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2. 9. 29. 00:02

     공장식 개 사육이 불 보듯

 

본디 육식동물인 개는 이가 날카롭다. 서열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사생결단으로 싸운다. 상처를 입거나 심하면 죽는다. 그런 개를 집단 사육한다면 사육장은 난장판이 되고, 소음으로 민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눈과 귀를 피한 곳에서 사육하는 이른바 개 농장은 지금도 민원의 대상이다. 한 마리가 짖으면 연쇄적으로 짖어대므로 많은 농장은 미리 고막을 뚫지만 소용없다. 성대를 제거하지 않는 한, 예민한 코가 낯선 이와 사료 냄새들에 반응해 짖는 행동을 연쇄적으로 유발하는 탓이다.


개 농장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보통 철망으로 만든 좁은 공간에 가둬 사육한다. 두 마리 이상 넣으면 서로 물어뜯을 수 있으니 이빨 몇 개를 미리 뽑기도 하는데, 그런 폭력은 심한 스트레스와 질병으로 이어지고, 질병은 개 농장 전체로 전파될 수 있다. 또한 그 스트레스는 개고기를 먹는 이에게 전해질 수 있다.


사회 일각에서 개고기 도축 합법화로 위생적인 도축과 투명한 사업을 유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개고기 도축 합법화는 명실상부하게 개를 식용으로 사육해 어린 상태에서 죽이겠다는 국내외 선언과 다르지 않다. 외국 일부 인사의 비난을 문화상대주의라며 백안시하지만 개고기가 남겨야 할 전통 음식문화로 보기 어렵다.


고기 먹기 어렵던 시절, 동네의 개는 무더위에 모내기하다 지친 농민들의 보양식이었지만 지금은 고기가 지천인 세상이다. 사냥하던 선조답게 신체 구조가 날렵할 뿐 아니라 울타리에 들어와 정을 나누던 개를 고기용으로 사육한다는 건 오히려 전통을 모독한다.


개고기 합법화는 공장식 축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개고기를 광고하여 판매를 촉진하는 일 또한 단속 대상일 수 없으니 소비는 늘어날 테고, 개 사육장은 자본에 의해 거대 집단화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민간의 감시를 차단한다면 동물 사육에 기본이 되어야 할 복지는 무시될 것이다.


개를 집단으로 사육하려면 미리 부리 끝을 뭉툭하게 잘라내는 닭이나 꼬리와 고환을 뜯어내는 돼지처럼 모종의 조치를 취할 가능성이 높다. 이를 뽑아내거나 고막을 뚫는 폭력으로 부족하다. 흐리멍덩한 시선으로 옥수수 축내는 송아지처럼 바꿔야 한다. 자본은 덩치 빨리 크고 순해터진 강아지만 꾸역꾸역 낳는 개를 품종개량하려 들지 않을까.


개도축 합법화가 되면 다양한 요리를 선보이겠다고 벼르는 이가 있다. 수육이나 전골 이외에 3분 개요리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고 개 통조림이 대형 슈퍼마켓에 버젓이 진열돼 해외 언론의 주목받을 것이다. 인생을 반려하기 위해 개를 입양한 시민은 몰론, 대외 업무에 종사하는 이들은 해외의 부정적인 기사를 볼 때마다 참담한 심사를 달래기 어려울 것이다.


비위생적으로 사육할 뿐 아니라 혐오스럽게 도살하는 농장이 이따금 보도돼 눈살 찌푸리게 하지만 그건 행정당국이 의지만 있다면 현행법으로 충분히 단속 계도할 수 있다. 고기용으로 허가받지 않은 이상, 목적에 맞는 시설을 갖추고 복지에 신경을 쓰며 사육한다면 민원은 얼마든지 줄일 수 있다.


후미진 식당의 개고기든, 복중이 아니라 사시사철 먹자고 붙인 사철탕이든, 고기가 지천인 세상에 이젠 자제할 때가 되었다. 사람은 맛과 재미, 그리고 호기심으로 개고기를 먹지만 오랜 세월 우리 곁을 지켰던 개는 목숨을 잃는다. 도축을 합법화하면 대부분 강아지 상태에서(한겨레, 2012.9.28.)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2. 8. 25. 12:55

   개고기 없이 무더위 견디기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흐른다. 찾아간 회의실에는 에어컨이 없어 장소를 바꿨다는데, 선풍기로 식힌 땀을 다시 흘리며 들어간 찻집. 과연 시원했지만 이내 더워졌다. 공기마저 답답해 얼음물을 연실 마셔도 소용이 없었다. 선풍기가 돌아가는 그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잘 견디므로, 외부인을 위한 에어컨 배려는 없어도 그만이었다. 모두 더우니 땀 흘리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회의에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회의장. 에어컨이 훌륭한 실내를 나와 예약한 삼계탕 집으로 나갔다. 낮은 온도로 에어컨을 켜도 펄펄 끓는 삼계탕 도가니를 끊임없이 내오는 식당은 더웠다. 먹는 이는 말할 것도 없을 텐데, 비 오듯 땀을 쏟는 일행은 차라리 밖이 더 시원할 거라 생각했다. 이열치열인가. 삼계탕 먹은 일행은 늦은 시간까지 회의를 강행했는데, 삼계탕 효과는 아니었다. 일행은 삼계탕과 관계없이 긴 회의 시간을 견뎌냈다. 에어컨은 몰라도 평소 고기를 많이 먹기 때문은 아니었다. 과한 육식으로 몸이 부푼 이가 적지 않았으므로.


삼계탕이나 개고기를 먹지 않고 무더위를 보내면 몸이 허해질까. 에어컨 없는 공간에서 삼계탕과 개고기를 피해도 몸이 허하지 않은 처지라서 뭐라 할 말이 없는데, 복날과 관계없이 지구온난화가 심해지면서 더 더워졌다. 체온 가까운 기온이 계속되므로 일을 집중하기 어렵다. 원고를 쓰거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회의장에서 특히 버겁다. 그러므로 에어컨은 필수일까. 그런 것 같지 않다. 에어컨 없던 시절, 중요한 결정이 여름이면 미루어지고 문사의 집필은 중단되었다는 말은 일찍이 듣지 못했다. 다만 더위 피한 밤을 기다렸겠지.


비교적 잘 먹고, 대낮에 쉴 수 있는 도회지의 문사들이야 그렇다 치고, 장마가 와야 천수답에 물이 고이니 삼복더위에 모내기했던 농부들은 몸이 허해졌을지 모른다. 저장해둔 잡곡까지 바닥을 보이던 시기에 몸을 잔뜩 구부리며 며칠을 일해야 했으니 오죽했으랴. 그때 닭을 잡고 싶지만 내 논일을 같이 한 이웃에게 두루 대접할 정도로 덩치가 큰 건 아니다. 소나 돼지는 살림밑천이니 참고, 비슷한 처지의 농부들은 자기 집의 개를 번갈아 내놓았을 테지. 강아지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므로.


지금은 고기가 지천이다. 닭고기는 물론 쇠고기와 돼지고기도 널렸다. 해산물은 또 얼마나 많은가. 농민들의 몸도 삼복더위에 허해지지 않는다. 이양기 때문만이 아니다. 양수기와 보온 못자리 덕분에 장마철 이전에 대부분의 논은 모내기를 마친다. 천수답도 거의 사라졌다. 지독한 가뭄이 아니라면 양수기가 불필요한데, 온갖 농기계 덕분에 농번기에도 일손이 전처럼 많아야 하는 게 아니다. 초고령화된 농촌에 일 부탁할 이웃이 드문 까닭에 주로 도시의 아들이나 친지와 농사를 짓는데, 저녁마다 고기반찬이 올라왔으니 남의 집 개를 잡을 일도 없다.


도시나 농촌이나 허할 기회조차 없지만, 삼복더위가 오면 반가운 듯 개고기와 닭고기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저 의례적이거나 맛과 재미 때문이다. 손님이 북적이는 식당의 수와 크기로 볼 때, 개고기보다 닭고기 먹는 이가 훨씬 많을 텐데, 개와 달리, 지금은 시장에서 닭을 구하는 시대가 아니다. 누가 무슨 사료를 주고 어떻게 키웠는지 전혀 알 수 없고, 알려고 들지 않는 대기업 제품의 닭고기를 먹는다. 손님 대부분은 얼마나 위생적으로 처리했는지 모르면서 대기업 제품이므로 막연히 믿는다. 하지만 개의 경우는 확신하지 못한다.


사육에서 도축과 포장까지, 하루 수십 만 마리를 처리하는 대기업 제품의 닭이 과연 위생적인지 여부는 예서 따지지 말자. 근교 허름한 곳에서 고기용으로 사육하는 개 농장은 겉보기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하지만 농장 주인은 그런 지적에 펄쩍 뛴다. 의심스러우면 와서 보라고 강변한다. 과일장수에게 파는 사과 맛있느냐 물을 수 없는 법. 개 농장 주인의 말을 신뢰할 수 없는 이는 대체로 소비자가 아니다. 소비자보다 행정가, 언론인, 시의원이나 국회의원 들은 삼복 시기가 되면 개고기 도축 합법화를 논의하자고 나선다. 펄쩍 뛰던 개 농장 주인은 떳떳해질 테니 반대하지 않는 눈치다.


생각해보자. 사위 와야 잡는 닭이야말로 가장 위생적이다. 자신의 딸과 사위,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손주들이 먹을 고기가 아닌가. 내 집 일 도와준 이웃과 같이 먹으려고 시장에서 서너 마리 사거나 닭장에서 가져온 닭도 위생적이다. 하지만 누가 키웠는지 모르는 닭을 시장에서 잡아서 팔 때 문제가 된다. 식중독이 발생한 거다. 그렇다면 비교해보자. 손님 보는 앞에서 한두 마리 잡던 예전과 대기업에서 한꺼번에 처리해 냉동하는 요즘, 식중독은 언제 더 발생했는가. 마찬가지 맥락인데, 개의 사육과 도축을 제도화하면 안심할 수 있을까. 공장식으로 사육해 냉동한 개를 대형 상가의 식품매장에서 팔면 위생적이 될까.


위생만이 쟁점의 전부일 수 없다. 밀집 사육하는 닭은 서로 쪼아 상처를 입히므로, 상품성을 위해 부리 끝을 미리 자른다. 닭고기가 그렇듯, 개고기도 이윤의 극대화를 노리는 대기업에서 독점할 텐데, 두 마리만 가둬도 무섭게 으르렁거리며 죽어라 물어뜯는 개는 어떻게 사육하려 들까. 지금도 귀청을 미리 뚫고 이 몇 개를 뽑는다던데, 혹시 양처럼 순하고 돼지처럼 살찌는 개를 육종하는 건 아닐까. 수육과 전골로 구별해 부위별로 포장하거나, 핫도그가 아닌 도그버거가 떠들썩한 광고를 등에 업고 출현하는 건 아닐까. 합법화가 되면 ‘3분 보신탕을 내놓겠다고 벼르는 업자가 있는 마당이다.


문화상대주의는 온당치 않으니 개고기 조롱하는 이에 대항해 그네의 음식문화를 비난하지 말자. 한데 개고기가 지켜야 할 우리의 고유 식문화는 아니다. 그러므로 고기가 지천인 세상에서, 사람과 눈 맞추며 정 나누는 개까지 고기용으로 사육할 당위성은 없다. 입맛을 위해 생명을 끊을 명분도 약하다. 소와 돼지도, 닭과 오리도, 심지어 연어도 유전자를 조작한 옥수수와 콩을 먹인다는데, 개는 아니 그럴까. 소비자의 눈을 피해 미국산 쇠고기의 도축부산물은 수입하는 건 아닐까.


     에어컨 때문에 여름 감기가 흔한 요즘, 사육과 도축 합법화로 얻는 고기가 지나치게 많다. 그래서 지구온난화는 심해진다. 그렇다면 견과류나 제발 제철 제고장의 콩 단백질을 먹으면 어떨까. 고깃살도 절로 줄 텐데. (작은책, 20129월호)

태풍피해 없으 셨나요?
또 온다는데 걱정입니다..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1. 28. 12:06

- 개고기 합법화 논쟁을 중심으로

 

해마다 복중이면 라디오나 텔레비전은 개고기 관련 토론회를 편성한다. 사람 품에서 자라는 개는 식용일 수 없다는 동물애호단체와 개고기는 전통 식품이므로 당연히 먹을 수 있다는 측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가운데, 문화를 전공하는 이가 잠잖게 참여하여 약방의 감초처럼 제기하는 논점은 문화상대주의다. 개를 잡아먹는 우리의 식문화를 미개하거나 비윤리적이라고 비난하는 외국인에 대해 우리가 굴욕적으로 민감해할 필요가 있는지 아쉬워하며 그들의 식문화는 과연 세련되거나 윤리적인가 되묻는다.

 

숱한 외국인을 하나의 문화 범주로 뭉뚱그릴 수 없다. 외국 중에 우리만큼 개고기를 즐기는 국가가 있고, 어쩌면 우리보다 정도가 더한 국가도 있을 것이지만 문화상대주의를 꺼낸 전문가는 왕년의 프랑스 인기 여배우와 그의 의견에 동조하는 하얀 피부의 서양인들이 사는 지역을 떠올렸을 것 같다. 서양인이라고 우리의 개고기 문화를 모두 백안시하는 것도 아니다. 토론방송의 자료화면은 우리 못지않게 개고기 식당을 찾아가는 서양 남녀의 인터뷰 장면을 긍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우리 식당에서 개고기를 즐기는 서양인은 우리나라를 방문한 외국인 중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은 남의 식습관을 굳이 따지지 않을 뿐, 개고기를 결코 반기지 않을 게 틀림없다. 우리의 음식문화에 말이나 송충이가 포함돼 있지 않듯, 그들의 문화와 의식 속에 개는 식용이 아닌 까닭이다. 모르긴 해도 건전한 상식을 가진 이라면 남의 나라의 음식문화를 자신에게 익숙한 문화잣대로 왈가왈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자기 음식문화의 고유한 메뉴라고 해도 누구나 즐기지 않는다. 개성에 따라 싫고 좋은 식단이 다르고, 때와 장소에 따라 변덕스러워지는 취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될 수 있는대로 개인의 선택을 배려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이가 개를 식용으로 받아들이는 건 아니다. 개고기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양측이 합리적으로 동의할 만큼 공정하며 투명한 통계자료가 나오지 않아 섣부르게 판단할 수 없지만, 우리나라 사람 중에 절반 이상은 개고기를 먹지 않으며 특히 젊은 층이나 여성의 경우 절대 다수가 선택의 여지가 있다면 피할 거로 생각한다. 개고기를 피하는 사람이 개고기 먹는 이를 혐오하거나 야만스럽다고 대놓고 비판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오히려 개고기를 먹는 사람의 인격보다 서양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지나치게 관심을 갖는 우리의 자세에 불만이 더 많을 것이다. 서양인의 평가에 일희일비하는 태도, 일종의 옥시덴탈리즘인가.

 

개고기 토론회에서 서양인들이 선호하는 식품 중에서 우리가 혐오하는 음식으로 자주 등장하는 메뉴는 단연 푸아그라다. 우리 개고기 문화를 비판한 여배우와 같은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즐기는 푸아그라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모른다. 거위의 간으로 만드는 푸아그라. 거위의 간이 커야 얼마나 클까. 한 마리에서 많은 양의 푸아그라를 얻기 위해 축산업자가 거위를 얼마나 잔혹하게 사육하는지 비판하는 사람은 우리나라보다 유럽에 많고, 푸아그라 소비자가 가장 많은 국가에도 적지 않은 이가 비판에 동참한다. 알코올이 섞인 사료를 억지로 목으로 밀어넣어 어린 거위의 간이 축구공만큼 커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아그라는 여전히 많이 생산되고 언제나 잘 팔린다.

 

우리 뿐 아니라 개고기를 먹는 다른 나라도 비판하는 그 여배우는 푸아그라를 즐길까. 그를 비판하는 사람의 근거 없는 주장과 달리, 그는 푸아그라는 물론 어떠한 육식도 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를 특히 좋아하는 그는 채식주의자답게 모피는 물론, 어떠한 가죽제품도 몸에 걸치지 않는다고 한다. 언론이 주목해주는 기회를 적극 활용해 남의 나라의 독특한 식문화를 비난해 우리 문화 전공자의 비판을 초래하지만, 개성이 뚜렷한 그는 어떠한 서양인도, 어떤 외국도 대표하지 않았다. 그저 한 개인일 뿐이다. 이제 우리 시민들은 음식과 관련된 문화상대주의 따위의 논란에 피로감을 느낀다. 개고기 토론에서 외국인의 시선을 배제할 필요는 없지만, 주로 백인인 외국인 때문에 개고기를 반대하는 우리나라 사람은 정치나 외교관련 고위 공무원 이외에는 드물지 모른다.

 

최근 서울시는 개고기를 합법화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서울에만 528개의 보신탕집이 있고 복날이 되면 일시적으로 600여 곳까지 늘어나는 현실에서 시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현행 축산물가공처리법에서 도축 대상으로 선정한 소, 말, 양(염소), 돼지, 닭, 오리, 사슴, 토끼, 칠면조, 거위, 메추리, 꿩, 당나귀, 이상 13종에 개를 추가하자고 중앙정부에 건의하겠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 음식문화로 자리잡았으나 관리의 사각지대에 있는 개고기를 위생적으로 도살해 시장에 내놓을 수 있도록 제도를 바꾸자는 서울시는 “동물 애호가들 반발과 국제적 논란”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여러 차례의 공청회를 열어 다양한 의견을 신중하게 수렴하겠다는 취지를 덧붙였다.

 

1975년 축산물에 포함되었던 개는 3년이 지나 제외되었고 1984년 올림픽을 4년 앞두고 서울시가 ‘혐오식품 영업행위 금지대상’에 포함했지만, 중앙정부가 서울시의 건의를 받아들인다면 개고기는 쇠고기처럼 시장에서 자유로운 판매가 가능하게 되는 것인가. 서울시는 “산채로 매달아 불에 그슬리거나 두들겨 패는 등 잔인하고 비위생적 도축도 엄격히 규제할 수 있어 오히려 동물권익에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하며 반대하는 시민들을 설득하겠다는데, 그 성공 여부와 관계없이, 도축 합법화가 동물권익에 도움이 되고 개고기가 설득의 대상인가 궁금하다. 개는 식용이라고 국가가 앞장서서 대내외적으로 천명하는 게 과연 현명한 정책일까.

 

장난감처럼 귀여워 기르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입양한 생명이라는 뜻에서 개를 ‘반려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시민단체 회원들은 성명서를 즉각 채택하며 서울시의 움직임에 대응했다. “개고기 합법화 정책이 인류의 보편적 동물보호 관념에서 크게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며,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한 이 사회에 경종을 울리지는 못할망정 거꾸로 비도덕적이고 비정한 개고기식용 악습을 부추기고 합법화 하려는 것은, 전 세계에 동물학대국의 오명을 쓰고 있는 대한민국의 이름에 다시 한 번 먹칠하는 것”이라며 “개고기식용이 합법화 되면 그 다음엔 고양이 식용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묻는다. 대조적인 반응도 나왔다. 개를 좋아하는 개인의 취향 때문에 즐기는 이가 많은 개고기의 합법화를 반대하는 동물보호단체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면서 지금까지 개고기를 먹어온 행위가 불법이었는지 따지며, 개고기가 개를 학대한 거라면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하다못해 고래고기도 모두 동물학대의 산물”인지 반문한다. 쳇바퀴 돌듯, 논쟁 때마다 들리는 주장들이다.

 

고래나 물개를 사냥할 뿐 학대하지 않는 이누잇은 음식문화의 전통이 그렇기 때문이지 규정에 따르는 게 아니다. 사위가 찾아오면 닭을 잡고 집안잔치 앞두고 돼지를 잡으며 동네잔치를 위해 소를 잡듯 모내기 마치고 개를 잡는 행위는 입법 여부와 관계없이 예로부터 자연스러웠다. 단백질이 부족했던 시절, 도와준 이에게 베푸는 작은 성의였다. 그를 위해 일부러 개를 키웠다 해도 키우는 과정에서 불필요하게 학대하지 않았고, 서울시에서 염려하듯 산 채로 매달아 불에 그슬리지 않았으며, 죽은 개를 남의 눈에 뜨지 않도록 가마니에 넣은 뒤에 두드렸다. 그 과정은 일종의 문화였지 법으로 조율해야하는 의전이 아니었다.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도 얼마 전까지 법이 관리하지 않았다. 도살하는 이와 판매하는 이, 그리고 구입하는 이가 절연돼 그 과정을 서로 알 수 없게 되면서 위생에 대한 신뢰를 공적으로 담보할 제도가 필요했을 것이다. 물론 제도가 견인한다고 위생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많은 가축을 한꺼번에 도축해야 경쟁에 이길 수 있다고 여기는 대형 공장일수록 비위생적이며 비윤리적인 처사가 빈발하지 않던가. 생산자에서 소비자까지 거리가 짧을수록 음식은 안심할 수 있다. 먹는 이가 직접 잡거나 가족이나 아는 사람이 잡은 가축을 나눠 먹는 경우라면 법 준수와 관계없이 고기는 믿을 수 있다. 판매용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도살하는 방식이 혐오스러워 보인다고 불문곡직 학대라고 단정할 수 없다. 혐오스럽다는 느낌 자체가 주관적일 뿐더러 도축 방법이 문화에 따라 다양한데 한쪽 시각으로 평가할 수 없을 것이다. 혐오나 학대, 비윤리성 들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가축의 임신과 출산, 사육과 도축, 그리고 가공과 유통에 이르기까지 동물의 본성이 어떻게 배려되었고, 그 과정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인권은 얼마나 고려되었는지 종합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행 축산물가공처리법으로 관리되는 13종의 축산물은 윤리적으로 생산된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동물의 본성을 제대로 배려하고 있는가.

 

24시간 불 밝힌 양계장의 좁아터진 철망상자 속에서 여성호르몬 섞인 사료만 먹으며 달걀을 낳다, 효율이 떨어지면 구덩이에 처박혀 죽는 산란용 닭은 본성이 최대로 억압되었다. 부화 후 꼭 35일 자라면 삼계탕 뚝배기로 들어가는 병아리도 마찬가지다. 남보다 빨리 많이 키워 큰돈을 벌어들이려는 자본에 의해 철저히 계산된 축사에서 정해진 사료를 먹고 짧은 시간에 살찌는 예비 닭고기일 뿐이다. 사료의 양과 불어나는 몸을 비교해 가장 경제적일 때 일제히 도살하는 돼지와 소는 성체가 되기도 전에 고기로 변한다. 본성이 고려될 틈이 있을까. 닭은 부리가 잘리고 돼지는 꼬리가 잘리며 소는 되새김질을 제지당한다. 배합사료만 먹어야 하고 도살될 때까지 전혀 움직이지 못한다. 움직이면 살이 덜 쪄 손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천지사방을 뛰어다녀야 하는 개는 오래 묶이거나 갇혀 있으면 사나워진다. 심지어 먹이를 주는 주인을 물기도 하는데 수백 마리의 개를 한 자리에서 키우는 일은 여간 버겁지 않다. 먹이를 먼저 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는 개들을 풀어 키울 수 없어 튼튼한 철망상자에 한 마리 씩 가둬야 하는데 번거롭기 그지없다. 상자에 여러 마리를 넣으면 물어죽이는 사고 빈발한다.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 마리가 짖으면 사방에서 덩달아 짖어대는 통에 민원이 드문 지역을 찾으려 애를 쓰는 사육업자는 고객의 편의를 위해 현장에서 도축까지 떠맡는데, 도축이 비위생적이라는 시민단체의 항의에 할 말이 많다. 견인하는 제도가 없어도 소나 돼지처럼 도축 과정이 깨끗하고 뒤처리도 말끔하다면서 원하면 공개하겠다고 제안한다.

 

고막을 뚫으면 잘 짓지 못하는 개는 사료를 잘 먹고 몸이 금방 불어난다고 한다. 그런 의혹과 관계없이 대부분의 개 사육업자는 자신의 사업이 합법적인 테두리에 들어가길 원한다. 떳떳하고 싶다는 점, 십분 이해하지만 개고기마저 합법화된다면 장차 어떤 일이 초래될 수 있을까. 단골은 물론, 호기심을 견딜 수 없는 사람을 위해 생김생김이 식용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개를 축산물로 지정한다면 사육업자는 축사 규모를 소나 돼지처럼 키울 것이고, 개도 그에 걸맞게 품종을 개량할 가능성이 높다. 토론회에 출연한 한 축산학자는 공개적으로 그 포부를 밝힌 바 있다. 가늘고 긴 개의 다리가 투실투실해지면서 개고기 광고와 더불어 통조림과 3분요리도 개고기 시장에 선보일 텐데, 문제는 예기치 않은 곳에서 증폭될 것이다. 국가 망신이 국제적으로 공식화될 가능성이 높다. 국가가 개를 식용으로 공인한 셈이 아닌가.

 

음식은 지역과 국가와 문화와 역사에 따라 다채롭고, 온전한 상식을 가졌다면 누구도 그 자체를 비난하지 않는다. 다만 국가에서 앞장서 법으로 식품의 성격을 규정할 때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생김새나 길들어온 과정을 고려할 때, 개는 식용으로 곁에 다가온 동물이 아니라는 걸 우리를 포함한 국제사회는 동의한다. 육식으로 인한 질병이 성인은 물론 어린이에게 만연된 세상에 굳이 개를 먹지 않아도 우리는 허기를 충분히 메울 수 있다. 또한 새로운 고기에 대한 호기심은 법과 제도가 없어도 충족되며, 사육과 도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생과 비윤리성은 기존의 다른 법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개고기든 푸아그라든, 번데기든 송충이 요리든, 음식문화에 다양성은 있어도 우열은 없다. 음식문화를 포함하여 모든 문화가 마찬가지다. 문화는 넓게 보아 ‘삶의 방식’이다. 경상도 음식이 짜고 전라도 음식이 단 것은 지역의 오랜 문화에서 온 개성이다. 거기에 옳고 그름, 맞고 틀림, 우수하고 열등하다는 차별은 가당치 않다. 자신이 대량으로 생산한 농축산물과 그를 획일적으로 가공한 식품과 고기를 독특한 문화적 개성을 무시하고 다양한 지역에 경쟁적으로 공급하려는 태도가 문제를 일으킨다. 광우병을 일으킨 소, 구제역에 연이어 쓰러지는 돼지, 조류독감을 퍼뜨리는 닭과 오리가 그럴 진데, 우리가 국제적 비난을 무릅쓰며 앞장서서 개마저 그 모양으로 만들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을 것이다. (사이언스올, 2009년 1월 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