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천

디딤돌 2021. 12. 27. 21:04

 

북성포구는 사라졌다. 십자수로의 절반 가까이 매립되었으니 분명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시민의 기억에 아스라이 남은 포구는 아니다. 인천을 상징하던 포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만석부두와 화수부두를 복원한다고 하니 기대할 수 있을까? 발전을 상징하는 송도신도시는 인천의 기억이 아니다. 게다가 기후위기는 해수면을 위험하게 끌어올릴 텐데, 대처하지 않으면 가라앉을 수 있지 않은가.

 

아련한 기억을 뒤로하고 만석과 화수부두를 걸으면 북쪽으로 청라신도시가 보인다. “청라에 사시나요?” 물었더니, “아니요! 청라국제도시에 산다고요!”하고 날이 선 대답이 돌아온 그곳에 외국인이 얼마나 사는지 모른다. 날씨가 흐려 그랬는지, 어딘가 을씨년스럽다. “국제를 강조한 그분이 들으면 기분 상해할 소리지만, 숨 헐떡이는 맹수가 날카로운 이빨을 하늘을 행해 맥없이 으르렁대는 모습으로 보인다. 국제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지만, 인천을 전혀 상징하지 못한다.

 

송도신도시도 국제도시인가? 외국인이 드물지 않은데, 송도신도시의 일부 주민은 새로운 랜드마크를 요구한다. 랜드마크라. 낯선 곳에서 어리둥절한 사람에게 길을 안내하는 상징을 말할 텐데, 초고층빌딩이 즐비한 송도신도시에서 151층 쌍둥이 빌딩이어야 할까? 다행인지, 151층을 강조하던 목소리가 차분해진 모양이다. 더 높은 건물이 들어서는 순간 빛을 잃는 높이보다 국제도시의 위상과 가치를 위한 시그니쳐 타운이 추세라는 설득이 주효했을지 모르는데, 시그니쳐 타운? 아리송하다.

 

송도신도시에 랜드마크는 이미 여럿이다. 동춘동의 집 베란다에 도드라지게 보이는 동북아무역센터는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타워가 완공되기 전까지 우리나라 최고 높이였다. 미세먼지가 지독하게 뿌옇지 않다면 송도신도시 어디에서 볼 수 있는 랜드마크임에 틀림없다. 최첨단을 자랑하는 송도콘벤시아도 있는데, 높이가 낮아 자격 미달일까? 호주 시드니는 해변의 수려한 오페라하우스를, 프랑스 파리는 에펠탑과 개선문을 상징으로 내세운다. 높이와 관계없이,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기에 여행자는 꼭 찾아가는 랜드마크다.

 

사진: 송도신도시의 동북아무역센터 빌딩. 잠실 롯데월드타워 완공 전까지 최고의 높이였다.(사진은 인천in에서)

 

1995년 갯벌 매립으로 시작한 송도신도시는 자체로 우리나라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최신 자동차 광고의 메카일 뿐 아니라 재벌가 집안싸움이 주제인 드라마의 지리적 배경이 될 정도로 휘황찬란하지 않던가. 신도시를 꿈꾸는 지역마다 송도신도시를 전범으로 여기는데, 사실 기후위기 시대에 해안의 개발은 신중해야 한다. 태평양의 작은 도서국만 해수면 상승에 피해 지역일 수 없다. 충청도까지 아열대화한 바다는 머지않아 인천의 해수면을 끌어올릴 텐데, 송도신도시는 시방 어떤 대비를 하고 있나?

 

송도신도시가 차지한 갯벌은 인천의 소중한 랜드마크였다. 영겁 세월이 만든 리아스식 해안에 드넓게 펼쳐진 갯벌은 바다에서 다가오는 재난을 가장 효과적으로 막았을 뿐 아니라 수많은 먹을거리의 기반이었다. 송도에서 고잔으로 이어진 어촌계에서 잡아들이던 어패물은 인천의 오랜 문화였지만 지금 없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밀도의 식물성플랑크톤과 탄산칼슘으로 구성된 조개껍데기는 얼마나 많은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며 지구온난화를 예방해주던가? 콘크리트 더미인 송도신도시는 온실가스를 지독하게 내뿜는다. 심각해지는 기후위기를 목전에 두고 송도신도시의 랜드마크 타령은 철없는 투정보다 나을 게 없다.

 

송도신도시 인근에 아시아 최대의 가스저장탱크가 비죽비죽 위용을 자랑하는데, 해수면 상승에 견딜까? 해수가 치고 들어와도 작동이 원활할지 궁금한데, 온난화로 높아질 해수면은 욕조에 따뜻한 물 채우듯 얌전하지 않을 거라는 데 있다. 우리 해역은 세계 평균보다 수온 상승이 크다. 수온 1도가 상승하면 태풍이 2배 이상 거세진다고 전문학자는 예측하는데, 연약지반 위의 랜드마크는 송도신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견인할 정도로 든든할 수 있을까?

 

모래땅의 신기루인 두바이 부르즈할리파는 800m를 상회하지만 머지않아 1km의 높이를 내세울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킹덤타워에 가려질 텐데, 역시 기후위기 앞에서 신기루에 불과할 것이다. 걷잡지 못할 에너지 낭비를 수반해야 유지될 높이가 국제사회에서 어떤 상징으로 손가락질받을 것인가? 이미 찬란한 송도신도시는 랜드마크 운운하며 신기루를 추가할 노릇일 수 없다. 갯벌로 돌이킬 수 없다면, 차라리 해수면 상승의 무서운 파고를 다소 완충할 인공 다도해를 랜드마크로 궁리를 하면 어떨까? (인천in, 2021.12.27.)

 

 
 
 

공동체·인간

디딤돌 2021. 9. 1. 21:17

 

9호 태풍 루핏의 간접 영향인가? 추분이 하루 지난 날, 강원도 해안은 시간당 60mm가 넘는 비가 쏟아져 도로를 덮쳤고, 찜통이던 인천에 한바탕 소나기가 스쳤다. 맑은 하늘에 낮은 구름이 엄습하더니 아파트단지의 나무들을 뒤흔들며 별안간 퍼부었는데, 비가 그치자 동쪽 하늘부터 구름이 사라지며 쌍무지개가 떴다. 원고 실마리 찾느라 미처 하늘을 살피지 못했는데, 사회연결망마다 사진이 속속 올라왔다.

 

우여곡절 속의 “2020 도쿄올림픽을 마치는 날 자정, 일본 남부 규슈지방을 관통할 루핏은 어느 정도의 비를 뿌렸을까? 재해는 피했나 본데, 미국 캘리포니아는 최악의 가뭄으로 대형 수력발전소가 가동을 멈췄다는 보도가 나왔다. 1967년 완공 이후 처음이라는데, 그리스와 터키는 감당하기 어려운 산불로 고통받았다. 작년 여름 우리는 기상관측 이래 가장 긴 장마로 시달렸는데, 코로나19 속 올여름은 폭염경보가 30일 넘게 이어진다. 기상이변인가? 분명 정상은 아닌데, 우리나라는 다행히 감내할 범위 안이다. 한낮 폭염은 여전한데, 어두워지자 누그러졌다. 고맙다.

 

소나기 퍼붓기 전, 찜통더위를 뚫고 집에서 멀지 않은 시립박물관을 찾았다. “한국전쟁 이후 식량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국민에게 구호품으로 미국이 제공한 밀을 제분하면서 덩치가 커진 회사와 손잡고 <52년 인천생 곰표>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연다기에 만보걷기를 겸해 찾은 것인데, 곰표 밀가루 생산 기업은 그간의 성취를 자랑하면서 새 상품도 홍보했다. 미국 밀 덕분에 허기를 면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분식이 일반화된 현상을 주목한 전시회는 우리 농촌이 밀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올여름 폭염은 관측 이래 얼마나 혹독했을까? 폭염주의보 기준인 하루 최고기온 섭씨 33도가 여전히 이어지는 상황이라 그런지 언론은 기록 경신 여부를 보도하지 않는다. 신혼 가전으로 등극한 지 오래된 에어컨이 웬만한 집에 설치된 마당이라 그런지, 폭염경보 기준인 35도를 초과해도 사람들은 경각심을 느끼지 못한다. 기술과 에너지 덕분에 견딜 만한데, 화석연료로 생산하는 전기는 실내를 시원하게 만드는 효과 이상으로 지구를 데운다. 에어컨을 켤 때 마음 무거워 입맛 잃는 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는데, 다행히 아침저녁으로 시원해진다.

 

요사이 바깥에서 먹는 점심은 차가워야 했다. 냉면은 30년 전 생긴 메밀 알레르기가 거부하니 콩국수나 냉국수를 찾았는데, 소금을 적량 넘게 넣어 콩국물을 짜게 마시는 실수를 피하려고 냉국수를 주문하지만, 대체로 맵다. 젊은이 취향이 대세라 그렇다. 밀면이 만만한데, 멀리 떨어진 식당까지 동행하려는 이 드물다. 하는 수 없어 슈퍼마켓에서 밀면을 잔뜩 사놓았는데, 질리고 말았다. 선선해졌으니 바지락 칼국수를 도전해볼까?

 

슈퍼마켓의 밀면은 조리가 쉽다. 끓인 면을 수돗물로 식힌 뒤 별도 포장된 육수에 넣기만 하면 그만인데, 바지락 칼국수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면이야 특별할 게 없지만, 싱싱한 바지락과 입맛에 맞는 육수는 찾기 어렵다. 애호박과 감자까지 구하려면 배보다 배꼽이 크다. 식당을 찾는 게 편한데, 대부도의 이름난 식당은 지나치게 멀다. 동행할 차가 드물다. 바지락이 싱싱하다면 동네 식당도 괜찮다. 가격이 적당하다.

 

사진: 1990년대 말, 송도신도시를 위한 갯벌매립이 본격화되기 이전, 송도갯벌에서 동죽을 채뒤하는 모습. 비가 오나 눈이오나 바람이 부나, 누구나 1인 하루 60kg의 동죽을 채취했다.

 

왕만두를 포함해 4만 원이면 4명에게 충분한 맛과 양을 제공하는 바지락 칼국수의 원가는 얼마나 될까? 곰표 밀가루 20kg 한 봉지 가격이 25천 원 정도다. 몇 인분이 나올지 감을 잡지 못하지만, 무시할 만하겠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택배비 포함한 바지락 10kg6만 원이란다. 다짜고짜 바지락 칼국수 잘 끊이는 방법으로 검색하니 4인분에 1.5kg의 바지락이 필요하다고 귀띔한다. 산지와 바지락을 직거래하고 도매상에서 애호박과 감자를 수북이 가져올 테니, 식당 주인에게 부담을 줄 정도는 아니겠다. 입추와 말복까지 지나 선선해졌으니 바지락 칼국수가 삼계탕 바통을 받을 것인가?

 

복중에 주로 먹는 삼계탕은 흔쾌히 지갑 열기에 좀 부담스럽다. 뚝배기 안에 쏙 들어가는 냉동 닭의 가격은 그리 비싸지 않다던데, 국물에 들어간 가는 인삼 두어 뿌리와 대추, 밤 때문일 리 없다. 무언가 바가지를 쓰는 기분이다. 그래도 더운 날 티셔츠 펑 젖을 정도로 땀 흘리고 나오면 몸이 시원해진다. 이열치열인데, 공장식으로 사육하는 닭은 병아리에서 냉동까지, 사람 손이 거의 필요 없다. 썰물 뒤를 따라 갯벌로 나간 아낙이 두어 시간 호미질로 채취하는 바지락이 더 비싸야 옳지 않나? 아니란다. 유전자 조작한 옥수수 사료를 주로 먹는 닭은 폭염과 조류독감에 쉽사리 죽어 나가니 그 비용도 추가해야 한단다.

 

지난 726, 44차 총회를 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갯벌을 세계 자연유산에 등재했다. 118종의 철새의 주요 기착지일 뿐 아니라 멸종 위기에 처한 세계적 희귀 조류 22종의 터전이 되는 서천, 고창, 신안, 그리고 보성과 순천만의 갯벌이 대상 지역이다. “지질학적, 해양학적, 기후학적으로 보존해야 할 가치가 크기에 자연유산에 등재한 유네스코는 탁월한 생물다양성을 주목했다. 2천여 동식물이 분포하는 갯벌의 생태적 가치를 국제사회가 뒤늦게 인식한 것이다.

 

칼국수에 들어가는 바지락을 채취하는 인천 일원의 갯벌은 포함되지 않았다. 천만다행일까? 꼭 그렇지 않다.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의 경험에 비추어, 호미 정도의 도구로 아낙이 채취하는 갯벌은 훼손되지 않는다. 고운 개펄보다 모래가 많은 갯벌에서 서식하는 바지락은 양식장에서 배양한 종패를 뿌린 뒤 2년이 지나야 채취한다. 인체의 콩팥처럼 온갖 생물이 육지에서 들어오는 유기물을 정화하는 갯벌은 2년이면 거뜬히 회복된다. 그뿐인가? 성장하는 바지락은 껍질에 탄산칼슘을 저장한다. 지구를 데우는 탄소를 그만큼 흡수한 것인데, 먹이사슬의 기반이 되는 플랑크톤은 갯벌 1g에 수억 분포하며 탄소를 흡수한다. 유네스코는 기후위기를 효율적으로 막아내는 천혜 갯벌의 가치를 비로소 파악했으리라.

 

우리 갯벌의 자연유산 등재 소식에 기뻐한 대통령은 지자체와 협력하여 갯벌의 생태계를 보전하고, 지역사회 발전, 더 나아가 세계인이 함께 공유하는 소중한 세계유산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현 정부와 이전 정부에서 무참하게 매립하며 파괴해온 갯벌의 막대한 손실에 대한 안타까움은 별도로 표시하지 않았다. 바지락보다 훨씬 맛나다 평가받는 백합의 주산지, 새만금 일원의 갯벌이 황당한 이유로 탐욕스럽게 오염되며 사라지는 현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바지락 칼국수의 주재료인 밀가루는 미국산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가 먹는 곡물의 80%는 대부분 미국에서 수입하는데, 역사적으로 탄소를 가장 많이 배출한 국가답게(?), 미국은 시방 기후위기의 복판에 있다. 사막화에 이어 감당할 수 없는 기상이변이 속출한다. 난방에 관심이 없던 텍사스에 분수가 겨울에 얼어붙더니 체온보다 높은 폭염이 에어컨 모르던 북부 도시의 여름을 강타했다. 강력한 기술을 동원해 서둘러 극복했지만, 임시방편이다. 더욱 가혹하게 번지는 산불과 경작지 사막화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미국의 밀을 안정적으로 수입할 날이 머지않아 종료된다는 엄중한 신호다.

 

세계 석유의 20%를 소비하는 미국은 공업보다 농업 분야에 더 많은 석유가 들어간다. 공장식 축산에 없어서 안 되는 옥수수를 재배하려면 옥수수 열량의 10배에 달하는 석유가 경운, 파종, 수확, 운송에 들어간다. 우리가 수입하는 밀과 콩도 마찬가지인데, 사막화되는 경작지의 농업용수를 위해 동원하는 에너지는 얼마나 될까? 기계화된 논밭에 저수지에서 물 끌어와야 하는 우리나라도 사정이 비슷한데, 바지락은 사뭇 다르다. 억척스러운 아낙의 정성이면 족하다. 물론 갯벌이 온전해야 가능한 이야기지만.

 

형벌 같았던 폭염이 슬그머니 물러간다. 짧아졌더라도 가을로 접어드는 걸 보니, 아직 우리는 살아 있고, 당분간 더 살아남을 수 있다는 의미인 모양이다. 희망을 버리지 말자. 이럴 때, 싱싱한 바지락 넣고 칼국수를 맛깔나게 조리하는 요섹남이 부러운데, 거대한 기계로 갯벌을 마구 흡입하며 잡아들이는 어린 바지락은 피했으면 좋겠다. 한데 우리 갯벌에 퍼지는 미세플라스틱은 어떻게 피해야 하나? 미세플라스틱 먹고 병치레하는 비용까지 원가에 포함되는 건 참을 수 없으므로.(작은책, 2021년 9월호)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12. 12. 5. 00:51

    내년 김장도 올해 같기를

 

하늘이 파랗다. 분명 11월이건만 주말마다 비가 내렸는데, 모처럼 구름 한 점 없다. 풀무학교 전공부에서 농사를 가르치는 장 선생은 정작 자기 밭의 수확과 파종이 늦어 안타까워하던데, 주말농장을 다니는 이도 오늘 같은 가을을 기다렸으리라. 주말농장이야 잘 여문 배추와 무를 뽑으면 빈터로 한겨울을 보내겠지만, 장 선생의 밭은 오늘 양파와 우리밀이 가지런히 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농약 전혀 없는 빵과 튼실한 양파를 내년이면 맛보겠지.


밖으로 열리는 유리창에 성에가 좀처럼 끼지 않는 도시에서 시민들은 희한해하겠지만, 갈무리를 마친 농경지에 하얀 서리가 아침이면 내릴 것이다. 배추와 무는 커다란 트럭에 실려 도시의 농산물시장으로 떠났으니 바야흐로 김장철이 되었다. 마당이 없는 도시는 김장독을 대신하는 냉장고를 비워둘 테고, 농민들은 주문에 맞게 배추를 소금에 절여놓을 것이다. 염전은 여름 땡볕에서 굵은 땀방울을 연실 흘렸고, 어부들은 가을에 잡아올린 새우들을 충분히 염장했을 것이다.


어려서 본 김장은 일종의 축제 같았다. 가깝게 지내는 이웃 사이에서 기대에 찬 우리는 마냥 즐거웠다. 집안의 추레한 모습을 가리는 담장의 높이만큼 쌓아올린 배추는 근 200포기는 되었던 거 같다. 남자들은 김장독을 묻으면 그만이었는데, 여자들은 바빴다. 절이고, 무 채 썰고, 양념 준비하고, 양념과 버무린 무채를 배춧잎 사이에 넣고, 깊은 김장독에 차곡차곡 김치를 넣어 뚜껑을 닫는다고 일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뒷정리도 많았지만, 아까부터 기다리는 남자들에게 소주에 곁들인 보쌈을 내놓아야 했다. 마냥 뛰어다니던 아이들에게 몇 점 먹였고.


그때 대부분의 가정은 12월 중순에 김장을 했는데, 요즘은 11월 찬바람이 불면 시작한다. 양념과 젓갈류는 물론 배추와 무도 시장과 쇼핑몰의 식품매장에 사시사철 준비돼 있지만, 무엇보다 김치냉장고가 있으니 계절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역시 김장은 김장철에 해야 제 맛이다. 김치에 깃드는 유산균도 계절에 따라 다른 건지, 보통 한두 포기, 많아야 예닐곱 포기에서 그치는 김치는 아무리 맛이 좋아도 김장김치 같지 않다. 북적거리며 준비하는 분위기에서 기대가 증폭돼 그랬을까. 마치면 한겨울이 넉넉해져 그런 건 아닐지.

 


과학기술이 개입하는 우리네 요즘 김장

 

몇 해 전인가. 늦은 겨울 강화의 한 호텔에서 회의를 할 때였다. 저녁 만찬에 나온 순무김치는 특별했다. 순무 사이에 간간이 보이는 밴댕이는 강화 특유의 향취를 입 안 가득 전해주었다. 김장철에 밴댕이는 잘 잡히지 않지만 그래도 갯벌이 넓은 만큼 없지는 않을 터. 속알지를 때내고 머리를 잘라낸 밴댕이를 순무김치와 버무리면 봄철 입맛 돋게 하는데 그만이었을 것이다. 특히 강화에서.


순무는 강화에서 재배해야 독특한 향이 분명해지는데 밴댕이가 많이 잡히는 곳이라서 그런가, 가을 밴댕이는 꼭 순무에 넣었다. 밴댕이가 적당히 발효된 순무김치 맛이 얼마 전까지 강화를 대표할 수 있었는데, 인천은 갈치를 김장배추에 버무려 넣었다. 지금이야 제주도 인근 바다에서 커다란 상태로 잡아 올리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과거,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인천 앞바다에 갈치가 흔했고, 살을 발라내기 어렵게 작은 갈치는 그대로 토막을 내 양념에 넣었다. 2월 김장독 깊은 곳에서 꺼낸 김치 사이에서 찾아내는 갈치는 쫀득쫀득, 바다가 살아 있음을 단박에 알려주었는데, 갯벌이 거의 사라진 지금은 아니다.


취향에 따라 다소 다르겠지만, 요즘 인천에서 담그는 김장의 젓갈은 다채롭지 않다. 가을에 잡은 새우로 만든 추젓이나 1년 이상 백령도나 대청도 인근에서 숙성한 까나리액젓이 주종을 이룬다. 까나리액젓은 최근 일이고, 육젓은 전부터 김장에 넣었는데, 매립이 광범위하게 진행된 인천 앞바다는 갯벌만 잃은 게 아니다. 모래도 막대하게 사라졌다. 수도권의 하늘 모르게 치솟는 건물을 위해 퍼올려진 모래의 양이 어마어마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모래는 매립하는 갯벌의 위에 쏟아 부어졌다. 그래서 모래가 쓸려나간 해안은 좁아지고 방풍림은 뿌리를 드러냈으며 세계적으로 인천 이외에 그 유래가 없는 풀등도 자취를 잃어간다. 바닷물이 썰어 낮아져도 모래가 나타나지 않는 거다. 그러자 새우가 전처럼 잡히지 않는다.


바닷모래로 세워 올린 아파트마다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인천에 인구는 급증했고 그들 모두 김장을 담근다. 새우젓이 그만큼 필요하다는 뜻인데, 갯벌이 명맥만 유지하는 소래포구에 넘쳐나는 새우젓은 어디에서 왔을까. 새우젓만이 아니다. 인천 앞바다에서 드물어졌거나 아예 잡히지 않는 생선과 여러 젓갈들이 승용차 몰고 찾아오는 손님들을 화려하게 유혹한다. 바닷모래가 넉넉했던 덕적도 인근에서 주머니 긴 그물로 연실 잡아올리던 새우들은 어느새 추억이 되었건만 소래포구와 연안부두는 새우젓을 산더미처럼 쌓았고, 강화는 해마다 새우젓 축제를 준비한다.


과학기술 덕분이다. 인공위성으로 새우 집단을 미리 파악할 수 있는 동력선과 잡아둔 새우를 얼려두는 냉동시설, 그리고 바닷물에서 소금을 얼른 추출할 수 있는 건조시설이 준비돼 있는 한, 새우젓은 사시사철 넘친다. 어디 새우젓뿐인가. 장마철 지나야 파종하던 김장용 배추와 무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산간에서 일 년 내내 심고 수확할 수 있다. 비닐멀칭과 화학비료와 제초제와 농기계가 있고, 커다란 트럭이 농산물시장으로 즉각 배달하기 때문으로, 모두 석유를 펑펑 소비하는 과학기술이 뒷받침한다. 다시 말해보자. 과학기술이 돕지 않는다면 이맘때 몰리는 김장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 석유가 모자란다면 김장 비용은 반비례해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가전회사에서 열심히 개발해 텔레비전으로 광고하는 김치냉장고가 없다면 김칫독을 묻을 수 없는 아파트는 김장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과연 과학기술의 찬란한 승리다.


 

걱정스런 내년 이후의 김장

 

계절의 변화에 순응하는 농토와 바다가 있기에 오래 전부터 적응해온 우리는 제철에 김장을 담가 겨울을 지낼 수 있었는데, 과학기술의 덕분에, 그리고 값싼 석유 덕분에, 우리는 제철보다 앞당겨 김장김치를 먹는다. 생활협동조합이 아니라면 김장용 양념 무채에 양식 굴을 넣고 가을부터 호강할 수 있지만 요즘 과학기술은 과도하다. 차라리 지나치다. 내의 차림으로 겨울을 지내게 해줄 정도로 에너지를 풍부하게 만들어내는 발전소마다 바다의 온도를 높여놓았다. 이산화탄소를 내뿜는 화력발전소는 공기의 온도까지 높이는데, 같은 용량의 화력발전소보다 2배나 많은 온배수를 쏟아내는 핵발전소는 바다의 생태계를 크게 흔든다. 새우잡이 그물이 찢어져라 올라오는 해파리는 바다 수온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다.


이젠 그 수준을 넘어선다. 수온변화는 애교가 되었다. 이맘때 제주도 모슬포에서 성황리에 잡아 올리는 방어를 삼가는 게 좋은 이유는 회유하는 방어의 특성 상,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로 분출된 방사성 물질이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김장에 넣는 멸치젓이 걱정인 이유 역시 후쿠시마 해역을 멸치가 회유하는 탓이다. 김장에 꼭 넣는 젓갈에 방사성 물질까지 포함시킬 수는 없건만, 우리는 안심할 수 있을까. 아직 갯벌에서 잡히는 해산물은 괜찮다고 하므로. 영광 핵발전소가 갯벌을 향해 막대한 온배수를 토해내지만 방사성 물질이 포함된 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걱정이다. 들리는 소문이 흉흉하다.


수명을 다해하는 핵발전소에 엉터리 부품을 사용했다는 의혹은 사고를 연상케 한다. 자연재해가 사고로 이어진 후쿠시마는 지진대 위에 지었는데, 어떤 전문가는 후쿠시마 핵발전소보다 우리 핵발전소의 위험 요소가 훨씬 크다고 주장한다. 후쿠시마 정도의 사고가 난다면 인천 앞바다의 갯벌마저 광범위하게 오렴시킬 게 분명한 영광 핵발전소도 예외가 아니다. 영광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한다면, 우리는 갯벌에서 건져올리는 어떤 어패류도 먹을 수 없다. 어쩌면 젓갈이 없는 김장김치를 맹맹하게 먹어야 할지 모른다. 우리 서해안에 세운 핵발전소만이 아니다. 중국 동해안, 다시 말해 우리 서해안을 바라보는 핵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한다면 어떨 것인가. 우리는 핵발전소를 감시하는 환경단체와 주민들이 있지만 중국엔 없다. 감시 없다면 어떤 시설도 안전하지 않다.


     그렇더라도, 김치냉장고를 구비한 덕분에, 생활협동조합에서 절인배추를 공급하는 덕분에, 아니 배추를 절여서 전해주는 유기농민 덕분에, 그리고 첨가물 없이 추젓을 담은 어민 덕분에, 11월 중순, 우리집은 김장을 일찍 마칠 수 있었다. 지구로 쏟아지는 태양의 입사각도가 좁아지면서 기온은 조금씩 내려가지만 햇빛이 드는 한낮은 따사롭다. 적당하게 익은 겉절이와 생굴로 버무린 김장용 무채로 휴일의 늦은 아침을 넉넉하게 먹은 오늘, 파란 하늘 아래 잎사귀를 잃은 가로수는 파리해보이지만, 깊어진 가을이 한결 여유롭다. 이런 호강, 내년에도 이어질 수 있을까. (푸른두레생협, 2012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