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21. 3. 9. 18:29

 

싱가포르 수상 리콴유는 에어컨을 20세기 최고 발명품으로 추켜세웠다는데, 미국 과학한림원은 양변기를 포함한 상하수도 시스템을 인류에 최고 혜택을 준 20세기 10대 발명품 중 하나로 선정했다고 한다. 에어컨을 여태 몰랐다면 제주도의 3분의 1인 싱가포르는 느리게 살아가는 어부와 신출귀몰한 말레이 해협의 해적이 출몰하는 적도 지역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고질적 악취와 질병을 도시에서 몰아낸 수세식 양변기는 인간의 평균 수명을 30년 연장했다고 학자들은 평가한다. 대소변이 눈앞에서 깨끗하게 사라지게 만드는 상하수도 시스템은 마술이었다. 머리 위에서 느닷없이 쏟아지는 배설물을 막는 얇은 코트와 발에 묻지 않도록 신던 굽 높은 구두가 수세식 양변기를 계기로 유행을 선도하는 장신구로 위상을 바꾸게 되었다. 역시 마술이었는데, 막대한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걷잡을 수 없는 수인성 전염병을 더는 방치할 수 없어 부유한 도시부터 도입했을 것이다.

 

14세기 유럽을 휩쓴 페스트는 도시를 뒤덮은 오물과 무관하지 않았다. 벼룩이 달라붙은 쥐들이 거리를 휩쓸 뿐 아니라 크고 작은 개천과 하천이 모두 불결해 옷도 음식이 깨끗할 수 없었을 것이다. 콜레라와 장티푸스 같은 수인성 감염병뿐 아니라 피부질환도 흔했을 텐데, 침방울로 전파되는 페스트가 치명적으로 창궐했다. 세균이 원인이라는 사실을 파악할 어떤 수단도 없던 당시는 죄가 깊은 탓이라 여겨 기도에 몰두했지만, 소용없었다, 죄를 사해주던 사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의사도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십자군 전쟁과 페스트 악몽은 신에 의지하던 사회를 계몽시켜 인류는 드디어 르네상스 시대를 펼치게 되었다고 우리는 배운다. 학문과 기술이 함양되고 신보다 사람에게 합리적인 제도가 유럽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종교 섭리의 족쇄가 풀리면서 자유로워진 연구와 논쟁 덕분에 과학도 일취월장했다. 하지만 오염된 물로 전파되는 병균의 존재는 현미경으로 세포를 1665년 관찰한 로버트 훅 시대에서 한참 지나야 파악할 수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1930년대에 알았다는데, 희생자가 터무니없이 이어지던 감염병 역사를 돌이켜보면 과학이 실생활에 다가온 영향이 얼마나 긍정적인지 새삼 확인한다.

 

코로나19 감염자가 발생한 지 1년이 지났다. 1억 명이 넘는 세계 인구가 감염되고 그중 220만 넘게 희생되었지만, 서광이 보인다. 자본력을 갖춘 초국적 제약회사의 집중 연구로 효능과 안전성을 기대하는 백신이 속속 개발되고, 물량이 모자랄 정도로 접종 중이다. 이제까지 8만의 확진자와 1500 가까운 희생자가 발생한 우리나라도 접종을 시작할 것이다. 시행착오가 있겠지만 놀라운 과학이 감염병을 극복한 역사를 다시금 기록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페스트는 왜 하필 14세기 유럽에 무섭게 창궐했을까? 세균 품은 쥐벼룩과 쥐가 도시와 농촌에 돌아다니는 건 14세기 이전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도 비슷했는데, 역사학자는 당시 냉기가 몰아쳐 수확을 건지지 못한 농노들이 굶주리며 도시로 모여들었다고 했다. 배설물과 더불어 쥐와 벼룩이 골목에 널렸을 게 틀림없다. 농촌과 농노가 건강했다면 페스트는 막강한 교회를 무너뜨릴 정도로 창궐하지 못했을지 모르는데, 비슷한 일은 1918년에 반복되었다.

 

1차대전 참호의 젊은 병사 수백만을 희생시킨 스페인독감 바이러스는 애초 독성이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유전자가 변했다. 독성과 전파력이 치명적으로 강해지자 당시 세계 인구의 2% 이상 사망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산한다. 부패한 시신이 강에 떠다니자 소스라치게 놀란 인도 농민들은 도시의 슬럼으로 파고들었고, 슬럼에 독감이 번지자 헐벗은 난민 천만 이상이 한꺼번에 사망했다고 학자들은 분석한다.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된 요즘 아무리 위험한 독감이 창궐해도 1918년 같은 희생자는 발생하지 않을 것 같다.

 

사진: 초등학교의 단체 예방주사의 한 장면. (인터넷 자료)

 

코로나19도 독감처럼 유전자가 쉽게 변하는 RNA 바이러스다. 방역당국은 3, 다시 말해 밀집, 밀폐, 밀접을 피하라고 당부하고 시민들을 대부분 응한다. 정부 지침에 맞게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하면서 진정 기미를 보이는데, 감기와 독감 환자가 크게 줄었다. 다른 호흡기 질환도 줄었을 텐데, 사람은 본디 거리를 두고 살지 못한다. 그렇게 진화되지 않았다. 백신이 나오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우리도 접종받을 코로나19 백신의 효능은 얼마나 오래 지속될까? 독감은 6개월 정도라는데, 코로나19는 그 이상일까? 집단면역이 생기려면 얼마나 많은 인구가 얼마나 자주 주사 맞아야 할까? 주사를 주기적으로 맞으면 집단면역은 유지될까? 가능하다면, 꼭 그래야 할까?

 

무증상 감염이 생소해서 그랬는지, 많은 국가에서 초기 대응에 실패했다. 증상이 없는 젊은이가 면역이 약한 노약자에 전파해 목숨을 잃게 했는데, 이번 백신을 계기로 코로나19가 사그라지길 간절히 희망한다. 하지만 잦은 변화로 감염성과 독성이 강화될 수 있으니 마음 놓을 수 없다. 백신과 치료제도 개선되어 2019년 중국 우한에서 퍼진 코로나19는 결국 사라질 거라 기대해보자. 하지만 감염병은 계속될 것이다. 어떤 모습으로 무슨 감염병이 발생할지 누구도 점칠 수 없지만, 기상이변이 속출하는 한, 걷잡기 어렵게 나타날 가능성은 무척 크다. 과학이 언제나 대처해줄 것인가? 그때마다 사람들은 철저한 거리두기에 동의할까?

 

거대해진 과학은 막대한 자본이 이끈다. 제약회사도 마찬가지다. 자본이 신속하게 지원하지 않는다면 과학은 신기술을 개발하지 않을 텐데, 자본은 이익이 보장되지 않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1930년대 발견된 코로나바이러스는 치명적이지 않아 그랬는지 과학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거대 기술과 결합한 요사이 과학은 석유의 지원이 없으면 결과를 내지 못한다. 플라스틱 없이 진단과 처방이 불가능한 코로나19만이 아니다. 사람은 물론, 가축과 농작물에 대한 감염병 백신과 치료제 대부분이 그렇다. 한데 석유는 한계를 보인다. 고갈된다면 더욱 무서워질 감염병에 우리는 속수무책이 될 것이다. 기후위기에 직면한 우리는 과학에 모든 걸 맡길 수 없다.

 

6번 교향곡 초연에서 혹평받은 차이콥스키는 화를 달래려 벌컥벌컥 마신 냉수로 콜레라에 감염돼 사망했다는데, 유럽에 페스트와 콜레라가 만연할 때 희생자가 거의 없는 지역이 있었다고 한다. 화강암 모래가 강물을 정화하는 곳이었다는데, 우리나라의 하천은 대부분 화강암 모래가 물을 정화하며 흐른다. 그래서 그런지, 페스트도 콜레라도 몰랐다. 대형 댐과 보에 흐름이 막힌 요즘은 아니다. 예로부터 그냥 마셨던 크고 작은 강이 더러워졌다. 오염된 강물을 과학으로 정화하지만, 미덥지 못한지 끓여서 마신다.

 

기후변화가 심할수록 우리는 과학을 생각한다. 하지만 성장과 번영을 앞세우는 과학은 기대를 외면한다. 자본에 의존하는 과학은 지속 가능한 내일을 제시하지 못한다. 어떤 과학이어야 할까? 적도의 사람들을 부지런하게 만드는 에어컨일까? 일찍이 장자는 기계에 의존하려는 마음, 다시 말해 기심(機心)을 경계했다. 기계에 의존할수록 순수성을 잃고 탐욕스럽게 변한다고 지적했다. 일찍이 무지를 극복하도록 이끈 과학은 재앙을 예방하게 했다. 지속 가능한 길을 제시했을 텐데, 그런 과학에 생태적 사유는 물론, 사회와 문화, 그리고 역사적 맥락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개발, 발전, 선진국을 추동하는 근대문명은 화석연료 과소비에 이은 기후위기를 심화시켰다. 콘크리트로 고층빌딩을 돋아 올릴수록, 고속도로와 공항이 늘어날수록 물과 공기는 더러워지고 자연은 위축되었다. 생물다양성을 잃고 완충력이 파괴된 생태계는 인간사회에 코로나19를 불러들였다. 찬란한 과학을 거듭 동원하더라도 생태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기상이변과 감염병은 진정되지 않을 것이다. 파국을 만난 생태계에서 후손의 삶이 멈추는 걸 바라지 않는다면, 코로나19가 던지는 묵직한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생존 가능한 내일을 어떻게 열어야 하나? 탐욕이 견인하는 과학은 그 답을 모른다. 21세기의 인류는 제2 코로나와 제2 페스트를 부를 정도로 치명적으로 번영했다. 치명적 무지를 극복하게 할 과학이 다급하다. (작은책, 20213월호)

 

 
 
 

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14. 11. 29. 15:44

 

갑자기 쌀쌀해져 그런가. 낙엽마저 사라진 거리가 조용하다. 월요일로 접어드는 새벽이면 단풍놀이 다녀오는 승용차가 이따금 작은 소음을 내놓을 만한데 아파트단지의 가을밤도 고요하게 깊어간다. 식구가 잠든 이 시간, 책을 들어다보며 조용히 원고를 쓴다.


책상의 작은 전구에 의지해도 돋보기와 컴퓨터 모니터의 빛이면 책 읽고 자판 토닥거리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컴퓨터가 없으면 원고 한 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되면서 촛불은 책상을 떠난 지 오래다. 긴 머릿결이 예뻤던 어떤 학생은 무인도에 해어드라이어는 꼭 가지고 가야 한다고 답했는데, 컴퓨터 없는 무인도에 가면 하루도 버티지 못할 처지가 되고 말았다.


내일은 무척 추울 거라며 일기예보는 엄포를 놓았다. 조끼 한 벌 챙겨야겠다. 지하철 서너 정거장을 걸을 때 등덜미에서 스미는 땀은 줄어들겠지만 땀이 식은 뒤 추울지 모른다. 보일러 온도를 높인 집안은 물론 지하철도 따뜻할 테니 큰 걱정은 하지 않지만, 강의 마치고 나올 거리는 제법 쌀쌀할 터. 바람도 거셀 거로 예고하니 조끼가 요긴하겠지.


얇은 스웨터는 한여름에도 요긴한 세상이다. 에어컨이 실내 기온을 드세게 내리기 때문이다. 올해 핵발전소와 화력발전소가 전기를 추가하면서 서울 주요 거리의 상가마다 에어컨을 바깥으로 틀어놓았다. 올겨울은 예년보다 더 추울까? 거위 가슴깃털로 무장한 외투를 입은 젊은이들이 찻집에 들어설 때 안경에 끼는 안개는 더욱 짙어질까? 천지사방의 든든한 보일러가 겨울을 데울 것이므로.


보일러와 에어컨이 겨울을 여름답게, 여름을 겨울답게 실내온도를 조정하는 세상에 거위와 오리는 인간을 위해 집단 사육되며 주기적으로 가슴깃털을 뜯긴다. 그뿐인가? 뉴질랜드는 부지런히 양가죽을 벗기고 은여우와 밍크는 밀집된 우리에 갇혀 사료만 축내다 가죽을 빼앗기며 죽는다. 가죽 잃은 몸통은 사료로 재활용될 것이다.


간장독과 아이들은 겨울에 내놓아도 얼지 않는다고 했건만 간장독이 사라진 요즘의 아이들은 조금만 추워도 감기에 걸린다. 아니 걸린다고 부모들이 성화다. 그래서 밖에 내놓을 때 외투에 털모자, 털장갑과 목도리를 휘감고 집안의 보일러를 펑펑 돌린다. 여름철 에어컨 켜듯.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감기를 달고 다니게 되었을 텐데, 요즘 감기는 과학기술에 삶을 의존하는 어른이라고 예외가 아니다.


공장식 산업축산이라는 과학, 발전소라는 과학이 우리네 삶의 비빌언덕이 되는 한, 한두 주 서둘러 다가오는 추위나 더위쯤이야 문제될 게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일기예보가 아무리 호들갑떨어도 놀라지 않는데, 앞으로는 어떨까? 과학기술은 거대할수록 석유 없으면 작동이 불가능한데, 세계의 석유는 늘어나는 소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른바 전문가들이 말하는 피크오일이 지난 것이다. 석유소비가 늘어날수록 심화될 기상이변은 계절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


10년 전 할리우드 영화 투모로우는 급속한 빙하로 바다가 얼어붙는 내일을 실감나게 보여주었는데, 영화 속 과학기술은 출연진 일부만 살려주었다. 28년 전 폭발한 구소련의 체르노빌은 아직도 방사선을 내뿜는다. 서유럽의 지원을 받은 우크라이나는 거대한 콘크리트로 발전소를 뒤덮는 공사를 벌이지만, 콘크리트는 방사성물질을 백년 이상 가두지 못한다. 이후 더 커다란 콘크리트로 다시 덮어야 할까?


태평양의 외로운 섬, 흔히 이스터 섬라고 말하는 라파루이는 모아이라는 거대한 석상으로 유명하지만 나무 한 그루 없이 황량한 곳이다. 17세기 첫발을 디딘 유럽인은 불가사이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지금은 한계를 넘은 개발이 빚은 처참한 결과라는 걸 안다. 울울창창한 야자나무로 카누를 만들어 고래를 잡아먹으며 번성했지만 늘어나는 인구와 씀씀이가 감당할 수 없게 커졌고, 이후 공포에 휩쓸린 섬은 신에 매달렸다고 한다.


부족이 둘로 나눠져 경쟁하던 라파누이 주민들은 개발 속도를 늦추기보다 상대 부족보다 더 큰 모아이를 더 많이 세우려는 경쟁에 돌입했다고 전문가는 분석한다. 100톤으로 늘어난 모아이를 제단까지 운반하는 굴대와 밧줄을 위해 야자수를 마구 자른 라파누이는 농사지을 토양마저 바람에 날려 잃었고, 언어까지 잃은 채 비참하게 사라지는 중이었다고 한다.


라파누이는 모아이를 세우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신은 풍요로울 때 화답했을 뿐인데, 21세기는 점점 커지는 과학기술이 신이다. 과학기술은 석유 없는 내일을 어떻게 이끌어갈까?


맹추위를 보일러로 대비할 수 있는 시대는 머지않아 끝난다. 모피 동물과 거위도 석유 없이 지금처럼 키우지 못한다. 석유를 들이부어야 생산이 가능한 곡물을 사료로 먹이거나 곡물을 잔뜩 먹인 가축의 내장을 먹이지 않나. 수억 년 전에 고인 석유는 200년 만에 막을 내릴 텐데, 우리는 여전히 과학기술을 들먹인다. 지구라는 라파누이는 과학기술이라는 모아이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는데.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기술 없이 생존이 불가능한 인간에게 중간기술을 권한다. 야심한 시간의 촛불이나 노안을 보완하는 돋보기 정도의 기술이다. 기후변화를 일으키지 않는 지속가능한 기술이다.


수십 만 원을 호가하는 백화점의 외투 옆에 십 만 원도 되지 않는 외투가 멀쩡하게 팔린다. 양가죽이나 거위깃털이 아니라도 겨울이 그리 춥지 않건만, 우리는 이미 외투가 많다. 석유 소비 부채질하는 외투보다 한 벌 더 끼어 입는 옷이 내일을 아름답게 한다. 이웃을 따뜻하게 한다.


1936년 마거릿 미첼이 쓴 소설을 3년 뒤 할리우드가 영화로 발표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은 흙을 움켜쥐며 자신에게 타라가 있다고 말한다. 타라는 시골의 땅이다. 농사지으며 살아갈 수 있는 진정한 비빌언덕이다.


망가지는 생태계를 더욱 황폐하게 만든 모아이도 석유를 펑펑 소비하는 거대 과학기술도 비빌언덕이 아니다. 대안은 내일을 배려하는 중간기술이아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컴퓨터 없는 글쓰기를 연습해야겠다. 원고가 필요 없는 세상이 되면 더욱 좋을 텐데. (작은책, 201412월호)

 
 
 

과학기술·생명공학

디딤돌 2014. 1. 21. 23:04

경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 치고 상대방의 주장을 주의 깊게 듣고 허심탄회하게 토론한 다음,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수정하는 이 보기 어렵다. 해외의 유명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딴 이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한데, 힘겹게 공부해서 그런가? 과학기술도 그런 점에서 뒤지지 않는다. 공부는 반드시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닌데. 좋든 싫든, 많은 사람과 부딪히는 일상에서 훨씬 많이 배우는데, 대개 그렇다.


18세기 귀족 맬서스가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지만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므로 큰일이라고 했다. 당시 영국 정부는 가난한 자들을 먹어 살리느라 골머리를 앓았겠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경제나 과학자들은 어깨를 한번 들썩이고 만다. 식량 증산을 유도한 녹색혁명이라는 과학기술이 해결했다는 거다. 20세기 초, 암모니아 가스를 냉매로 사용하던 원양어선의 배관에 이상이 생기면 수리하는 선원은 생명을 잃을 수 있었지만 프레온가스를 사용하면서 그런 위험에서 자유로워졌다. 과학기술 덕분이라고 이야기한다.


과학기술 덕분이라는 확신은 과학자의 자부심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경제의 영역으로 이어진다. 아니 자신이 선도했다고 경제가 큰소리친다. 부족한 식량을 증산시키는 기술과 안전한 냉매의 개발을 과학자에 의뢰한 측이 경제라는 거다. 다국적기업이 그들이다. 물론 기술개발에 성공한 과학자는 명성과 그 못지않은 부를 챙겼을 것이다. 녹색혁명을 이끈 미국의 과학자 노먼 볼로그는 197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모르긴 해도 돈도 꽤 벌었을 텐데, 프레온가스 특허를 가진 과학자도 돈방석에 앉았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프레온가스 생산업자와 그 냉매를 넣는 냉장기기를 만드는 자본이 훨씬 큰돈을 벌어들였다. 농업 관련 다국적기업의 막대한 성장은 또 어떤가.


프레온은 오존층을 파괴했다. 부랴부랴 과학자들은 대체 냉매를 개발했지만 오존층을 건드리지 않는 새 냉매는 프레온가스 이상 지구온난화를 촉진한다. 참고로 프레온가스는 이산화탄소의 2만 배 가까이 온실효과를 만들어낸다고 한다. 앞으로 오존층도 건드리지 않고 온실효과도 피하는 냉매를 다시 개발해 특허를 출원하는 과학자는 큰돈을 벌어들일지 모른다. 지금 그 목표로 기업에 연구비를 받는 과학자가 많을 텐데, 새로 나올 냉매는 부작용이 과연 없을까. 프레온가스로 열광할 때 세상 사람들은 오존층이 무엇인지 몰랐다.


노먼 볼로그는 기아를 걱정해 다수확 곡식을 개발했을지 모르지만, 농작물이 상품으로 바뀌자 기아가 만연한 지역에 식량은 순조롭게 전달되지 않았다. 그런 지역에도 옥토가 있다. 기름진 땅을 다국적기업이 차지해 서양에 높은 가격으로 팔아넘기는 플랜트농업에 주력하면서 기아는 더욱 늘어나지 않았던가. 막대한 이익을 채운 녹색혁명은 시방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석유로 가공하는 농약과 비료, 석유를 들이키는 무거운 농기계 없이 경작이 불가능한 지경이 되었는데, 미생물과 지렁이를 잃은 땅은 황폐화되고 말았다.


당면한 문제를 해결한 듯 홍보되는 과학기술은 거대해지고 자본에 독점될수록 더 큰 문제를 만들어내며 그 책임을 혜택과 거리가 먼 지역의 사람과 생태계 그리고 다음세대에 떠넘긴다. 석유의 막대한 소비 없이 가동되지 않는 산업은 석유 소비가 거의 없는 지역의 재해 규모를 키웠다. 지난 11월 초 필리핀을 덮친 태풍 하이옌이 그 예다. 일본 후쿠시마 핵발전소 폭발은 자국의 가난한 지역을 항구적으로 오염시켰고 태평양 해양 생태계를 망쳐놓았다. 다국적기업의 농작물에 의존하는 지역일수록 고통이 클 것이다. 지구온난화로 더욱 심화되는 풍수해와 석유 위기로 식량 가격이 급등할 게 틀림없는 까닭인데, 우리나라가 그렇다.


많은 이들은 여전히 과학기술을 기대한다. 지구온난화도 에너지와 식량 부족도 해결할 것으로 막연히 믿는다. 생산하는 농작물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 수경재배 수직농장을 콘크리트로 높게 짓고, 그 에너지는 핵에서 얻으면 된다는 식으로 경제학자는 낙관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핵폐기물 안전처리 방법을 모른다. 핵융합으로 해결하면 될까? 과학기술은 콘크리트를 친환경적이며 오래 사용하도록 개발해낼까?


큰돈 들여 개발할수록 가난한 이는 혜택에서 제외될 텐데, 기다리면 떡고물이 떨어질까? 그런 경우가 없지 않지만, 떡고물이 전해질 때면 부작용은 더 커지고, 그 피해는 약자나 소외된 자에게 예외 없이 집중된다. 탐욕스런 경제가 과학기술을 지배한 탓인데, 자본이 지배하는 과학기술은 거대해지기만 한다. 거대과학은 지불 능력이 없는 자를 외면하기 일쑤다. 거대 자본이 주도하는 핵발전과 화력발전이 그렇다. 녹색혁명과 유전자조작이 그렇다.


수렵채취로 돌아갈 수 없다면 어느 정도의 기술은 필요하다. 지역에서 나누며 자급하는 농작물과 태양광 전기는 거대 시설과 큰 기술을 요구하지 않는다. 식량과 에너지의 자급에 필요한 도구는 지역에서 서로 도우며 만들고 고칠 수 있다. 자연과 다음세대에 영향주지 않는 중간기술이다. 거대과학이 일으킨 문제는 더욱 거대한 과학으로 해결할 수 없다. 거대과학 독선에서 벗어나 중간기술을 도모해야 한다. (야곱의우물, 20142월호)

좋은 글 스크랩해서 가져 갑니다. 감사합니다.
포스팅구경하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