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21. 1. 4. 17:36

 

헤라클레이토스의 불, 에르빈 샤르가프 지음, 이현웅 옮김, 달팽이출판, 2020.

 

머지않아 코로나19 백신이 나온다고 한다. 안전하고 효능이 우수한 백신이 널리 보급되면 드디어 코로나19는 우리를 긴장하게 한 사스나 메르스처럼 슬그머니 자취를 감출까? 이후 우리는 국제공항을 혼잡하게 만드는 일상을 회복해도 좋을까? 1937년 닭에서 최초로 발견했다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요즘 세계적으로 창궐하는 이유는 뭘까? 박쥐를 잡아먹거나 천산갑의 껍질을 우려먹은 사람은 1937년 이전에도 많았을 텐데, 그간 왜 잠잠했을까?

 

동물과 사람을 동시에 감염시키는 인수공통질병의 주요 바이러스는 거의 절반이 코로나19와 독감처럼 RNA 유전자를 가진다고 알려졌다. RNA는 복제과정에서 DNA보다 100만 배 이상 실수를 일으킨다는데, 그 이유를 일찍이 에르빈 사르가프가 알려주었다. 상보성(complementarity)이라고 했다. DNA를 구성하는 4가지 핵산 중 아데닌은 반드시 티민과 결합하고 구아닌은 꼭 시토신과 상호 보완적으로 결합한다는 사실을 1948년에 밝혀낸 것이다.

 

두 가닥의 핵산이 나선으로 길게 이어지는 DNA는 복제과정에 핵산 하나가 빠지거나 끼어들어도 상보적인 핵산 가닥이 제 위치를 원본처럼 지키므로 금방 교정이 가능하다. RNA는 불가능하다. 핵산이 한 가닥이므로 실수를 교정하지 못한 채 숙주의 몸에서 거침없이 증식한 뒤 빠져나간다. 1918년 스페인독감이 그랬다. 애초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지만, 변형으로 독성이 강화된 독감 바이러스는 당시 세계 인구의 2% 이상을 희생시켰다. 독성이 약해도 전파력이 강력한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중국 우한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갔던 2020년 봄과 다른 모습으로 세계 곳곳에 창궐한다. 벌써 몇 차례 변형되었다는데, 시판될 백신과 치료제의 효능은 언제까지 지속될까?

 

우리나라의 과학 분야 연구비는 한 해 20조 원이 훌쩍 넘는다. 세계의 연구자들이 부러워하는 액수라지만, 연구가 사회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논의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아니더라도, 코로나19 백신이 가져올 사회적 영향은 어디선가 연구하고 있을까? 우리 정부가 선의로 보급하려는 자궁경부암 백신은 남성도 접종받아야 한다는데, 어떨까? 합리적인가? 부작용을 의심하는 전문가는 최고의 의학 스캔들이라고 분개하는데, 사회적 합의를 생략하고 접종을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질병이 무엇일까? 그 정의와 진단은 전적으로 의사와 같은 과학자의 영역일까? 사회에 따라, 문화에 따라, 회자되는 질병의 모습은 다르다. 과거에 질병으로 취급받던 현상이 지금 질병이 아닌 경우가 많고, 그 반대도 많다. 복합오염 시대에 질병의 원인은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아니 원인을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질병도 많다. 질병의 원인을 섣불리 재단하는 일은 무모함을 넘어 위험천만한데, 생명공학이 주도하는 의학 분야가 그렇다. 약을 먼저 개발한 뒤 질병을 창안하는 제약회사의 행태는 어떻게 해석해야 옳을까? 샤르가프는 무엇에 홀린 듯 무모함으로 치달리는 생명공학에 성냥을 주었다고 자책한다.

 

 

유전공학과 상보성 원리

 

평생 자리를 지킨 컬럼비아대학에서 은퇴한 뒤 에르빈 사르가프는 자전적인 책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을 펴냈다. 제국의 기운을 잃은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나이가 어려 1차대전 참전이 면제되고 나이가 넘쳐 2차대전을 용케 피했지만, 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젊은 연구자에게 유럽은 선뜻 손을 내밀지 못했다. 히틀러의 광기는 과학자들을 허겁지겁 미국으로 향하게 했고 샤르가프는 박봉이라도 연구를 이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감지덕지해야 했다.

 

연구 진전이 느렸던 2차대전 이전의 과학은 인간적이었다. 하지만 잔혹했던 전쟁을 몇 차례 겪으며 세상이 달라졌다. 패권을 놓지 않으려는 국가는 거액의 연구비를 내걸고 승리에 기여할 기술을 요구했고 과학자 사회는 기꺼이 응답했다. 어릴 적부터 동서고금의 인문학에 소홀하지 않은 샤르가프는 달랐다. 공산주의자를 색출하려는 매카시 광풍이 잠시 스쳤던 경험을 에피소드로 기억하면서 세포막의 주요 성분인 인지질을 연구하던 그는 자연스레 생물학으로 이어졌지만, 과학자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선행연구를 내밀하게 분석하고 연결되는 과학적 사실을 탐구하는 데 최선을 다했을 뿐이었다. 그는 연구 결과로 유명해지는 걸 원치 않았다.

 

샤르가프가 정리한 DNA의 상보성 원리는 훗날 DNA 구조를 밝힌 두 젊은 과학자, 제임스 왓슨과 프렌시스 크릭에게 노벨생리의학상을 안기게 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그런데 두 젊은이는 헌신적 논의로 자신들의 연구에 영감을 불어넣은 샤르가프에 한 마디의 사례도 없었다. 샤르가프는 미생물의 형질전환을 밝힌 선배 과학자 오즈월드 에이버리에 대한 헌사를 잊지 않았다. 끊어져 병원성을 잃은 폐렴균의 짧은 DNA 가닥이 병원성 없는 폐렴균에 옮겨가면서 병원성을 획득하게 되는 형질전환 현상은 샤르가프의 과학적 상상력을 자극했고, 상보성 원리를 추론하게 이끌었다. 어찌 고맙지 않을 수 있으랴.

 

사진: 에르빈 샤르가프의 <헤라클레이코스의 불> 2020년 달팽이출판, 그 책 서평을 제재한 <녹색평론> 176호, 2021년 1-2월호.

 

샤르가프가 컬럼비아대학에서 연구를 시작할 때 과학자들은 DNA를 구성하는 핵산의 존재와 종류를 파악했어도 대부분 단백질 연구에 몰두했다. 핵산은 단백질을 보조하는 물질로 여겼기에 형질전환이 과학자의 관심사가 될 수 없었지만, 샤르가프는 에이버리의 연구를 계기로 DNA야말로 생물종의 특이성을 전달하는 핵심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생물종은 물론이고 쌍둥이가 아니라면 개체마다 DNA가 다르다는 건 지금 상식이지만, 에이버리의 연구를 무시한 과학자들은 핵산의 상보성 역시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똬리 튼 고정관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과학자 사회는 핵산을 이해했고 샤르가프를 새롭게 평가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상보성 원리를 샤르가프 법칙이라 추켜세우는 사람들은 상보성 원리를 바탕으로 DNA 구조를 연구했다면 노벨상을 받았을 거로 상찬했지만, 샤르가프는 그 순간이 불편했다. 유명세를 혐오하도록 교육받았다고 여기는 샤르가프는 무능력의 소치로 대꾸했지만, 한편 자신의 연구 결과가 어디로 이어질지 몰라 두렵기도 했다.

 

나중에 자신의 전기를 쓴 왓슨과 크릭은 루비콘강에 빠졌다. 연구 성과를 각색하고 보충하고 니스칠까지 하자 언론이 한껏 주목했고 더욱 눈부신 성과를 요구하는 연구비가 거액으로 밀려들었다. 장밋빛 전망으로 치장하는 과학은 기술과 만나 거대해졌고, 거대해진 과학기술은 권력이 되었다. 결국 핵무기를 만든 과학기술은 유전자를 조작하는 생명공학으로 이어지지 않았나. 패권을 유지하려는 국가와 더불어 배타적 이윤을 노리는 자본은 거대과학과 손을 잡고 명성과 연구비에 눈이 먼 과학자들을 줄 세운다. 이윽고 코로나19가 창궐할 필요충분조건이 완성되었다.

 

스웨덴 왕립과학원은 2020년 유전자가위 기술을 개발한 미 버클리 대학의 제니퍼 다우드나 교수에게 노벨화학상을 안겨주었다. 유전자가위 특허를 둘러싼 법정 소송이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다우드나 교수는 지난 10월 유전자가위 기술 가능성을 한껏 홍보했다. 언제 어디서든 빠르고 간편하게 코로나19를 검사할 진단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5분 만에 감염 여부를 확인한다는 그 기술을 미 당국이 현재 한껏 활용하는지 알지 못하는데, 하루 20만 명의 확진자를 양산하는 미국은 30만 명에 다가가는 희생자 수를 조금도 줄이지 못한다.

 

어떤 목적을 위해 다른 생물의 유전자를 넣는 유전자 조작과 달리 유전자가위 기술은 안전과 윤리적인 문제가 없다고 주장한다. 필요한 유전자를 동일 종에서 찾아서 넣으므로 GMO가 아니라고 강변하는데, 어떤 가치로 노벨상을 받은 것일까? 유전병 치료는 물론이고 농산물과 가축의 유전자를 정교하게 변형할 수 있다면 경제적 가치는 상상 이상일 거로 평가하는 관련 과학자는 유전자가위 기술을 유전자 교정으로 표현한다. 질병에 든 이유는 유전자 때문이고, 그 유전자는 갈아치워야 할 결점이라는 투다. 그런가? 유전자는 마모되었거나 잘 못 끼워놓은 기계의 부품이 아닌데.

 

유전자는 대부분 홀로 발현하지 않는다. 하나의 형질을 발현하는데 하나의 유전자가 관여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뿐이 아니다. 유전자는 환경을 기반으로 발현한다. 젊었을 때 발현하는 유전자는 나이 들면 작동을 멈추거나 다르게 발현한다. 이따금 나이 든 신체에 암을 일으키기도 한다. 영양 상태가 불량하면 누구나 성장에 지장이 생긴다. 하지만 어떤 유전자가 어느 염색체에서 성장 표현에 관계하는지 모른다. 현 환경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유전자가 환경이 변화된 이후 어떻게 발현할지 미리 점칠 수 없다. 위기로 치닫는 기후변화로 기상이변이 일상화된 요즘, 홍보부터 현란한 유전자가위 기술은 어떤 경제적 가치를 누구에게 약속할까?

 

상보성 원리에서 한 발 더 나가는 생물학 연구는 샤르가프를 두려움에 떨게 했다. 생명을 기계적으로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술회했는데, “천국으로 인도되는 나선형 계단DNA는 탐욕에 눈이 먼 세상을 어떤 천국으로 인도하려는가? 더 많은 이윤을 독점적으로 확보하려 경쟁하는 자본은 조급하다. 세포와 육체의 움직임을 구조와 기능으로 분별하면서 불충분하게 확보한 지식을 이윤을 위해 선도한다. 대중에 과학기술의 효능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면서 부를 끌어모은다. 그럴수록 자본도 과학기술도 오만해졌다.

 

다수확 품종에 맞게 경작환경을 통제하면 수확은 눈에 띄게 늘어난다. 그를 위해 관개와 기계를 도입하자 땅인 짓눌리고 가뭄이 일상화되었다. 드넓은 농토의 다수확 품종이 잡초와 해충을 초대하자 자본은 화학비료와 농약을 살포해야 했다. 생물다양성과 유전다양성이 사라진 이후의 일이다. 축산과학이 혹독하게 계산한 좁은 공간에 최대로 밀집시켜 엄선한 사료를 최적으로 제공하자 돼지와 닭은 빠르게 몸집을 키웠지만, 구제역과 조류독감에 맥없이 스러졌다. 질병이 돌기 전에 안전반경 안의 가축은 모조리 살처분해야 한다.

 

 

거대과학이 만든 파국

 

샤르가프는 핵을 파괴하는 과학을 비판한다. 자연에서 결코 나눠질 수 없는 요소가 아닌가. 수 억 년 전 땅속에 응축된 화석연료를 순식간에 소비해 기후를 위기로 몰아가더니 깨끗하다는 불확실한 가설을 앞세워 원소의 핵을 분열시킨다. 파국적인 핵에너지의 실체를 파악한 과학은 아연실색했지만, 안전신화를 창안하고 핵발전소를 세우더니 아니다 싶었는지 핵을 융합하겠다고 벼른다. 생물 세포 안의 핵을 파괴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위기를 생태계에 끌어들였다. 그 존재를 몰랐을 때 절대 불행하지 않았건만, DNARNA를 자르고 붙이며 유전자를 획일화하자 다양성을 잃은 인류는 생존의 대안마저 잃어간다.

 

1970년대 중반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을 쓴 샤르가프는 작은과학을 마지막 구원이라고 믿었다. 간디는 자급자족에 기여하는 기술, 슈마허는 필요에 따라 스스로 만들고 수선할 수 있는 기술을 생각했는데, 인문학에 심취한 그는 다양성을 염두에 두었다. 구체적으로 거론하지 않았지만, 적은 수의 과학자가 느린 속도로 진행하는 과학이길 바랬다. 젊은이 수준으로 건강을 진단하는 의학은 분명히 아니다. 질병을 창안하는 병원은 정작 코로나19 앞에서 속수무책이다. ‘바이오 헬스캐어로 개개인의 질환을 발본색원하겠다는 제약회사도 아니다. 샤르가프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탐미하는 과학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맨해튼 프로젝트를 권유하는 서류에 서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말년에 바이올린으로 자신을 다독거리며 반핵운동에 나섰다. 핵폭탄 개발을 책임졌던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회한으로 말년을 고통 속에 보내야 했다. 극단으로 치달아가는 거대과학의 상업화를 바라보며 노년을 우울하게 보낸 에르빈 샤르가프가 코로나19를 가장 슬기롭게 통제하면서 핵융합을 선도한다고 자랑하는 한국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심정이 될까? 22조 원의 연구비는 작은과학을 질식시킬 텐데.

 

온실가스를 가장 효율적으로 제거하던 갯벌을 광활하게 매립한 자리를 차지한 인천공항이 20년 동안 세계 최고를 자랑했지만, 코로나19가 창궐하자 90% 이상 멈췄다. 코로나19 백신이 상용화되면 다시 붐비려나? 가덕도 신공항과 제주도의 제2공항도 신설되려나?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생태적 완충력을 파괴하는 콘크리트와 비례해 창궐한다. 최첨단 과학으로 코로나19를 잠재우는 의약품이 개발되면 코로나바이러스는 변형돼 때를 기다릴 텐데, 단조로운 생태계에서 찾을 대안은 드물다. 어떤 최첨단이 거대과학이 만든 파국을 해결하겠다고 나설까? 샤르가프가 그립다. 연구비에 눈먼 과학자에게 헤라클레이토스의 불을 권하고 싶다. (녹색평론, 20211-2월호)

 

 
 
 

서평·추억

디딤돌 2020. 3. 5. 23:01


에코사이드, 마리-모니크 로뱅 지음, 목수정 옮김, 시대의창, 2020.

 

 마리-모니크 로뱅. 10여 년 전, 그이의 책 몬산토 - 죽음을 생산하는 기업을 읽으며 전율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파편적으로 기억하는 추악한 기업, 몬산토의 전모를 집요하게 파헤치면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로뱅의 책은 독점 이익을 위해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저버리는 자본의 실체를 드러냈고, 읽는 내내 몸서리쳐야 했다. 그 추악한 기업은 지금 없다. 아스피린으로 유명한 독일계 농화학기업 바이엘에 20169월에 팔렸다. 이후 몬산토의 책임은 사라지는 걸까? 분명한 현상은 몬산토를 인수한 이후 바이엘의 주식 가치가 전에 없이 곤두박질한다는 사실이다.


20161015,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몬산토 국제법정이 열렸다. 확실히 역사에 남을 일이지만 몬산토 담당자는 외면했다. 한 달 전 77조 원에 달하는 거금으로 합병된 몬산토는 법인격이 사라졌지만, 국제법정을 연출된 묘기라고 조롱한 몬산토 관계자들은 애초 참석할 의지가 없었다. 바이엘은 제초제 라운드업을 독점 판매한 몬산토가 미국을 비롯해 세계의 농민과 소비자에게 배상해야 할 거액을 내놓을 용의가 있을까? 마리-모니크 로뱅이 펴낸 에코사이드가 우리말로 번역 출간된 현재까지, 바이엘은 침묵으로 일관할 따름이다.





몬산토 최고경영자는 왜 하필 헤이그 국제법정이 열리기 직전에 막강한 권력을 포기했을까? 말이 국제법정이지, 사실 기업에 구속력이 없는 시민법정이었는데, 몬산토는 한사코 외면했다. 자신에 집중된 손해배상 소송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을까? 헤이그에서 치부가 드러나는 게 두려웠던 걸까? 알 수 없는데, 201411젠장할 성장을 집필 중인 로뱅은 농업 관련 협동조합을 이끄는 두 명의 스위스 농부를 만났다. 그들과 의기투합해 몬산토 국제법정을 구상한 로뱅은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며 만난 희생자들, 책을 펴내며 만난 과학자와 법조인을 연락해 국제법정에 기꺼이 참석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 소식을 몬산토가 모를 리 없었을 텐데, 젠장할 성장이 우리말로 출간되었는지 궁금하다.


사회정의를 위해 헤이그로 모인 5명의 법조인, 고통을 증언하거나 진실을 밝히려는 24명의 과학자, 증언을 들으려고 모인 청중, 몬산토 국제법정이 열리도록 흔쾌히 기부금을 낸 세계 시민들의 열정은 역사적 성과를 빚었다. 그 과정을 입체적으로 기록한 로뱅의 책, 에코사이드는 법정 기록에 그치지 않았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현장의 내용을 심층적 포괄적으로 담았다. 저자가 감정을 실어 고발한 기록을 일일이 소환할 필요는 없겠다. 우리가 짐작하는 몬산토의 만행은 지역은 물론 시대를 초월했다. 바이엘은 아니 그럴까? 세계로 뻗어가려는 우리 기업은 어떨까?


파죽지세로 확산된 독성물질

제초제는 식물만 죽이는가? 그렇다고 대개의 농화학기업은 답한다. 하지만 식물이 죽은 공간에 곤충은 괜찮고 초식동물은 온전할 것인가? 사람까지 문제가 미치지 않을 수 없건만, 몬산토는 한술 더 떴다. 강아지가 라운드업을 방금 뿌린 잔디밭을 뛰며 뒹굴러도 탈 없이 귀엽기만 하다는 광고를 내세우며 마셔도 문제없다는 태도를 연출한 게 아닌가. 그래서 프랑스 임산부는 글리포세이트라는 킬레이트가 주성분인 라운드업을 텃밭에 뿌렸다. 비선택적이므로 농작물에 묻지 않도록 조심하기만 했으리라.


비선택적? 쌍떡잎이든 외떡잎이든 모든 식물을 말려죽인다는 의미다. 그래서 상품평이 라운드업(Round up)”이다. 싹 죽인다는 건데, 결국 죽음 행렬이 농작물을 넘어 생태계 전반으로 진행되었지만,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킬레이트? 수도관에 찌든 금속을 추출해 빼내는 데 사용하는 물질이란다. 글리포세이트를 뿌리면 필수영양소의 일종인 망간 같은 금속을 잃은 식물이 모조리 말라죽으니 라인드업이겠지. 몬산토는 글리포세이트가 금방 자연분해돼 사람에게 절대 안전하다고 광고했다. 인부를 고용해야 하는 광활한 농토의 농장주는 편리하다고 칭송했고 그 말을 믿던 임산부는 가족을 행복하게 해줄 텃밭에 사용했다.


글리포세이트는 1950년 스위스 과학자가 발명했지만, 용도를 찾지 못해 사장된 물질이었다. 1964년 금속을 물에 녹여 추출하는 기능을 찾아낸 미국 화학기업이 특허를 냈고 중금속 중독 환자의 치료용으로 판매했다고 로뱅은 내력을 찾아냈다. 이후 공업용 관 세척용으로 판매했지만, 신통치 않았나 보다. 1970년 몬산토 화학자가 제초 기능을 확인했고 살충제 활용 가능성까지 추가해 시장에 라운드업 상품을 내놓았다. 광고가 이어졌고 큰돈을 벌자 몬산토는 농화학기업의 패권을 쥐었다. 세계 곳곳 토양의 미생물부터 죽음의 대열에 들어선 건 이후의 일이었을 테지.


프랑스 귀농인은 음식을 넘길 수 없는 아기를 낳았다. 엄마 젖을 처음 빤 아르헨티나의 신생아는 바로 질식하고 말았다. 식도와 기관지가 분리되지 않은 것이다. 찌개 국물이 기도에 조금만 스쳐도 무섭게 기침을 해대는 게 사람인데, 신생아에게 얼마나 끔찍했을까? 첫 모유를 물린 엄마는 얼마나 놀랐을까? 허겁지겁 응급실로 달려갔지만, 신생아의 식도와 기관지를 분리하기에 급급한 의사는 그리 태어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용하게 살아남은 아기는 거듭된 수술을 견뎠지만, 그만 성대가 훼손되고 말았다.


올겨울 미국에서 근 만 명이 독감으로 목숨을 잃었다는데, 미국을 비롯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제초제로 한두 아기에게 문제가 생겼다. 그게 큰 문제인가? 프랑스 하천의 절반이 글리포세이트에 오염되어도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고작 한 명? 그런 건가? 민감한 아기의 예외적인 사건을 침소봉대하는 걸까?


드러나지 않아 그렇지, 피해가 훨씬 컸을 게 틀림없다. 임신 초기, 세포와 기관 분화가 활발한 배아일 때 엄마 몸에 들어가는 화학물질, 세상에 없던 킬레이트 같은 화학물질이라면 극미량으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유산이나 사산된 태아에서 기형이 발견되고 배아 상태에서 죽은 사례도 많을 것이다. 초기 배아가 죽었다면 산모가 모를 경우가 많을 게 틀림없다. 정상으로 태어난 듯 보여도 성장이 비정상이거나 부진할 수 있다. 한두 아기의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사람에 국한할 수 없다. 미리미리 살펴 병원으로 달려가는 사람과 달리 맥없이 죽어갈 동식물들, 그 때문에 교란되거나 파괴된 생태계는 곳곳에 널렸다.


끝없는 죽음의 연쇄 앞에서

식물에 망간을 제공하면서 질소를 고정하던 박테리아가 흙에서 제거되더니 미네랄을 빼앗긴 식물이 죽어가며 생태계는 균형을 잃었다. 20년 라운드업을 뿌리자 경작지에 40여 질병이 만연하더니 콩이 급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농경지 생태계가 파괴되자 글리포세이트에 내성을 가진 잡초 20여 종류가 등장했다. 광고에 익숙한 농업자본은 당연히 라운드업을 더 살포했다. 16년 연구를 바탕으로 독립과학자는 라운드업 사용을 서너 배 늘리자 지렁이가 사라지고 토양이 침식했다고 2012년 보고했다. 콘크리트 가루처럼 흙이 푸석푸석해졌을 게 틀림없다. 끝없이 콩과 옥수수를 재배하는 미국 경작지가 요즘 그 모양이다. 미국은 언제까지 곡물을 우리나라에 수출할 수 있을까?


킬레이트로 인한 망간결핍은 가축이라고 피해갈 수 없다. 뼈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 소와 돼지가 기형으로 태어나거나 사산되었다. 태어나도 지나치게 작거나 연골 형성 장애를 앓았으니 공장식 축산이 반길 리 없다. 아르헨티나의 팜파스는 요즘 없다. 드넓었던 방목지는 중국과 유럽으로 수출해 외화를 벌어들이는 마술 종자가 도입된 뒤 갈아엎었다. 유전자조작 콩 일색인 들판은 라운드업 세례를 비행기로 받았고, 축사로 들어간 소들은 유전자조작 사료에 의존했다. 자본은 새로운 농업 질서라 추켜세웠지만 라운드업을 거푸 살포해도 잡초는 기승이었다. 이후 악몽이 전염병처럼 퍼졌다.


신경순환계 퇴행성질환으로 라운드업을 살포하던 조종사의 몸이 기형으로 뒤틀어지면서 죽어간 건 시작에 불과했다. 유산이 증가하더니 어린이 자폐가 늘어나고 천식, 비만은 만연했지만, 애교에 불과했다. 대장암, 간암, 췌장암, 혈액암이 스페인의 10배에 달하는 게 아닌가. 폐렴과 호흡기 질환으로 아이들이 죽어가 라운드업 살포를 제지하자 학교에 협박 전화가 날아들었고 누구의 압력을 받았는지 관계 장관은 피해를 평가절하했다.


비행기로 뿌리는 라운드업은 바람에 섞이며 구름을 형성하기도 했다. 경작지를 벗어난 지역으로 떨어진다는 뜻인데, 목화밭으로 퍼진 라운드업은 의학용 거즈와 생리대에 배어들었다. 과일, 채소, 곡물에 스며들자 유럽의 맥주, 미국 어린이의 소변에 심각한 수준으로 검출되었다. 몬산토는 라운드업의 위험을 카페인의 25분의 1, 비타민D500분의 1로 평가하며 수영장에 한 방울 정도의 농도에 불과하다고 얼버무렸지만, 극미량이라도 계속 흡수할 때 발생할 위험성은 전혀 평가하지 않았다.


차로 유명한 스리랑카는 라운드업 판매를 국가 차원에서 금지했다. 몬산토와 몬산토 소속 과학자의 압력과 회유가 집요했지만, 정부는 단호했다. 라운드업을 뿌린 차밭과 논에 일했던 농부, 그 지역 우물을 마신 주민의 신장 질환이 심각한 게 아닌가. 제초제로 바꾸거나 유기농으로 전환하면 증상이 사라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코나커피 품종을 알리려는 하와이는 어떠했나? 라운드업을 뿌리자 개구리에 문제가 생겼다. 어긋난 자리에 다리가 더 달리자 천적이 와도 어기적거렸고, 개구리를 잡아먹는 파충류와 새들에 연쇄 문제가 발생했을 게 틀림없다. 드물어진 개구리가 놓친 곤충들이 농작물을 마음껏 뜯었을 테고. 사슴의 성기는 후대를 잇지 못할 정도로 위축되었는데, 생태계의 그물코에서 사람인들 온전하겠는가.


기업의 폭주를 막을 방법은

명백한 생태학살이다. 식물병리학자는 어렵사리 망간결핍 현상을 파악했지만, 영업비밀이라며 자료제출을 거부한 몬산토는 1981년부터 위험성을 파악하고 있었다. 환경보호청에 몬산토 간부들을 포진시켜 자신의 의도를 관철할 수 있기에 30년 동안 감출 수 있었다. ‘환경보호인디아나연합이라. 언뜻 시민단체 같지만 몬산토가 감싸는 허수아비 단체다. 농업 연구자, 규제 담당 과학자들마저 몬산토의 위력에 굴종했다. 거액의 지원금이 입에 자물쇠를 물린 것이다.


몬산토는 모략도 서슴지 않았다. 2012년 프랑스 캉대학의 질-에릭 세랄리니 교수가 미국 허용량의 40만분의 1 농도에 불과한 글리포세이트를 2년 동안 먹이자 실험용 쥐의 신장과 간이 손상된 실상은 끔찍한 영상으로 인터넷에 떠도는데, 몬산토는 꼭두각시 학자를 동원해 중상모략했다. 대신 정년을 앞둔 독성학자가 비과학적 개념에 기초해 만들어진 임의의 결정일 뿐이라며 몬산토의 한계 허용량을 성토했는데, 20172, 노르웨이 느롬쇠대학 연구자는 자료공개 요구로 몬산토의 고의적 왜곡을 폭로했다. 15년 동안 콩의 한계 허용량을 연구하면서 글리포세이트에 적시지 않았다는 게 아닌가.


24명의 생생한 증언을 청취한 헤이그 몬산토 국제법정은 20161016일 권고의견을 작성했다. 몬산토의 생태학살을 인정하고 국제형사재판소의 재판이 열리길 기대했다. 몬산토의 추악함을 모르지 않던 우리는 어떤 행동에 나서야 할까? 생태계에 치명적인 독성물질은 바이엘이 판매할 글리포세이트에서 그치지 않는다. 치어 뱃속에서 발견되는 마이크로플라스틱과 도쿄올림픽 선수촌 식당에 공급할 후쿠시마 농수산물의 방사성물질도 생태계에 없었다. 그런데도 안전을 강변하는 세력에 맞설 독립과학자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특히 절실하건만.


초미세먼지와 온실가스가 요즘 같은 농도였다면 일찍이 생태계는 형성될 수 없었을 텐데, 우리는 오늘도 성장을 무턱대고 섬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전하는 묵시록에 관심을 두지 않는 정부와 자본은 언론을 앞세우며 가동 중단된 자동차산업을 걱정할 따름이다. 마리-모니크 로뱅의 에코사이드는 추악했던 몬산토와 치명적인 라운드업만 주목하는 게 아니다. 성장 자체에 치를 떠는데, 인간은 생태학살의 결말을 도무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녹색평론, 20203-4월호)

이책의 서평을 읽어보니 꼭 강추해야할 도서라서 방금 구입했나이다
고맙습니다^^♥

 
 
 

서평·추억

디딤돌 2019. 1. 3. 22:08

인류세의 파국 앞에서

 

인류세, 클라이브 해밀턴 지음, 정서진 옮김, 이상북스, 2018.

 

 

 

 

 

방어의 계절이 돌아왔다. 이맘때 제주도 모슬포 앞바다에서 건져 올리는 방어는 덩치가 커서 그런지, “대방어라 칭한다. 몸길이 1미터에 10Kg을 넘나드는 방추형 방어는 연붉은 살이 부드러워 식도락가의 입맛을 자극하니, 수도권의 이름 난 횟집마다 개시를 알리는 입간판을 큼직하게 세워놓았다. 하지만 수족관에 초점 잃고 둥둥 떠다니는 방어의 덩치는 의외로 작다. 한 자 겨우 넘을라나? 알 한번 낳은 적 없는 어린 개체임에 틀림없다.


배 위에 오르자마자 몇 번 힘차게 버둥대다 이내 조용해지는 방어를 살려서 수도권으로 옮기기 무척 어려울 터. 항생제 듬뿍 넣은 해수에 빠뜨려 죽지 못하게 실어오려면 아무래도 덩치가 작은 게 낫겠지. 우리나라에 항생제 내성이 높은 건 병의원의 처방전 때문이라는 해석이 있지만 수족관에서 활어를 고르려는 습관도 무시할 수 없을 텐데, 방어는 항생제보다 다른 이유로 피하고 싶다. 방사선이다. 그것도 인류가 만든 최악의 독성물질, 플루토늄.


자연계 우라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U238은 비교적 안정적인 물질이다, 발전소에서 사용하는 핵연료는 U238의 핵을 97%, 고속 중성자를 맞으면 연쇄반응하며 막대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U235의 핵을 3% 골고루 섞어 만드는데, 사용 전 핵연료는 덜 위험하지만 일단 핵분열이 시작되면 위험이 고조되고 폐기할 즈음 끔찍한 상태가 된다. 사용 직후의 핵연료 1미터 앞에 1초만 서성여도 생명이 끊어진다는데, 연쇄반응 과정에서 1% 정도 생성된 플루토늄도 한 몫 한다. 플루토늄은 알파선을 내놓는다. 알파선은 입자가 커서 종이도 뚫지 못한다지만 몸에 들어가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방어는 회유성 연안 어류다. 이맘때 우리 남해안과 제주도 모슬포 연안에 모이지만 여름이면 물이 차가운 동해로 올라간다지만 동해에 머무르는 건 아니다. 오호츠크에서 타이완까지 널리 회유하며 분포하는 방어의 일부는 여름철이면 후쿠시마 앞바다에서 바닥에 널린 생선을 잡아먹으며 덩치를 키우는데, 그 무리는 우리 연안과 모슬포 일원을 반드시 피할까?


20113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연쇄 폭발 이후, 망가진 원자로를 빠져나온 핵연료에서 적지 않은 플루토늄이 추출돼 후쿠시마 연안의 바닥에 켜켜이 쌓였을 거로 추측할 수 있고, 먹이사슬이 거듭될수록 급격히 농축되는 플루토늄이 최종 포식자인 방어 몸속에서 알파선을 내뿜을 거라 합리적으로 의심할 수 있다. 반감기가 24000년이 넘는 플루토늄 1그램이면 우리나라 인구 전부를 폐암으로 사망하게 할 정도라고 전문가들은 경고한다. 그 중 극히 일부를 섭취하더라도 대단히 위험하므로, 방어를 굳이 외면한다.


폭발한 후쿠시마 핵발전소는 굴곡진 리아스식 해안을 짓밟고 들어섰다. 오랜 풍파를 받으며 구불구불 가장 안정된 지형이었지만 인간은 리아스식 해안을 일직선으로 메웠고 그 자리에 새운 핵발전소를 안전하다 계산했다. 리아스식인 우리 해안에 갯벌이 드넓다. 아니 넓었다. 하지만 현재 대부분 매립했고 그 자리를 호화스런 비행장, 휘황찬란한 빌딩숲, 그리고 크고 작은 공단과 수많은 화력발전소로 채웠다. 영광군은 핵발전소에 내주었다, 일본과 달리 지진이 약하고 쓰나미가 없으니 염려 놓을까? 지구온난화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면서 빈도가 늘어난 태풍이 한층 강해졌고 지진도 예년 같지 않다던데.


인류세의 공룡?

 

1991년 한 생태학자가 인간을 홀로세의 공룡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홀로세가 아니라 인류세라는 주장이 2000년대 초에 나왔다. ‘현세다시 말해 홀로세는 11700년 전 플라이스토세 빙하기가 끝난 무렵부터 이어왔지만 상황이 바꿨다는 거다. 인류의 적극적 활동으로 지형이 크게 바뀐 만큼 인류세(Anthropocene)로 정의하자며 오존층 연구로 1995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파울 크뤼천이 제안했다. 물줄기와 육지의 안정성을 해치는 초대형 댐과 해안 매립만이 아니다. 생태계의 순환을 방해하는 온갖 화학물질은 생물종의 멸종을 부추기고 지구의 평균온도를 급상승시켜 사막화를 확산시켰다. 결국 2016년 국제층서위원회는 크뤼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인류세의 공룡인가? 쥐라기에서 백악기 사이 대략 2억년 동안 번성하던 거대 동식물인 공룡과 양치식물은 6500만 년 전, 한순간에 사라졌다. 이른바 대멸종이다. 전문학자는 1만년이라는 찰나에 사라졌다고 주장하는데, 지질연대로 삽시간에 생물종의 75% 이상을 멸종하게 만든 급작스런 지층 변화는 5차례 발생했고, 그 원인은 당시 번성하던 생물의 의지와 관계없었다. 지름 10킬로미터가 넘는 거대 운석이 지구에 떨어져 발생한 지층의 급변이 5번째 대멸종의 원인이었다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운석 충돌 이후 걷잡을 수 없는 화산과 지진이 이어지며 지표면이 요동쳐 먼지를 일으키고 기운이 급강하했을 텐데, 얼마나 많은 개체들이 그 순간 절명했을까?


쥐라기의 공룡은 수천 종으로 번성했지만 홀로세의 인간은 달랐다. 다른 생물의 안정을 방해하며 홀로 번성한 인간은 인류세에 이르러 자신의 종말을 스스로 예고한다. 쥐라기의 공룡은 자연 재해로 2억 년의 장구한 역사를 1만 년 만에 마감했지만 기껏 백만 년 전 존재를 드러낸 인간은 제 꾀에 걸려 넘어졌다. 경작과 가축화로 다른 생물의 생존을 억압한지 1만년 만에 다른 생물종의 멸종을 무모하게 재촉하더니 결국 자신의 생존 기반마저 허물어버렸다. 편견을 바탕으로 한 교만이었다. 이제 6번째 대멸종의 징후가 흉흉하건만 반성은커녕 인류세 주인공의 행태는 점입가경이다. 합성생물로 위기를 극복하겠단다.


자본이 주도한 한국의 산업화를 연구해 1980년대 중반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클라이브 해밀턴이 나섰다. 호주의 한 대학에서 전 지구적 성장 이념을 냉철하게 비판하던 그가 이 지경에 이른 인류세를 제대로 파악하자며 Defiant Earth펴낸 것이다. 번역하면, 도전적인 지구? 저항하는 지구? 부제로 인류세에 놓인 인류 운명(the fate humans in the anthropocene)”을 덧붙였는데, 우리 독자들이 언뜻 이해하기 쉽지 않을 터. 번역 출판한 출판사는 알기 쉽게 거대한 전환 앞에 선 인간과 지구 시스템으로 옮겼고 책 제목도 인류세로 내놓았다.


인류세의 저자 해밀턴은 독자에게 경각심을 전하고자 책을 쓴 게 아니라면서 첫 페이지를 열었다. “인류세에 도달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이해하고자 암중모색한 거라고 책의 의미를 부여했다. 암중모색? 망가뜨린 지구를 더 늦기 전에 지켜주자던가 반성할 줄 아는 생물종인 인류가 지능을 최선으로 끌어올리는 행동으로 이제라도 파탄을 막아보자는 호소는 아니다. 눈부신 과학기술로 극복할 수단을 찾아보자는 제안은 더욱 아니다. 생존을 위협할 만큼 생명유지 시스템이 훼손되었건만 별일 없는 듯 살아가는 우리는 숱한 경고를 무시한다. 막연하지만 낙관적인 전망에 희망을 거는 경향을 보인다. 그런 인간에게 인지적 도약필요하기에 절박한 마음으로 해밀턴은 암중모색을 시도한다.


인류의 인지적 도약이 필요하다

 

오늘날 가장 큰 비극은 비극을 비극으로 느끼지 못하는 데 있다고 말하는 해밀턴은 인류세는 지구 역사의 균열이라고 주장한다. 어떤 균열일까? 20대에 탄자니아 곰베 숲에 들어갈 때 300만 마리 넘던 침팬지가 50년 만에 1% 미만으로 위축되었지만 제인 구달은 반성할 줄 아는 인간이므로 희망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따뜻한 마음이지만, 개발에 저돌적인 인간이 반성을 호소하는 인간보다 훨씬 많은 세상에서 지구 생명 시스템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처참해졌다. 먼 훗날, 인류가 사라지고 한참 지난 뒤 지층에 균열은 뚜렷할 것이다. 인간에게 미칠 영향을 최소화할 여유가 한시적으로 몇 십 년 남았다고 믿지만 인류세저자는 대안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임진강에도 4대강에 설치된 대형 보가 세워질 뻔했다. 콘크리트로 번듯하게 세운 대형 보는 촛불 정권이 들어서도 없애지 못한다. 없애기커녕 눈치 보기 바쁘다. 대형 보가 높인 수위에 맞춰 시설재배를 시작한 농부들이 수위 조절에 반대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가. 보 때문에 생태계가 붕괴되고 수질이 오염되었지만 여태 엉거주춤한다. 중국 양자강의 수위를 170미터 이상 끌어올린 싼샤 댐이 완공되고 2년 뒤 쓰촨 성 대지진으로 수십만 인민이 사망했지만 인과관계는 모른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수압이 원인이라는 결론이 나오면 중국 정부는 세계 최대 수력발전을 포기하고 싼샤 댐을 허물까?


자연경관과 생태계에 인간이 영향을 미치므로 인류세라 정의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해밀턴은 지구 시스템 전반의 기능에 생긴 균열을 설명하는 용어가 인류세라고 강변한다. 지구는 이제 새로운 지질학적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걸 이해하자고 독자를 다독인다. 기술로 감히 해결을 시도할 수 없다. 지형이나 기후, 생태계와 환경으로 설명할 수 없는 초월적 범주다. 해밀턴이 말하는 지구 시스템 과학은 생태적 사유를 대체하기보다 새로운 사고체계라고 강조한다. “생태계 교란을 뛰어넘어 지구 시스템의 균열을 인식하는 질적 도약을 포착하기 위해 고안되었다는 인류세, 좀 아리송하다.


인류세 개념이 나오자 사화과학자와 자연과학자의 해석이 난무한다. 그들은 인류가 지구에 가할 수 있는 위협을 축소하면서 그릇된 해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고층대기에 황산염 입자를 뿌려 온난화를 막자는 제안은 기후과학을 부정하고 싶은 정치인과 관련 자본의 지지를 끌어들인다. 관련 연구비가 이어지겠지. 인류라는 지구의 훌륭한 지적자산의 노력으로 매력적인 행성은 난관을 극복할 거라는 믿음이 인간 세상에 스며들겠지.


지구의 모든 육상 척추동물의 질량을 따져보자. 인간이 30%, 가축이 67%. 이제 생태계가 안정되었던 홀로세로 도저히 되돌아갈 수 없다고 지적하는 해밀턴은 인간을 특출한 생물로 오만하게 인식하는 오류에서 벗어나 도덕적으로 겸허해야 한다고 말한다. 변화의 속도, 어쩌면 인간이 당연히 포함될 6의 멸종의 속도를 늦추기 위해 자연의 구조 안에서 책임 있는 행동을 보여야한다는 거다. 관성적이던 행동에 제약을 가하고 스스로 절제하자는데, 그 방법은 무엇일까? 새만금에 핵을 대체할 태양광 발전이나 내연기관을 없앨 자율주행차는 아니다. 유전자 가위 기술로 환경변화를 이기는 곡물을 그때그때 개발하는 일도 아니다.

 

인류세는 언제부터일까? 학자마다 다양한 견해를 제시하는데, 해밀턴은 콕 짚어 1945년을 제안했다. 홀로세에 없던 플라스틱과 유기화합물질이 그 즈음 출현했지만 무엇보다 방사능물질이 본격적으로 축적된 시점이다. 핵폭탄이 떨어지면서 수천 핵실험이 연거푸 자행되자 남극 빙하에 방사성물질이 나타나기 시작하지 않았나. 일본의 핵화학자 다카기 진자부로오가 반핵학자로 회심한 계기가 그랬다. 그는 촉망받던 과학자에서 다음세대를 걱정하는 생태주의자가 되었다.


자연과 합일하기 위한 노력을


지구 생명 시스템은 태양계의 에너지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지구 시스템 과학은 생태적 사유를 초월해야하므로 인류세에서 인간은 어떤 대안 행동을 암중모색해야 할까? 인류세의 저자는 자연과 분리된 인류의 독립된 역사가 현대사회과학의 기반이 되었다는 걸 상기한다. 그 결과 인간이 인류세에 내몰리게 되었겠지. 그렇다면 다시 자연과 합일해야 한다. 적어도 경작을 시작한 시절의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부품이 두 개인 도끼와 화살로 수렵채취해 가족을 먹이고 입히며 집도 지어야 하는데, 그럴 땅도 기술도 의지도 인류세에 없다. 반면 먹여 살릴 인구가 지나치게 넘친다.


생물 종 75% 이상 사라지면 지구생태계는 리셋 현상으로 들어갈 것이다. 산업화 시대보다 섭씨 평균 3.4도 이상 상승하면 양의 되물림현상으로 지구는 6.4도 이상의 상승을 피하지 못할 것이고 그리 상승하면 심해에 얼어붙은 막대한 양의 메탄하이드레이트가 대기에 분출되며 불이 붙어 지상에서 탈 수 있는 모든 게 사라질 것으로 전문학자가 분석한 기사를 10여 년 전에 보았다. 10년 이내에 인간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100년 안에 불행이 다가올 거라 당시 전문학자가 경고했는데, 이미 10년이 속절없이 지났고 파국을 맞을 상승온도를 3.4에서 2.0도로 최근 수정했다. 지난해 10월 초, 갯벌을 광활하게 메운 인천 송도신도시에서 IPCC(기후변화에 관란 정부간 협의체)는 기온 상승을 1.5도에서 막아내자고 다급하게 결의했지만 구속력이 이어지지 않았다. 후손에게 고개를 들 수 없다.


결국 6번째 대멸종으로 이어진다면 지금과 같은 인간이 진화해 다시 등장할 리 없다. 인간 비슷한 지능을 가진 존재가 운 좋게 진화된다면 인류세를 인식할지 알 수 없는데, 지금의 인간은 지구 생명 시스템이라는 기댈 언덕이 형성되었기에 등장할 수 있었다. 이제 그 언덕이 거의 무너져간다. 인간 자신의 탐욕에 의해. 우린 분수계를 넘었다. 돌이킬 수 없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이마 앞에 성호를 긋고 멸종을 기다려야 하나? 아니라면? 인류세를 읽고 경각심을 갖자. 초롱초롱한 눈매를 깜박이는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고 행복해야 하니까. (녹색평론, 2019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