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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딤돌 2009. 9. 19. 16:30

 

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들은 한결같이 넓은 공원을 자랑한다. 도심 한가운데 몇 시간을 걸어야 끝이 나오는 숲을 조성하는가 하면 동네 어귀에도 푸른 녹지를 펼친다. 낡은 건물을 헐어낸 자리에 더 크고 화려한 건물을 올리기보다 나무를 심는 걸 당연하게 여기고, 새로운 주택단지를 만들 때에도 녹지부터 확보한 뒤에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낮은 건물을 배치한다. 그 결과 자기가 사는 지역에서 주말을 보내는 주민이 전에 없이 늘었다고 한다. 주변에 녹색의 자연이 충만해 있으면 있을수록 사람들은 머물러 있으려 한다는 것이다. 도시생태학자들은 나무로 울창한 녹지가 도시 면적의 30퍼센트보다 낮으면 시민들은 자연을 찾아 멀리 나가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주장한다.

 

도시의 녹지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에 쏟아진 뒤 낮은 곳으로 거세게 흐르는 빗물을 완충한다. 그를 위해 넓은 호수를 녹지 안에 만들어 물고기를 풀어놓자 도시는 새들이 날아드는 생태공간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런 녹지는 찾아오는 시민에게 자연스런 휴식공간을, 학생들에게 교육장소를 제공한다. 어려서부터 호수를 품고 있는 녹지에서 뛰어놓았던 시민들은 도시 속에서 고향을 느끼니 상급학교 진학이나 취직을 위해 잠시 떠나더라도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귀소본능을 가진 동물에게 아주 자연스런 현상일 테지. 유서 깊은 도시일수록 도시의 완성을 녹지에서 찾는다. 역사 유물도 자랑스럽지만 그건 조상이 물려준 거다. 오늘은 물론, 내일을 살아가야 하는 후손도 자신의 삶에 뿌리가 내리는 도시를 가져야 한다. 그렇다면 도시의 진면목을 녹지에서 찾아야한다고 그들은 믿기 때문이리라.

 

유럽 도시도 강을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도심 공원의 호수와 이어지는 강은 주변에 주말농장을 펼쳐놓는 경우가 많다. 우리말로 ‘작은 정원’으로 해석할 수 있는 독일의 ‘클라인가르텐’은 지방정부에서 중산층 시민에게 텃밭이나 정원으로 장기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임대해주는 땅을 말한다. 주말을 맞은 가족이 나무와 꽃을 심고 가꾸는 휴식 공간이거나 농작물을 재배하는 텃밭이 되는 클라인가르텐은 평상시에는 도시의 열기를 식히는 녹지가 되고 유사시에는 시민들의 소중한 식량 공급기지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100평방미터 면적에서 재배하는 채소는 가족에게 건강한 먹을거리를 짬짜미 제공할 뿐 아니라 수확의 기쁨과 더불어 가족의 유대를 돈독하게 한다.

 

이름은 다르지만 독일의 클라인가르텐과 같은 시민의 텃밭은 유럽 대부분 국가의 도시마다 있고 미국과 일본의 도시들에도 흔하다. 지방정부가 시민에게 분양하는 점도 거의 같다. 종교단체나 환경단체에서 근교의 자투리농지를 부정기적으로 임대해 운영하는 텃밭이 우리나라에도 더러 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고, 지방정부에서 제공하는 텃밭은 찾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도심의 상가는 물론이고 주거 공간인 아파트단지도 빌딩이다. 삭막한 도시에 종일 생활하는 시민들은 주말이면 녹지를 찾아 멀리 떠나고 싶다. 어떤 이는 자동차로 서너 시간 이상 달려야 도달하는 시골에 밭을 마련해 주말이면 집을 비운다. 자연과 고향에 대한 갈증이 그만큼 깊기 때문일 텐데, 아이들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잠시라도 도시를 떠나지 못한 아이들은 고향의 정취라는 걸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단일 품종의 농작물을 획일적으로 심는 기업형 농장이라면 고향의 정서와 무관할 것이다. 집이나 마을에서 가족과 이웃이 작은 밭을 함께 일궈 어느 정도 자급을 꾀할 수 있다면 모를까, 끊임없는 노동만이 강요된다면 비록 시골에 살아도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녹지를 찾아 떠나고 싶을 것 같다. 미국 자본이 지배하는 중남미의 바나나나 파인애플과 같은 대규모 플랜트 농업단지들이 그럴 테고, 들판 가득 담배와 사탕수수를 심었던 쿠바가 한때 그랬을 거다. 미국 자본이 물러간 뒤에도 쿠바는 한동안 담배와 사탕수수를 외국에 팔아 벌어들이는 외화로 대부분의 농작물을 수입했다. 그때 도시나 농촌이나, 시민들의 삶은 땅에 뿌리내릴 수 없었다.

 

담배와 사탕수수의 수출길이 막히면서 굶주림을 심각하게 경험한 쿠바는 새로운 교훈을 얻었다. 식량은 제 지역에서 자급자족해야 한다는 거였고, 그를 계기로 정부는 시민에게 텃밭을 적극 장려하는데 앞장섰다. 가족과 먹는 농산물을 스스로 재배하는 쿠바인의 텃밭은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유기농업을 채택했고 요즘은 자급자족의 수준에 달할 정도라고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들녘, 2004)의 저자 요시다 타로는 증언한다. 하지만 작은 텃밭에서 제가 먹을 모든 농작물을 재배할 수 없다. 따라서 자신이 더 생산한 농작물은 장터에 내놓고 필요한 걸 교환하는 시장이 필요하게 된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는 텃밭에서 생산한 농작물을 교환하는 장터가 곳곳에 열리고, 그 시장을 오고가는 시민들의 구릿빛 얼굴에서 여유를 느끼게 한다. 수출하는 담배와 사탕수수의 양은 크게 줄었어도 시민들의 몸과 마음은 전에 없이 건강하다.

 

사는 곳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 농토를 구해 주말마다 막히는 길을 헤치며 다녀오는 시민에게 고향이 전해주는 따뜻한 정서가 함양될까. 수확을 맞을 때 가슴 벅찬 기쁨을 만끽하겠지만 일찌감치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아이들은 제 부모와 다를 것이다. 주말마다 부모와 농사짓던 기억은 중학생 전후부터 사라질 테니 나들이 다녔던 추억과 그리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아이들에게 고향이 필요하다. 뿌리내릴 땅이 있어야 정서가 메마르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도시의 아이들에게 고향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역시 땅이다. 도시의 산부인과에서 태어나 아파트를 전전해온 내일의 시민에게 고향에 대한 인식을 남겨주려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텃밭을 마련해서 입시 준비와 관계없이 함께 땅을 일구는 게 좋을 것 같다. 제 땀방울로 씨를 뿌려 수확한 농작물을 조리해 먹는 기억은 여간해서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친하게 지내는 이웃과 함께 그 텃밭을 일군다면 더욱 좋을 텐데, 아쉽게도 우리에게 그런 기회는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텃밭의 수나 면적도 충분하지 않지만 폐쇄된 도시에서 이웃의 관심을 끌어들이기 어렵다. 아직까지 생산의 기쁨을 이웃과 나누는 시민도 드문 게 현실이다. 유권자의 관심사에 민감한 지방정부가 텃밭 마련에 소극적인 이유가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시간이 없이 텃밭에서 농사지을 엄두를 낼 수 없는 시민이라도 마음에 고향을 품는 게 낫다. 그러자면 최소한 고향이라 여길 수 있는 지역에서 생산한 농작물을 가족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땅에 뿌리 내린 농부의 믿을 수 있는 농작물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산자의 사진과 인적 사항을 전시해놓는 식품매장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을 전혀 모르는 소비자가 농작물을 구입하며 고향을 느끼기는 무언가 부족하다. 동네의 대형 식품매장에 쌓인 농산물과 가공식품은 대개 출처가 불분명하다. 당장 위험한 건 아니겠지만 누가 어떻게 생산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으니 마냥 안심할 수는 없다. 강력한 제도를 만든 국가가 행정력으로 안전을 보장한다지만, 농약이나 첨가물로 인한 문제들이 잊을만하면 터지는 현실은 소비자의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지 못한다. 수입 농산물이나 가공식품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

 

누가 어떻게 재배하고 가공했는지 알 수 있는 농산물과 가공식품이라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 생산자와 막역하게 가깝다면 더욱 좋을 것인데 시골의 부모나 친지가 보내는 농산물을 받을 처지가 못 되는 대부분의 도시 소비자들은 생산자와 친밀해질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웃는 자에 침 뱉지 않는다고, 자주 만나 친해진 생산자에게 농산물을 구입하면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디 허물없이 지날 생산자를 소개해주는 단체나 사람이 없을까. 농번기를 만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 가족과 찾아가 흔쾌히 도울 수 있을 만큼 가까운 농촌이라면 금상첨화일 텐데. 농작물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받을 때마다 고향의 정취를 흠뻑 느낄 수 있을 텐데. 생활협동조합이 그 대안을 기꺼이 안내한다. (사이언스올, 2009년 9월)

 
 
 

도시·인천

디딤돌 2008. 7. 12. 20:47
 

 

자동차가 질주하는 아스팔트를 따라 긴 시간 도시를 걷는다는 것. 제 정신에 할 짓이 아니다. 창을 꼭 닫은 승용차가 아스팔트에 파열음을 일으키며 비웃듯 지나치는 거리를 땀에 젖어 걷는 일에서 낭만을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명상은커녕 먼지가 일고 시끄러우니 짜증스럽다. 그래도 지하철 몇 정거장의 거리를 한 시간 남짓, 걷는다. 도시 환경의 현실을 온몸으로 느끼며 땀에 젖어 걷는다.

 

옆으로 자전거가 휙 지나간다. 새로 단장한 보행자도로 옆에는 붉은 아스콘을 입힌 자전거도로가 나란히 이어진다. 눈이 내리면 고생스럽긴 해도 자전거는 여름에 특히 시원할 하리라. 이동 시간이 걷기보다 짧겠지. 한데 많은 사람들이 자전거도로로 걷는다. 보도블록보다 편한 모양인데, 마주 오는 이를 피해야 할 때 잠시 신세지는 경우가 없지 않더라도 나는 되도록 붉은 아스콘을 밟지 않는다. 자전거를 위한 도로의 필요성을 주장한 처지가 아닌가.

 

자전거도로에 오토바이가 지나가는 경우도 많다. 자동차도로보다 안전하니 무서운 게 없는 듯, 자전거도로와 보행자도로를 휘젓고 누빈다. 언젠가 자전거도로로 다가오던 맞은 편의 전동휠체어가 갑자기 보행자도로로 옮기기에 하는 수 없이 자전거도로로 피했더니 뒤에서 웬 오토바이가 경적과 욕설을 퍼부으며 지나친다. 오토바이도 놀랐겠지만 거긴 자전거도로다. 차도를 이용할 자신이 없는 운전자는 오토바이를 세워두어야 옳다.

 

집에 자전거가 한 대 있었다. 큰 녀석이 홍성농업고등기술학교로 진학한 뒤 작은 녀석이 간혹 이용하던 자전거는 학습지 2년 치를 구입한다는 조건으로 받은 거지만 아이들은 학습지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베란다 정리를 위해 잠시 현관 밖에 내놓은 지 며칠 만에 자전거는 없어졌는데, 아이들은 그리 아쉬워하지 않는다. 지금 누군가 잘 이용하겠지. 오토바이가 무서워 자전거를 이용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회의나 강의, 그밖에 이러저런 약속을 위해 서울과 인천을 오갈 때에 자전거는 짐이다. 더구나 저녁에 술 기울여야 할 약속으로 이어지지 않던가. 자전거는 아무래도 집에서 학교와 시장과 관공서를 왕복할 때 편리하다. 지하철 몇 정거장 거리의 출퇴근에 이용하는 것이야 좋겠지.

 

해질 녘, 도시의 보행자도로는 운동 삼아 걷는 시민들로 북적인다. 그들은 아주 씩씩하다. 위아래로 흔드는 팔과 앞으로 내딛는 발동작이 여간 아닌 그들 앞에 얼쩡거리면 부딪혀 나동그래질 것 같다. 휴일이나 밖에 나갈 일이 없는 평일, 일부러 시간 내어 걷는 경우가 없지 않지만 그럴 때는 저녁 전이나 밤 시간을 이용해야 마음이 편하다. 볼일이 있어 밖에 나온 듯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교차로 신호에 따라 발길을 부지런히 옮긴다. 그렇게 씩씩한 이를 피하며 동네를 한 시간 정도 돌다 생활협동조합 매장에 들려 이것저것 사들고 집에 올 때도 많다.

 

얼마 전, 지하철 여러 정거장을 걸어 고교동기의 상갓집에 갔다. 오랜만에 악수를 나누던 친구들은 쌀쌀한 날씨에도 땀에 푹 젖은 모습에 의아해하더니, 한 시간 이상 걸었다고 하니 더 놀란다. 자동차를 파는 친구는 무모하다고, 의사인 친구는 무식하다며 고개를 젓는다. 그들은 배가 나와 고민이다. 그래서 골프를 하지만 도무지 살이 빠지지 않는단다. 걷는 걸 엄두내지 못하는 그들은 은근히 내가 부러울 게 틀림없다. 날씨와 계절을 가리지 않고 2년을 걷자 뱃살이 빠진 내 모습을 보았으므로.

 

우리나라에서 골프는 별 운동이 못 된다. 골프채 휘두를 들어가는 힘이 운동의 거의 전부가 아니던가. 잔디 위를 걷는 거리는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18홀 대부분의 길을 전동 카트에 의존하고 골프가방은 캐디에 맡긴다. 골프 마치고 일행과 먹고 마시는 열량이 적지 않아 살이 더 찌고, 내기골프로 거의 점철되니 기분이 상할 때가 많다고 고백한다. 50대에 즐길 적당한 운동이 골프라고 둘러대곤 하지만, 골프와 골프장이 시민사회와 생태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도 외면하기 부담스러울 것이다.

 

걸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무슨 일로 화가 치밀 때, 무작정 걸어보자. 한참을 걷다보면 화가 난 원인이 돌이켜지고, 상대를 이해하면서 내 태도를 반성하게 된다. 이 생각 저 생각하며 동네를 어슬렁거리다보면 독촉되는 원고의 지지부진하던 실마리가 풀린다. 불현듯 영감이 떠오르는 거다. 잠이 통 오지 않을 때, 아파트를 한 바퀴 천천히 돌면 아침까지 단잠을 이을 수 있다. 오로지 걷기 때문이다.

 

우리 도시는 사실 계절과 관계없이 걷기 불편하다. 에어컨 실외기가 여름을 더욱 후텁지근하게 하고 겨울에는 외투 속에 흐르는 땀을 주체하기 어렵게 하지만, 매연에 고통스러워하는 가로수를 보는 일이 무엇보다 불편하다. 걷는 동안 내 폐는 안녕할 수 있을까. 자전거도로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보행을 방해하며 주차된 자동차도 많건만, 바삐 스쳐가는 경찰들은 걷는 이의 안전에 도무지 무감각하다.

 

도시에 오솔길을 배려할 수 없을까. 그런 길을 5분 걸으면 나무가 우거진 공원을 유럽처럼 만날 수 있게 우리의 도시를 가꿀 수 없는 것일까. 가족과 나온 이웃을 반갑게 만나는 공원은 기후변화 시대의 도시를 한층 시원하게 만들어줄 텐데. 그런 생각에 잠기며 날씨가 제법 쌀쌀한 오늘도 도시를 걷는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야곱의 우물, 2009년 1월호?)

 
 
 

도시·인천

디딤돌 2007. 9. 5. 11:56
 


연수구청에는 담이 없다. 연수구청 앞 광장에서 주민들은 가끔 집회를 한다. 징과 괭가리를 두드리며. 시끄럽게 해서라도 행정당국과 시민의 관심을 끌어내려는 의도를 볼 때, 소통이 잘 이루어진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하지만 연수구청은 소통을 요구하는 공간이나마 열어 놓았다. 반면, 청사를 잠그는 것도 모자라 차가 빼곡한 광장을 담으로 둘러막고 정문에 까다로운 경비원을 배치한 인천시청은 소통 자체를 거부한다.


아파트는 일반주택에 비해 소통이 불편하다. 복도식인 경우 오가며 눈인사 나누는 이웃을 기억할 수 있지만 계단식은 기억은커녕 이웃과 만날 기회도 드물다. 어느 달동네보다 위아래 전후좌우로 다닥다닥 붙었어도 주차문제로 멱살을 잡을지언정 도무지 이웃과 소통이 없다. 닫아걸면 차단되는 익명의 공동주택에서 이웃이라곤 ‘경비 아저씨’가 전부다. 광장도 골목도 없다.


독일 베를린에서 본 어떤 아파트에 작은 시내가 흐른다. 2년 넘는 회의 끝에 비용을 공동 부담한 주민들이 만든 것이다. 사용하지 않는 교회의 지붕에 태양발전 패널을 붙이고 십자가 대신 풍력발전 날개를 달아 오염 없는 전력을 얻었고, 그 전기로 저수지의 물을 끌어올려 흘리는 100여 미터 남짓한 시내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종아리 반 깊이로 조금씩 흐르지만 키 작은 나무로 그늘이 드리우고 의자가 놓인 시내에는 주민들이 넘쳤다. 그들은 여간해서 제 아파트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고 가이드를 귀띔했다. 자신의 정주공간에 자부심이 생겼기 때문이리라.


대구의 작은 동네에서 비롯된 ‘담 허물기’도 좋은 예가 되겠다. 제 집 담을 먼저 헐어 이웃과 차를 마실 공간을 마련한 시민운동가의 기지였다. 서먹했던 동네를 이웃사촌으로 다정하게 이끈 ‘담 허물기’는 이제 관에서 주도하는 주민운동이 되어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 인천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도시 대부분의 공간은 닫혀있다. 관공서와 아파트는 물론이고 연립이나 다세대주택도 주차 목적 이외의 공간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최근 다세대주택을 다시 재개발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인다. 소통되던 골목을 다세대주택으로 바꾸더니 다세대주택을 헐어낸 자리를 고층아파트로 채우려는 계획이다. 한데,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대개의 계획은 소통에 인색하다. 가구 수를 늘이려는 건설업자나 주택가격 상승을 기대하는 주민들도 금전적 이익에 민감할지언정 광장과 골목을 외면하기는 마찬가지다. 북적이는 익명의 공간에서 마음 나눌 이웃이 없는 시민들은 항상 외롭다.


최근 인기 없는 아파트 1층을 공동공간으로 바꾸려는 방안이 사회 일각에서 활발하게 구상되고 있다. 이웃과 책을 읽거나 차를 마실 수 있도록 꾸미자는 거다. 주차장을 지하로 넣어 확보한 자리에 넓은 녹지광장을 만들자는 제안도 나온다. 성냥갑 같은 폐쇄공간에서 지친 시민들의 당연한 대안모색이라 하겠는데 지하공간을 지나치게 잠식하면 생태계가 교란된다. 지하수 흐름이 차단되고 빗물의 보충이 차단되는 만큼 물이 담기는 생태공간을 지상에 마련해야 한다. 이른바 ‘비오톱’(Biotope)인데, 비오톱도 소통공간으로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다.


이제 공동주택에 차보다 이웃을 먼저 배려하는 ‘열린 마당’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건물을 요령 있게 배치하면 소통이 가능한 골목과 광장을 얼마든지 확보할 수 있다. 땅이 좁으므로 아파트를 고층으로 올려야 한다는 건설업자의 주장은 우리보다 인구밀도가 높은 국가의 사례와 비교할 때 설득력을 잃는다. 프리미엄 붙여 팔면 그만인 주택에서 정붙일 이웃을 찾을 수 없지만 소통이 보장된 공동주택에는 문화가 깃든다. 이웃 사이에 정주의식이 싹튼다. 희로애락을 나누는 주민들은 마을의 대소사를 논의하고, 그 결과를 행정과 기쁘게 협의할 것이다.


물리적인 담이 없어지면 마음의 담도 서서히 허물어진다. 이름을 기억하는 이웃과 반갑게 만나는 골목과 광장이 확보된 주거공간에서 시민사회는 건강해지고 민주주의는 튼실해진다. 시민의 출입을 차단하는 인천시가 귀담아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인천신문, 2007.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