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천

디딤돌 2009. 4. 20. 17:19

 

배다리. 거기는 인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장년층에게 남다른 곳이다. 문화의 갈망이 어린 기억의 고향이랄까. 지금은 더러 쇠락해도 인천의 기억을 오롯이 간직하는 배다리에 가면 여전히 헌책방 거리를 만날 수 있다. 시절을 풍미했던 양조장은 지역문화를 지키려는 젊은이가 꾸민 전시와 기획공간으로 활짝 열렸으며, 지역문화에 공감하려는 의지가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찾아가 따뜻한 찻잔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랑방이 여기 저기 마련돼 있다.

 

배다리에서 창영초등학교를 지나 도원고개로 이어지는 우각로는 인천시에서 가장 유서 깊은 근대문화를 품고 있다. 인천의 삼일독립운동 발상지인 창영초등학교는 1907년 개교한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이고 인근의 영화초등학교 동명초등학교, 그리고 영화여자상업고등학교는 1894년 한국 최초로 건립된 사립학교다. 지금도 사용하는 일대의 건물은 인천유형문화재로 등록돼 보존되어 있다. 도원역은 1987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역사를 펼친 시발점이 아닌가.

 

지난 4월 10일, 원로 영화배우인 황정순 선생을 비롯한 인천지역의 문인과 200여 시민이 창영초등학교에 모여 ‘배다리 문화선언 선포식’을 개최해야 했다. 중구 신흥동 삼익아파트에서 동구 동국제강까지 이어지는 폭 50미터의 산업도로가 2011년 완공을 목표로 하필 배다리 우각로를 관통하겠다고 벼르기 때문이다. 미처 저항하지 못한 주택과 상가를 밀어내 황토가 드러낸 공사현장을 턱 밑까지 밀어붙인 상태에서 여보란 듯 공사를 멈추고 있는 산업도로에 대해 배다리를 기억하고 보전하려는 시민들은 ‘중구 동구 관통 산업도로 무효화 주민 대책위원회’로 뭉쳤고, 공사 강행에 저항하며 반대의 논리와 당위성을 알리는 행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 생활문화사의 원형질인 배다리를 훼손하고 말살하려는 인천시의 태도를 반역사적이고 반문화적이며 비민주적이라고 지적하는 배다리 문화선언문은 시민의 체취가 깊이 배어 있는 배다리 일대를 적극 보호 보존하는 일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역사와 문화적 소명임을 강조하면서 후손에게 물려줄 귀중한 문화 자산으로 가꾸는 활동을 다양하게 전개할 것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나아가 그를 위한 인천시의 현명한 결단을 요구하면서 앞으로 전개될 모든 도시개발에서 인간적 삶의 가치에 기초한 도시철학과 문화적 상상력을 최대한 반영하는 발상의 전환을 촉구했다.

 

지역에 뿌리내리려는 시민이라면 마땅히 취해야 할 논리요 행동이다. 고층건물과 자동차가 질주한다고 어디 도시가 속도와 목표가 미덕일 수 있는가. 주권은 시민에 있지 않은가. 유서 깊은 도시를 잠시 돌이켜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듯, 도시는 보존된 역사와 문화, 시민들의 정주의식에 자부심을 가진다. 아무리 돈이 가치를 전복하는 세상일지라도 조상의 얼이 깃든 지역에 개발의 삽날을 들이대는 행정을 후손이 용납하지 않는다. 배다리를 관통하는 산업도로는 조상은 물론이고 후손에게 모멸감을 준다. 문화와 역사가 보전될수록 정주의식은 싹트고, 뜨내기 공간일수록 강호순 사건과 같은 사이코패스는 빈발한다. 지방자치단체가 지향해야 할 도시는 어디에 있어야 바람직하겠는가.

 

배다리 문화선언문을 채택한 시민들은 배다리 일대를 ‘배다리 에코뮤지엄’으로 조성하자고 제안한다. 그를 위해 헌책방 거리와 인천시 지정유형문화재를 포함한 우각로 일원의 골목을 보전하고 도로 예정 부지를 역사 문화 테마파크로 가꾸자는 것이다. 그를 위해 산업도로 통과 구간의 지하화를 요구하는데, 더 좋은 대안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예 시민이 모여드는 녹지로 조성하자는 거다. 턱까지 다가온 도로는 광장으로 활용하고 황토가 드러난 부지에 나무와 잔디를 심어 배다리 에코뮤지엄으로 연결하면 어떨까. 속도와 목표를 추앙하는 산업도로가 인천에 뿌리내린 시민들이 모여드는 녹색광장으로 열릴 것이다. (경향신문 인천판, 2009년 4월 ?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