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3. 3. 26. 18:14

 

농업국가 라오스. 서양인들이 꼽는 가장 가고 싶은 여행지의 으뜸이라고 한다. 이번 겨울, 잠시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짧은 일정 때문에 찾아간 지역의 주민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는 없었지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분위기는 보는 내내 편안했다. 이렇다하게 알려진 관광지는 없어도 많은 유럽인이 찾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 맑고 공기 좋은 라오스에서 사람들은 늘 웃는다. 국민의 95퍼센트가 농업에 종사하는 라오스에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그래서 바쁜 일상에 치인 이들이 방문하고 싶은 건 아닐지.


쌀을 주식으로 하는 라오스는 국경선을 맞대는 태국과 달리 대부분의 논이 일모작이다. 강수량이 많아도 관개시설이 없는 탓이라는데, 과연 태국의 논은 갈수기에도 다채로웠다. 모내기를 방금 마쳤는지 작은 모가 올라오거나 익은 벼가 고개를 숙였고, 대형 농기계로 추수가 한창인 곳도 많았지만 방치하는 논은 없었다. 반면 추수를 일찌감치 마친 라오스의 논은 고즈넉했다. 날씨가 온화하지만 우기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가이드는 설명했는데, 풀에 뒤덮인 2월의 라오스 농촌에 물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닭과 돼지가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농사 경험이 있는 한 일행은 태국처럼 다모작을 못해 부유해질 수 없는 라오스의 현실을 안타까워했지만, 가이드는 태국의 건설 현장에서 돈을 더 주겠다고 해도 잔업을 마다하는 라오스 사람들의 여유로움을 이야기한다. 게으름과 다르다면서. 수도 비엔티안의 국립대학을 졸업해도 직장 구하기 어렵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고향에 농사지을 땅이 있으므로 큰 불만이 없다고 했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일본, 그리고 서양에서 도와주려 찾는 이가 늘어나건만 정작 라오스 사람들은 느긋했다. 마음이 풍요로워보였다.


미국 턱 밑에 있는 쿠바는 한때 풍요로웠다. 설탕과 담배 그리고 약간의 커피를 소련이 시세보다 월등한 가격으로 수입해가는 덕분에 공업제품은 물론 농산물과 의약품을 넉넉히 수입하며 살아갔는데 오래가지 못했다. 소련이 무너지자 미국의 철저한 경제봉쇄로 곤혹을 치러야했던 것이다. 외부 지원에 의존하던 쿠바 경제는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졌어도 망하지 않았다. 화학비료가 끊어지고 의약품이 동떨어져 한동안 위기에 휩싸였지만 유기농업으로 살려낸 땅에서 농산물을 자급하고 자연의학을 활성화하면서 견뎌낸 것이다. 미국의 경제봉쇄가 얼마 안 가 무색해진 건 쿠바 사람에게 땅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멕시코의 칸쿤은 세계적 휴양지다. 초일류 호텔이 부서진 산호 알갱이가 만든 눈부신 해변을 장식하며 이어진다. 주로 미국과 유럽에서 온 관광객이 해변을 거니는 칸쿤에 일본과 우리나라, 그리고 중국 관광객이 늘어난다는데, 그 휘황찬란한 시설이 허리케인이 빈발하는 해변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건 불황에도 관광객이 모여들 정도로 경관이 수려하고 기후가 온화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큰 비용 들이지 않고 찾아갈 수 있는 세계적 휴양지가 어디 한두 군데인가. 칸쿤이 화려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건 남루한 복장의 원주민이 관광객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저임금으로 일하기 때문이다.


북경 올림픽에 이어 광저우 아시안게임, 그리고 상해 엑스포까지 중국이 거대한 규모의 세계 축전을 거푸 성공적으로 펼쳐낼 수 있었던 건 외화 보유고가 그만큼 막대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돈벌이를 위해 시골에서 찾아온 이른바 농민공이 저임금으로 시달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시각도 만만치 않다. 외부인의 시선에 잘 띄지 않던 농민공들의 노고가 아니었다면 중국은 행사를 기획하기 어려웠을지 모르는데, 그들 대부분은 건설 시장이 위축되면서 제 고향으로 돌아갔다. 농사지을 땅이 거기에 있지 않은가.


칸쿤과 북경만이 아니다. 지금은 건설경기가 곤두박질한 두바이도 마찬가지지만 서울 강남의 높은 건물도 낮은 임금으로 일하는 이가 새벽부터 강북에서 출간하지 않는다면 화려함을 유지할 수 없다. 남루한 복장과 관계없이 칸쿤의 원주민은 대개 근처에 물려받은 땅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서 식구와 농사를 짓는다. 고향을 찾아간 중국의 농민공들은 당장 손에 쥐어지는 현금이 적더러도 땅이 있으므로 가족 굶주리게 하지 않을 것이다. 강남의 건물을 청소하는 강북의 눈에 띄지 않는 분들도 쪼들리기는 해도 굶주리지 않는다. 하지만 앞으로 경기가 추락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들에게 땅이 없다. 일자리가 사라지면 갈 곳이 없다.


아무리 도시의 화려한 생활에서 소외되어도 돌아갈 땅이 있다면 삶에 여유를 잃지 않을 수 있지만, 없다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땅이 있다면 지하 서울역에서 골판지 펴고 겨우내 쪽잠을 자는 노숙자 신세는 면할 수 있다. 골판지뿐인 서울이든 책 몇 권을 갖춘 도쿄든, 시골에 농사지을 땅이 없는 노숙자는 도시에서 동정심의 의지해야 하는 삶을 피하지 못한다. 그들은 낯모르는 이의 접근을 극도로 경계한다. 복장이 남루한 북경의 농민공이나 칸쿤의 원주민과 달리 방문객이나 관광객에게 친절하기 어렵다. 자신의 자리가 불안한 강남 빌딩의 청소원들도 낯선 이에게 친절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산품 수출로 농산물을 포함한 식품 대부분, 적어도 4분의3을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는 농사지을 땅이 상당히 부족하다. 지구온난화가 심화되면서 곡창지대에 가뭄이 발생하여 국제 곡물가격이 급등하는데, 언제까지 웃을 수 있을까. 늘어나는 소비보다 퍼올리는 양이 부족해진 석유위기 시대에 기계화를 기반으로 하는 이모작과 삼모작은 불가능하다. 화학비료와 농약은 수입식량과 더불어 가격이 치솟을 텐데 땅을 확보하지 못하는 우리는 어떤 대안을 모색해야 할까. 거품경제는 계속될 리 없다.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1930년대 할리우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 오하라로 나오는 비비안 리는 마지막 장면에서 타라가 있다고 했다. ‘타라는 고향의 땅이다. 어떤 시련이 있어도 농사지을 땅이 있으니 좌절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였는데, 라오스가 시방 그렇다. 그들은 전혀 가난하지 않다. 내일을 우리만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자신들이 서 있는 발아래 땅이 있지 않은가. 그들은 우리와 달리 선조에게 받은 땅을 현대문명에 팔아넘기지 않았다. 그래서 여유로운 그들은 언제나 웃고 이방인에게 친절하다. (작은책, 2013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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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딤돌 2009. 9. 19. 16:31

 

옛말에 돈을 잃으면 조금, 건강을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지만 신뢰를 잃으면 모든 걸 잃는 거라고 했다. 그만큼 신뢰, 다시 말해 상대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는 건데, 주로 도시에서 소비자를 만나고 농촌에서 생산자와 만나는 생활협동조합은 신뢰를 기반으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한다. 그걸 모토로 삼는다.

 

도매시장에 밭떼기나 차떼기로 넘길 농산물은 상품성을 높이려는 상인의 주문대로 화학비료와 농약을 듬뿍 뿌리지만 제 식구가 먹을 건 유기질 비료를 주며 온갖 정성을 다해 재배한다던데, 상식을 가진 농부라면 저와 친밀하게 지내는 이에게 알고는 먹기 찜찜한 농산물을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농부가 정성을 다한 유기농산물은 그만큼 자존심이 크다. 그런 농산물을 아무렇게나 팔아치우려는 농부는 없을 터. 하지만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소비자가 많지 않은지라 어렵게 생산한 유기농산물을 중간상인에게 넘길 때가 많은데, 헐값으로 가져간 유기농산물이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의 식품매장에 높은 가격으로 전시된 걸 보면 속이 상한다.

 

가족과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농산물을 구입하고자 하는 소비자도 걱정이 많다. 잘 알고 지내는 농부가 있는 게 아니라서 그나마 공신력이 있는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를 찾는데, 식품매장의 유기농산물은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으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허구헛날 일반 농산물이나 그 가공식품을 고르자니 영 탐탁하지 않다. 사실 생산자인 농부에게 돌아가는 몫을 생각해보면 일반 농작물의 가격이 그리 낮은 것도 아니다. 소비자에게 불만을 사는 농산물 시장은 열심히 농사짓는 농부의 의지를 꺾어놓기 일쑤다.

 

‘공정무역’이란 게 있다. 여러 단계의 중간상인을 거쳐 복잡하게 가공된 뒤 유통 단계에 이르면 최종 소비자에게 팔리는 가격이 최초 농산물에 비해 어처구니없이 높아지는 무역의 불합리를 바로 잡으려는 시민운동이다. 커피나 초콜릿을 보자. 정작 농토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이에게 돌아가는 보수가 지나칠 정도로 작다. 대개 최종 소비자에게 팔리는 가격의 1퍼센트 미만이라고 하니 시민단체가 나섰다.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농산물을 유통과 가공 단계를 획기적으로 줄여 소비자에 되도록 값싸게 제공하는 운동을 펼치는 거다. 커피, 초콜릿, 설탕, 바나나와 같은 농작물에서 시작한 공정무역은 티셔츠와 청바지와 같은 의류제품까지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다만 공정무역 제품은 대개 다국적기업이 장악해 판매하는 상품에 비해 가격이 다소 높고 익숙해진 미각이나 촉감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막강한 기술력을 가진 거대한 자본처럼 한꺼번에 많은 물량을 사들이지 못하고 입맛을 말초적으로 길들이는 첨가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공정무역의 정신을 십분 이해하는 소비자들은 흔쾌히 양해하며 구입한다. 몸에 더 좋다는 걸 확신하는 이웃의 경험이 주효한 까닭이기도 하다.

 

무역만 공정해야 하는 건 아니다. 수확하기 전부터 계약하는 중간상인에 헐값으로 넘기고도 먹고 살만큼 이윤을 남기려면 많은 양의 농산물을 생산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농부는 화학비료와 농약에 의존하는 다수확 품종 농작물의 씨앗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자 몸만 축나는 게 아니었다. 조상이 물려준 땅도 엉망이 되고 말았다. 미생물에서 곤충과 개구리, 두더지와 뱀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던 농토는 어느새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외상으로 산 씨앗과 비료와 농약 값을 갚고, 생활비를 벌어들이려면 다른 도리가 없다. 농작물을 건강하게 만들던 생물이 사라진 농토는 그만 생산 능력을 잃어버렸다. 척박해진 땅에 뿌리는 농약과 화학비료는 증산이 아니라 감산을 모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그래서 생활협동조합이 나섰다. 신뢰를 바탕으로 도시의 소비자와 농촌의 생산자를 공정하게 연결하려는 시민운동의 일환이다.

 

생산자에게 합리적인 가격을 보장하는 생활협동조합은 복잡한 유통단계를 줄여 소비자에게 돌아가는 가격을 최대한 낮추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농업은 땅을 살리고 먹는 이의 생명을 살리는 산업이어야 하기에 화학농법을 마다하고 유기농업을 적극 환영한다. 덕분에 생활협동조합은 외국의 유기농산물이나 그 가공식품을 버젓이 전시하는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와 달리 식품매장의 유기농 코너에 가야 알현할 수 있는 지체 높은 농산물보다 훨씬 저렴한 유기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저렴하게 제공할 수 있다. 물론 화학농업으로 생산한 시중의 농산물보다 가격이 다소 높은 경우가 많지만 그건 땅을 살리며 힘겹게 농사지은 생산자에 제공된 몫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활협동조합의 일꾼에게 충분한 급여를 제공하는 건 아니다. 시민운동의 차원인 까닭이다.

 

많은 이들은 여유 있는 계층만이 생활협동조합을 이용할 수 있다고 아쉬워하는데, 그건 눈앞의 현상만 짧게 해석한 오해다. 물론 당장 돈이 더 들어가는 건 맞지만 유기농산물은 먹는 이의 건강을 나이든 뒤까지 도모할 테니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 주머니에 돈이 부족하다면 덜 구입하면 된다. 우리나라 도시의 소비자 대부분은 시방 영양이 많아 걱정이지 않은가. 다이어트에 들어가는 돈으로 생활협동조합의 유기농산물을 구입해 가족과 오순도순 조리해 먹는 선택을 권하고 싶다. 비교적 가격이 높은 고기를 구입하지 않거나 줄이는 것도 비용을 아끼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유기농이든 화학농이든 고기를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에너지가 채소나 곡물에 비해 훨씬 많지 않던가.

 

어떤 이는 유기농업에 전적으로 의존할 경우 화학농업에 비해 생산량이 줄어 식량부족을 자초하게 된다는 점을 꼬집는데, 그건 하나만 보고 그 이상을 보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땅이 척박해질수록 석유를 가공한 농약과 화학비료를 많이 뿌려야 하는 화학농업은 생태계의 안정을 해칠 뿐이 아니다. 변화된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화학농업에 적합하도록 개량해서 종자회사가 파는 씨앗은 유전적 다양성을 상실한 까닭에 환경변화에 아주 약하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그런 씨앗을 믿다 석유위기가 닥치거나 지구온난화가 심해진다면 식량위기는 돌이킬 수 없게 될 테고, 인류는 파국을 맞을 가능성이 그만큼 높이진다. 따라서 내일의 식량을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이제 겨우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유기농업이 어서 화학농업을 압도할 수 있기를 성원해야 한다. 그를 위한 사회적 논의가 시급하다.

 

생활협동조합은 조합원에게 유기농산물을 판매하는 유통 기능에서 그치면 안 된다. 고향의 정취를 잊어가는 도시의 소비자 조합원을 흙으로 안내할 필요가 있다. 생산자 조합원이 바쁜 시기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연결하는 일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농촌을 찾아간 다음세대들은 농산물이 어떻게 재배되는 걸 알게 될 뿐 아니라 농부의 노고에 고마운 마음을 느끼고, 맨발로 흙을 디디면서 고향의 정취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농부들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체험할 수 있다면 유기농산물의 가격이 결코 비싼 게 아니라는 걸 절절하게 이해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신뢰는 더욱 깊어질 게 아닌가.

 

생활협동조합은 조합원 교육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아무래도 소비자가 생산자를 끌어가는 게 낫다. 소비가 안 돼 기껏 생산한 유기농산물을 버리는 것보다 늘어난 소비자가 화학농업에서 벗어나려는 농부를 유기농업으로 전환하게 이끄는 편이 바람직하므로. 그를 위해 생활협동조합은 유기농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농산물이라면 기꺼이 소비자에게 소개하며 판매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척박해진 땅이 유기농업으로 기름져질 때까지 생산량이 급감하는 전환기 농부를 격려하며 지원해야 하므로. 필요하다면 농산물의 가격에 전환기 농부 지원 기금을 포함하는 것도 검토할 수 있지 않을까. 생활협동조합에서 소비자는 왕이 아니다. 생산자에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가진 조합원이어야 한다. 물론 생활협동조합은 생산자와 소비자 조합원 모두에게 신뢰를 잃지 않도록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영리가 아니라 운동이어야 하는 생활협동조합은 생산자 조합원과 소비자 조합원의 충분한 의견을 모아 운동의 질적 양적 확산에 주력할 필요가 있지만 그런 행동이 자칫 생활협동조합 사이의 세력 불리기 위한 경쟁으로 비화된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것이다. 초심을 잃을 것이고, 쌓았던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 외국의 유명한 유기농 매장이 가격공세로 밀고들어올 경우 경쟁력도 사라질 수 있다. 한데 외국의 유기농산물은 엄밀한 의미에서 유기농이라 해석할 수 없다. 운송 과정에서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니, 크던 작던 지구온난화를 부추긴 까닭이다. 그렇다면 생활협동조합은 최대한 제철 제고장 농산물을 취급하는 원칙을 고수해야 옳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를 최소화할 때 땅과 생명이 가장 건강할 뿐 아니라 그만큼 지역의 문화도 보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언스올,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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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딤돌 2009. 9. 19. 16:30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들은 한결같이 넓은 공원을 자랑한다. 도심 한가운데 몇 시간을 걸어야 끝이 나오는 숲을 조성하는가 하면 동네 어귀에도 푸른 녹지를 펼친다. 낡은 건물을 헐어낸 자리에 더 크고 화려한 건물을 올리기보다 나무를 심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새로운 주택단지를 만들 때에도 녹지부터 확보한 뒤에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낮은 건물을 배치한다. 그 결과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주말을 보내는 주민이 전에 없이 늘었다고 한다. 주변에 녹색의 자연이 충만해 있으면 있을수록 사람들은 머물러 있으려 한다는 것이다. 도시생태학자들은 나무로 울창한 녹지가 도시 면적의 30퍼센트보다 낮으면 시민들은 자연을 찾아 멀리 나가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도시의 녹지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에 쏟아진 뒤 낮은 곳으로 거세게 흐르는 빗물을 완충한다. 그를 위해 넓은 호수를 녹지 안에 만들어 물고기를 풀어놓자 도시는 새들이 날아드는 생태공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런 녹지는 찾아오는 시민에게 자연스런 휴식공간을, 학생들에게 교육장소를 제공한다. 어려서부터 호수를 품고 있는 녹지에서 뛰어놓았던 시민들은 도시 속에서 고향을 느끼니 상급학교 진학이나 취직을 위해 잠시 떠나더라도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귀소본능을 가진 동물에게 아주 자연스런 현상일 테지. 유서 깊은 도시일수록 도시의 완성을 녹지에서 찾는다. 역사 유물도 자랑스럽지만 그건 조상이 물려준 거다. 오늘은 물론, 내일을 살아가야 하는 후손도 자신의 삶에 뿌리가 내리는 도시를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도시의 진면목을 녹지에서 찾아야한다고 그들은 믿기 때문이리라.

 

유럽 도시도 강을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도심 공원의 호수와 이어지는 강은 주변에 주말농장을 펼쳐놓는 경우가 많다. 우리말로 ‘작은 정원’으로 해석할 수 있는 독일의 ‘클라인가르텐’은 지방정부에서 중산층 시민에게 텃밭이나 정원으로 장기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임대해주는 땅을 말한다. 주말을 맞은 가족이 나무와 꽃을 심고 가꾸는 휴식 공간이거나 농작물을 재배하는 텃밭이 되는 클라인가르텐은 평상시에는 도시의 열기를 식히는 녹지가 되고 유사시에는 시민들의 소중한 식량 공급기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100평방미터 면적에서 재배하는 채소는 가족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짬짜미 제공할 뿐 아니라 수확의 기쁨과 더불어 가족의 유대를 돈독하게 한다.

 

이름은 다르지만 독일의 클라인가르텐과 같은 시민의 텃밭은 유럽 대부분 국가의 도시마다 있고 미국과 일본의 도시들에도 흔하다. 지방정부가 시민에게 분양하는 점도 거의 같다. 종교단체나 환경단체에서 근교의 자투리농지를 부정기적으로 임대해 운영하는 텃밭이 우리나라에도 더러 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고, 지방정부에서 제공하는 텃밭은 찾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도심의 상가는 물론이고 주거 공간인 아파트단지도 빌딩이다. 삭막한 도시에 종일 생활하는 시민들은 주말이면 녹지를 찾아 멀리 떠나고 싶다. 어떤 이는 자동차로 서너 시간 이상 달려야 도달하는 시골에 밭을 마련해 주말이면 집을 비운다. 자연과 고향에 대한 갈증이 그만큼 깊기 때문일 텐데, 아이들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잠시라도 도시를 떠나지 못한 아이들은 고향의 정취라는 걸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단일 품종의 농작물을 획일적으로 심는 기업형 농장이라면 고향의 정서와 무관할 것이다. 집이나 마을에서 가족과 이웃이 작은 밭을 함께 일궈 어느 정도 자급을 꾀할 수 있다면 모를까, 끊임없는 노동만이 강요된다면 비록 시골에 살아도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녹지를 찾아 떠나고 싶을 것 같다. 미국 자본이 지배하는 중남미의 바나나나 파인애플과 같은 대규모 플랜트 농업단지들이 그럴 테고, 들판 가득 담배와 사탕수수를 심었던 쿠바가 한때 그랬을 거다. 미국 자본이 물러간 뒤에도 쿠바는 한동안 담배와 사탕수수를 외국에 팔아 벌어들이는 외화로 대부분의 농작물을 수입했다. 그때 도시나 농촌이나, 시민들의 삶은 땅에 뿌리내릴 수 없었다.

 

담배와 사탕수수의 수출길이 막히면서 굶주림을 심각하게 경험한 쿠바는 새로운 교훈을 얻었다. 식량은 제 지역에서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거였고, 그를 계기로 정부는 시민에게 텃밭을 적극 장려하는데 앞장섰다. 가족과 먹는 농산물을 스스로 재배하는 쿠바인의 텃밭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유기농업을 채택했고 요즘은 자급자족의 수준에 달할 정도라고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들녘, 2004)의 저자 요시다 타로는 증언한다. 하지만 작은 텃밭에서 제가 먹을 모든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이 더 생산한 농작물은 장터에 내놓고 필요한 걸 교환하는 시장이 필요하게 된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는 텃밭에서 생산한 농작물을 교환하는 장터가 곳곳에 열리고, 그 시장을 오고가는 시민들의 구릿빛 얼굴에서 여유를 느끼게 한다. 수출하는 담배와 사탕수수의 양은 크게 줄었어도 시민들의 몸과 마음은 전에 없이 건강하다.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 농토를 구해 주말마다 막히는 길을 헤치며 다녀오는 시민에게 고향이 전해주는 따뜻한 정서가 함양될까. 수확을 맞을 때 가슴 벅찬 기쁨을 만끽하겠지만 일찌감치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은 제 부모와 다를 것이다. 주말마다 부모와 농사짓던 기억은 중학생 전후부터 사라질 테니 나들이 다녔던 추억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아이들에게 고향이 필요하다. 뿌리내릴 땅이 있어야 정서가 메마르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도시의 아이들에게 고향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역시 땅이다. 도시의 산부인과에서 태어나 아파트를 전전해온 내일의 시민에게 고향에 대한 인식을 남겨주려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텃밭을 마련해서 입시 준비와 관계없이 함께 땅을 일구는 게 좋을 것 같다. 제 땀방울로 씨를 뿌려 수확한 농작물을 조리해 먹는 기억은 여간해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친하게 지내는 이웃과 함께 그 텃밭을 일군다면 더욱 좋을 텐데, 아쉽게도 우리에게 그런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텃밭의 수나 면적도 충분하지 않지만 폐쇄된 도시에서 이웃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어렵다. 아직까지 생산의 기쁨을 이웃과 나누는 시민도 드문 게 현실이다. 유권자의 관심사에 민감한 지방정부가 텃밭 마련에 소극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시간이 없이 텃밭에서 농사지을 엄두를 낼 수 없는 시민이라도 마음에 고향을 품는 게 낫다. 그러자면 최소한 고향이라 여길 수 있는 지역에서 생산한 농작물을 가족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땅에 뿌리 내린 농부의 믿을 수 있는 농작물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산자의 사진과 인적 사항을 전시해놓는 식품매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을 전혀 모르는 소비자가 농작물을 구입하며 고향을 느끼기는 무언가 부족하다. 동네의 대형 식품매장에 쌓인 농산물과 가공식품은 대개 출처가 불분명하다. 당장 위험한 건 아니겠지만 누가 어떻게 생산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으니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강력한 제도를 만든 국가가 행정력으로 안전을 보장한다지만, 농약이나 첨가물로 인한 문제들이 잊을만하면 터지는 현실은 소비자의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지 못한다. 수입 농산물이나 가공식품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

 

누가 어떻게 재배하고 가공했는지 알 수 있는 농산물과 가공식품이라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 생산자와 막역하게 가깝다면 더욱 좋을 것인데 시골의 부모나 친지가 보내는 농산물을 받을 처지가 못 되는 대부분의 도시 소비자들은 생산자와 친밀해질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웃는 자에 침 뱉지 않는다고, 자주 만나 친해진 생산자에게 농산물을 구입하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디 허물없이 지날 생산자를 소개해주는 단체나 사람이 없을까. 농번기를 만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가족과 찾아가 흔쾌히 도울 수 있을 만큼 가까운 농촌이라면 금상첨화일 텐데. 농작물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받을 때마다 고향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을 텐데. 생활협동조합이 그 대안을 기꺼이 안내한다. (사이언스올, 2009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