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2. 9. 11. 16:54

     죽어 가는 봄을 살려낸 환경고전

침묵의 봄, 레이첼 카슨 지음. 김은령 옮김, 에코리브르, 2011

 

 

1998, 미국의 한 유력 일간지는 특집 면을 기획, 미국의 봄은 여전히 새소리와 함께 열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심각한 농약 중독으로 봄이 와도 새가 울지 않을 것으로 예견했던 레이첼 카슨의 1962침묵의 봄주장이 틀렸다고 선언하려는 의도일 리 없었다. 일찍이 레이첼 카슨의 경고가 없었다면, 미국의 봄은 진작부터 침묵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며, 레이첼 카슨 서거 30주년을 기념하여 카슨 여사와 그의 기념비적 환경도서의 고전, 침묵의 봄을 기리고자 하는 특집이었다.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을 집필하고 한 세대가 지난 1990년대 초, 강원도 미시령을 빠져나와 속초로 이어지는 신평리 벌판에서 세계 잼버리 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회가 무르익을 무렵, 수려한 생태계로 자랑스러운 우리의 설악산 기슭에서 야생조류를 관찰하는 날이 다가오자, 우리의 대회 담당자는 참가자들이 행여 모기 물릴세라 비행기로 농약을 뿌리는 친절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 날, 만 명이 넘었을 탐조인원 중, 살아 숨 쉬며 노래하는 한국의 아름다운 새를 관찰한 참가자는 아무도 없었다. 다만, 죽어 나자빠진 곤충들은 진저리나도록 보아야만 했다.


이차대전 중, 인마 살상용으로 생산했던 화학무기 재료가 종전 이후 창고에 넘치자, ‘탱크를 보습으로!’ 라는 기치를 가장한 군산복합체에 의해 재고처리용으로 개발되었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농약은, 농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고 말았다. 한 지역에서 단순한 품종을 대규모로 심어 곳곳으로 분배하는 이른바 중앙 집중적 생산력주의는 농약이 없으면 농작물의 생장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든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세계는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와 매장량이 한정된 자원을 더욱 과다하게 소비하며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를 부추기기 시작했고, 농촌도 거기에서 결코 예외일 수 없었다. 가족을 위해, 이웃과 나누어 먹기 위해 농사지을 적에 필요하지 않았던 농약이었지만, 산업사회를 위해 농촌을 소외하면서 불가피해졌다. 농민을 도시 노동자로 끌어내기 위해 강력하게 펼친 농작물 저가 정책은 농촌을 공동화하게 유도했고, 일손을 잃은 농촌은 먹고 살기 위해 도시의 식민지가 되었다. 농작물을 싼 가격으로 공급하기 위해 몇 가지 안 되는 농작물을 넓은 면적에 다량으로 심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농촌은 김매고 벌레 쫓아내는 일은 약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구조화되었다.


당초 기대했던 바와 크게 다르게 농약은 잡초와 해충들만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었다. 파라치온이 담겨 있던 가방을 만졌다는 이유만으로 두 명의 어린이가 죽고 분무기 노즐과 농약 탱크 뚜껑을 잡았던 사람이 며칠 만에 죽는, 눈에 드러나는 사건만이 아니었다. 생태계 저변을 치명적으로 교란한 농약이 먹이사슬을 따라 최고 수 백만 배 농축되는 현상으로 전혀 예측할 수 없었던 피해가 속출하고 말았다. 단일 작목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농부는 달려드는 벌레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살충제를 뿌렸고, 살충제를 맞고 떨어진 곤충을 닭이 쪼아 먹자 닭들이 다리를 쭉 뻗고 죽어 가는 게 아닌가. 상품가치를 잃은 닭을 아깝다고 삶아먹은 농부의 운명은 그가 죽인 해충이나 닭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1960년대 초, 농업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인 녹색혁명으로 농약사용량은 더욱 늘어나고, 농약사용량이 늘어나는 만큼 사세가 확장 탄탄대로를 만끽할 수 있었던 미국의 농약 제조회사들은, 시민들이 침묵의 봄을 읽기 시작하면서 농약 살포하는 양이 곤두박질치는 양상을 목도하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의 농약회사들은 거의 망하지 않았다. 세계적 농약 사용량은 오히려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여, 침묵의 봄이후 50만 배에 달하고 있다. 판로가 막힌 농약회사들은 다국적기업으로 화려하게 변신, 한국을 비롯한 신흥공업국에 팔아먹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한국은 OECD 평균 6배 이상의 농약을 살포하는 실적을 올린다. 이웃보다 더 뿌려야 안심하는 조바심은 이미 부메랑이 되었다.


레이첼 카슨 시절, 해마다 500종류에 달했던 신개발 화학제품이 40여 년이 지난 요즘, 수천 가지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확증할 수 있는 인체 안전성은 요원한 마당이다. 인체를 대상으로 연구한 개개 제품의 안전성도 얼마 안가 부정되는 처지에 생태계 안전성은 거론조차 하기 어렵고, 화학제품 사이의 영향력 상승관계는 파악이 전혀 불가능한 실정이다. 개발회사에서 제출한 자료에 의존한 안전성 평가만을 믿고 광범위하게 남용한 이후 부지불식간에 발생된 인체와 생태계의 위험사례는 어디 한 두 가지인가. 하지만 제철 제 고장 농작물을 질식사시킨 농촌에 화려하게 등극한 국제 비교우위 신자유주의 농업구조는 단순한 농약중독 시대를 넘어 유전자 조작된 돌연변이 농작물의 범세계적 단작 시대로 우리들을 밀어 넣고 있다. 지구촌 70억의 인구는 몇 안 되는 다국적기업의 손아귀에 거의 장악되었다.


수도권에서 가장 울창한 극상림을 간직하고 있는 전등사 숲을 거닐 적이다. 동행하던 미국 환경운동가가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채곤 의아해 한다. 새뿐인가. 개구리 소리 거의 들리지 않는다. 농촌에 아기 울음소리도 멈췄다. 레이첼 카슨이 침묵의 봄을 경고한지 한 세대가 지나, 반성한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고요해지고 만 것이다.


     더 늦지 전에 우리도 내 강산이 침묵에 휩싸인다는 사실을 어서 인식해야 한다. 농약뿐이 아니라 광우병과 구제역, 그리고 수많은 독성 첨가물과 함께 돌연변이 농산물까지 범람하는 이때, 우리는 침묵의 봄을 읽어야 할 필요가 충분하다. 침묵의 봄이 출간된 이래 여전히 미국을 움직인 20권의 책가운데 한 권으로 자리 잡고 있는 환경서적의 고전 침묵의 봄의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니, 2012.9.11.)

 
 
 

도시·인천

디딤돌 2010. 8. 7. 02:53

 

지금은 새벽 한시. 먼동 틀 무렵부터 선잠을 깨웠던 아파트 단지의 매미 몇 마리가 여태 울어 젖힌다. 저 녀석들은 잠도 없나. 매미는 보통 날이 훤할 때 운다고 들었는데, 요즘 도시의 매미는 시도 때도 없는 모양이다. 가로등이나 현관 불이 훤해도 목이 터져라 운다. 아파트 단지의 어떤 이웃은 매미 울음소리가 시끄럽다고 민원을 띄우고, 방학을 맞은 초등학생들은 플라스틱 채집통으로 하나 매미들을 잡고도 잠자리채를 놓지 않는데, 숨을 턱턱 막히게 하던 한낮의 더위는 열대야를 며칠 째 연장시킨다.

 

아파트 단지의 매미는 정확히 9시 종합뉴스의 기상캐스터가 마지막 장마전선이 북쪽으로 올라갔다던 날의 아침부터 울기 시작했다. 장마전선은 대만 아래까지 내려간 뒤 흐지부지 사라지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올라가더니 함흥차사다. 그걸 매미는 진작 알았나보다. 장마철에 침묵을 지키던, 아니 땅 속에서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던 매미가 일제히 나무로 올라와 단단한 껍질을 벗고 드디어 우렁찬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장마가 끝났다고 아우성이다. 땅 속에서 나무뿌리나 등걸을 파먹으며 서너 해 이상 기다리더니 이제 제 세상을 선언하기 시작한 거다.

 

열대야에 지쳐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든 아파트 단지의 도시인들은 매미가 원망스러울지 모른다. 겨우 잠이 들었나 싶은데 귓전에서 얼마나 우렁차게 울어 젖히는지, 도저히 깊은 잠을 이룰 수 없지 않은가. 약이 오른 마음은 민원을 띄워 아파트 단지의 알량한 나무들을 베어내 수종갱신까지 재촉했는데, 웬걸. 매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올해도 그 자리에서 우렁차기만 하다. 작년에 자른 나무 등걸을 보니 커다란 구멍이 숭숭 뚫렸던데, 녹지가 휑할 정도로 베어냈건만, 저 녀석들은 어디에서 나타난 걸까. 모질기도 하다.

 

사람들은 사실 매미 소리로 여름을 맞는다. 산들바람이 부는 그늘에서 매미 소리를 들으면 무덥던 여름이 시원해진다고 말한다. 전에 들었던 매미 소리는 사실 그리 시끄럽지 않았다. 아니, 아무리 시끄럽다 한들, 아스팔트에서 파열음을 내는 자동차 바퀴만 하랴. 자동차 소음은 사시사철 잘도 참아내면서 길어야 고작 한 달? 그 짧은 시간 안에 제 짝을 찾으려 목이 터져라 단조로운 가락을 반복하는 매미를 탓할까. 시끄럽다고 겉보기 멀쩡한 나무까지 자르다니. 도시의 인간들, 참 야박하기도 하다.

 

애벌레인 굼벵이 시절이 훨씬 긴 매미는 오로지 번식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운다. 매미는 자신의 일생 대부분을 어둡고 침침한 땅 속에서 보내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괜히 그 처지를 안타까워할 필요는 없다. 매미에게 그 시절이 가장 행복할지 모른다. 학원도 다니지 않고 꾸물꾸물 자랐을 테니. 그 꿈같은 시간이 지나 한 보름 동안 밝은 세상으로 나오니 자동차 소음으로 시끄러울 뿐 아니라 공기도 더럽다. 그 뿐이 아니다. 어렵사리 짝을 만나도 도무지 알을 낳을 틈이 없다. 나무 옆구리에 앉아 날개를 비비며 열심히 우느라 잠시 긴장을 놓았을 때 잠자리채로 잡아들이는 어린 인간들 때문이 아니다. 알 낳을 만한 나무가 점점 줄어들지 않은가.

 

베란다의 방충망까지 붙잡고 날개를 비비는 매미는 왜 하필 녹지가 태부족한 아파트 단지에 많은 걸까. 아닐 수 있다. 사실 아파트 단지보다 교외나 숲속에 더 많을지 모르지만 거긴 다른 생물들도 많다. 매미처럼 우는 곤충이 더 있고 봄부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새들도 많다. 그러므로 매미 소리가 도시보다 크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나무가 도시보다 훨씬 많다. 알을 여기저기 흩어서 낳았으니 여름철 숲에서 우는 매미 소리는 도시보다 드물 수밖에. 한데 시골의 매미는 그리 시끄럽지 않은 것 같다. 왜 그럴까. 혹시 시끄러운 자동차보다 더 크게 울어야 짝을 찾을 수 있으니 그런 거 아닐까. 우리도 전화 속의 목소리가 작으면 고래고래 소리 지르지 않던가. 상대는 잘 듣고 있는지 모르면서.

 

복중의 아파트 단지에 매미가 시끄러운 건 어쩌면 농약 때문일 수 있다. 매미보다 나비와 나방 애벌레 때문에 이른 여름부터 나무 잎사귀에 진득한 농약을 흥건하게 뿌렸다. 농약 냄새가 나서 산책하기 싫어질 정도로. 그건 독약이다. 작은 애벌레는 바로 죽어 떨어지지만 사람에게 좋을 까닭이 없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에게는 훨씬 나쁠 게 뻔하다. 한데 아파트 단지의 녹지마다 집요하게 뿌려댄다. 애벌레 몇 마리 기어 다닌다고 질병이 도는 것도 아닌데, 애벌레가 있어야 나비도 나방도 생기고, 그래야 새들이 찾아와 교교한 노래를 부를 수 있는데, 알량한 녹지에 모여드는 사람들도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질 텐데.

 

도시의 녹지에 악착같이 뿌려대는 농약은 매미의 천적을 몰아냈다. 나무줄기를 쪼는 딱따구리도 땅 속에서 헤집고 다니다 굼벵이 잡아먹는 두더지와 땃쥐도 자취를 감췄다. 무더위가 꺾이는 저녁 무렵에 귀뚜라미가 나타나기 전까지, 여름 한 철의 밝은 대낮을 풍미하는 매미는 거의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며 질세라 사랑의 세레나데만 부르다 녹지의 나무껍질 안에 수백 개의 알을 낳은 뒤 죽어가지만 나뭇결의 영양분을 먹는 굼벵이는 농약 세례를 피하며 세월을 기다린다. 천적이 사라진 도시의 여름 녹지에서 제철을 만난 매미들은 많은데 밤에도 불이 훤하니 어쩌겠는가. 목이 터져라 경쟁적으로 울 수밖에. 그러지 않으면 짝을 찾지 못하지 않겠나. 우리는 매미가 시끄럽다고 탓할 하등의 자격이 없다.

 

아파트 단지의 매미가 시끄럽다고 이 더위에 짜증내지 말자. 저 자동차 소음보다 낫지 않은가. 그래도 도저히 시끄러워 견딜 수 없고 시골로 이사 갈 형편이 되지 않는다면, 도시의 녹지에 자연의 이웃을 끌어들이자. 독한 농약을 아무 때나 치지 않는 건 물론이고 외곽의 숲에서 아파트 단지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녹지축을 연결하는 거다. 딱따구리와 같은 새들은 물론이고 두더지와 땃쥐도 와 줄 수 있도록 배려하면 더욱 좋겠다. 농약을 치지 않으면 어이들 아토피도 그만큼 줄어들 테고, 정서도 메마르지 않을 것이다. 또한 되도록 자동차를 집에 두고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아예 걷는다면 매미는 그렇게 시끄럽게 울지 않으려 할지 모르다.

 

매미도 밤에 울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저 먼동 틀 때 다른 매미보다 먼저 울고 싶을지 모른다. 새벽에 우는 매미, 열대야에 잠 못 든 우리에게 아침 안부인사 하는 것으로 생각하자. 귀뚜라미가 바통을 이어받을 때까지. 불쾌지수 높아 우릴 짜증스럽게 하는 이 더위도 곧 물러난다. 그나마 매미라도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렇게 녹지를 허물어 아파트 단지를 짓고, 거기에 농약을 마구 뿌려대는 도시에. (인천in, 2010.8.9)

 
 
 

생태계·동물

디딤돌 2009. 5. 30. 15:44

 

산딸기가 빨갛게 익어가는 7월. 수도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인적 드문 산기슭에 앉아 땀을 식히려는데 계곡 가장가리의 키 작은 나무 사이에서 작디작은 대나무 가지 하나가 바람결에 살랑살랑 흔들린다. 조릿대가 밀고 올라온 건가. 큰 나뭇가지 사이로 햇살이 부서져내리는 숲의 한쪽 사면을 빼곡히 채우는 조릿대는 계곡 가장자리의 응달에 여간해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데, 이상한 일이다. 다시 눈을 돌리니 대나무 가지가 안 보인다.

 

충청도에서 강원도 강릉으로 이어지는 대나무 북방한계선은 지구가 더워지면서 벌써 올라갔을 것이니 수도권에도 조릿대가 무성할 수 있을 텐데, 앙증맞은 대나무는 산들바람에도 나무 뒤로 밀려난 건가. 가만, 이번엔 나뭇잎 뒤에서 그 대나무 가지가 머뭇거린다. 앞으로 갈까 말까 머뭇거리며 눈치를 살핀다. 그랬다. 그 여린 대나무 가지는 분명히 머뭇거렸다. 대나무 가지가 아니라 대벌레인 거였다. 비로소 주위를 둘러보니 나뭇잎 뒤에서 머뭇거리는 녀석이 한두 마리가 아니다. 산딸기가 더없이 탐스러운 작은 계곡은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을 뒤따르는 대벌레들이 이른 여름을 만끽하고 있었다.

 

대벌레는 영어로 워킹스틱(walkingstick)이다. ‘걸어 다니는 막대기’라, 그럴싸하다. 대나무처럼 변장한 대벌레는 새와 같은 천적에게 발각되면 마디가 도드라지는 몸을 바람에 흔들리듯 앞뒤로 머뭇거리고 도마뱀과 같은 천적이 다가오면 지나가 사라질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버틴다. 어쩌다 천적에게 발이 잡히면 잽싸게 떼놓고 줄행랑을 치는데, 가늘지만 말랑말랑한 대나무 줄기를 물었다 아차 싶은 천적은 잠시 허탈해도 어쩔 수 없을 터. 대벌레는 실 같은 대나무 다리를 금방 재생해낼 것이다.

 

곤충의 변장술은 유별나다. 돌출한 작은 나뭇가지인 양, 가지를 한쪽 발로 단단히 부여잡고 꼼짝 않는 자벌레를 비롯해 낙엽을 닮은 날개를 가진 네발나비, 알에서 갓 깨어났을 때 새똥으로 위장하다 나비로 변하기 직전이면 부릅뜬 눈 무늬를 꼬리에 드러내는 호랑나비 애벌레도 변장술로 자신을 보호한다. 한자로 죽절충(竹節蟲)이라 칭하는 대벌레는 날아가는 것보다 효과가 좋았던지 날개는 퇴화돼 사라졌고, 가는 대나무 다리에 얹은 10센티미터 불과한 녹색이나 황갈색 몸은 산들바람에도 갈듯 말듯 흔들린다.

 

낙엽이나 부드러운 흙에서 알로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에 작은 성체로 깨어나는 대벌레는 불완전변태를 한다. 투명한 연녹색을 띈 어린 대벌레는 새순이나 잎을 갉아먹으며 무럭무럭 자라 여름이 완연해지면서 성체가 되는데 늦은 가을까지 조릿대 주변에 서성이며 주변 활엽수의 잎사귀를 지분거리다 낙엽이 깔린 흙에 700개 가까운 알을 무더기로 낳고 죽는다. 그런데, 어쩌다 조건이 좋아 무리지어 깨어난 대벌레들이 산림을 좀 축내는 모양이다. 사람들은 산림을 황폐화시키는 주범이라고 난리다. 하지만 그건 대벌레의 탓이 아니다. 하도 많은 농약을 뿌려 산림을 단조롭게 망쳐놓는 건 누군가.

 

사실 숲 속의 다채로운 활엽수들은 대벌레를 비롯한 수많은 곤충과 애벌레들에 뜯기고 뜯겨도 견뎌낼 만큼 충분한 잎사귀를 매달았고, 나무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는 도마뱀이나 새들은 대벌레와 애벌레들이 무작정 늘어나지 못하도록 솎아주었다. 어디 그뿐이랴. 낙엽 속의 톡톡이들이 대벌레의 알을 가만 두지 않았을 터. 눈이 밝지 않으면 여간해서 보이지 않던 게 대벌레였건만 농약은 대벌레의 천적을 숲에서 일거에 사라지게 만들었고, 숲 여기저기를 파헤치던 사람이 감나무나 밤나무를 양팔간격으로 심거나 땅을 갈아엎어 한 가지 농작물을 바투 심었다. 보드라운 게 영양도 그만인 농작물을 굳이 마다할 리 없는 대벌레는 덕분에 전에 없이 수가 늘었을 따름이다.

 

대벌레가 많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만이 농약을 뿌리는 건 아니다. 솔잎혹파리나 재선충을 방제하려는 공무원들이 비행기로 농약을 뿌리지만 온갖 생물이 다채롭게 보전되어야 하는 국립공원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다. 1990년대 후반, 천적이 뜸한 국립공원에서 무럭무럭 자란 대벌레가 하계생태조사에 나선 대학원생의 눈에 띄어 모처럼 흔쾌히 생태 모델이 되어주려는 찰나였다. 느닷없이 적막을 깨는 모터 소음과 함께 안개처럼 분무되는 농약이 등산로 인근의 숲을 맹렬하게 집어삼키는 게 아닌가. 놀란 대학원생은 카메라 방향을 농약 분무차량으로 바꿨고, 대학원생의 서슴없는 카메라에 놀란 인부는 드잡이가 통하지 않자 양식장 주인을 냉큼 불러왔다.

 

공원 당국에 겨우 허가를 받아 “송어회를 드시는 손님들 모기 물릴세라 농약을 뿌리는 게” 잘못되었냐며 펄펄뛰는 무지개송어 양식장 주인은 필름을 내놓으라며 근육질의 몸을 함부로 드러내는 게 아닌가. 국립공원에 그것도 미국산 송어를 상업용으로 양식해도 무방한 것인지 단호하게 묻던 대학원생은 협박에 굴하지 않았는데, 그날 저녁, 양식장 주인은 물론이고 국립공원 책임자까지 대학원생의 지도교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이번만 봐달라면서. 이후 그 국립공원에 대벌레가 늘었는지 줄었는지 다시 찾을 기회가 없어 알지 못한다.

 

2000년대 들어 강원도와 충청도 일원의 숲에 대벌레가 크게 발생하는 기현상이 발생한다고 관련학자들은 전한다. 정확한 원인은 구체적으로 연구하지 못했지만, 이미 몇 차례 아열대성 산림병해충이 늘어났던 사례를 비추어 지구온난화로 겨울철 온도와 습도가 높아지면서 부화 성공률이 높아진 걸 그 원인으로 짐작한다. 다행인 것은 대벌레의 급증이 아직 부정기적 현상이라는 점인데, 온난화 진전으로 산림 황폐화가 내륙으로 번져나갈지 전문가는 걱정한다. 온대지방에 아열대곤충이 늘어나는 현상의 원인을 단순히 지구온난화로 돌릴 수는 없다. 우리 산림에 천적까지 유입되지 못했기 때문일 테지만 그에 앞서 균형이 깨긴 생태 공간에 천적이 없는 곤충이 먼저 자리를 잡은 까닭으로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결국은 사람이 문제를 일으킨 셈이다.

 

대벌레는 여전히 머뭇거리는데 사람은 자신의 터전을 파괴하는데 더없이 과감하다. 천적 없는 세상이 반드시 안전할까. 천적을 모조리 없애는 사람은 그렇다고 답하겠지만 아열대 경쟁자를 맞이할 대벌레는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 같다. (전원생활, 2009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