이 삼삼오오 물 속에 들락거리는 게 심상치 않아 보인다. 작황도 지지부진하고 꾀도 나는 참에 은근히 다가가 슬쩍 바구니를 열어보니 이런! 은어다. 그들은 마을의 은어 전문 낚시꾼들이었다.

커다란 바위 사이를 휘돌아 흐르는 지리산 쌍계사 앞 하천은 씨알이 굵은 은어가 떼로 몰려든다. 허리춤 깊이의 세찬 물 속에 길지 않은 낚싯대를 들고 들어간 낚시꾼들은 나왔다하면 어김없이 은어 한 마리 씩 꿰어내는데 여간 신기한 게 아니다. 휘둥그레 바라보는 학생들을 행해 낚시꾼들은 어디어디 식당으로 오란다. 그러고 보니, 숙소로 가는 길가의 식당마다 은어가 가득 담긴 수족관들이 진작부터 손님을 유혹하고 있었다.

시리도록 맑은 하천에 서식하는 은어는 동작이 얼마나 재빠른지 대낮에는 도저히 투망으로 잡을 수 없다. 바닥이 얕은 남해의 한 하천에서 한밤에 랜턴 비추고 친 투망으로 허둥대는 은어를 바구니 가득 잡곤 했는데, 6월 초, 바다에서 막 올라온 몸길이가 15센티미터 내외인 밝은 은색의 은어는 맛과 향기가 얼마나 좋은지 말도 못한다. 비늘과 내장만 벗겨내고 튀긴 은어 한 마리 얻어먹자고 소주 들고 나오는 동네 사람들 덕분에 새벽녘까지 얼큰했던 20여 년 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80년 대까지만 해도 오염이 덜했던 섬진강 하구를 타고 쌍계사까지 거슬러온 은어는 몸길이가 20센티미터에 이르고 몸도 짙어져 있다. 때를 기다리던 낚시꾼들은 '씨 은어 놀림낚시'를 선보인다. 친구를 이용해 잡는다는 의미를 가진 '도모쯔리'는 일본말이다. 같은 방식인 놀림낚시는 은어의 행동을 이용한다. 낚싯바늘이 달린 모형 은어를 작은 낚싯대에 단단히 묵고 물 속에 들어가 살살 흔들면 세력권을 지키려는 은어는 육탄공세로 모형을 밀어내는데, 이때 바늘로 획 낚아채며 한 나리 씩 낚아 올리는 것이다. 맑은 하천 바닥의 바위나 자갈에 붙은 돌이끼를 독차지하려던 은어는 잠시 맑은 하늘을 보다 바구니 속에 처박히고, 곧 숭숭 썰려 접시에 올라가거나 아가리 넓은 매운탕 솥에 들어갔는데, 오이 향 진했던 7월의 쌍계사 은어, 지금은 볼 수 없다.

연어와 사촌간인 은어는 연어와 같은 회귀성 어류다. 가을철 하천에서 부화한 어린 개체들은 바다에서 겨울과 봄을 보내고 이듬해 초여름 다시 모천으로 올라가는데, 우리나라의 모든 강에서 서식하던 은어가 왜 이리 드물어진 것일까. 짐작하는대로, 오염 때문이다. 하구언이나 보를 어렵게 타고 넘어도 거대한 댐이 가로막기 때문이다. 모천이 사라진 은어가 한강 영산강 금강에서 거의 자취를 감추고 드물게나마 낙동강과 섬진강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이 땅을 찾아줄까. 댐 만드는데 혈안이 된 수자원공사가 사세를 나날이 확장하고 있는 추세로 보아 전망은 그리 밝지 않아 보인다.

그런데 경상북도 봉화군에서 희망을 일구는 사람이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인공부화로 얻은 치어부터 애써 키워낸 은어를 낙동강 수계의 하천에 방생하면서 굵은 땀을 흘리는 그 주인공은 '벽촌무역'의 홍주선 씨다. 혼자만으로는 위기의 은어를 살려내는 것은 아무래도 버거운 일이다. 은어의 생태계를 보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러자면 많은 시민들이 자연의 가치를 체험하게 하는 게 좋다. 홍주선 씨는 애써 키운 은어의 일부를 내성천에 풀어넣고 여름방학을 맞은 시민들에게 '은어 잡이 체험학습장'을 마련한다. 어설픈 솜씨로 족대를 들고 겨우 서너 마리를 잡은 참여자들에게 회로 매운탕으로 튀김과 조림으로 잔뜩 내놓으며 은어의 생태와 습성과 함께 보전의 가치를 설명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모처럼 깨끗한 자연에 나와 가족과 함께 신나게 은어도 잡고 기막힌 은어 요리도 맛본 시민들은 자연보전의 가치를 몸으로 깨닫는다.

회나 튀김, 천편일률적인 매운탕만이 아니다. 스페셜 요리는 은어밥과 은어죽이다. 그런데 은어죽에 참기름은 피하는 게 좋다. 특유의 맛과 향이 지워질 수 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밥할 때 함께 앉혔다 살만 발라 썩썩 비벼먹는 은어밥이 백미가 아닐까 한다. 내성천에서 겨우 만날 수 있는 은어의 자태와 맛을 글이나 도감에 맡길 수는 없다. 수족관도 아니다. '담백한 맛과 영양가가 높아 예로부터 임금님에게 진상되던 최고급 민물고기'인 은어를 내성천은 물론, 쌍계사를 비롯한 모든 하천에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모천을 잃은 은어의 어쩌면 마지막 꿈일지 모른다. (물푸레골에서, 2003년 7월호)

 
 
 

생태계·동물

디딤돌 2004. 3. 8. 13:12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제일 진화된 동물은 무어니?” “당연한 질문하지 않기, 사람!” “그러면 사람 다음으로 진화된 동물은?” “그야 침팬지!” 위기를 느낀 사람은 침팬지를 다 잡아 죽인다? 백설공주 식으로 풀어가자면 그래야 당연할지 몰라도, 침팬지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리 없다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실험용으로 사용할지언정 그다지 적의를 품지 않는다. “거울아 거울아, 그렇다면, 침팬지 다음으로 진화된 동물은 무어니?” “고릴라!” “고릴라 다음은?” “오랑우탄!” “오랑우탄 다음은?” “글쎄, 모르겠는걸. 원숭이 종류가 하도 많아놔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가장 진화된 동물이라는데 신화처럼 동의한다. 그렇다면 거울에게 한 가지 더 묻도록 하자. “거울아 거울아, 개하고 돼지하고 어느 쪽이 더 진화되었을까?” “또 당연한 질문! 개!” “그러면 개하고 곰 중에서 더 진화된 동물은 뭐니?” 독자들이여 맞춰 보시라. 거울은 뭐라고 대답했을까. 잘 모르겠다면, 힌트 한 마디! 사람들은 사람 흉내 잘 내는 동물이 더 진화되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거울은 개라고 답했을까? 아니면 곰?

 

우리는 진화된 역순위를 염두에 두고 동물들을 고등과 하등으로 차별한다. 고등이라면 친근함을 선사하고 하등은 징그럽다며 찡그린다. 이쯤에서, 하등 중의 하등이라고 천대하는 동물을 한 종류를 소개한다. 짜잔-, 바로 ‘지렁이’다. 지렁이라, 땅속의 용이라 해서 ‘지룡이’, 지룡이에서 지렁이로 변천되었다지만 진심으로 용 대접했을까. 지렁이는 징그럽다는 뜻의 어의변천은 아닐까.

 

‘지렁이가 사람을 얼마나 징그럽게 생각할까’는 여기에서 논외로 치고, 사람에게 해될 만한 짓은 결코 하지 않았는데, 보이기만 하면 인상을 찌푸리는 지렁이에게 사람은 어떤 대접을 할까. 어른들은 지렁이에게 공연히 침을 뱉고 아이들은 오줌을 겨냥한다. 마음 약한 사람은 길을 획 돌아가고, 어떤 이는 다짜고짜 밟아 죽인다. 가장 진화된 사람의 푸대접은 지렁이에게 양해 사항일까.

 

사람다운 환경이 있다면 동물들도 각자 자신에 맞는 환경이 있다. 지렁이는 지렁이대로, 침팬지는 침팬지대로 살아갈 환경이 있다. 비록 품종 개량되었지만, 선조의 습성을 상당 부분 간직하고 있는 개와 돼지도 고유의 환경이 있을 것이다. 세인트버나드에서 치와와까지 극단적으로 품종 개량한 개, 어떤 품종은 전용 미용실에서 발톱에 매니큐어도 칠하고 부분 염색으로 매력 포인트를 강조 당하지만, 개의 처지에서 어처구니없을 것이다. 일어서서 재롱도 떨지만 그래야 맛난 먹이가 나온다는 사실을 알기에 굴종할 따름이다.

 

냄새 지독한 바닥에 질펀하게 누워 지내는 돼지 역시, 자신의 선조와 터무니없이 다른 환경에서 죽지 못해 산다. 돼지를 보고 코부터 움켜쥐는 사람은 과연 사람다운 환경에서 산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초고층 인텔리전트 빌딩에 온도 자동 조절되는 승용차, 지구 반대편 전쟁도 생중계 받고, 핵발전소 건설에 유전자 조작까지 감행하는 사람에게 지금 환경은 바람직할까. 자연에서 먹이를 구하는 동물은 배설물은 물론 죽은 몸도 자연에게 기꺼이 돌려준다. 오직 사람만은 아니다. 파괴한 자연에 감당할 수 없이 쓰레기를 안긴다. 자신의 배설물과 남은 음식도 돌려주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몸도 순순히 내주지 않는다.

 

침팬지와 조상을 공유했던 사람은 침팬지의 환경에서 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렁이의 환경에 당연히 못산다. 그건 지렁이도 침팬지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모든 생물은 똑같다. 독특한 환경을 가지고 있는 모든 생물은 자신의 환경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환경을 기준으로 생태계에서 가장 진화된 것이다. 따라서 환경에 우열이 없듯, 진화에는 서열도 우열도 있을 수 없다. 하등이나 고등은 오로지 사람의 편견일 뿐이다.

 

발생 중에 체절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사람은 척추동물이다. 척추동물의 갈비뼈와 등뼈는 체절의 흔적이다. 그래서 체절이 분명한 지렁이를 척추동물, 즉 사람의 먼 조상으로 학자들은 추론한다. 스스로 인류로 칭송하는 사람은 듣기 무척 언짢을 것이지만, 당하는 지렁이는 뭐 우쭐하겠는가. 어이없어하기 마찬가지가 아닐까.

 

자신의 환경을 스스로 변화시키지 않는 지렁이와 달리 지렁이의 환경을 크게 위축시킨 사람은 자신의 환경마저 거침없이 변화시킨다. 지렁이가 드물어진 만큼 늘어난 콘크리트 더미와 아스팔트를 자신의 생존 환경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교통사고와 붕괴사고로 쉽게 목숨을 잃는다. 자신의 환경을 터무니없이 개편했기 때문이리라.

 

도시는 물론 농촌에도 더 이상 지렁이를 구경하기 힘든 세상이 됐다. 경쟁적으로 살포하는 화학비료와 살충제 때문이지만, 산성비도 빼놓을 수 없다. 지렁이가 사라진 산하는 쓰레기로 썩어 가는데, 최근 일부 사람들이 지렁이를 새삼스럽게 평가하기 시작했다는 풍문이다. 토룡탕 때문이 아니다. 다분히 사람의 편의적 발상이지만, 매립도 소각도 어려워, 국제법을 무시하고 공해상에 투기했던 음식쓰레기와 사람의 분뇨를 대신 처리해주기 때문이란다. 사람보다 먼저 진화하여 흙을 지켜왔던 땅 속의 용을 소중한 재원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꿈을 꾸는 지렁이들의 모임’이라는 생태여성주의 단체가 있다. 그들은 왜 자신들의 명칭에 하필 징그러운 지렁이를 채용했을까. 무릇, 생명을 잉태하는 땅을 자궁에 비유한다면, 땅을 살리는 지렁이는 자궁을 살리는 의미와 같다. 사람들에 의해 하등이라며 배제된 지렁이와 같이, 여성들도 남성들에게 소외돼왔다. 남성의 주도권 하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고, 식구들 밥해 먹이던 여성들은 다 자란 아들에게 소외되면서까지 먼 길 떠난 남편을 땅에 묻어준다. 밟혀 죽으면서도 사람들의 쓰레기를 묵묵히 처리해주는 지렁이의 모습에서 착안해 단체 이름을 정한 것은 아닐지. 지렁이와 자신을 등치한 생태여성주의자들은 요즘 어떤 꿈을 꾸고 있을까. 지렁이는 양성이 평등한데.

 

반성하는 마음으로 자연에 ‘풀꽃상’을 드리는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은 자연에 대한 존경심을 회복하려는 마음으로 7번째 풀꽃상을 지렁이에게 드렸다. 2001년 6월 16일 소식이다. 새천년을 맞았다고 지렁이가 용서할 정도로 사람들이 개과천선했을 리 만무하지만, 아무튼 참 잘한 일이라는 느낌이다. 이참에 사람들이 비로소 제 땅, 제 환경, 제 조상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인데, 풀꽃세상은 왜 지렁이에게 풀꽃상을 드리려했을까.

 

인간에게 유용한가 아닌가와 관계없이 모든 존재들이 스스로 지니고 있는 가치를 옹호하는” 풀꽃세상은 “2억만년 전에 이 행성에 출현해 생태계 먹이사슬의 최하위의 지위를 굳건히 지키면서 땅 밑 어둠 속에서 흙을 부드럽고 기름지게 만들다가 여러 다양한 포식자들을 만족시키거나 식물의 자양분으로 살신성인하는 장엄한 최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감동과 함께 인간의 불충분한 이해에 바탕한 근거 없는 혐오증과 모욕에 하염없이 시달리면서도 아랑곳하지 않다가 마침내 인간의 야만적인 생태계 파괴에 의해 서서히 우리 곁에서 사라져 가는 데 대한 진심어린 사과와 뒤늦은 애정의 마음”을 담아 ‘제7회 풀꽃상 본상’을 지렁이에게 드린다고 밝혔다.

 

그런데 전례와 달리 부상이 없다. 상금도 상품도 없는 달랑 상장 한 장인 부상은 사람에게 드리는데, 왜 부상이 없었을까. “지렁이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라는 것이 모조리 지렁이 자체에 대한 무관심이라기보다는 ‘지렁이 똥’이나 분변토를 이용한 ‘사람의 땅’ 등 사용가치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행여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단체를 백방으로 수소문해도 찾을 수 없었기에” 즉, 마땅한 사람이 없으므로 부득이 부상을 드릴 수 없다는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아직까지 지렁이의 눈높이에서 지렁이를 살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지렁이의 생태적 가치를 깨닫는 이가 늘어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제 땅에 지렁이가 나오는 걸 자랑하는 농부들이 있고, 그 땅에서 생산되는 각종 채소들이 유기농산물이라는 벼슬을 얻고 값비싸게 팔린다는 것이다. 그것 참. 땅 속의 지렁이는 지위를 탐하지 않는데, 땅도 살리고 농부도 살리는 지렁이는 부자들의 고급 식탁보다 내일의 건강한 밥상 공동체를 지키는 것일 텐데, 어디 풀꽃상 부상 받을 이 없을까. 새싹 돋는 봄이 벌써부터 완연한데. (2004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