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21. 3. 15. 11:34

 

거리에 전기자동차가 자주 눈에 띈다. 전기차만 만드는 미국산도 보이고 국산도 적지 않은데, 외양은 기존 승용차 모델과 다르지 않다. 다만 내연기관을 가진 자동차와 달리 슬그머니 다가오니 귀가 어두운 행인이라면 부딪힐 수 있겠다.

전기자는 부속품이 많지 않아 크기를 줄일 수 있다는데, 소비자들이 익숙한 모델을 선호해서 그럴까? 겉은 같은데 내부의 공간이 넓어졌고, 주행거리는 점점 늘어난다고 한다. 자동차의 편의장치는 그대로이거나 더 달았다는데, 수소차도 비슷하다. 수소차도 전기로 움직인다. 배터리의 전기가 아니다. 기술적 원리를 파악하는 건 아니지만, 탱크에 담긴 수소가 공기 중의 산소와 결합해 물로 변하면서 발생하는 전기로 모터를 돌려 움직인다고 한다. 수소차는 많은 배터리를 가진 전기차보다 크기를 줄일 수 있을까?

 

수소 저장탱크보다 산소와 만나는 과정에 안전성이 중요하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는 내연기관 자동차보다 더 위험한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뉴스 화면에 불에 활활 타면서 문이 열리지 않는 전기차의 사고 모습이 두렵게 나오지만, 기존 자동차보다 위험한 건 아니라고 전문가는 주장한다. 디젤 승용차보다 안전한 게 분명할 텐데, 보조금 없다면 가격이 부담스러운 게 현실적 한계일지 모른다. 대량생산으로 가격이 낮아지면 기존 차량을 대체할 수 있을까? 그때가 되면 전기차 광고처럼 하늘은 맑아지고 공기가 깨끗해질까?

 

자동차에 들어가는 철강, 가죽 시트, 윤활유, 타이어, 여러 전기제품, 그리고 배터리와 수소탱크를 만드는데 들어가는 소재와 에너지를 생각해보자. 연료를 살짝 바꾼다고 자동차 바깥의 환경이 크게 개선되리라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소비자든 생산자든, 자동차를 광고하는 기업인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한데, 시대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생태계와 다음세대에 어느 정도 미안해한다는 걸 자동차회사는 간파한다. 조금이라도 환경을 개선할 수 있다는 점을 광고하니, 같은 값이면 순진한 소비자는 전기차와 수소차를 선택하고 싶겠지. 한데 전기와 수소는 어떻게 생산하는 걸까?

 

사진: 유채로 제조하는 바이오디젤유를 친환경이라고 소개하는 홍보 사진. 하지만 화학비료와 기계로 경작하는 방식은 친환경일 수 없다.

 

친환경 수소라고 구별한다. 화력발전이나 핵발전으로 생산한 전기로 물을 분해해서 생산하는 수소라면 청정 지위를 얻지 못한다. 물을 분해하는 전기의 양이 수소연료전지에서 얻는 전기의 양보다 훨씬 많다. 물 전기분해는 아니다. 정부는 부생가스를 거론한다. 정유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스로 지금까지 정유회사는 태워버렸지만, 가공하면 수소를 분리할 수 있다고 한다. 그 과정에 에너지가 들어가고 불순물이 나오지만 견딜 수준이라고 장담한다. 한데, 부생가스로 얼마나 많은 수소차를 움직이게 할까? 음식과 축산분뇨에서 발생하는 가스를 분리하겠다는 사람도 있는데, 그 양은 더욱 적다. 차라리 식단과 육식을 줄이자.

 

액화천연가스로 수소를 분리하겠다고 하는데, 액화천연가스는 자체로 훌륭한 에너지다. 가정의 연료로 사용하고 자동차도 움직이게 하는데, 에너지 추가로 소비하며 수소를 분리해야 하나? 그 과정에서 온실가스가 적지 않게 발생하는데? 수소차를 움직이게 하려고? 몇 대나 움직이게 할까? 전국 곳곳에서 액화천연가스로 수소를 분리하겠다는 회사가 친환경을 앞세우며 등장할까 겁난다. 탄소섬유로 만드는 수소탱크는 안전하다 치자. 수소를 분리해 탱크로 옮기는 과정, 자동차 사고는 탱크, 탱크와 연결되는 설비를 지켜줄까?

 

화석연료나 핵으로 생산하는 전기를 충전하지 않을 테니, 1975년 세상에 나온 어니스트 칼렌바크의 소설 에코토피아가 소개하는 전기차를 생각해보자. 대기업이 만드는 차가 아니다. 솜씨 좋은 장인이 망치를 두드려 조립해 저렴하게 판다. 피치 못할 계기로 미국에서 독립한 국가 에코토피아를 지배하는 생존당정부는 넓었던 도로를 숲으로 바꿨다. 숲으로 가득한 도시에서 느리게 살아가는 시민은 필요할 때 전기 열차를 이용한다, 내연기관 자동차는 사라졌고 전기차도 거의 없는 공간에서 에너지와 농작물을 자급하고 일을 공정하게 나누기에 경쟁할 일이 없는 이웃은 서로 개성을 배려하기에 행복하다. 그런 국가에 새들이 깃들고 공기는 신선했다.

 

미 바이든 정부는 반도체 부족으로 자동차 생산에 차질이 생기자 당황했다. 코로나19로 집에 콕 박힌 시민들이 자동차보다 비디오게임에 빠졌고, 그를 간파한 반도체회사에서 자동차용 반도체 생산 물량을 줄이자 나타난 현상이라는데, 자동차 없이 생활이 불편한 미국에서 탄소중립을 앞당기려는 바이든 대통령도 어쩔 수 없나 보다. 하지만 자동차는 줄이기보다 아예 없애야 친환경에 다가갈 수 있다. 당장 없앨 수 없으면 차고에 콕 박아두고 꼭 필요할 때 꺼내야 환경이 약간 나아지겠지. 어떤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연료와 관계없이, 자동차는 환경과 결코 친할 수 없다. (지금여기, 2021.3.15)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21. 1. 28. 22:20

 

지난해 말 노르웨이는 커다란 재난을 당했다. 어린이를 포함해 20여 명이 실종되거나 다치고 700명의 주민이 황급히 대피해야 했다. 산사태에 이은 싱크홀이었다. 오슬로 인근 도시에서 주택 30여 채를 삼키거나 파괴한 재난의 원인으로 노르웨이 당국은 최근 집중된 비를 지목했다고 언론은 전했다. 그런데 큰비는 원인이 아니라 현상이다. 원인은 무엇일까? 지진이나 강우를 만나면 점성 잃고 액체 상태로 흘러내리는 지반이지만, 길고 혹독한 겨울을 보내던 북유럽에 큰비가 내린 까닭을 물어야 했다.

 

2010년 동계올림픽을 개최한 캐나다 밴쿠버는 자칫 노르딕 스키대회를 포기할 뻔했다. 2월에 눈 대신 내린 것이다. 부랴부랴 제설기를 수소문해 가동했고 대회를 마쳤지만, 고위도 지역의 기상이변도 일상이 되어간다. 눈 덮인 시베리아에 산불이 빈발하더니 싱크홀을 만났다. 지하철 공사장에 빗물이 휩쓸자 도로 일부가 무너지는 우리나라는 애교에 불과했다. 북유럽의 무시무시한 싱크홀은 기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마을을 집어삼킨 노르웨이나 어두울 만큼 넓고 깊은 시베리아의 싱크홀은 현재 진행형이다.

 

영구동토의 이누잇 가옥이 한쪽으로 기울다 무너지는 사고는 지하의 메탄이 슬금슬금 빠져나가며 생기는 현상이다. 툰드라 지대의 한대림은 길고 긴 세월 땅속에 파묻혀 토탄이나 갈탄으로 변했고 유럽의 산업화에 일조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 국가는 풍부한 갈탄을 더는 채굴하지 않는다. 대기오염은 최신 설비로 줄일 수 있지만, 이산화탄소 방출을 막을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시베리아의 메탄은 러시아에 막대한 부와 싱크홀을 안긴다. 집어삼킬 마을이 없어 주목받지 않았지만, 산불을 무시무시하게 키웠다.

 

사진: 시베리아에 나타나는 싱크홀. 기후변화로 지하에 얼었던 메탄이 녹아 빠져나가면서 거대하게 발생한다. 사진은 인터넷에서.

 

20115월 전후, 유럽은 공포에 절었다. 신선하다 믿었던 채소를 먹은 2000여 유럽인이 용혈성 요독증후군을 앓았고 20여 명이 사망한 까닭이다. 외교분쟁과 손해배상 공방이 이어지면서 원인은 오리무중이 되었어도 짐작은 한다. 전문가들은 스페인 남부 알메리아의 비닐하우스 단지를 주시한다. 알메리아는 15세기 대항해시대 이전 울창한 숲이었지만 범선을 위해 벌채한 뒤 황무지로 방치된 곳이었다. 1980년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피레네산맥의 만년설에서 농업용수를 가져오면서 황무지는 세계 최대 비닐하우스 단지로 개과천선했다, 하지만 기후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눈 쌓이던 피레네산맥에 비가 쏟아진다. 강수량이 부족한 알메리아는 지하수를 찾았는데, 점점 깊어졌다. 비닐하우스 농작물은 영양분을 포함하는 물을 적량 적시에 받아야하므로 알메리아는 농업용수를 재활용했다. 경쟁에 몰리는 농부는 생산비를 줄여야 했고, 이따금 농업용수 정화에 소홀했다. 용혈성 대장균이 발생한 원인으로 전문가는 추정하는데, 모름지기 인과관계는 소송에 휘말릴수록 규명이 어려운 법이다.

 

올겨울은 추워서 다행이다. 작년 겨울은 눈다운 눈을 허용하지 않았다. 요즘 털장갑 낀 손을 호주머니에 찌르고 종종걸음칠 때 보이는 부자동네의 가로수는 알록달록한 털옷을 입었다. 보는 이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필요없는 장식이다. 잎사귀 갉는 애벌레를 예방하려고 예전에 짚을 씌웠다. 나방이 땅이 아니라 짚에 알을 낳도록 유도하고, 그 짚은 봄에 태웠다. 가로수 옷은 주인 취향으로 입힌 반려견의 옷처럼 부자연스럽다.

 

관측 이래 수치를 거듭 경신하는 기상이변은 2019년 여름에 형벌 같은 더위를 안겼다. 2018년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일본 큐슈와 오키나와 그리고 대만까지 영하의 날씨에 휘감은 한파는 기후위기가 빚은 뜻밖의 사태였다. 온난화로 북극해의 빙하가 녹자 상층권에서 한기를 붙잡던 제트기류가 느슨해졌고, 한파가 낮은 위도 지역으로 빠져나가 생긴 재난이었다. 2019년 여름의 폭염은 티베트고원 만년설의 빙하가 녹아 벌어졌다. 설원이 사라지자 상층 제트기류가 느슨해졌고, 폭염이 우리나라 쪽으로 번졌다고 기상 전문가는 해석했다.

 

제설차가 꼼짝하지 않았던 겨울이 지나가자 지난봄에 매미나방 유충이 전국 산림과 논밭을 뒤덮었다.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과수원은 병균에 감염돼 잎사귀가 바싹 말랐는데, 올봄에 매미나방은 들끓지 않겠지. 하지만 기후변화는 사과 재배지를 끌어올린다. 언제까지 추석 차례상에 사과가 올라갈지 궁금한데, 제주도와 남도 숲의 요정인 긴꼬리딱새와 동박새는 강원도 일원에 둥지를 친다. 제주도 곶자왈이 훼손된 탓이 크지만, 기후위기가 곁에 왔다는 증거다. 아열대 해파리와 어패류는 일찌감치 우리 바다를 점령했다.

 

그린란드 빙하가 녹아내리자 공포를 느낀 아이슬란드 소설가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은 변질되는 시간과 물에 대하여고뇌한 책에서 사람들의 안일한 태도에 절망한다. 생태계와 인류를 파국으로 몰고가는 기후변화를 절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을 채찍질하며 히말라야 빙원이 녹아내릴 상황에 안절부절한다. 운 좋게 나치의 사슬을 피한 조부모 덕분에 태어난 소설가 조너선 사프란 포어는 점점 강력해지는 자연의 경고를 귀찮은 소음 정도로 취급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날씨다라고 외친다. ‘K방역에 취한 우리는 어떤가? 기후위기의 파국을 모면할 운이 찾아올까?

 

대통령이 2050년 탄소중립을 선언하자 자동차 대기업은 2040년까지 내연기관을 가진 자동차 생산을 중단하겠다 호응했다. 유럽과 일본은 2030년에 생산 중단을 선언했고 미국 새 정권도 동참을 예고하는데, 우리는 한가하다. 2040년 이전에 내연기관 자동차를 팔 수 있다고 보는가? 유럽 대부분의 국가는 2030년에 모든 화력발전을 폐쇄하겠다고 선언했는데, 화력발전소를 계속 짓는 우리나라는 고물 발전소 연료를 천연가스로 대체하겠다며 생색을 낸다. 막대한 전력이 필요한 디지털 산업을 한국판 뉴딜로 선전하는 국가다운데, 천연가스는 기후변화와 무관하다고 믿는 걸까? 전기와 수소로 움직이는 자율자동차는 그린뉴딜인가?

 

바닷물이 시내까지 넘치자 베네치아는 8조 원의 예산으로 해수면 상승을 막으려고 발버둥치지만 전문가들은 가당찮게 본다. 이번 세기 내에 25cm 상승할 해수면은 그린란드 빙하가 모두 녹는다면 7미터 이상 육지를 삼킬 거로 예견한다. 해수면은 목욕물이 욕조에 차오르듯 상승할 리 없다. 해일과 쓰나미를 동반하며 해안 방호벽을 가볍게 넘거나 파괴할 게 틀림없다. 중국 상하이는 해수면 아래로 사라질 텐데, 인천공항은 온전할까? 자동차 광고의 매카인 송도신도시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는 해운대 아파트는 언제까지 명성을 유지할까? 이용객이 90% 이상 줄어도 만들겠다는 가덕도, 울릉도, 흑산도, 백령도의 공항은 무슨 소용인가?

 

경작이 시작된 이래 홀로세였던 지층이 오로지 인류의 탐욕으로 변질되었다. 홀로세가 아니라 인류세로 변경하자고 학자들은 2000년에 제안했다. 사회학자 클라이브 해밀턴은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않는 인류가 빚은 필연적 파국으로 분석한다. 코로나19가 번지자 유럽과 미국의 부자들은 비상식량과 생존배낭을 챙겨 안전지대로 탈출했지만, 소용없었다. 인류세 지층에 탈출할 안전공간은 없다. “자네만 잠자고 있으면” “걔만 잘했다면아무 문제 없는 듯 지나가던 시절은 지나갔다.

 

1991년 미국 애리조나 사막에서 시도한 인공 생태계 연구는 실패했다. 우주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갈 공간은 연구자의 허황일 뿐 인류의 꿈이 아니다. 생태계에서 태어난 인류는 어찌되든 지구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코로나19는 지금과 같은 삶은 틀렸다고 분명하게 경고한다. 콘크리트로 생태계를 질식시키는 삶은 후손의 몫까지 빼앗아 짓밟는다. 포유류 생태계의 97%를 차지한 인류는 식물의 70%, 동물의 60%를 먹어치운 뒤 버린다. 다양성이 손상된 생태계는 완충력을 잃었다. 파국 부르는 기후위기에 포위됐다.

 

2021년 백신을 개발한 인류는 석유로 유지되는 과학기술로 코로나19는 통제할 수 있다고 교만해한다. 티베트의 영구동토가 녹으면 온난화된 콘크리트 지층에 어떤 인수공통질병들이 스멀스멀 창궐할까? 자신의 비빌언덕인 생태계를 유린한 인류는 코로나19 이후의 바이러스에 대항할 수 있다고 믿는 걸까? 입춘 지나 신축년에 들어서면 백신이 본격 보급될 텐데, 코로나19의 경고는 2020년 소음으로 잊혀질 것인가? (작은책, 20212월호)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20. 10. 19. 18:03

 

시화호에 수달이 산다. 1990년대 중반, 11km의 방조제가 바닷물을 막았을 때 끔찍한 악취를 풍기던 시화호는 요즘 깨끗해졌다. 조력발전소에서 하루 두 차례 바닷물을 받고 내보내면서 시커먼 물속에서 썩어가던 어선도 말끔히 치워졌고 그 자리에 낚시꾼이 모인다.

 

원래 갯벌과 바다였던 시화호 자리를 방조제로 막아 담수를 모아두면 인근 시화공단의 공업용수와 주변 농촌의 농업용수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 개발자들은 홍보했다. 아니 그런 기대를 앞세우고 방조제를 막았지만 허사였다. 공장 폐수는 물론이고 농약에 찌든 오염수가 모이면서 불과 2년 만에 저주받은 호수로 전락했다. 시화 방조제를 강행했던 사람들은 그런 결과를 애초 짐작하지 못했을까? 환경단체마다 진작 예견했는데?

 

정부에서 시화호 수질을 개선하려고 많은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소용없었다. 시화호 일부는 개발되었다. 대부도를 잇는 도로로 활용되는 상황이므로 기왕 완성된 방조제는 돌이킬 수 없다고 합리화한 정부는 공업단지를 조성했다. 한술 더 떴다. 시화호 일부 구간에 조력발전소를 끼워 넣은 것인다. 그러자 수질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방조제 안쪽 물이 나가면서 한동안 바다 생태계가 뒤죽박죽 교란되었지만, 자연의 완충력으로 이내 회복되었고 담수 섞인 호수 안쪽 물 색깔이 바다와 같을 정도로 개선되었다. 그러자 수달이 나타났다.

 

시화호에서 수달을 볼 수 있다는 소문은 일본의 관광객을 끌어들였다. 우리보다 먼저 강둑 대부분을 콘크리트로 싸바른 일본의 주요 하천은 자연성을 상실했고, 터전 잃은 수달은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나라처럼 일본도 조끼와 목도리를 위한 사냥으로 수달 수를 크게 잃었어도 명맥은 유지했는데, 콘크리트가 강의 생명력을 거세하자 멸종된 것이리라. 많은 일본인은 수달에 대한 추억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나 보다. 코로나19로 방문을 자제하지만, 시화호를 찾은 일본인들은 우리나라를 무척 부러워했다.

 

기네스북에 등재된 새만금 방조제는 시화호보다 3배 넘게 길다. 수많은 축사와 드넓은 농경지에서 배출하는 오염수가 섞이는 동진강과 만경강은 방조제 안에 하구를 열어 놓는다. 바닷물 흐름이 차단된 거대한 호수로 두 하천에서 토해낸 물이 10년 넘게 모이면서 시화호보다 훨씬 막대한 예산을 퍼부어도 새만금의 수질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 그 예산은 누가 어떻게 탕진했는지 예서 따지지 말자. 견딜 수 없었는지, 새만금도 결국 방조제를 개방해 살려내자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당연한 일이다.

 

새만금 이전에 기네스북에 올랐을 네덜란드 압술루트 방조제는 현재 바닷물이 자유롭게 왕래한다. 애초 그렇게 설계한 건 아니었다. 국토의 4분의 1이 해수면 아래에 있는 국가에서 거액의 예산을 들인 방조제 안에 바닷물을 드나들게 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오염과 악취를 버림받던 방조제를 관광용으로 전환한 것인데, 기대 이상의 효과가 나타났다. 낚시와 야영, 먹을거리 관련 산업이 들어섰고 어업이 되살아나면서 관광 명소로 거듭나는 게 아닌가. 예산을 축내며 나락을 헤매는 새만금은 어떤 길을 모색해야 할까?

 

그림: 여러 차례 덧칠하는 새만금 개발 계획도. 애초 계획했던 농경지는 보이지 않고 신기루 같은 청사진을 마구잡이로 늘어놓았지만 실현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전북지역의 시민단체와 종교계가 해수유통을 요구하며 민관협의회 구성을 제안하고 나셨다. 지금까지 퍼부은 예산과 노력이 소용없었다는 걸 30년 만에 인정한 환경부가 해수유통 발상을 꺼낸 이후의 일이다. 시민단체와 종교계는 경쟁력 있는 새만금을 만들기 위해서 수질이 1~2등급은 돼야 한다.”라며 환영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은 모양이다. “스마트 수변도시와 관광레저용지 특성을 고려할 때 현재 3등급인 목표 수질의 상향 조정이 필요하다 덧붙였다고 언론이 보도했는데, 본질은 개발보다 회복이어야 한다.

 

이제까지 새만금 개발청에서 화려하게 덧칠해온 도시개발은 가당치 않다. 인구 300만 대도시인 인천도 유지에 힘겨워하는 송도신도시보다 훨씬 휘황찬란한 그림들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어떤 투자가를 속일 수 있겠나? 지구온난화가 심각해지면서 태풍과 해일이 전에 없이 거세지는 마당에 해수면보다 낮은 지반에 조성하겠다는 비행장도 터무니없다. 핵발전소 3기를 능가할 거라는 태양광발전 계획도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다. 숱한 사례를 돌아보라. 태양광 발전은 가정과 마을 단위가 적절하지 않은가?

 

34km가 넘는 방조제 일부를 뜯어내 해수유통이 자유롭게 개조한다면 바깥 바다가 오염되더라도 고통의 시간을 잠시 견디면 회복될 것이다. 방조제 내부에 해수가 하루 두 차례 밀고 썬다면 갯벌이 살아나면서 어패류를 맨손으로 수확하던 문화와 역사를 틀림없이 되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를 위한 연구는 조급하면 안 된다. 살아날 새만금 일원에 터 잡을 주민과 후손이 흔쾌히 받아들일 만큼 합리적이어야 한다. 투명하고 독립적이어야 할 뿐 아니라 심층적이어야 한다.

 

갯벌도 영토다. 철근콘크리트 건물들이 하늘을 찌르고 아스팔트 도로가 종횡으로 달리는 개발은 신기루다. 코로나 19를 불러들이며 확산시켰다. 내일을 생각하며 차분해야 한다. 자본의 이윤보다 후손의 지속 가능한 생존을 먼저 생각한다면 콘크리트보다 생태계를 보전해야 한다. 해양생태계를 보듬으며 지구온난화를 예방하고 해양재난을 완충하는 해안은 예나 지금이나 전북의 자산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애써 무시해왔던 시화호와 네덜란드의 경험을 상기하면서 마땅히 달라져야 한다. (지금여기, 2020.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