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4. 7. 1. 09:03

 

권정생 선생의 7주기가 얼마 전 지나갔다. 조촐한 추모 행사가 열렸는데, 가고 싶어도 머뭇거리게 된다. 적지 않은 인세가 들어와도 청빈보다 평생 가난하게 산 권정생 선생은 생을 거둘 때까지 자신의 영혼을 더럽히지 않았는데, 그가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지났어도 세파에 찌든 몸으로 찾아갈 수 없었다. 북한 주민의 3분의1이 굶주린다는 말이 들릴 때, 서글픈 세상에서 기쁜 이야기를 쓸 수 없다던 권정생 선생은 죽을 먹어도 함께 살자며 독자에게 북한 지원을 호소한 적 있다.


밥은 바빠서 못 먹고, 죽은 죽어도 안 먹고, 술만 술술 잘 넘어간다.”는 주당의 너스레가 있는데, 동지 때 아내가 팥죽을 챙기지 않는다면 죽 먹을 기회는 거의 없다. 술술 잘 넘어가는 술로 고주망태가 된 다음날 전문식당을 찾은 적이 드물게 있고, 아메리카노가 지겨울 때 단팥죽을 주문할 따름이다. 그저 죽은 별식일 따름인데 죽으로 끼니를 이어야 한다면 얼마나 갑갑할까. 그런 죽이 쇠약해진 몸을 거뜬히 일으키는 모습을 보았다. 지율스님이 KTX 천성산 구간 터널의 부당함을 알리며 100일 가까이 수행하던 단식을 마칠 적이었다.


50년이 넘는 기억 속에 돈이나 먹을 게 없어 굶은 적은 없지만 두어 차례 단식은 했다. 지율스님을 응원하려 조계사 앞에서 시민단체들이 마음을 모을 적에 고작 하루 3끼를 굶었고 물론 견딜만했다. 그날 함께 단식한 수녀들은 24시간 먹는 이야기만 꺼냈다. 팔도음식을 거쳐 각종 샐러드로 이어질 때마다 군침을 다셔야 했는데, 청양고추를 넣어야 샐러드도 제맛이라는 말에 기가 질리기도 했다. 단식을 마치면 조계사 앞 수레에서 파는 수수팥떡부터 먹으리라 다짐했건만 그 시간에 수레는 떠나고 없었다.


타의로 끼니를 거른 적 없으니 굶주림의 고통을 이해할 리 없는데, 무기한 단식에 들어간 적은 있다. 아직 젊었던 30대 후반의 일이다. 굴업도 핵폐기장을 반대하며 들어간 단식이었다. 주위에서 하도 겁을 줘 잔뜩 긴장하기도 했지만 3일 만에 중단했으니 배고플 기회가 없었다. 10끼 굶고 찾은 식당에서 허연 죽을 미지근한 물에 풀어 내주었는데, 그걸 조금 마시고 일어서니 참기 어려운 허기가 갑자기 밀려왔다. 단식보다 복식이 어렵다니 죽보다 부드러운 음식, 하필 초콜릿을 골랐다. 이후 얼마나 배가 아팠는지. 족히 일주일은 고생해야 했다.

 

 

마른 논에 물 들어가고, 자식들 입에 이팝 들어가던 때

 

청주의 명물 중 하나는 입구 4차선 도로를 덮은 가로수 터널일 테지만 시민들이 지켜낸 산남동의 원흥이 방죽도 빼놓을 수 없다. 2003년 산남3지구 주택 개발 사업이 예정된 곳은 계단식 논이 넓었다. 공사가 시작될 즈음 법원과 검찰청이 예정된 터에서 조금 떨어진 원흥이 방죽에 새카만 두꺼비 올챙이들이 거대한 무리를 이루며 이동하고 있었다. 보호대상종이던 두꺼비의 오랜 산란터라는 걸 확인한 청주시민들이 한마음으로 뭉쳐 행동했고, 부족하나마 원흥이 방죽의 훼손을 막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6천 가구가 넘는 산남동의 번듯한 아파트에 살림살이를 들여놓은 이 가운데 원흥이 방죽을 기억하는 이 드물다. 그래서 그런가. 산란하는 두꺼비가 해마다 줄어든다.


법원과 검찰청으로 이어지는 넓은 도로의 양 측편은 이팝나무 가로수가 독특한 풍경을 연출한다. 5월 초 회의 참석을 위해 원흥이 방죽 근처의 두꺼비 마을을 찾았더니 이팝나무 가로수들은 저마다 작고 하얀 꽃을 활짝 펼쳐놓았다. 과연 흰밥 한 주발을 엎어놓은 모양 그대로였다. “마른 논에 물 들어갈 때와 자식들 입에 이팝 들어갈 때가장 뿌듯하다는 말이 있다. 이때 이팝은 흰 쌀밥을 뜻한다. 농경사회에서 24절기의 입하(立夏)는 한참 배고플 시기였을 것이다. 그때 꽃이 피니 입하나무로 불렀다는 말도 있는데, 겉보리도 수확하기 전이다.


저장해둔 쌀이 벌써 다 떨어진 입하 무렵이었을까. 들판의 보리가 봄 가뭄으로 타들어갈 즈음, 권전생 선생은 마을 할머니에게 듣던 안동지방의 굶주림을 가만가만 전한다. 방문 닫아걸고 밥을 먹고 있으면 문을 부수고 느닷없이 들어선 거지가 밥주발을 빼앗아 달아났다고 한다. 뺨을 후려쳐 뱉어낸 밥알까지 긁어 먹었던 시절, 뒷산 애기무덤은 발 디딜 틈 없이 애기들이 묻혔고 날보리를 껍질 째 손바닥으로 비벼 먹은 거지들이 주린 배를 움켜쥐며 떼로 죽어갔다는 노인의 기억은 권정생 선생이 태어나기 전, 1920년대 우리 조상의 피눈물나는 고통의 한 단면이었다.


겉보리도 먹지 못하고 죽어간 조상의 후손은 요즘, 요령 있게 밥, 아니 칼로리를 줄이려 애를 쓴다. 밥은 별로 먹지 않는다. 하루 3, 일주일 21끼 중에 밥은 식단의 절반도 차지하지 못한다. 아침을 거르는 경우도 많지만 국수나 빵으로 대신하거나 저녁 때 술 한 잔과 안주로 때우기 일쑤다. 어젯밤 술 때문에 아침을 마다할 적이 많으니 이래저래 쌀 소비량은 줄어든다. 1970년대에만 해도 밥주발에 한 주발을 더 엎어놓은 듯, 고봉을 눌러 담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주발보다 작은 그릇에 채워담지 않아도 으레 남긴다.


허기진 구석을 조금도 찾을 수 없는 요즘 사람들은 칼로리의 대부분을 밥보다 반찬에서 챙긴다. 주문하는 도시락도 밥보다 반찬이 훨씬 많다. 밥은 그저 짜고 맵고 단 반찬을 중화시키려 먹는 용도로 전락했는데, 굶주림을 잊은 우리는 쌀 이외 음식의 자급률이 3%에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잊곤 한다. 쌀 자급률마저 80%대로 떨어지고 말았으니 원산지 표시가 허술한 식당의 밥이나 편의점 삼각김밥의 쌀 출처는 의심해볼 일이다.

 

 

비만은 가난의 상징?

 

맨 처음 뷔페식당에 들어간 게 언제였던가. 1980년대에만 해도 대단한 부자가 아니라면 엄두 낼 수 없었는데, 어느덧 일상으로 다가왔다. 결혼식이나 생일에 초대받아 찾는 뷔페식당마다 가득 쌓은 음식. 출처는 과연 어디일까? 접시를 몇 차례 교환하며 받아오는 산해진미의 원산지를 확인하는 손님은 거의 없다. 시장이나 슈퍼마켓에서 포장지 뒷면의 깨알 같은 글자를 유심히 살피는 소비자일지라도 유전자를 조작한 농산물인지, 광우병 위험이 높은 고기인지, 후쿠시마 일원에서 잡아온 물고기인지 뷔페식당에서 따지지 않는다. 버리는 음식도 상당할 것이다.


해마다 우리나라에서 버리는 음식 쓰레기는 얼마나 될까. 2008년 환경부는 일인당 하루에 평균 280그램을 버린다고 조사했으니, 인구를 곱하면 하루 14000톤이고 해마다 510만 톤의 음식 쓰레기가 발생하는 셈이다. 처리비용도 만만치 않을 텐데, 식량의 70% 이상 수입하는 처지에 지나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환경부는 식당이나 가정에서 배출하는 쓰레기가 많다고 밝혔지만 식품회사보다 많지 않을 것이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가정에서 그렇게 많은 음식 쓰레기를 배출할 리 없다. 식품 제조공장의 발생량은 영업비밀일까?


먹는 양보다 상해서 버리는 고기가 더 많을 때가 드물지 않은 나라가 미국이다. 가공과정에서 대장균이나 식중독 균에 오염된 사실이 밝혀지면 그 회사의 같은 제품을 지체없이 폐기하기 때문이다. 주로 대형 식품회사의 제품에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우리나라도 비슷하다. 2004년 만두소 파동과 2008년 중국산 유제품의 멜라민 오염 사건을 생각해보라. 얼마나 많은 음식이 상품화 전에 버려졌던가. 멀쩡해도 버린다. 오스트리아 최대 도시인 비엔나에서 하루에 버리는 가공식품은 두 번째로 큰 그라츠에서 소비하는 양과 같다. 포장도 뜯지 않은 빵과 유제품이 유통기한 지났다는 이유로 전량 폐기된다.


멀쩡한 상태로 버린 음식을 일부로 찾아 먹는 사람을 프리건(freegan)’이라고 한다. 낭비적 삶을 행동으로 비판하는 미국 프리건의 상당수는 고학력 전문직이라지만 그들이 소비하는 음식의 양은 얼마 되지 않는다. 유통기한에 근접해 폐기 대상인 식품을 모아 저소득 계층에 무료로 나누어주는 정부나 민간단체의 푸드뱅크(food bank)’ 사업은 우리나라도 실시하지만 결식 시민을 없애지 못한다. 어차피 버릴 음식이므로 식품회사에서 기꺼이 푸드뱅크에 내놓지만, 유통기한 지난 재고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모두 내놓으면 새로 팔 물건이 그만큼 줄어들지 않은가.


음식 쓰레기가 넘치는 세상이건만 굶주리는 이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 무료 급식소마다 점심 줄이 길어지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그 덕분인가? 굶어서 죽어가는 사람은 아주 드물지만 비만이 가난의 상징이 되었다. 예전에 없던 역설이다. 여유가 없어 값싼 가공식품을 허겁지겁 먹는 가난한 계층에 비만이 늘었다는 건데, 필수 영양소나 비타민이 결핍된 가공식품에 의존하다 젊거나 어린 나이에 성인병에 접어들기도 한다.

 

 

녹색혁명과 유전자조작

 

내일도 3끼 먹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는 사람은 세계에 얼마나 될까? “세계가 만일 100명의 마을이라면” 30명은 진종일 굶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30명은 3끼 먹을 자신이 없다. 분쟁과 갈등으로 구호식량이 제대로 분배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만 근본 원인은 다른 데에서 찾아야 한다. 식량을 생산해오던 기름진 농토에 말뚝을 박은 다국적기업이 플랜트농업단지를 만들어 돈 많은 국가에 팔기 위해 기호식품이나 농산물을 재배한다. 식량은 언제 어디에서나 기본적으로 이웃과 나눴지만 지금은 아니다. 상품이다. 돈이 없으면 열외일 수밖에 없다.


록펠러와 포드재단의 후원으로 1943년 멕시코 소노라 주에서 시험한 녹색혁명은 대성공을 거뒀다. 적시 적량의 물과 엄선한 화학비료를 적기 투입하자 밀은 3, 옥수수는 2배의 수확을 올렸다. 과학자가 개발해 종자회사가 공급하는 다수확품종이다. 그 씨앗에 맞는 농사법을 엄격하게 적용하자 2모작은 물론 3모작까지 가능했다. 기아로 허덕이는 지역의 식량은 충분히 공급하게 될 것으로 믿을 만했다. 다수확품종을 심는 농민은 이윽고 조상이 물려준 씨앗을 버렸다.


다수확품종을 대규모로 심기 위해 농민은 소박하게 농사짓던 농토를 바꿔야 했다. 무거운 농기계에 맞춰 경작지를 커다랗고 반듯하게 정리한 다음, 적지 않은 석유를 소비해야 했다. 막대한 투자에서 소외된 농민들은 농사를 포기해야 했다. 남은 농부는 돈이 들어가는 만큼 수확한 농작물은 적정 이윤이 보장된 시장에 팔아야 했는데, 씨앗을 남기면 계약위반이다. 농부는 해마다 다수확품종의 씨앗을 종자회사에서 구입해야만 했다. 내년에 심을 씨앗을 몰래 갈무리했다 들키면 감당 못할 벌금이 부과된다.


녹색혁명 이후 농작물은 엄연한 상품이다. 가난한 지역의 인구는 농산물을 구입할 수 없다. 농작물의 생산과 소비 뿐 아니라 운송과 유통까지 통제하는 다국적 식량 자본은 다수확 농작물의 공급 방향을 바꿨다. 과잉 생산된 곡물을 가축의 사료로 공급하는 편이 훨씬 이익이라는 걸 간파한 뒤의 일이다. 요즘 미국의 축산자본이 공급하는 쇠고기가 그렇다. 쇠고기 1킬로그램은 16킬로그램의 옥수수를 먹인 결과물이다. 옥수수는 어떤가. 100칼로리에 해당하는 옥수수를 수확하려면 그 10배인 1000칼로리 열량의 석유를 들이부어야 한다. 농기계와 운송트럭이 태우는 석유만이 아니다. 석유를 가공한 농약과 화학비료도 만만치 않게 사용한다.


옥수수뿐이 아니다. 콩이나 감자도 마찬가지다. 시금치와 당근, 사과나 포도, 아몬드나 땅콩, 돼지고기나 닭고기, 그 가공식품, 우유와 낙농제품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음식이 아니라 석유를 먹는 것과 같다. 그 과정에서 낭비되는 물도 상당한데 강이 오염되거나 지구온난화 여파로 물줄기가 줄어들자 농부는 지하수를 끌어올려야 한다. 그러느라 소비되는 석유도 무시할 수 없는데 우리나 미국이나 농촌의 지하수맥은 점점 깊어진다.


제초제와 살충제의 피해가 확산되면서 녹색혁명은 생명공학에 권위를 넘기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옥수수의 30% 이상, 콩의 절반이 유전자조작(GMO)이다. 세계의 곡물창고를 자임하는 미국은 그 비중이 더욱 크다. GMO 씨앗 역시 기업에서 구입해야 한다. 경작에서 가공, 운송애서 저장에 이르는 과정마다 막대한 석유가 들어가야 하는 건 마찬가지다. 지역 단위의 종자회사에 구속되는 녹색혁명과 달리 GMO는 몇 개 안 되는 다국적기업에 세계의 농부와 소비자가 종속된다. 녹색혁명은 지역적 단작을 몰고왔지만 GMO 농작물은 세계가 동일하다. 농작물 고유의 유전적 다양성은 줄어들고 환경변화에 대한 적응력은 떨어진다.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농작물

 

우리나라에도 흔해빠질 정도로 수입하는 바나나는 시방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 튤립처럼 뿌리를 뜯어 심는 바나나는 여러해살이 풀이지만 사실상 세계가 한 그루를 심은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타고난 유전적 다양성이 거의 사라진 상태다. 그 바나나에 곰팡이가 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농작물을 빼곡하게 심으면 질병은 순식간에 퍼진다. 목적에 맞춰 극단적으로 육종한 닭이나 오리는 유전적으로 단순하다. 그런 가금에 조류독감이 쉽게 퍼지듯, 바나나 곰팡이도 무섭다. 전파를 막으려면 조류독감 바이러스가 검출된 축사 안전반경 이내의 닭과 오리를 살처분하듯, 넓은 농장을 한꺼번에 불태워야한다.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GMO 씨앗에 포함된 조작된 유전자는 엉뚱한 식물의 유전자를 오염시킨다. 다국적 농화학기업 몬산토가 독점 공급하는 GMO 중에 특정 제초제에 저항성을 갖는 씨앗이 있다. 몬산토가 독점 판매하는 라운드업’(Roundup, 한국 상품명은 근사미’)을 뿌려도 끄떡없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것인데, 콩과 유채 속의 조작 유전자가 옮겨가면서 잡초까지 끄떡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른바 수평이동이다. GMO를 개발할 때 몰랐던 독성이 생태계를 오염시키고 먹는 가축이나 사람에게 피해를 안기는 사례는 세계 곳곳에서 발생한다. GMO에 질병이 번진다면 대책 세우기 무척 어렵다. 생산량이 급감해 굶주림이 만연할 수 있다.


지구온난화에 이은 기상이변은 유전적 다양성을 상실한 농작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곡창지대의 가뭄으로 옥수수와 밀 생산량이 줄어들자 국제 곡물가격은 크게 치솟았다. 2010년과 2012년 발생한 러시아의 가뭄은 국제 밀 가격의 상승으로 이어져 아프리카 지역의 국가에 기아를 부추기고 말았다. 북중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이후 값싼 미국 옥수수가 멕시코로 밀려들어가자 원산지인 멕시코의 옥수수 농업이 붕괴되고 말았다. 자급 기반을 잃은 멕시코 민중은 미국 옥수수로 또띨라를 반죽할 수밖에 없었는데, 가뭄은 옥수수 가격을 끌어올렸다. 식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계층이 폭동을 일으켰지만 미국 기업의 세계무역기구 제소를 두려워하는 멕시코 정부는 진압 이외에 다른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바이오디젤로 가공해 챙기는 이익이 옥수수 수출보다 크자 다국적기업은 수출 물량을 줄였고 옥수수의 가격은 더욱 치솟았다. 옥수수를 사료와 식용유 재료로 수입하는 우리나라에 큰 영향은 없을까? 식용유와 사료 가격의 상승은 가계소비 위축을 넘어 가공식품과 축산업계의 위축으로 이어진다. 반도체와 자동차 수출로 아직 큰 문제가 없다지만 마냥 안심할 수 없다. 수출전선에 차질이 생기면 식량 부족 현상으로 바로 이어질 수 있다. 한두 기업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의 반도체와 자동차는 경쟁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정부는 노동쟁의를 가혹하게 억압한다.


구입할 돈이 충분해도 식량을 확보하지 못할 수 있다. 16세기 거대한 노천은광에서 큰돈을 벌어들인 볼리비아 포토시의 스페인 출신 귀족은 유럽에서 식량을 실은 배가 제때 접안하지 못하면 굶거나 쥐를 잡아먹어야 했다.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농작물은 환경변화에 약한데 지구온난화는 가뭄과 홍수가 느닷없이 곡창지대를 휩쓸게 한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수입할 식량이 없으면 예나 지금이나 굶주릴 수밖에 없다. 다국적기업에 식량의 4분의3을 의존하는 우리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석유로 돌아가는 농업, 다가오는 굶주림의 공포

 

예로부터 사흘 굶어 도둑질하지 않을 놈 없다고 했다. 식량은 부족하지 않아야 돈도 명예도 유지될 수 있다. 지급된 건빵을 병사에게 나눠주던 군종장교도 고된 훈련으로 배가 고프면 슬며시 숨긴다는 게 아닌가. 평화(平和)는 밥을 공평하게 먹는 일로 해석할 수 있다. 식량 자급률이 처참한 우리나라는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 기준으로 진정한 독립국이 아니다. 드골 대통령 취임 당시 80%였던 식량 자급률을 프랑스는 현재 200%에 육박할 정도로 끌어올렸다. 프랑스에서 농부는 존중된다. 덕분에 먹고 사는 시민들에게 고마운 존재인데 우리는 어떤가. 고마운 마음은커녕 미안해하지도 않는다.


석유농업이 확산되고 고기 소비가 비약적으로 늘어나는 중국도 식량 수입국가가 되었다. 수출하는 식량보다 수입량이 많아졌지만 자급할 농토는 아직은 충분하다. 그래도 자국의 농촌과 농민, 그리고 농업의 안정적 유지를 지원하는 관료와 지식인이 늘어나는데, 우리는 경각심조차 배양하지 못했다. 정부와 지식인들은 가족농이나 소농보다 시대착오적으로 기업형 농장을 지원할 따름이다. 귀농 인파가 늘어나는 현상과 관계없이 농부가 천대받는 분위기에서 농토는 점차 사라진다. 투기 목적으로 농토를 구입한 외지인은 개발 기회를 엿보지만, 주택이나 공업단지, 또는 연구시설로 농토를 대규모로 매립하는 정부에 비교하면 애교에 불과하다.


서울시의 인구 과밀화를 분산하기 위한 세종행정수도는 보호대상종인 금개구리가 분포하는 논밭을 넓게 매립했다. 충북 오송 생명과학연구단지와 오창 과학산업단지도 논밭이었다. 행정을 위하든 연구를 위하든, 특별시에서 논밭을 없앤 도시로 주소를 옮긴 시민들도 날마다 무언가 먹어야 한다. 아파트 숲으로 뒤바뀐 옛 김포평야에 입주한 시민들도 무언가 먹는다. 인천 아시안게임의 경기장은 하나같이 논밭을 깔고 앉았다. 오는 921일부터 보름동안 경기장에 모여들 아시아의 선수와 인원, 그리고 관중도 먹어야 하는데, 논밭을 매립한 우리는 무엇을 권해야하나.


나날이 과도해지는 화석연료 사용이 지구온난화를 심화시키는 요즘은 석유위기 시대다. 이제 석유가 고갈을 눈앞에 두고 있다. 뽑아올리기 위해 들어가는 에너지의 양이 늘어나면서 석유 가격이 치솟고, 가격 상승으로 석유 소비가 억제되어도 올라간 가격이 내려가지 않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석유로 짓는 농사는 머지않아 한계를 만날 수밖에 없다. 악몽의 전조는 벌써 시작되었으니 식량과 에너지 부족이라는 이중고가 지구촌을 엄습할 텐데 자식 키우는 우리는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하나.


굶주리는 국가의 곡창지대에 플랜트농업단지를 조성하는 행태는 지탄의 대상일 뿐, 전혀 정의롭지 않다. 막대한 석유를 소비해야 하는 플랜트농업은 전혀 지속가능하지 않다. 수확한 농작물의 저장과 운송 과정에서 막대한 석유가 낭비될 뿐 아니라 음식 쓰레기가 발생한다. 상당한 화학물질을 운송 도중인 농작물에 살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도시에 농사를 위한 빌딩을 짓고 LED 조명으로 수경재배하는 이른바 수직농장도 석유위기 시대에 대안이 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소비자와 거리가 가까운 만큼 농장주에 배타적인 이윤이 발생할지 모르지만, ‘로컬푸드로 분류할 수 없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가까운 거리에서 만나 얼굴을 마주하며 안전한 농작물을 거래하며 마을을 나눌 때 비로소 로컬푸드라 말할 수 있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아도 수직농장이 유기농업일 수 없다. 생산자와 소비자는 물론이고 생태계와 문화까지 두루 유기적으로 이어져야 유기농으로 인정할 수 있다.


어떻게든 내 땅에서 석유 소비를 줄이며 식량을 자급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농토를 더는 개발하지 않아야 하고, 개발된 농토를 경작지로 환원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그를 위해 정부는 인력을 양성하고 실행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모자라지 않은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는 식단을 다양하게 연구하고 널리 보급해 식탐과 낭비를 부추기는 말초적 식문화를 개선할 필요가 있다. 곡물사료 사육으로 얻는 육류의 소비를 줄이면 소비자와 환경이 크게 개선될 뿐 아니라 식량 자급률도 크게 높일 수 있다. 전통 가족농과 소농을 적극 지원하고 천혜의 갯벌을 보존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나라의 갯벌은 수많은 어패류의 서식지이자 산란장이고 지구온난화를 예방하며 태풍으로 인한 해일을 완충하지 않은가.


아무리 노력해도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을지 모른다. 많은 인구가 먹을 수 있는 유기농산물을 자급할 농토가 충분하지 않은 현실적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를 감안해 국가와 전문가, 그리고 시민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종합적이고 체계적이며 정의로운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사막화 확산으로 방목 위주인 전통 축산업에 위기를 맞은 몽골을 유기농업으로 지원하며 사막화를 방지하는 방법은 없을까? 몽골과 우리가 상생하며 만족할 대안을 함께 논의할 수 있으면 좋겠다.


춘궁기를 두려워하던 조상을 모시는 우리는 늦기 전에 배고픔을 모르는 자식과 행복하게 살아갈 내일을 준비해야 한다. 기억은 물론 상상조차 어려운 굶주림의 공포가 코앞으로 다가오기 전에 대안을 절박하게 모색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 (기쁨과희망, 20146월호)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2. 3. 20. 08:58

 

올해도 북극해가 완전히 얼지 않았는지 2월 하순의 냉기가 범상치 않다. 북극권 상층의 제트기류가 느슨해지면 냉기가 남쪽 위도로 내려간다던데, 한파가 엄습한 유럽에 사망자가 빈발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주로 가난한 계층일 텐데, 우리나라도 춥다. 그래서 그런가. 친지의 부고장이 하루가 멀다고 발송된다. 그래도 봄은 곧 시작된다. 둥근 지구는 무한하다는 우주에서 둥근 태양을 돌고 돈다. 언제나 그랬듯, 봄이 온다. 새 생명도 꽃피겠지.

 

봄은 언제 오는지 묻자 한 어린이가 눈이 녹으면이라고 말해 주위를 놀라게 했는데, 막바지 한파가 물러가면 응달의 잔설도 모두 녹을 것이다. 이제 산골의 비탈진 밭도 봄을 기다릴 텐데, 까치들이 짝을 짓고 작년에 사용한 둥지를 수선하는 계절이 다가오자, 근교의 밭마다 유기질 비료 부대들이 잔뜩 쌓였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머지않아 녹을 테니 봄비가 내리기 전에 밭고랑마다 거무튀튀한 비료를 뿌릴 것이다. 그때 근교의 개성 있는 식당을 찾은 식도락가는 유기질 비료 특유의 냄새에 잠시 코를 찡그릴지 모른다. 그래도 비료가 땅에 스며야 싱싱한 채소가 식탁에 오른다는 걸 잘 알기에 냄새를 크게 탓할 리 없다.

 

입춘이 지나 춘분이 다가오면서 대지는 봄을 기다린다. 태양의 입사각은 어느새 양지에 온기를 보내고, 근교 시멘트 포장길 옆의 흙에 파릇파릇 새순이 보인다. 호미를 든 아주머니들이 냉이와 쑥을 캘 날도 머지않았는데, 말리고 싶다. 비록 자동차가 빈번한 도심에서 떨어졌을지언정 먼지와 소음이 날아드는데, 냉이와 쑥인들 안전하겠나. 장일순 선생은 일찍이 좁쌀 한 알에 세상이 다 담겼다 일렀다. 근교의 길가를 파릇하게 장식하는 냉이와 쑥에 도시의 독이 스몄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가만, 밭 가장자리에 쌓아놓거나 고랑 가까이 늘어놓은 유기질 비료는 괜찮을까.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판매하는 유기질 비료인 만큼 눈에 띄는 문제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비료의 출처는 양해할만할까.

 

대구에서 유기농산물 직거래운동을 개척한 천규석 선생은 대규모 축산단지에서 배출돼 가공한 요즘의 유기질 비료를 불신한다. 미국산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사료로 먹인 가축의 배설물이라면 자연의 순환을 방해한 축산의 부산물이라는 이유로. 비록 석유를 직접 가공한 화학비료는 아닐지라도 엄격한 기준으로 따지자면 유기질이라고 판단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이 지나치게 엄격하다 힐난하는 이 없지 않지만, 수긍이 간다. 해마다 양을 늘리며 화학비료와 제초제와 살충제를 뿌리지 않으면 아예 경작이 불가능한 녹색혁명은 식량이 사람에게 전하는 자연의 순환을 저버리게 했다. 그런 농업은 부메랑이 되어 결국 사람에게 피해를 안겼는데, 유전자 조작 농산물은 녹색혁명의 폐해를 훨씬 능가한다. 지역적 단작이 녹색혁명이라면 유전자 조작은 다국적 기업에 의한 세계적 단작을 강요한다. 석유는 훨씬 더 들어가야 한다.

 

유기적이라는 의미를 생각해보라. 삼라만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붙일 수 있는 용어를 석유 마구 퍼부어야 생산과 가공이 가능한 미국산 가축사료에 선사할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런 사료는 국제 석유 가격이 오르는 한, 값이 상승할 수밖에 없다. ‘석유 정점’, 다시 말해 석유를 퍼올리는 양이 소비하는 양보다 줄어들면서 투기자본의 영향권에 놓인 석유 가격은 오를 수밖에 없다. 이제 젖소 송아지 수컷을 만원에 팔아넘기거나 굶겨 죽일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 우리 목장은 문을 닫거나 과거 꼴을 베거나 방죽의 풀로 끓인 쇠죽으로 한두 마리 유기적으로 키우던 시절로 돌아가야 할 텐데, 상경투쟁하는 모습을 보니, 그럴 의사는 없어 보인다. 대책을 세우겠다는 정부는 경쟁력 운운하며 규모를 더욱 키우려 드는데, 효과가 있든 없든, 그런 목장에서 발생하는 축산분뇨를 유기질 비료로 포장할 수 없다는 천규석 선생의 주장을 부정하기 어렵다.

 

근교 농촌에 쌓인 유기질 비료의 냄새로 보아 가축분뇨를 발효시켰을 것으로 능히 짐작하게 하는데, 가끔 음식물 쓰레기를 가공한 비료도 유기질로 포장된다. 그 비료는 천규석 선생이 인정할 만큼 유기적인가. 우리가 시방 먹는 음식의 정체를 알면 쉽게 판단이 갈 테지만, 역시 회의적이다. 한 사람이 평생 320킬로그램 먹는다는 첨가물과 색소는 과자를 먹는 아이에게 아토피를 안기게 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자연의 순환을 방해한다. 석유를 과소비해야 생산이 가능한 비닐하우스의 농작물들이 대형매장에 산더미처럼 쌓인 현실은 무엇을 반영하나. 게다가 요즘 농작물은 먼 거리를 달려 식탁에 오른다. 그 점에서 유기농산물 전문매장도 고심해야 한다. 수입하는 과일과 채소만이 아니다. 패스트푸드와 가공식품에 들어가는 재료까지 따진다면 지구를 몇 바퀴 돌았을지 모른다.

 

어떤 엄격한 이는 손수레로 옮기지 못할 거리에서 운송해온 농작물은 재배 방식과 관계없이 유기농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화려한 조명 아래 전시된 열대과일은 물론이고, 유럽과 미국에서 날아온 농작물과 가공식품도 마찬가지다. 유기농산물은 수출하는 순간 그 자격을 잃는다는 건데, 미국과 유럽하고 FTA를 체결했으니 우리는 유기농산물의 기준을 자본에 맡겨야 한단다. 이미 광고로 국내시장 진입을 선언한 외국의 유기농산물, 화학물질을 뿌리지 않았을 뿐 무거운 농기계를 사용하는 재배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석유를 소비했을 그 농산물이 도시의 식품매장에서 생활협동조합의 생존을 위협하더라도 저항하기 어렵다. 유권자의 지지로 선출된 대표든 의원이든,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투자자 정부 제소가 보장되지 않았던가. 자연의 순환을 방해하는 셈이다.

 

간혹 낙엽을 발효시킨 유기질 비료가 텃밭이나 화원에 등장하기도 한다. 그건 유기질인가. 모르긴 해도, 천규석 선생은 고개를 흔들 것 같다. 걸핏하면 벌레 낀다며 가로수와 공원에 살충제를 퍼붓지 않았나. 그런 곳에서 모은 낙엽을 가을 내내 발효시키려 해도 예전 같지 않다는 양묘장 관리원의 하소연, 들은 적 있다. 나무는 애벌레에게 뜯겨도 생장에 지장이 없을 만큼 잎사귀를 펼친다. 새들이 날아와 조절할 것이라는 걸 오랜 세월 잘 알고 있기 때문일 텐데, 살충제는 새들을 쫓아냈다. 새들이 풀과 나무의 씨앗을 떨어뜨려주지 않는 숲은 수명이 짧다. 가로수와 공원처럼 사람이 나무를 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뿐인가. 살충제에 금세 내성을 갖는 애벌레는 순식간에 공원과 가로수의 잎을 갉아낸다. 그래서 더욱 흥건한 농약 세례를 받은 낙엽이 자연 속에서 순환되기 쉽겠나.

 

참 어렵다. 순수성을 따지자면 유기질이라 판단할 비료는 드물거나 거의 없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는 일. 노력하면 유기질의 순수성 간격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다. 천규석 선생에게 양해를 구하자. 사람은 제 탐욕을 한순간에 버리지 못하므로 시간이 필요하다. 단순한 품종의 농작물을 거대하게 심어 큰돈을 벌어들이려는 탐욕은 자연의 순환을 거부해왔다. 순환을 잃자 땅은 황폐화되고 사람은 아토피로 고통스러우며 기후는 변화했다. 이대로 지속가능한 내일을 후손에게 물려줄 수 없다는 데 동의할 수밖에 없다면, 이제 복원을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하는데, 발은 머리보다 느리다. 의지 있는 자의 솔선수범과 설득이 농촌은 물론 도시까지 번져야 한다.

 

인천의 한 근교에서 본 유기질 비료에서 파생된 상념이 여기까지 왔다. 어떤 특별한 묘책이 있으랴. 자연의 순환에 순응하던 시절로 돌아가는 일이겠지. 서서히 공감대를 늘리면서. 농약과 화학비료에 찌들어 황폐화된 농토에 더는 화학농업을 지속할 수 없으니, 우선 유기농업을 고민하는 농부를 위해 대규모 축산단지에서 나온 분뇨를 가공한 비료라도 뿌려, 땅을 회복시킬 필요는 있겠다. 그만큼 땅에서 생산된 농작물은 유기적인 관계가 전보다 나아질 게 아닌가. 근교의 밭이 그렇다. 그 땅에서 재배한 농작물의 찌꺼기나 그 농산물을 조리한 음식의 쓰레기를 가공한 비료를 뿌린다면 이후의 유기적인 순수성은 더 좋아지겠지. 그 농작물을 먹은 시민도 건강해지겠지. 나아가 공원과 가로수에 곤충 애벌레가 생겨도 그냥 둔다면 새들이 날아와 처리할 테니, 농약이 묻지 않은 낙엽으로 만든 비료는 유기질이겠지.

 

3월은 영어로 마치(march). 시작한다는 의미다. 동창이 밝아 노고지리가 우지지는 봄이면 농부는 농구를 챙겨 들에 나가 한 해를 시작한다. 씨 뿌려 새싹이 돋으면 벌레가 끼겠지만, 마당에 닭과 개구리가 있다면 자연에서 모두 공존 가능할 정도로 처리할 것이다. 쥐불놀이로 벌레를 쫓아내던 우리 조상은 벌레의 씨는 남겨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벌레가 있어야 새도 개구리도 가까이 온다는 걸 잘 아는 까닭일 텐데, 순환이 보장되는 농토에 가을이 오면 사람도, 닭과 개구리도, 그리고 곤충도, 내년을 기약할 식량을 받을 것이다. 자연은 오랜 세월 그렇게 너그러웠다. 덕분에 도시에 사는 소비자도 건강했다.

 

자연의 순환을 독점하려고 농약을 퍼부으니 부메랑이 되었지만, 자연은 아직 순환한다. 너른 품을 가진 자연은 탕아에게 기댈 언덕을 여전히 제공한다. 유기질 비료를 쌓아둔 인천 근교의 농부와 그 농토에서 재배한 유기농산물을 사먹는 시민도 파릇파릇 새순을 무던히도 올리는 자연처럼 유기적 관계를 회복했으면 좋겠다. 곧 봄이다. (푸른생협, 20123월호)

 
 
 

서평·추억

디딤돌 2011. 1. 6. 10:47

, 데이비드 몽고메리 지음, 이수용 옮김, 삼천리, 2010.

 

 

 

멕시코시티에서 북동쪽으로 4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테오티우아칸. 그곳은 바퀴도 철기도 없었던 중남미에서 서기 원년 경 10만 인구 이상 번성했을 것으로 추정하는 광활한 역사 유적으로 현재에도 온전한 모습으로 발굴되는 멕시코 최대의 세계적 관광지로 각광받는 곳이다. 발굴되기 전까지 자그마치 83제곱킬로미터나 되는 면적에 고운 흙이 무덤처럼 덮여 있었는데, 그 흙이 언제 어떻게 쌓였는지 알려진 바 없다. 또한 왜 갑자기 10만의 인구가 유적을 온전히 남긴 채 홀연히 사라졌는지 추정하기 어려워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대개 농사지을 만한 흙이 사라진 데에서 그 원인을 찾고자 한다.

 

흔히 이스터라 하는 태평양의 고도 라파누이는 거대한 석상 모아이로 유명하다.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땅에서 헐벗고 굶주린 주민들이 어떻게 100톤에 이르는 석상을 수백 개나 깎아 재단에 올려놓은 것인가. 몰랐을 때는 불가사이라 했지만 지금은 그 전후 사정을 파악했다. 라파누이는 야자나무가 어떤 땅보다 울창하고 흙이 기름져 풍요로운 섬이었다. 재생 가능한 자원의 한계 내에서 농사를 짓고 카누를 깎으며 모아이를 만들었다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한계를 넘어 위기에 닥쳐오자 그들은 오히려 역행했다. 두 부족은 서로 모아이를 더 많이 세우려는 경쟁으로 치달았고, 결국 나무가 모두 베어지자 황폐해진 것이었다.

 

나무가 없어지자 흙이 사라진 게 가장 치명적이었다. 작은 돌로 덮으며 농사지을 흙을 남기려했지만 태평양의 거센 바람을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조상의 역사는 물론 언어까지 대부분 잃고 생존을 위해 식인을 일삼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석상을 올려놓을 수 있는 땅에도 흙이 없지 않았지만 지나친 개발은 경작 가능한 표층의 흙을 사라지게 했다. 흙이 사라져 발생한 재앙은 수백 년 전에만 있던 과거의 사례일 뿐이 아니다. 미국의 노벨상 수상자인 존 스타인벡이 1939년에 발표한 분노의 포도는 흙을 잃어버리고 쫓겨나는 대공항 시대 미국 오클라호마 출신 농부들의 이야기다. 20세기 초, 미국은 흙의 소중함을 이해하지 못했는데, 흙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지금은 잘 보전하고 있을까.

 

지형의 변화가 생태계와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미 워싱턴대학교의 데이비드 몽고메리 교수는 2007년에 발간한 자신의 책 에서 고개를 완강하게 젓는다.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이란 부재를 단 그 책을 빌려 이대로 가다가 우린 후손에게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 말 거라고 태산 같이 걱정한다. 그는 정신 차리고 흙을 보전하려 노력한다면 아직 희망이 남았다는 따위로 책의 결론을 맺지 않는다. 불과 몇 센티미터의 흙이 생성되는데 천년 이상이 필요한데, 우린 이미 재앙을 예약해놓았다는 거다. 세계의 정부와 농민과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고 최선의 보전 노력을 다한다 해도 세계 인구를 먹일 흙을 확보할 수 있을까 말까 한데, 흙으로 벽돌을 구워 파는 사람이 있다고 한탄한다. 그렇다 해도, “흙을 산업공정의 토대로 보지 말고 문명의 수명을 연장하는 살아 있는 생명의 토대로 여겨 달라.” 부탁하며 맺는 몽고메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한 경작지에 같은 농작물만 계속 심으면 지력이 떨어진다고 많은 농민들은 말한다. 그래서 객토한다면서 다른 곳의 흙을 가져온다. 그런데 가져온 흙이 무엇인가에 따라 경작지는 개선되거나 더 척박해질 수 있다. 학자들은 흙을 셋으로 나눈다. 흙의 기반이 되는 암석, 그 위에 암석이 풍화된 밑흙, 구리고 밑흙 위에 유기물을 포함하는 겉흙이 그것이다. 겉흙 중에 실제 농작물이 뿌리를 내리는 표층의 흙을 몽고메리는 O층이라 했는데, O층의 흙이야말로 먼저 뿌리내렸던 유기물이 쌓이고 쌓인 영양분 덩어리라고 설명한다. 그 흙이 보전되어야 우리는 문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19세기 프랑스의 문호 프랑수아르네 드 샤토브리앙은 문명 앞에 숲이 있고 문명 뒤에 사막이 남는다.”고 일찍이 말했다.

 

진화론으로 유명한 영국의 다윈은 지렁이들이 흙에 파묻히는 유기물을 먹으며 기름진 흙을 해마다 0.25에서 0.6센티미터 씩 밀어올리므로 에이커 당 10에서 20톤의 흙을 만들어낸다고 연구했는데, 미국 미시시피 강은 1초에 덤프트럭 한 대 분량의 겉흙을 카리브 해로 실어보낸다고 말한다. 이는 미국 모든 가정에 해마다 픽업트럭 한 대 씩 나누어줄 양이라는데, 세계적으로 최근 240억 톤의 겉흙이 침식돼 해마다 사라진다고 서글퍼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사람이 농사를 짓기 시작한 대략 11000년 전부터 침식은 있었다.

 

수렵채취에서 농경사회로 접어들면서 정착을 선택한 인류는 재배한 식량 이외에 따로 먹을 게 거의 없어졌고, 따라서 농사는 생존을 위한 필수 행동이 되었다. 그런데 한 번의 추수로 한해를 견뎌야 하는 조상이지만 갈무리 때 생기는 잉어 덕택에 인구를 조금씩 늘렸고, 늘어나는 인구만큼 경작에 대한 압박은 거셀 수밖에 없었다. 관개농업을 구상해 한숨 돌렸지만 그것도 잠시, 거듭되는 관개는 소금기를 흙에 올라가게 하면서 수확량이 감소하니 늘어난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면 마을을 버릴 수밖에. 샤토브리앙은 멕시코의 테오티우아칸을 염두에 두지 않았겠지만, 우리가 아는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문명을 위시로 대부분의 문명 뒷자리는 결국 사막으로 버림받았다.

 

쟁기가 발명되면서 경작 면적은 더욱 확대돼 나무로 뒤덮은 산기슭을 파헤치기에 이르렀고 인구는 그만큼 더 늘었지만 흙은 무자비하게 빗물에 쓸려내려가고 말았다. 그러자 빗물을 막아보자고 강 양안에 제방을 쌓고 강줄기를 댐으로 막았더니 그만, 흙이 저수지 바닥에 퇴적돼 사용할 수 없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그친 게 아니었다. 강바닥의 높이가 점점 상승하는 게 아닌가. 중국 황하의 경우, 현재 많은 도시와 마을이 수면 수십 미터 아래 위태롭게 놓여 있는 실정이다.

 

물 수십억 톤을 모으는 대형 댐이 거대한 강을 틀어막는 요즘은 사정이 어떨까. 저수지 물을 도수관으로 흘려보내는 지역은 잠시 수확량이 늘어 인구 증가를 허용하지만 지나친 관개는 머지않아 흙에 소금이 베어들게 할 것이다. 까마득히 오래 전부터 상류에서 퇴적된 흙 속의 유기물로 풍요를 구가하던 지역은 댐이 완공되는 순간 버림받는다. 아스완 댐 완성 이후 퇴적되는 흙을 잃은 나일 강 삼각주가 오늘날 그렇다. 퇴적물이 지나치게 쌓이면 댐은 기능을 잃는다. 흙을 지키려면 강을 지키고, 강을 지키려면 산을 지켜야 하건만, 요즘 우리나 미국이나 전 세계 어디나, 그 반대로 가기만 한다.

 

가축이 끄는 쇠 쟁기가 깊은 곳의 유기물까지 쉬지 않고 뒤집으면서 겉흙이 쓸모없게 버림받자 일군의 과학자들은 녹색혁명이라는 기치로 화학농업을 도입했다. 하지만 화학농업은 얼마 가지 않아 흙에 독약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도 지금 많은 농경지는 그 독약이 없으면 농사를 포기해야 한다. 대부분의 문명국가들이 그렇지만 세계의 식량창고라 일컫는 미국이 특히 그렇다. 녹색혁명 초기, 농작물이 생각보다 훨씬 많이 재배되자 성급하게 환호했지만 화학비료가 없이 자라지 않는 다수확품종은 금세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이제 증산은커녕 감산을 면하기 위해 화학비료를 듬뿍 뿌려야 한다. 석유를 가공하여 만드는 살충제와 제초제도 여러 차례 뿌리지 않을 수 없다.

 

녹색혁명의 어파로 흙에 남으려던 가족농과 소농이 수입을 잃고 땅을 떠나자 그 땅마저 차지한 산업농은 석유를 펑펑 소비하는 무거운 경운기와 탈곡기와 콤바인을 사용해 땅을 꾹꾹 누르며 경작하지만, 흙이 유실된 상태에서 언제까지 소기의 수확이 가능할지, 몽고메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다. 석유 위기가 예고되는 상황에서 그와 같은 석유 농업을 계속 고집한다면 머지않아 인류에 큰 재앙이 닥친다고 걱정하는 거다. 유전자 조작이라는 생명공학이 해결책을 모색해줄까. ‘아서라!’고 손을 흔드는 의 저자는 생명공학을 화학농업의 선구자인 녹색혁명의 연장선으로 본다. 흙의 가치를 근본에서 말살하는, 아니 오히려 훨씬 위험천만한 방법이므로.

 

흙이 사라지자 서구문명은 식량을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의 흙을 착취해 자신의 문명 규모를 더욱 키웠지만 이내 더욱 큰 한계에 부딪혔고, 아프리카와 중남미에 들어가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흙을 착취했어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서구 문명의 규모는 감당할 수 없이 막대해졌다. 그러자 비로소 위기를 느낀 걸까, 신선한 농작물을 저렴하게 공급하기 어려운 도시에 고층의 수직 농장 빌딩을 지어 수경재배하자고 벼르는 이가 생겼다. 하지만 몽고메리는 그 알량한 효과는 한시적일 따름이라고 못 박는다. 초기 건설자본 이외에 누가 이익을 챙길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절박한 사정의 흙을 보전할 대안은 무엇이어야 할까. 몽고메리의 생각은 쿠바와 같은 도시농업이다. 자투리땅에 퇴비를 사용하는 유기농업으로 이웃과 자급하는 농업이다. 거기에 가축과 사람의 배설물을 사용하면서 흙에 유기물을 끊임없이 공급하는 행동이다. 덩치가 큰 산업농은 대안을 실천하기 부적당하다. 흙을 먼저 생각하는 소농이나 가족농이어야 한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쳐 미국 독립혁명의 아버지라 칭송받는 패트릭 헨리는 가장 위대한 애국자는 흙의 침식을 가장 많이 막아낸 사람이라 했다고 몽고메리는 덧붙이면서 세계의 농부, 정부, 전문가들이 모두 힘을 모아 흙을 살리는 소농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행동하는 것 이외의 대안은 없다고 강조한다. 탐욕으로 사라지게 만든 흙을 생존을 위한 책임감으로 되살려내지 않으면 내일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지금 그의 목소리를 귀담아 듣는 이 누구일까. 기상이변은 세계 곳곳에서 해마다 심해지기만 하는데. (사이언스타임즈, 201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