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10. 17. 18:55

 

하루가 지나갈수록 가을이 완연해진다. 사람들은 유난히 아름답다는 올해의 단풍을 맞으려 산과 들을 찾아 집을 나서지만, 기상이변으로 예년 같지 않은 여름 내내 탄소동화작용을 하며 노폐물이 쌓인 나뭇잎들은 초록을 잃고 가을색을 머물며 잠시 더 매달려 있을 뿐이다. 머지않아 땅에 쓸쓸이 떨어지면 내년 봄 대지에서 싹을 틔울 씨앗과 열매를 위해 기꺼이 거름이 될 것이다. 나뭇잎을 떨어뜨리며 성장이 멈춘 나무는 벌써 내년 봄에 펼칠 잎눈을 달아놓았다.

 

언제든 먹을거리가 지천인 사람과 사람 주변에서 먹이를 구하는 애완동물도 덩달아 예외지만, 대부분의 동물은 먹을 게 풍성할 때 새끼들을 낳는다. 초식동물이 어미젖을 뗄 때 연한 풀잎이 널렸고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의 새끼들이 막 태어날 때 젖을 뗄 것이다. 그때가 대략 봄이지만 모름지기 생명이 깃든 자연의 삼라만상은 내일의 생명을 위해 가을에 갈무리한다. 우리가 가을에 거두는 온갖 곡식도 내년을 위해 잘 보관한다. 햅쌀로 밥을 지어먹는 농부는 막 태어난 아기가 건강하게 자랄 것이라 믿으며 뿌듯해했을 것이다.

 

결실의 계절이라 그런가. 정부는 인구 문제를 가을에 들고 나왔다. 지난달 30일 부천에서 5000만 번째 아기가 태어났다고, 우리나라가 이제 인구 5천만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떠들썩하게 발표한 지 한 달도 안 돼, 이제 우리의 인구가 줄어든다고, 이러다가 2100년이면 반토막, 2500년이면 우리 민족이 사라질지 모른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하지만 그런 주장에 북한의 한민족과 해외 동포의 수를 뺀 결례가 있다는 걸 지적하면서 나아가 한 지역의 인구 변화가 그 따위 일차함수로 늘고 주는 게 아니라는 걸 덧붙이고 싶다.

 

모름지기 자연에서 변화하는 생물종의 개체수는 환경 여건과 밀접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여건이 허락되면 낳지 말라고 해도 낳을 테고, 더 낳으려 하지 않는 건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걸 모르지 않는 정부가 덮어놓고 아이를 더 낳으라며 여성들을 자극하는 행위는 무책임할 뿐 아니라 부도덕하다. 낳은 아이를 남 못지않게 키우려는 부모의 심정을 거의 충족시킬 수 없는 정책을 아직도 수정하지 못하는 처지를 망각하고 있을 뿐 아니다. 지위와 계층을 막론하고 일단 태어난 아이가 건강한 사회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환경을 개선하려는데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역행하지 않던가.

 

교육 여건이나 일자리만이 아니다. 식량자급률은 비참할 지경으로 떨어졌어도 기름진 농토는 정부 주도의 개발로 점점 사라져 해외 의존은 더욱 심화되는데, 지구온난화에 이은 기상이변은 세계 식량의 수급을 예측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석유는 정점을 지나 에너지 위기를 예고하지만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 소비는 국제사회의 갈등을 부추긴다. 내일의 환경이 안정적이지 않은데 어떻게 아이를 더 낳으라는 건가. 조상이 물려준 금수강산은 맥없이 파괴되고 물과 대기와 땅은 형편없이 오염되고 말았다. 어디 그뿐인가. 뿌리가 파괴된 공동체에서 마음 나눌 이웃 만나기 어렵다.

 

아이를 더 낳아야 애국이라고? 얼마 전까지 인파가 몰리는 광장마다 숫자가 늘어나는 ‘인구시계’를 세워놓고 아이를 그만 낳으라고 다그치던 시절을 생각해보라. 피임 기구를 무료로 나누어주는데 그치지 않고 정관 수술을 하면 예비군 훈련도 즉각 면제해주었다. 1983년 남쪽의 인구가 4천만이 되었을 때 정부는 아이를 셋 이상 낳은 자를 징벌해야 할 철면피로 취급했다. 의료보험은 물론이고 학자금 혜택도 제외하며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며 성화하더니 이제 더 낳으라고? 4천만일 때 많다던 인구가 5천만이 되자 왜 부족하게 된 건지, 납득할 만한 변명이 없다. 그 사이 농토나 식량이 늘었나. 아니면 환경이라도 나아졌는가.

 

‘고령화사회’에서 ‘저출산’이 문제라고? 산업체에서 일한 인력이 장차 부족해질 거라고? 그 말은 어느 정도 맞을 텐데, 에너지 과소비와 자동화를 추구하는 산업화가 지금보다 얼마나 확대되어야 하는지 여부는 여기에서 따지지 않기로 하고, 정부는 지금 일자리를 찾지 못해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보내는 젊은이를 위해 어떤 정책을 구상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정부만이 아니다. 일할 사람이 줄어들 것이라 엄살을 펴는 기업은 어떤 배려를 준비하고 있는가. 고상한 척하며 저출산과 고령화사회의 대책을 요구하는 논객들은 더 태어날 후손에게 어떤 내일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들이 나이 들었을 때 맞을 환경은 염두에 둔 것일까.

 

평균 수명이 연장되면서 늘어나는 노인을 적은 수의 젊은이가 부양하느라 가족을 제대로 돌볼 수 없게 될 거라고? 노인은 가족이 아닌가. 내가 태어났을 때 진자리 마른자리 보살폈던 노인을 부양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아깝다는 겐가. 병원비가 많이 들어간다고? 생각해보자. 노인의 몸이 젊은이와 다른 건 당연하다. 늙어간다는 건 치료 대상인 질병이 늘어난다는 게 아니다. 노화는 현상이다. 건강은 나이에 따라 다를 것이다. 노화는 본인과 가족, 그리고 이웃과 사회가 서로 이해하고 벼려하면서 받아들여야 한다. 노화를 굳이 질병이라 부르짖는 이유가 수상하다.

 

가족과 사회를 위해 젊음을 다 바친 노인은 당연히 부양되어야 인간세상은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 아니 그런가. 야생의 동물세계처럼 방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우리나라가 어느새 ‘고령화사회’가 되었다고 하는데, 인구의 7퍼센트 이상이 65세일 때를 고령화사회라 하므로 노인의 기준이 65세인 모양인데 산업체 인력을 미리 걱정하는 기업은 왜 65세보다 한참 빠를 때 해고하지 못해 안달을 하는가. 그리고 정부는 그런 기업을 제재하지 않는가. 고달팠던 산업화의 터널을 어렵싸리 빠져나온 65세 이후의 노인이 과연 자식에게 부양받아야 할 퇴물일까. 대부분의 노인은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 일을 더 할 수 있다. 그들의 경륜은 사장되어야 할까.

 

보건복지가족부의 지원을 받는 한 민간단체는 저출산을 걱정하며 ‘123 캠페인’에 나섰다. “결혼 1년 내에 임신을 해서 2명의 30세 이전에 낳자!”는 다그침이었다. 그런 캠페인에 대항한 여성단체는 ‘1234 캠페인’을 내놓았다. “결혼 1년 내에 임신을 해서 2명의 30세 이전에 낳는 가정은 40세 이전에 파산한다.”면서. 지면 도태된다는 경쟁사회에서 남 못지않은 교육과 의식주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하려면 하나의 아이도 벅찬 세상이지만 그건 나중 문제다. 서른 전에 두 명의 아이를 낳으려면 도대체 몇 살에 결혼을 하라는 겐가. 대학 졸업하지마자? 결혼하거나 임신한 여성에 배려할 줄 모르는 회사가 대부분인 곳이 우리나라이므로 직장에 들어가자마자? 여성들은 코웃음을 짓는다.

 

가정을 꾸려 아기를 낳아 잘 기르고 싶은 대부분의 시민들은 정부의 발표를 액면 그대로 믿지 못한다. 그래서 그런가. 저출산이 심각하다는 걸 십분 이해하지만 결혼 자체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 땅의 여성들은 평균 거의 서른이 다 돼야 결혼을 생각한다고 언론은 통계수치를 내놓는다. 힘들게 공부해서 전문지식을 쌓은 여성더러 어서 결혼해 아이를 낳으라고 성화하면 누가 달가워할 것인가. 더구나 지원도 배려도 외면하면서. 드라마와 상품광고는 소비와 향락을 요란하게 부추기는데, 결혼해 애를 낳으라니. 아이를 다섯 낳으면 천만 원을 지원하는 지방자치단체도 있다지만 그런 말초적 처방은 효과가 지속적일 수 없다. 아무리 성화해도 지난해 세 자녀 이상의 가정은 5퍼센트 줄었다는 보도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아이 낳아 기르는 일이 직장을 다니는 여성만의 일도 아니다. 정부는 직장마다 탁아시설을 의무화하겠다고 얼마 전에 발표했지만 그건 아이를 막 낳은 여성이 태어났을 때에도 발표한 내용과 그리 다르지 않다. 또한 발표된 정책도 정치권과 여성계의 차가운 평가처럼 충분한 대책과 거리가 멀다. 예산이 부족하니 이해해달라고? 예산이 부족하다며 4대강을 막아 내일의 환경을 치명적으로 위협하는데 펑펑 예산을 버리는 행태는 어느 세력의 내일을 보장하려는 노심처사인가. 가정을 지키는 여성, 그리고 직장을 다니는 남성을 위한 배려는 보이지 않는다고 여성단체는 지적하던데, 사실 그런 지원이 만족할만한 국가라 해서 인구가 늘어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주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정부가 발표한 알량한 대책을 놓고, 그러면 그렇지, 한국경영자총협회는 기업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다면서 반발한 모양이다. 정부의 “검증되지 않은 선심성 규제로 새로 만들거나 강화해 기업의 인력운용을 제약하고 고용창출 능력마저 낮추고 있다.”고 강조하면서 “정부안이 현실화되면, 기업이 여성 고용을 회피할 것”으로 어깃장을 놓았다는 것이다. 결국 기업은 내 알바 아니니 정부가 세금으로 해결하라는 투였는데 세계 각국의 숱한 경험이 증명하고 있듯, 규제 없어도 기업이 앞장서서 비용을 들이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 정부의 규제가 동인이었지만 정부는 시민들의 의식에 따라 움직였다. 그 때문에 망한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규제에 능동적으로 응한 기업이 대부분 살아남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인구가 줄어들어 한국의 중장기 성장률이 떨어질 것이라 예상했다지만 그럴까.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사회로 접어든 국가들이 그랬던가. OECD의 지적이 사실이라면 지금 우리가 겪는 일은 감내해야 할 일시적인 현상으로 이해해야 한다. 어떤 기업의 연구소는 2100년이면 인구가 반으로 줄고 2500년이면 민족이 소멸된다는 일차함수를 연구결과라고 내놓은 모양인데, 그런 예측은 내일을 위해 아무런 영양가가 없다. 그보다 좁은 국토에서 후손이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미 감당할 수 없이 늘어난 지금의 인구를 줄이는데 열과 성을 다하자고 제안해야 옳지 않았을까. 식량과 석유위기가 다가오는 지구온난화 시대를 대비해 내 땅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여건을 한시바삐 조성해야 책임 있는 선조의 자세가 아닌가.

 

전체 인구의 14퍼센트가 65세 이상일 때 ‘고령사회’, 20퍼센트 이상일 때를 ‘초고령사회’라고 학자들은 정의하는데, 그렇다면 우리 농촌은 이미 초고령사회지만, 65세 이상의 노인들이 여전히 농사를 짓는 덕분에 아직 우리는 이 땅에서 먹고 살고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또한 자신의 일에서 은퇴한 노인을 폐물 취급하면 곤란하다. 어쩌면 많은 노인들은 타의에 의해 일자리를 잃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령화사회를 넘어 고령사회를 앞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책임 있는 정부라면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노인들이 자신이 하고자하는 일을 놓지 않을 여건을 정책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야 한다. 아울러 적은 수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사회도 함께 해결하려 노력할 어려운 일이 남는다. 하나 또는 둘 태어나는 우리 아이들이 이웃과 다정하게 어울릴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사회성을 깨우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불안한 국제정세를 염두에 두고 생각해보자. 식량과 에너지의 자급자족이 거의 불가능한 작은 국토에 뿌리를 내린 우리에게 작금의 저출산 현상은 어쩌면 내일을 위한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은가. 무책임한 저출산 타령은 전에 없이 삭막해진 우리 땅과 지구의 환경에서 내 자식의 삶을 위험으로 몰아갈 수 있다는 걸 명심했으면 좋겠다. (인천in, 2010.10.20)

정말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사람을 기계로 취급하고 있는 세상이고
빈약한 철학과 실패한 정책에 의한 고용의 문제를
젊은 사람과 나이먹은 사람의 대립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드디어 3월입니다
봄이 더욱 더 가까워지는 것 같네요
유용한 글 잘 보고 갑니다.^^
구구절절이 맞는 말씀에 공감하고 갑니다.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7. 29. 15:18

   

에피소드 1

한나라당 임두성 의원이 보건복지가족부로부터 제출받은 ‘저출산ㆍ고령화 관련 국민인식조사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본인 인생에서 자녀가 필요한가’라는 인식조사에서 8.2퍼센트가 ‘별로 필요하지 않은 편’,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답했다. 이 보고서는 지난해 11월 5일부터 25일까지 전국의 19세 이상 성인 남녀 2천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다. 현재의 상황에서 몇 명의 자녀를 갖겠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2명이 56.5퍼센트로 가장 많았고 3명, 1명이 각 14.9퍼센트였으며 ‘갖지 않겠다’는 답변도 10.5퍼센트나 됐다. 응답자가 계획 중인 자녀수를 평균으로 계산하면 1.86명으로 현재 인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 출산율(대체출산율) 2.1명에 못 미쳤다. 자녀가 필요치 않은 이유로는 ‘경제적 부담’(36퍼센트)과 ‘내 생활이 없어져서’(23.2퍼센트)를 많이 꼽았다. 정부정책에 대한 국민인지도 조사에서는 절반가량인 45.8퍼센트가 정부의 임신ㆍ출산정책을 ‘모른다’고 답했고 36.9퍼센트는 ‘산전후 휴가급여 및 육아 휴직수당 지원’을 듣지 못했다고 응답했다. 임 의원은 “저출산 문제 해결은 국가의 지속발전가능의 선결조건이므로 범국민적인 운동과 범정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며 “각종 저출산, 고령사회 정책에 대한 홍보강화와 실질적 효과에 대한 총체적인 점검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네트워크신문, 기사입력: 2009/06/15 [19:32] 최종편집: ⓒ ntimes)

 

에피소드 2

6일 ‘2009 OECD 통계연보’에 따르면 한국 자살률(인구 10만 명 당 자살자 수)은 18.7명으로 OECD 평균(11.88명)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특히 여성 자살률은 11.1명으로 OECD 평균(5.4명) 대비 2배 수준이었다. 전반적으로 삶의 질, 환경과 관련된 지표들은 OECD 평균에 비해 한국이 낮은 수준으로 집계됐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보건 지출은 6.4퍼센트(2006년)로 OECD 평균(9.0퍼센트)에 비해 3분의2 수준이었고, 자동차 사고 건수는 100만 명 당 127건으로 OECD 평균(90건)보다 높았다. 이산화탄소 배출량과 물 소비량 등은 OECD 평균보다 높은 수준으로 나타났다. 한편 한국 학생 학습능력 수준은 높은 편이었으나 민간 교육비 지출은 과도한 것으로 집계됐다. OECD가 실시한 국제학력평가 점수에 따르면 한국 학생의 읽기(556점) 과학(522점) 수학(547점) 실력 모두 OECD 국가 중 최상위 수준이었다. (매일경제신문, 2009년 4월 6일)

 

 

 

아이를 더 낳으라는 무책임

 

과연 ‘강남불패’인지, 경기 회복의 기미가 보인다는 전망이 나오자마자 서울 강남권의 아파트 가격이 치솟는다는 소식이다. 취재에 응한 부동산 관련 전문가는 물량이 모자라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데, 아파트가 밀집된 강남에 대체 어느 정도 더 지어야 물량이 충족되는 걸까. 신축을 포함하여 기존 아파트의 재개발과 재건축이 한동안 묶여 있어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고, 마침 새 학기를 앞둔 이사철과 겹쳐 전세 가격마저 동반 상승한다고 언론은 당장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보도한다.

 

이사철에 강남으로 몰리는 인파는 이른바 ‘좋은 대학’에 많이 입학시키는 학군을 부나비처럼 찾는 가구들일 텐데, 좋은 대학은 무엇인지 여기에서 굳이 따지지 말자. 그 좋은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좋은 기업’에 취직한다는데, 좋은 기업의 기준도 따지지 말자. 그 좋다는 기업에 취직하면 행복할까. 좋다는 대학에 들어가면 창의력이 셈 솟아오를까. 그럴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좋은 기업은 월급이 많고, 좋은 대학은 전통 학풍이 평가를 대신하는 게 보통이므로. 하지만 강남의 학교와 학원은 그런 대학에 다수 밀어넣기 위해 학생들을 길들인다. 아무리 길들여도 들어가는 학생보다 실패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데 그들은 조명하지 않는다.

 

좋은 대학을 거쳐 좋은 기업에 다닌 사람, 또는 각종 고시를 통과해 관료의 길에 나선 이들은 신념과 긍지로 자신의 개성과 신념에 맞는 일에 몰두할 수 있을까. 누릴 혜택을 과점하는 만큼 존경받는 인생을 사는 걸까. 내 나라를 발전시켰나. 그래서 국민이 행복해졌던가. 후손들이 고마워할까. 그럴지 모른다. 다른 나라도 비슷한 기준에 일희일비하지 않던가. 한데, 공부와 일자리에 편견이 심화된 이후 지구의 환경이 본격적으로 엉망이 되었다는 걸 인식하는 이는 드물다. 후손의 삶터까지 망가뜨렸다는 걸 생각하고 반성하는 이는 거의 없다. 기득권을 장악한 세력의 편견으로 완고하게 구성된 발전이니 출세니 하는 기준에 혹시라도 뒤쳐질까 두려워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군상들은 대개 길들여졌다. 칭찬받는 창의력? 기득권의 이해에 굴종하는 창의력은 대개 개성이나 신념과 무관하다. 오로지 부동산 소유자만 조명하는 강남불패의 원인. 그런 일련의 착시 현상에 의존하므로 지탱하고 있는 건 아닐까.

 

누구의 조화인지 ‘위기 산업’이 뜨고 있다. 빚을 내서라도 이번에 집을 사지 못하면 뛰는 집값을 감당하지 못해 평생 전세살이 면하지 못할지 모른다는 위기론의 출처는 어디일까. 해마다 건강진단을 받지 않으면 암을 키울지 모른다는 위기감은 어떤 산업을 흥하게 할까. 교육도 비슷하다. 성적을 올리지 못하면 공부에 흥미를 잃어 번듯한 대학에 가기 어렵고,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제대로 시집장가 못가 인생을 잡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자리 잡는다. 그로인해 보습이 아닌 선행학습 위주의 학원들이 목하 번창하지 않던가. 그러니 땅과 집값이 터무니없이 오르고 20대부터 건강진단을 받아야 안심을 하며 이사철마다 학원이 밀집된 강남의 전세비가 꿈틀거린다. 위기의식은 가구당 1주택이 넘어도 노숙자를 지하철에 넘치게 했고 의료비 지출은 천정부지로 올라가게 만들었으며 입시 준비에 지치거나 비관해 자살하는 청소년이 전에 없이 늘었다.

 

더 없이 늘어나는 위기에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는 시민들은 아이 낳기가 두렵다. ‘아이들은 제 먹을 밥을 챙기고 태어난다’는 옛말은 시방 무책임하다. 기저귀를 차고 신문을 읽는 아기를 요구하는 세태가 아닌가. 선행학습은 대학입시 준비를 중학교가 아니라 초등학교로 내려가게 했지만 약삭빠른 이는 영어 유치원, 영재 유치원에 제 아이를 넣기 위해 안달이다. 한결같이 돈을 요구하건만, 그 비용을 모두 감당할 젊은 부모는 그리 많지 않다. 아이를 처지지 않게 키우려고 일부라도 감당하려면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그동안 노력해왔던 자신의 삶을 일찌감치 포기해야 한다. 당신들의 삶을 포기해왔던 부모에게 죄스러웠던 만큼 사회에 나간 후 보란 듯 꿈을 펼치려 했는데, 결혼에 이은 출산으로 제 부모와 똑 같은, 아니 그보다 더 처절하게 아이에 매달려야한다는 사실에 좌절해야한다. 그럴 바에야 아이를 낳지 않거나 낳더라도 감당할 정도만 낳고, 차라리 결혼을 늦추거나 아예 포기하고 내 인생을 줄기는 쪽을 택하고 싶어진다. 우리 사회의 풍토가 이런데, 어찌 누가 아기 낳지 않으려는 젊은이를 탓할 수 있으랴.

 

그럼에도 우리의 인구는 늘어난다. 날마다 같은 거리를 다니지만 마주치는 얼굴은 언제나 초면이다. 한 아파트를 몇 년이나 살며 숱한 이웃을 지나치지만 서로 관심이 없어 그런가, 여전히 익명이다. 아무튼, 도시에 인구가 집중되는 만큼 시골에 폐가가 늘어나지만 우리 인구가 늘어나는 건 아직까지 분명한 사실이다. 아이 낳는 수가 내일이 걱정스러울 만큼 줄었어도 인구가 증가하는 건 평균수명이 계속 연장되면서 태어나는 생명보다 사망자가 적기 때문일 텐데, 전문가들은 우리의 인구증가도 곧 한계에 다다를 거로 예상한다. 머지않아 인구는 줄어들 테고, 전체 인구에서 노인의 비중이 확대될 거란다.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 역동적이라던 한국이 어느 틈에 늙어간다고 걱정한다. 이미 65세 인구 비율이 7퍼센트를 넘겨 고령화사회에 접어든 우리는 곧 14퍼센트를 돌파해 고령사회로 접어들 테고 머지않아 20센트 이상의 인구가 65세인 초고령사회로 이행할 것이라 우울하게 전망한다. 그래서 그런가. 정원보다 줄어든 입학생 때문에 문을 닫아야 할 대학이 지방부터 속출할 것으로 예상하는 가운데, 시민단체는 의식 있는 젊은 활동가를 좀처럼 충원하지 못한다.

 

인구가 줄어든다는 정부의 경고는 시민사회에 그리 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불과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인구가 늘어나면 안 된다고 정부가 호통을 친 사실을 시민들은 분명히 기억하기 때문이다. 실수로 셋째 아이를 임신하기 만해도 죄인 바라보듯 눈을 치켜뜨던 데가 바로 정부 아닌가. ‘아들 딸’이 아니라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던 정부가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며 딸 하나만 낳더라도 단산할 것을 노골적으로 종용하더니 갑자기 더 낳으라니. 언제는 정관수술하면 예비군 동원훈련을 면제해주더니, 이제는 셋 이상 낳으라고 성화다. 그리 성화하는 공무원들은 더 낳던가. 시민들은 그런 정부를 신뢰하기 어렵다.

 

지구온난화가 심화되는 지구에서 늘어나는 인구를 걱정하는 척하더니 돌연 출산을 장려하는 건 핵가족 증가로 공동체 의식이 희석되기 때문이 아니다. 생산인구가 모자라다는 거다. 가계를 이을 시민들의 소박한 행복보다 기득권의 이윤을 떠받치기 위해 생산인구를 채우라는 특명이라는 속내가 느껴진다. 대한민국이 늙어간다거나, 초고령사회가 되면 젊은이 한 명이 노인 한 명을 부양해야 한다거나, 의료비 지출의 60퍼센트 이상 노인에게 집중된다거나 하는 소문을 정부에서 앞장서서 퍼뜨리는 건, 기득권을 위해 일하면서 소비할 사람을 충원해야 한다는 기업의 의지를 대신 반영하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면, 지나치다 비난받아야 할까.

 

 

생산인구라는 불경스러움

 

생산인구라. 14세부터 65세까지로 규정하는 생산인구는 노인과 그의 경륜에 대한 모독이다.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14세 이하는 예비 생산인구일 터이므로 이해할 수 있다지만, 65세 이상은 졸지에 무능력자가 되어야 한다는 건가. 효율성이 떨어졌으니 잔말 말고 뒷방 신세지라는 요구는 아닌가. 65세가 넘은 관록에서 우러나는 배우의 중후함이나 경륜에서 풍기는 작가의 깊은 상상력은 대체할 수 있는 자산이 아니다. 기업의 현장에 가보라. 규모와 관계없이, 설립자는 물론이고 관리자 중에 65세 이상의 노인이 무척 많다. 그들의 경험은 회사를 유지하는데 여전히 중요하다. 근육의 힘은 전 같지 않아도 숱한 시행착오로 축적한 경험은 사회나 기업에서 무시할 대상일 수 없다.

 

기계가 힘을 대신하는 세상에서 젊은이도 근육을 사용하는 일을 꺼리지만, 농촌을 가보라. 우리 농촌은 65세 이상의 노인이 없으면 돌아갈 수 없을 지경이다. 사실 한 톨의 씨앗에서 온갖 곡식을 갈무리하는 농업이야말로 진정한 생산이다. 재료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고 발생하는 폐기물이 적지 않은 공업은 생산이라기보다 변형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65세 이상을 생산인구가 아니라고 함부로 재단해도 옳을까. 그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65세 인구를 생산 현장에서 소외시키는 논리는 속도와 효율성을 강조하는 것이겠지만 그 대가로 놓치는 게 많을 뿐더러 결례이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에 부메랑이 될 게 틀림없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굳이 생산인구가 아니라고 내치지 않아도 우리 사회에서 65세 이상의 노인들은 배려의 대상에서 소외된 지 오래다. 대중교통의 경로우대로 온양온천이나 파고다공원에 무료로 가는 걸로 만족해야하는 노인들은 젊은이도 비밀번호의 지뢰밭이 귀찮은 인터넷 공간에서 딜리트 되었지만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시내를 시속 80킬로미터까지 질주할 수 있는 교차로의 보행자 신호 시간은 노인의 박자에 맞추지 않았다. 노인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버스 운전기사는 보기 쉽던가. 그런 과잉 친절은 시간을 다퉈야 이윤이 느는 회사 영업에 방해가 될 뿐이다.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노인에게 배려하는 일본의 경우와 아주 다르다. 자신도 늙어간다는 걸 잘 인식하는 그들은 소리를 질러야 알아듣는 노인에게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도시의 많은 노인들은 자신의 모진 희생으로 교육시킨 덕에 번듯한 아파트를 가진 자식과 함께 살지만, 차라리 감옥살이다. 학원 다녀오자마자 컴퓨터 게임에 빠지는 손자손녀들은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할아버지나 할머니 방에 들어가길 꺼린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는 컴퓨터의 동영상이 훨씬 생생하지 않던가. 하릴없어 노인당에 가면 노인 등치는 약장수들이 설치고, 좋은 마음으로 약 상자 할부로 끊어오면 사위와 며느리의 눈치가 여간 사나운 게 아니다. 일본에서 할아버지를 살해한 어떤 중학생이 법정에서 “집안의 대형 폐기물 하나 없앤 거”라고 당당하게 말했다던데, 우리 사회에서 노인들도 이미 폐기되었다. 제 부모의 말과 행실에서 감지하는 아이들에게 우리 노인들도 폐기물이나 다름없다.

 

노인에게 들어가는 의료비용이 많은 건 당연하다. 젊은이가 노인보다 병원에 더 들락거려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성형수술? 그건 편견을 바탕으로 하니 사회에 만연하는 잘못된 기준을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 교통사고나 작업장 사고? 그건 제도와 체계를 개선하거나 안전시설을 확충하고, 피로와 스트레스를 최소화할 수 있는 작업장을 만든다면 충분히 예방 가능하다. 전쟁? 그거야 당연히 억제해야 옳다. 일찍 찾아오는 성인병? 그건 과다한 식품첨가물이나 육식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한편 대기오염과 수질오염을 개선하며 예방에 시민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 유전병과 같은 불치병? 그거야 당장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환경 개선으로 유전병 발생 요인을 줄여가야 한다. 이와 같이 발생 요인을 최대로 줄인다면 젊은이가 병원 신세질 이유는 차차 줄어들 것이다. 그러므로 노인에게 의료비가 많은 건 당연하다. 다만 노인 질병 소인의 기준을 젊은이의 수준에 맞추는 건 타당하지 않다. 따라서 노화는 치료해야 할 질병이라기보다 누구나 거치는 과정으로 이해해야 옳다.

 

노화를 질병이라 못 박는 태도는 의료계의 횡포거나 이윤 창출을 위한 판촉이라고 혹평할 수 있다. 노인에 들어가는 의료비가 갈수록 늘어나는 현상은 자연스럽지 않다. 그런다고 노인이 줄어드는 게 아니지 않은가. 노화 과정을 가족과 사회가 함께 받아들인다면 노인이든 젊은이든 몸과 마음이 편해질 테고, 수입에서 의료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한결 낮아질 게 틀림없다. 타의에 의해 하던 일이 사라지면 스트레스는 증가하고, 스트레스는 면역이 약해진 노인의 건강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젊은이나 노인이나 질병 요인이 줄어드는 가운데 출생률이 사망률보다 낮다면 건강한 노인의 인구 비중이 높아지는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노인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몸에 맞는 일을 계속 할 수 있다면, 개인이든 가족이든 사회든, 나이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히말라야 북쪽의 작은 민족, 라다크는 밭일 마치고 저녁까지 맛있게 든 노인이 잠든 모습으로 생명을 내려놓는 게 보통이라고 한다. 세계의 장수촌들이 대개 그렇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되어야 바람직한 게 아닌가. 다만 현실의 문제는 노인 인구가 늘어난다는 게 아니라 젊은이의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이어야 한다. 아파트 가격 올리며 강남으로 몰려간 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찾을 수 없는데, 아이를 더 낳으라는 요구. 도대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렵사리 대기업에 들어가도 50세가 되기 전에 퇴사해야 하는 우리 사회에서 65세 생산인구 제외론은 소외되는 자의 현실을 더욱 슬프게 한다.

 

 

늘어나는 인구 이상의 문제

 

하루에 21만 명 이상 증가하는 현재, 세계 인구는 68억 2천9백만 명을 넘어 2050년이면 90억을 돌파할 것으로 통계는 전망한다. 해마다 14만 명 이상 증가하는 우리나라의 현재 인구는 4천875만 명으로 남북한 합쳐 7천265만 명으로 추산하는데, 2020년 이후 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해 2050년이면 지금보다 641만 명이 감소, 인구 순위가 현재 세계 26위에서 46위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한다. 이는 물론 여성 1명 당 2.56명 낳는 세계 평균보다 크게 뒤지는 1.13명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추세가 이어진다면 65세 인구 비중이 2010년 11퍼센트에서 2050년 38퍼센트로 증가한다고 추정하는 정부는 젊은 부부들에게 통계수치를 들이대며 노인 부양을 위한 부담이 늘어난다고 엄포를 놓는다.

 

보건복지가족부가 후원하는 모자보건학회에서 몇 년 전부터 신혼부부를 향해 벌이는 ‘123캠페인’은 “결혼 1년 내에 아이를 갖고, 2명의 아이를 30세 이전에 낳자”는 내용을 담는다. 적어도 27세 전에 결혼해서 두 명 이상의 아이를 후다닥 낳아달라는 건데, 그런 당부에 순응할 여성이 몇이나 될까. 쉽게 말해 생산인구 확보를 위해 신혼생활을 포기하라는 투가 아닌가. 서울시의 통계는 여성 초혼의 평균 나이가 29.3세라고 전한다. 1990년보다 3.8세 많아졌다는데, 평균수명이 늘어난 데 원인이 없지 않겠지만 젊음을 구가하라는 집요한 광고가 결혼을 늦췄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하며, 놀고 즐기는데 신용카드를 부지런히 사용하라는 광고가 얼마 전까지 소비자들을 극성스레 유혹하지 않았던가. 남들 놀고 즐기는데 당신은 일찍 결혼해 아이를 낳아 키우느라 젊은 시절을 다 바치라는 캠페인은 설득력이 전혀 없었다. 그에 대항해서 나온 네티즌의 ‘1234 경구’. 정부의 권유대로 “결혼 1년 내에 아이를 갖고, 2명의 아이를 30세 이전에 낳으면 40세가 되기 전에 파산하고 말 게 틀림없다!”고 대항한다.

 

남편이 가사를 돕지 않는 상황이 그리 나아지지 않았어도 여성의 사회활동은 크게 늘어났지만 육아에 대한 우리 사회는 지원은 요지부동이다. 국가나 직장에서 도와주기는커녕 육아휴직이 끝나면 계약해지를 통보하기 일쑤라는 것이다. “아이는 제 먹을 걸 가지고 태어난다!”고? 얼마 전 대통령이 출산을 장려한다며 꺼낸 일성이다. 사교육비 지출이 OECD 평균의 3배가 넘는 요즘 세상에 고작 몰래 사진 찍어 돈버는 ‘학파라치’ 제도로 대처하면서, 덮어놓고 아이부터 낳아라? 신뢰가 떨어지는 통치권자의 쇼를 액면 그대로 믿는 젊은이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 그나마 다행인데, 자신의 인생을 어느 정도 누린 요사이 젊은 부부들은 제 아이를 허투루 키울 생각이 전혀 없다. 기왕 늦은 만큼 자신의 아이만은 누구보다 열심히 키워 반드시 기득권에 안착시키려 한다. 대통령이 시골의 기숙형 인문계고등학교에 납시어 학생들과 억지 사진을 찍으며 “과외 없이 일류대학으로!”를 아무리 강조해도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다. 강남 족집게 학원의 수강료 상한제도는 무너질 게 뻔하다.

 

지구온난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식량위기의 징후가 흉흉하고 에너지와 자원은 바닥을 드러내는 상황에서 당면한 우리의 문제는 한반도의 인구가 자급기반 이상으로 늘어난 마당인데 세계 인구가 여전히 늘어난다는 데 있다. 목하 벌어지는 지구온난화 위기의 원인은 어디에 있던가. 에너지 낭비를 일삼는 기득권의 행태와 무관하지 않건만 기득권들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고, 기득권의 삶의 방식을 추종하는 세계 인구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기만 한다. 합하면 세계 인구의 3분의1이 넘는 ‘친디아’(Chindia, China +India), 다시 말해 중국과 인도의 에너지와 자원소비가 최근 급격하게 커지며 위기는 더욱 증폭될 것이다.

 

누가 친디아를 비난할 수 있는가. 이제까지 소외되었다 믿는 그들이 기득권을 지향한다고 비난할 자격은 우리에게 없다. 황해와 동해 연안의 평균 기온상승을 세계의 두 배 이상 올린 주범 중의 하나인 우리는 소비에 걸신들린 미국의 삶을 막무가내로 추종하는 않던가. 더구나 석탄과 식품을 중국에서 막대하게 수입하는 우리는 중국에 무역 흑자를 기록할 정도로 공산품을 수출한다. 중국과 교역하지 않으면 당장 파산하고 말 우리는 늘어나는 중국 인구와 그들의 소비수준에 목말라한다.

 

월드워치연구소는 중국이 마이카시대가 되면 세계 철강은 바닥을 드러내고 말 거로 예상했는데, 이미 중국의 자동차 생산 능력이 세계 최대로 등극하게 되었다. 앞으로 미국에서 돌아다니는 만큼 중국 땅에 자동차 수가 늘어난다면 지금도 감당하기 어려운 대기오염은 최악으로 치달을 테지만 황해를 공유하는 우리나라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중산층 인구의 대부분이 몰린 중국 동해안에서 우리나라 쪽으로 내뿜는 오염물질 만이 아니다. 석유가 매장돼 있어도 이미 에너지 순 수입국으로 바뀐 중국은 미국과 양보하기 어려운 갈등을 주고받으며 세계 에너지 시장의 주도권을 잠식해 들어가는데, 시장 규모가 작은 우리는 점점 기댈 언덕이 줄어들 것이다. 중국인이 본격적으로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 세계 식량은 바닥날 것으로 월드워치연구소는 정통한 통계를 바탕으로 일찍이 전망했는데, 언제까지 우리는 중국에 의존할 수 있을까.

 

현재 세계 인구의 20퍼센트에 가까운 13억4천600만 명을 기록하는 중국은 혹독한 산아제한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늘어나기만 한다. 역시 개인위생과 소득 수준의 증가가 견인하는 평균수명 연장 덕분일 것이다. 현재 12억에 가까운 인도의 인구는 그 증가 속도가 중국을 능가한다. 세계 인구가 91억을 초과할 것으로 추산되는 2050년이면 14억 이상일 중국을 추월해 16억이 넘을 것으로 전문가는 점친다. 인도도 같은 추세로 이어지겠지만, 중국의 고령화 추세가 벌써 진행되기 시작되었다. 그 사실에 세계, 특히 우리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산아제한의 유지를 요구하라는 뜻이 아니다.

 

고령사회로 옮겨가는 중국의 속도가 사상 유래 없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빨리 진행될 것으로 전문가들은 동의하는데, 그에 대한 대책마저 우리처럼 생산인구 증가를 위한 아이 더 낳기로 이어진다면 세계의 지구온난화와 환경위기는 돌이킬 수 없게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력했던 한 자녀 운동을 고액 벌금으로 조금씩 완화하는 중국이 본격적으로 산아제한을 푼다면? 상상하기 두려운 사태가 국제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국가가 중국의 인구정책을 참견할 수 있으랴. 미국에 유학 다녀온 이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주도권을 쥐고 미국을 맹종하는 나라들은 참견할 자격이 없다.

 

간디는 세상은 모든 이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지만 한 사람의 탐욕도 만족할 수 없다고 했는데, 할리우드 문화가 지구촌 곳곳에 침투된 요즘, 모든 이는 평균이 아니라 미국 상류층의 삶을 지향한다. 일본의 생태사회학자 토다 키요시는 세계인이 모두 미국 평균의 삶을 살려면 지구가 6개 필요하다고 했다. 참고로, 지구온난화를 경고하는 강연을 활발하게 펼친 공로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미국 부통령 출신 엘 고어는 미국 평균 전기 소비량의 20배를 쓴다. 다른 생물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생태계에 전적으로 기대며 산다. 생태계에서 식량과 에너지 자원을 얻고 생태계로 배설물을 돌려주며 순환에 동참한다. 최초로 경작을 시작한 1만 년 전까지, 사람도 진화된 90퍼센트 이상의 세월동안 분명히 그랬다.

 

마티스 웨커네이걸과 윌리엄 리스는 《생태발자국》(이매진, 2006)에서 생태 위기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국민총생산(GNP) 지표를 대신해 ‘생태발자국’을 국가 경제지표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생태계에 부담으로 남기는 면적을 분석해 비교하며 반성해야 한다는 거다. 그 제안에 따라 녹색연합과 한화환경연구소가 2005년 12월에 발표한 한국인 일인당 생태발자국은 3.56헥타르였다. 유엔환경계획(UNEP)의 1993년 통계는 일본은 4.8헥타르, 영국과 프랑스는 5.3헥타르, 미국은 9.7헥타르로, 지구촌 모든 이가 미국인처럼 살면 지구가 5.39개 필요한 것으로 계산된다. 사람과 자원 경쟁을 하는 다른 동물은 물론 계산에 넣지 않았는데, 한국인 평균으로 살면 지구가 2.08개 필요하다는 수치가 나온다.

 

지구온난화는 세계 곡창지대의 침수와 사막화를 예견하건만 친디아를 비롯한 세계의 인구는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인구를 억지로 늘려야 하나. 인구가 지나치게 많아 산아제한 하라고 시민들을 다그칠 때보다 시방 인구가 훨씬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인구가 줄어들 때 준비해야 할 일

 

이미 초고령사회가 된 농촌은 아기가 태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사망자가 발생하는 만큼 인구가 줄어드는데, 어떤 지방에서 과감한 유입 정책을 추진해 언론의 주목을 받은 적 있다. 자기 지역으로 주민등록을 옮겨 아이를 낳을 경우 두둑한 정착금을 제공한 것이다. 한데 그 의도는 순수해보이지 않았다. 인근 자치단체와 통합될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지위가 사라질까 두려운 고위 공직자가 주민의 수를 억지로 늘리려는 의도였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거다. 시로 승격하기 위해 지방 공무원 일가친척의 주민등록을 강제로 옮기게 해 말썽을 빚은 선출직 공직자가 지방에 없지 않은데, 인구가 늘어날 것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개발 청사진을 펼치는 선출직 공직자는 도시의 크기나 역사에 관계없이 어디에나 목소리를 높인다. 재선을 노리는 포석이겠지만 그로 인해 발생할 예상 시민 수를 모두 합한다면 우리나라 인구를 훌쩍 넘어설 게고, 아무래도 인구까지 수입해야 할 판국이다.

 

집안이든 마을이든, 지방이나 국가도, 인구가 작은 것보다 많은 게 낫다. 하지만 그 인구들이 서로 상대의 개성과 인격을 배려하기보다 경쟁과 질시로 배척한다면 그 사회에 행복은 깃들기 어려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이나 생태계의 동식물들은 자신의 삶에 여유가 있을 때 남을 배려하지만 모자란다면 경쟁이 치열해진다. 동식물들은 경쟁을 피하는 방향으로 생태적 조건을 달리하며 종이 분화되지만 사람은 그게 불가능하다. 외부에서 지원되는 자원이 부족해지는 순간, 대안을 향한 과정보다 배타적인 경쟁이 치열해질 거고 자원을 선점하려는 폭력이 난무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태평양의 고도 이스터는 인구가 늘면서 황폐해지자 종족 간의 갈등이 심화, 결국 ‘모아이’라는 문명의 자취만 남긴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지지 않았던가.

 

인구를 억지로 줄이는 방법으로 피임에 의한 산아제한이 일반적으로 제안되지만 산아제한이 성공하는 국가는 그리 많지 않다. 아이가 거듭 죽어가는데 단산할 엄두를 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산아제한의 성공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낳은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다. 개인위생은 물론이고 개성을 존중하며 기회가 평등한 사회가 보장된다면 대부분의 시민들은 국가 시책에 반하면서까지 아이를 더 낳지 않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늘어나는 인구를 억제하기보다 줄이려고 ‘한 자녀 갖기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할 경우, 중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소왕자, 소공주’ 현상의 출현을 걱정할 수 있겠다. 성인이 되도록 부모에게 의존하거나 자기만 소중하다 여기며 남을 배려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한다는 거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함께 놀고 밥 먹으며 잠자던 추억, 손님과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던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건 아무래도 서글픈 일이다.

 

그럼에도 아이를 하나 또는 둘 낳고 말 수밖에 없는 부모도 있다. 그들은 아이에게 미안하다. 그나마 형제나 자매는 한 방에 지내면서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고, 물건도 함께 사용할 수 있지만 자라면 방을 달리하게 되는 남매는 허물없는 식구가 없다고 느낄 때가 상대적으로 많을 수 있다. 그럴 때 가까운 친지라도 곁에 있으면 자주 만나며 마음을 나누게 된다. 과거 대가족이 그랬을 것이다. 늦둥이를 돌보거나 일손을 돕고 어려운 문제를 서로 상의하며 극복하던 가족 공동체, 그런 공동체는 마을과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빚어내었으리라. 하면, 비록 일가친척이 아니더라도 이웃과 그런 공동체를 새롭게 구현하면 어떨까. 하나 또는 둘 뿐인 아이들이 같은 울타리 내에서 어울릴 수 있다면 건강한 사회성을 배울 수 있을 텐데.

 

대구의 ‘담 허물기’ 운동이 그 가능성을 보여준 가운데 사회 일각에서 육아와 교육을 공동으로 하는 지역운동이 전개된다. 맞벌이로 아이를 돌볼 시간과 여유가 없는 이들이 같은 처지의 아이들을 모아, 어울려 놀며 공부할 수 있는 마을 도서관을 만들어 함께 운영하는 곳이 늘어나는 것이다. 또한 이웃과 텃밭을 함께 일구거나 지역화폐를 발행해 희로애락을 나누는 사례가 낯설지 않다. 그렇듯, 인터넷 가상공간에서 마음을 주고받는 이들이 공동체에 대한 갈증을 현실 공간에서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위아래와 앞뒤 집에 사는 이웃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 몇 년이고 현관 문 닫아걸고 살아가는 아파트에서 벗어나 눈길 마주치면 인사 나눌 수 있는 공동주택을 조성할 수 있다면, 아이들은 부모의 직장이나 지위에 관계없이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 대구의 담 없는 마을의 예처럼 어른들도 자연스레 만나게 될 테고, 함께 마을 대소사를 이야기하면서 일손과 마음을 나누는 공동체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컴퓨터 게임에 빠지거나 친구를 경쟁자로 여기는 선행 과외에서 탈출하는 아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물론이고, 언니, 누나, 오빠, 여동생, 남동생, 그리고 많은 삼촌과 이모,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기억하며 인사하고 배려하는 가운데 건강한 사회성을 자연스럽게 배울 거라 생각한다.

 

다닥다닥한 다세대주택을 부셔 고층아파트를 짓고, 멀쩡한 고층아파트를 헐어 창문마저 닫아 걸어야하는 초고층아파트를 짓는 건 투기자본과 아파트 건설업자의 한시적인 이익을 위해 소통이 없는 인구만 밀집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에너지 낭비도 심할 수밖에 없다. 개개발이 필요하다면 세입자의 이해와 권리도 존중하면서 주민들의 소통이 자유롭게 열리는 공간으로 구상할 수 없을까. 공동으로 육아와 교육이 가능하고 밥도 같이 먹으며 대소사를 의논할 수 있는 공동주택을 만들어 갈 수 없을까. 지열과 햇빛발전 들을 도입해 에너지를 절약하고 빗물을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얼마든지 도입할 수 있다. 이웃과 텃밭을 함께 일굴 수 있는 마을이라면 한 자녀 가족이라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국가 차원에서 인구를 줄일 수 있는 건 물론이고 공동체에서 제 일을 찾을 수 있는 노인들도 이웃의 보살핌 속에서 여생을 건강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에너지와 자원, 그리고 식량의 70퍼센트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주제에 농경지에 신도시를 만들고 도시 근교의 그린벨트와 산기슭을 골프장으로 파괴하는 행위는 지구온난화가 심화되는 현실에서 후손에 대한 무책임을 넘어 범죄에 가까운데, 정부는 새만금 간척사업 부지의 70퍼센트를 이른바 ‘명품도시’로 바꾸겠다고 그 청사진을 내놓았다. 사라지는 경작지를 보전하려는 차원이라고 강변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역시나 개발하겠다는 건데, 그 넓디넓은 명품도시의 표피를 해수면 이상 높이려면 남산 150개가 필요하다고 했다. 가능할까 염려되지만, 그보다, 정부는 해수면 상승에 묘안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지구온난화로 더욱 강해질 태풍과 해일, 해마다 높이를 경신하는 너울성 파고를 막아낼 수 있을까.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덮친 허리케인 카트리나는 멀리 있지 않다. 윤제균 감독의 영화 <해운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고 국제 갈등의 핵심이 되는 에너지 자원은 계속 확보할 수 있으며, 식량은 어찌 감당하려는지, 후손의 처지에서 대안은 마련돼 있는가.

 

외부에서 지원이 줄어드는 순간 악몽이 되고 말 무책임한 개발은 마땅히 중단되어야 한다. 이제 내 작은 공간에서 자급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좁은 한반도에서 식량은 물론이고 에너지도 자급하려면 지금도 인구가 많다. 노인들 모욕하는 생산인구를 들먹이며 아이 더 낳으라고 가임여설을 닦달하는 정책보다 적은 아이들이 공동체 안에서 사회성을 익히며 행복할 수 있는 내일을 실현하는 정책을 강구할 필요가 충분하다. 서울시 마포구의 ‘성미산 공동체’는 그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자원과 에너지 위기를 이을 식량 위기까지 자존심을 잃지 않으며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그를 위해 각자는 탐욕을 버리고 내일을 위해 오늘의 씀씀이를 줄여나가야 한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다른 국가보다 1.6배 높은 건 당연한 결과인지 모르는데, 호주 사막의 한 원주민은 더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정신과 의사 말로 모건의 이야기가 《무탄트 메시지》(정신세계사, 2003)에서 소설처럼 소개된 바 있다. 지나친 개발로 더럽혀진 세상에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다짐이라는 거다. 46억 살 된 지구, 그 지구의 생태계에 가장 늦게 동참한 사람은 자신의 터전을 거침없이 황폐화시켜놓고 그 땅에 제 후손을 낳는다. 어떤 생태주의자는 내일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책은 자신의 자손을 더는 후대에 남기지 않는 거라고 냉소했는데, 현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냉정한 행동인지 모른다. 설사 그렇더라도, 자식을 지금 키우고 있는 우리는 지속가능한 내일을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 저출산은 그 기회를 열어줄 어쩌면 마지막일 수 있다. (환경과생명, 2009년 가을호)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7. 12. 9. 18:49
 


세계 인구는 67억을, 남한은 5천만을 넘겼다. 이케다 가요코가 엮은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은 20명이 영양실조, 1명이 굶어죽기 직전이라고 말한다. 세계인이 미국 평균의 생활수준으로 산다면 지구는 6개 필요할 것으로 토다 키요시는 《환경학과 평화학》에서 주장한다. 문제는 할리우드 영화가 보편화된 세상에서 많은 이는 미국 평균보다 더 잘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지구는 몇 개 있어야 만족될까.


2000년 7월을 기해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의 7퍼센트가 넘었다. 우리도 ‘고령화사회’를 맞은 것이다. 65세 이상이 14퍼센트면 ‘고령사회’, 20퍼센트가 넘으면 ‘초고령사회’로 정의한다. 이후 우리의 인구 캠페인이 바꿨다. 얼마 전까지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 하던 당국이 출산을 장려하고 나선다. 텔레비전 홈드라마는 슬그머니 아이를 3명 이상으로 늘였다. 성인 2명의 수입으로 노인 한 명을 부양하는 시대가 다가온다고 걱정하는 전문가도 있다. 요컨대 ‘생산인구’가 줄어 국가경쟁력이 떨어진다는 거다.


생산인구라. 정부는 14세 이상부터 65세 미만을 생산인구로 규정하는 모양이다. 물론 몸과 마음이 두루 성장해야 할 14세 미만의 어린이를 착취하는 건 옳지 않다. 그런데, 65세 이상의 인구는 생산 능력 없다고 단정해도 될까. 계몽주의 이후 아동기를 따로 설정하면서 아동이 억압되기 시작했다는 일부 인류학자의 주장은 논외로 치더라도, 65세 이상의 노동력과 의지를 무시하는 행위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힘과 행동을 기계 속도에 맞춰야 하는 산업사회라지만 산업의 종류도 많은데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65세 이상을 부양받아야 할 인구로 분류하는 태도는 65세 이상이 볼 때 불손하다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보건복지부는 젊은 미혼 여성에게 ‘123’을 캠페인을 벌인다. 결혼 1년 내에 아이를 갖고 2명의 아이를 30세 이전에 낳자는 거다. 한데, 아이를 둘 낳으면 인구는 늘어나지 않는다. 아이 둘을 일찍 낳는 부부는 나중에 늦둥이를 추가할 거로 믿는 걸까. 여성단체는 정부의 캠페인을 ‘1234’로 냉소한다. 보전복지부의 제안대로 애를 낳으면 40세기 되기 전에 가정이 파산할 거란다. 현란한 텔레비전 광고를 보라. 놀며 즐기라는 풍조에 일찍 결혼할 젊은이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이태백이 아니라 이구백이다. 아이 낳기 싫다기보다 키우기 어려워 하나로 그치려는 민심을 정부는 얼마나 이해하는 걸까.


가속되는 기후변화를 완화하기 위해 우리도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진다. 개발도상국이므로 봐달라는 읍소는 국제사회에서 더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무역 규모가 커진 OECD 가맹국의 처지에 무책임한 태도라는 국제사회의 규탄을 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무역상 불이익이 초래될 가능성이 높다. 젊었을 때 실컷 놀다 느지막하게 낳은 아이를 애지중지 키우려는 부모의 심정을 누구도 무시할 수 없다면, 기후변화 시대에 우리가 고민해야 할 인구정책은 무엇이어야 할까.


이화여자대학교의 최재천 교수는 “인생을 2모작하자”고 제안한다. 아이가 경제나 사회적으로 자립할 나이가 되면 부모는 돈벌이에 연연하던 삶을 버리잔다. 젊은이에게 주도권을 잃은 직장을 버리고 아이 때문에 미루어두었던 일에 새롭게 도전하라는 제안이다. 근사하다. 하지만 가계부채에 치여 사는 세상에서 선뜻 이모작에 나설 부모가 얼마나 될지 알 수 없다. 이모작에서 그칠 수 없다. 노인들이 자신에 맞는 생산적 일에 계속 종사하는 장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근본적이지 않다. 태어난 아이를 잘 키우면서도 인구를 줄어야 한다. 2모작을 인구 억제와 병행할 필요가 있다.


아이를 잘 키우기 위해 낭비를 전제로 하는 과다한 생산을 과감하게 제한해야 한다. 미국 수준의 소비를 세계적으로 확산하는 행위는 미친 짓이다. 대부분이 미국인인 6퍼센트가 세계 부의 59퍼센트를 갖는데, 그들의 소비수준을 따르자는 한미FTA는 내일의 삶을 피폐하게 할 뿐 아니라 더욱 온난화될 지구는 치명적으로 파괴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생산을 줄이면 많은 인구가 필요치 않다. 줄어든 인구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 65세 인구가 담당할 일도 있을 것이다. 인구가 줄면 소비도 지구의 부담도 줄어든다.


세계 속에서 한국이 존재하는데, 세계 인구는 줄이고 우리 인구만 늘여야 한다는 논리는 기후변화 시대에 설득력을 잃는다. 한계를 드러내는 지구에서 내내 살아가야 하는 후손을 생각한다면, 생산 운운하며 인구를 늘이자는 주장은 무책임하다. 내일을 먼저 생각한다면 노인의 일자리를 적극 배려하면서 인구를 줄이는 인구정책을 펼쳐야 하지만 그에 앞서 삶을 생태적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지구의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하며 살아왔다. 자본이 마련한 기준에 소외되지 않으려 발버둥치며 허상을 좇았다. 이웃의 행복과 소통할 때 내 행복은 지속가능하다. 지구의 지속성을 파괴해온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한다. 개성을 배려하는 이웃과 자급자족하는 생태적 삶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유일한 대안이 거기에 있다. 그러기에 우리 인구는 이미 넘친다. (야곱의우물, 2008년 2월호)

맞는말이에요 미친것들.. 완전 정신 나간것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