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2. 3. 12. 12:47

꿀벌을 지키는 사람, 한나 노드하우스 지음, 최선영 옮김, 더숲, 2011.

 

 

석유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다. 지구상에 이런 광영이 재현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의식주에서 석유를 빼면, 고급 승용차와 아파트에서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게 지내는 삶을 당연시하는 이는 당장 생사가 위태로워질 텐데, 상당 기간 석유에 의존해온 현생 인류 역시 온전하기 어려울 것이다. 석유를 많이 썼던 아니든 심지어 인간이든 아니든 심각한 변화에 직면할 것이고, 현재의 생태계는 적지 않은 변동을 피하기 어려울 게 틀림없다.

 

지난 127, 영국 BBC는 과학잡지 최신호에 발표된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보도했다. 세탁기로 빨래할 때 옷에서 떨어지는 마이크로플라스틱이 바다로 흘러들어 생태계를 교란하며 흡수돼 인체에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으로, 옷 한 벌에서 1밀리미터 이하의 미세 플라스틱이 최대 1900개 배출된다고 덧붙였다. 해양 쓰레기의 60%에 이르는 마이크로플라스틱은 해류에 실려 한반도 6배에 해당하는 태평양에 소용돌이치며 떠돌다 어패류 먹이사슬을 거치며 정점에 다가갈수록 높은 농도로 흡수돼 쌓일 텐데, 스펀지처럼 중금속이나 화학물질을 빨아들이는 특성으로 먹이사슬 최상위 동물에 치명적일 수 있다고 BBC는 보도했다. 대책으로 연구진은 하수처리의 획기적 개선을 제안했지만 현재 기술로 개선될 기미가 없다던데, 이미 배출된 마이크로플라스틱은 어쩌나.

 

어패류를 즐기는 우리의 몸에 어쩌면 적지 않은 마이크로플라스틱이 소화기와 호흡기의 여기저기에 박혀있을지 모른다. 인체를 괴롭히는 미세물질은 물론 석유를 가공한 플라스틱만이 아니다. 석유가 가공되기 전까지 세상에 없었기에 분해할 생물이 존재하지 않는 숱한 석유화학제품은 잘게 부서진 채 지구촌 구석구석에 넘치지만, 넘치는 석유화학제품은 플라스틱에서 그치지 않는다. 1964년 재발된 유방암으로 56세에 숨진 레이첼 카슨은 죽기 2년 전, 침묵의 봄으로 살충제와 제초제의 위험성을 고발했다. 분해할 생물이 없는 석유화학제품의 긴 목록에 일부 포함되는 독성 물질들이다. 침묵의 봄이후 문제가 되었던 많은 살충제와 제초제는 생산이 중단되었지만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다. 꿀벌의 몸도 예외가 아니다.

 

만신창이가 된 꿀벌

 

농업 면세유 가격이 오르면서 딸기 수확기를 맞은 비닐하우스마다 농부들은 울상이었다. 겨우내 붉고 탐스러워져야 할 딸기가 보일러 열기를 제대로 받지 못해 푸르죽죽하니 누가 선뜻 사려할 것인가. 인상된 면세유 가격을 반영한 까닭에 주머니 사정이 전 같지 않아진 소비자들은 큰맘 먹어야 구입하려 할 텐데, 대형 마트 지하 식품매장의 딸기도 전 같지 않다. 이파리가 붙은 쪽의 과육은 여전히 퍼렇다. 그래도 커다랗기만 한 이맘때의 딸기는 일찍이 성장호르몬이 처리되었음을 숨기지 못한다. 이파리만 괜히 커다란 게 아니다. 과육을 보라. 하도 커 그런지, 한입 베어물면 참외도 아니면서 빈 속이 드러난다.

 

제 본분 모르고 커진 과일과 채소는 딸기만이 아니다. 성장호르몬을 처리한 만큼 터무니없게 서둘러 자라야 하는 과일은 석유를 가공한 화학비료를 듬뿍 뿌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 비료를 잡초에게 빼앗기지 않아야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테니 농부는 제초제를 수시로 뿌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큰돈 들이며 조심스럽게 재배하는 과일에 벌레가 생기면 곤란하다. 때때로 살충제를 뿌리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 과일들, 꿀벌이 꽃가루를 수정해야 열매를 맺는데, 꿀벌은 살충제와 제초제에 무척 약하다.

 

비닐하우스의 딸기도 꿀벌이 꽃가루를 수정해야 한다. 한데 이맘때 출하하는 딸기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계절에는 날아다니는 꿀벌이 없다. 농부는 비닐하우스용 꿀벌을 그때마다 구입할 텐데, 그 꿀벌들은 일회용이다. 어차피 추운 비닐하우스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처지인데, 꽃가루 수정이 끝나면 농부는 꿀벌이 기피하는 화학비료를 비닐하우스 안에 흥건히 뿌릴 것이므로 그렇다. 그렇다면 노지의 딸기가 제 계절에 꽃을 피워낼 때 벌통을 나온 꿀벌들은 괜찮을까. 면역력이 약해진 꿀벌에 나타난다는 낭충붕아부패병으로 토종벌들이 죽어나가는 우리의 현실은 꿀벌에 다음세대의 시작을 의뢰하는 생물에게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토종벌보다 개체수가 훨씬 많은 양봉은 괜찮을까. 4월 둘째 주말이면 100만 인파가 밤낮으로 운집하는 여의도 윤중로의 벚나무 가로수 사이에서 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꿀벌들은 거의 양봉이다. 미국과 유럽의 양봉가에서 들리는 소문은 이미 흉흉하다.

 

2009년부터 토종벌들이 낭충붕아부패병으로 본격적으로 몰살되기 시작한 우리나라와 달리 유럽과 미국은 꿀벌집단붕괴현상으로 양봉가들이 시방 몸서리치고 있는데, 그 전에 꿀벌의 기생충인 응애에 끔찍한 시달림을 받았다. 핀 머리 크기에 불과한 응애는 꿀벌 애벌레의 몸에 알을 낳고 번식하며 집단을 늘려 벌집 전체를 응애로 뒤바뀌게 한다. 눈도 날개도 없는 응애는 바다를 건널 수 없다.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된 문제의 응애가 삽시간에 세계 각국으로 퍼진 건 비행기나 배의 도움이 컸을 것이다. 세계 방방곳곳의 여왕벌과 꿀벌은 그 자체가 부가가치를 보장하는 상품이 아니던가. 응애가 극성이라도 양봉업계의 지원을 받는 과학자가 버티고 있기에 일단 안심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꿀벌에 피해를 주지 않고 오로지 응애만 처리하는 살충제를 개발해 쉽게 해결되는 듯 보였던 거다. 하지만 꿀벌보다 작은 응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살충제에 견디기 시작했고, 독성을 강화한 살충제마저 우습게 여기게 되었다. 그러자 이번엔 꿀벌이 위험해졌다.

 

기생충과 숙주의 관계는 묘하다. 숙주를 다 죽일 정도로 확산되면 자신의 운명도 머지않아 끝난다. 꿀벌이 원래 응애에 맥없이 당했다면 꿀벌은 벌써 자취를 감췄을 터. 대부분의 꿀벌은 응애를 피할 재간을 갖고 있고 응애가 전하는 바이러스나 독성도 잘 견뎌냈을 텐데, 요사이 꿀벌은 도무지 속수무책이다. 무슨 변고인가. 꿀벌을 지키는 사람의 저자 한나 노드하우스는 꿀벌의 면역력을 주목한다. 응애 살충제만이 아니다. 경작지 곳곳에 뿌린 살충제와 제초제가 어디 한두 가지인가. 전문가는 꿀벌의 몸은 어느새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걸 속속 증명한다. 그 작은 몸을 공격하는 숱한 농약들이 꿀벌의 면역력을 형편없이 떨어뜨리자, 독성을 강화한 응애에 속절없이 당하게 되었다는 거다. 이제 벌통을 지키려는 양봉가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하나. 살충제의 개량이 대규모 양봉가에게 당장 솔깃할 텐데, 이후 더 심각한 피해가 닥칠 수 있다.

 

등에 묻는 꽃가루를 다리를 들어올리며 모으는 행동은 등에 붙은 응애를 떨쳐내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미국에서 문제가 된 응애의 공격을 먼저 받은 동양계 꿀벌은 그런 행동을 보인다고 한다. 따라서 동양계 꿀벌로 미국에 보편적인 유럽계 꿀벌의 품종을 개량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텐데, 그 과정에서 타고난 유전적 다양성은 더욱 위축될 것이다. 한데 꿀벌은 이미 수천 년 전부터 양식되었다. 양식하면서 양봉가는 사납게 쏘아대는 성가신 행동을 보이는 개체들을 선택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런 유전자를 제거하고 꿀을 많이 가져오는 유전자를 선택했을 터. 그런 품종개량이 지역마다 거듭되었을 테니 타고난 유전적 다양성은 오래 전부터 조금씩 줄었을지 모른다. 유럽에서 이주한 정착인과 더불어 미국으로 넘어온 꿀벌을 북미원주민은 백인의 파리라고 불렀다던데, 전래의 농업 문화에 따라 세계 곳곳에서 선택과 집중으로 품종을 개량한 꿀벌은 이미 자연종이 아니다. 그 점에서 우리 토종벌도 마찬가지다. 크든 작든, 양봉가의 벌통에서 벌통으로 세대를 이어오지 않았던가.

 

꿀벌집단붕괴현상은 우리 현실의 표상 

 

기족이 관리할 수 있을 만큼 벌통을 놓고 양봉을 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적어도 세계 아몬드 생산량의 80%를 지배하는 미국에서 소박한 양봉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시대는 추억이 되었다. 성장호르몬을 바르는 과수원처럼, 남보다 빨리 많은 꿀을 모아야 경쟁에서 승리하는 양봉업계의 세태는 탐욕이 견인한다. 달콤한 끌을 모으는 꿀벌은 탐욕스런 인간에게 운명적으로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꿀벌집단붕괴현상은 그 결과다.

 

식물 성장호르몬을 발라 커다란 과일을 받으려는 과수원은 가는 가지에 빼곡하게 피는 꽃을 전부 챙기려하지 않는다. 살구도 마찬가진데, 살구와 아주 가까운 아몬드는 과육이 아니라 씨앗을 수확하므로 모든 꽃이 수정되어야 실속이 크다. 미국 캘리포니아 센트럴벨리에 자로 잰 듯 심어놓은 아몬드나무는 완전히 기계로 수확된다. 기계의 오차범위 내에서 재배와 수확이 보장되어야 하므로 유전적 다양성은 상당 부분 제거되었다는 뜻이다.

 

대규모 단작인 아몬드농장에 수많은 꽃은 일제히 피고 진다. 그 짧은 시간에 꿀벌이 동원되어야 하고 꽃가루 수정을 마친 꿀벌들은 즉시 떠나야 한다.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농약 세례를 받는다. 200마일에 이르는 농장의 아몬드를 일시에 꽃가루 수정할 꿀벌은 그 지역만으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 따라서 미국 각지에서 꿀벌이 몰려와야하는데, 소박한 양봉가는 당연히 배제된다. 수천에서 수만 개의 벌통을 취급하는 양봉가들은 이른 봄부터 그때를 손꼽아 기다리지만, 면역이 약해진 꿀벌들은 추위에 약하다. 질병에도 약하다. 미국은 물론, 인근 국가와 유럽의 꿀벌까지 끌어들이는 아몬드농장은 질병을 한순간에 퍼뜨리는 온상이 된다.

 

아몬드나무와 농장은 기계에 최적화되었지만 자연은 그렇지 않다. 어느 해는 비가 많고 한파가 몰아치기도 하지만 어느 해는 가뭄이 계속된다. 아몬드나무에 꽃이 피는 이름 봄을 대비해 억지로 동면에서 깨어나는 꿀벌은 아직 벌통마다 충분한 일벌을 늘리지 못했다. 여왕벌이 수벌과 짝짓기 여행을 떠났다 돌아와 하루에 2000개의 알을 낳으려면 더 따뜻해야 한다. 마음 급한 대규모 양봉가는 여왕벌을 공장에서 대량으로 구입해 해결한다. 여왕벌이 갑자기 사라지거나 주위의 서식환경이 열악해지면 일벌들이 알에서 여러 마리의 여왕벌 후보를 간택해 맹렬하게 키우는 습성이 있다. 그 습성을 한껏 이용해 생산한 하루 수천 마리의 여왕벌을 양봉가에게 파는 기업이 등장한 것이다. 그렇게 생산된 여왕벌에게 유전적 다양성은 기대할 수 없다. 면역력도 물론 기대할 수 없다. 여왕벌이 낳은 알에서 태어날 일벌도 마찬가지다.

 

벌통에서 로열젤리를 연실 내주는 일벌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으며 태어난 여왕벌이 경쟁자를 물리치고 벌통을 물려받은 뒤, 여러 벌통에서 짝짓기에 도전하는 여러 수벌과 공중에서 교배하여 낳은 알이라면 고유의 유전적 다양성과 면역력을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을 테지만, 그런 꿀벌은 양봉가의 벌통에서 퇴출된 지 오래다. 응애에 속수무책인 꿀벌은 이미 수많은 농약에 찌들어 기진맥진해 있다. 거기에 얹어진 새로운 농약은 해마다 그 가짓수와 독성을 더하는데, 봄부터 가을까지 꿀과 꽃가루를 날아오느라 지치는 꿀벌이 어찌 감당할 수 있으랴. 결국 사단이 났다. 꿀벌의 신경계를 퇴화시키는 것으로 짐작되는 살충제, 네오니코티노이드가 탈을 일으킨 것이다. 꿀과 꽃가루는 물론, 한창 자라는 애벌레들까지 남긴 채 벌통을 나간 일벌이 돌아오지 않는 꿀벌집단붕괴현상이 뒤따르는 게 아닌가. 그것도 광범위하게.

 

처음엔 휴대전화와 그 기지국에서 내뿜는 전자파가 원인일 거라 막연히 추측했지만 기지국에서 멀리 떨어진 벌통에도 예외가 없기에 기각되었다. 만일 전자파가 원인이라는 결론이 난다면, 사람들은 기꺼이 휴대전화를 포기하려 할까? 이미 익숙해진, 아니 없으면 불안해하는 현대인의 대부분은 저항할지라도일부는 심각성을 인식하고 자진해서 포기할지 모른다. 하지만 삼성이나 엘지 같은 휴대전화 생산회사, SKKT와 같은 무선통신 회사도 수익이 큰 사업을 순순히 포기할까. 1962침묵의 봄이 출간되자 전문 과학자들을 총동원하며 레이첼 카슨을 비난했던 농약회사처럼, 복잡한 인과관계를 연실 들먹이는 전문가들 동원할 기업은 아랑곳하지 않을 게 뻔하다. 프레온가스를 대체할 냉매를 개발한 뒤 몬트리올 협상에 응한 기업처럼, 시간을 어지간히 끌 것이다.

 

네오니코티노이드에 혐의가 있다는 연구가 잇따르자 역시나, 그 살충제를 생산하는 기업이 반박하고 나섰다. 네오니코티노이드 살충제를 금지한 프랑스에도 꿀벌집단붕괴현상이 나타났다면서 판매금지 요청에 저항한 것인데, 양봉가나 꿀벌을 생각한 처사는 물론 아니었다. 그렇다면 네오니코티노이드가 꿀벌집단붕괴현상의 주범일까. 아닐 것이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꿀벌에게 마지막 충격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절대적 원인으로 간주할 수 없다고 과학자들은 동의한다. 한데 최근 집중되는 대형 양봉가의 손실에서 꿀벌집단붕괴현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의외로 작을지 모른다.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과 홍수, 때 이른 한파와 살인적인 더위는 꿀벌 집단에 질병을 늘릴 뿐 아니라 치명적인 굶주림까지 안기지 않던가. 그 결과 응애가 공격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가 되었을 것이다. 거기까지인가. 아니다. 처참해질 정도로 면역력이 약해진 꿀벌의 희생은 꿀벌의 문제에서 끝날 리 없다.

 

우리가 먹는 농작물의 3분의1은 꿀벌이 꽃가루를 수정해야 얻을 수 있다. 아인슈타인이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는 4년을 버틸 수 없다고 일찍이 경고했다던데, 아인슈타인이 살아 있을 때에도 꿀벌의 면역은 신통치 않았을 테지만 적어도 요즘 같은 집단붕괴현상은 없었다. 응애에 희생되는 벌통이 가끔 있었을 테지만 요즘처럼 속수무책은 아니었을 것이다. 양봉보다 효율이 다소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진 우리의 토중벌도 아인슈타인이 경고했을 당시, 낭충붕아부패병으로 속절없이 죽어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탐욕이 이끈 지나친 꿀벌 착취는 이제 부메랑이 되려 한다. 꿀벌이 사라지고 있지 않은가.

 

농작물만이 아니다. 화려하고 꽃의 향기가 진한 대부분의 식물도 꿀벌이 있어야 다음 세대를 제대로 기약할 수 있다. 박쥐나 직박구리와 같은 새, 그리고 가끔 다른 벌이 꽃가루를 수정하지만, 그 양은 작다.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는 당장 벌꿀을 맛볼 수 없고, 얼마 안 가 먹어야 할 농작물도 급격히 줄어들겠지만, 생태계는 급격히 왜곡될 수밖에 없고 과학기술을 앞세우는 사람도 그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주장처럼 4년 만에 인류의 삶이 마감될지 알 수 없지만, 훨씬 먼저 세상에 나온 꿀벌과 생태계 덕분에 살아가는 인류도 내일을 기약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아직 꿀벌은 남아 있다. 드물어졌더라도 여전히 농작물과 현화식물에게 꽃가루를 수정해준다. 덕분에 우리는 성장호르몬 발라 터무니없이 커진 과일을 명절 선물용으로 구입해 친지에게 전할 수 있다.

 

대안은 획기적인 전환뿐이다

 

한나 노드하우스는 꿀벌을 지키는 사람에서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커진 미국의 거대 농업에서 꿀벌의 대규모 양봉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같이 가족 단위로 자급자족하는 농업과 양봉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 지금과 같은 체제 안에서 대책을 세울 수밖에 없다는데 은근히 동의한다. 바로 대규모 양봉가들이 선호하는 개선된 농약과 꿀벌의 품종개량이다. 들어가는 돈과 혹독한 노동에 비해 벌어들이는 돈이 신통치 않은 양봉을 물려받으려는 젊은이들은 부족하지만, 아직 꿀벌은 사람에게 관대하므로 역경에도 살아남는 꿀벌을 잘 선택하면서 공존할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양봉가의 말을 빌려 제안한다. 꿀벌을 사랑하는 한 무던한 양봉가를 여러 해 취재하며 꿀벌을 지키는 사람을 쓴 저자의 결론인데, 꿀벌은 과연 언제까지 인간에게 관대할 수 있을까.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꿀벌은 면역력마저 상실했는데, 기후변화에 대처할 능력이 남아 있을까. 유전적 다양성은 환경변화에 대처할 능력을 담보하는데, 탐욕이 인도한 극단적 단작은 기후변화에 대처할 적응력을 위축시켰다.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까닭이다. 중요한 밀원식물인 아몬드와 과일나무만이 아니다. 산업화된 꿀벌과 가축도 마찬가지다. 극단적인 품종개량으로 타고난 유전적 다양성을 꽤 잃었다. 어쩌면 획일적으로 주어지는 산업문명의 중앙 집중적 편의에 길든 사람들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유전적 다양성보다 의식과 행동의 다양성은 분명히 손상되었다.

 

적응력이 없다면 환경변화에 대처할 수 없는데, 이제 석유가 만든 광영, 다시 말해 인간에게 안락하게 하던 환경은 머지않아 종말을 고할 것이다. 과학기술을 동원하는 사람은 석유를 과다하게 소비하는 산업문명을 억지로 유지하려 발버둥치지만 생산의 정점이 지난 석유는 머지않아 고갈될 것이다. 우린 석유가 고갈될 거라는 사실을 기반으로 대책을 근본에서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 양봉도 마찬가지다. 탐욕에 기반을 두는 농업이 기후변화 시대에 위험한 것처럼 대규모의 양봉에 획기적인 전환이 모색되지 않는다면 기반을 상실할 수 있다. 꿀벌집단붕괴에 이은 부메랑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도시의 아스팔트 못지않게 잡초 하나 남기지 않는 농부는 까치와 꿀벌을 내쫓는다. 반면 자신의 과수원에 그물을 치지 않는 유기농 농부는 꿀벌은 물론이고 까치에게도 관대하다. 잡초 하나 없이 깨끗한 과수원에서 까치들은 먹을 것을 찾을 수 없으니 과일들을 기웃거리지만 잡초에 벌레까지 우글거리는 유기농 과수원은 다르다. 그물을 둘러쳐도 집요하게 뚫고 들어와 익지 않은 과일 지분거리는 까치는 농부에게 유해조수가 되었지만 곤충을 잡아먹는 까치는 여전히 친숙한 과수원의 이웃이다. 그 까치도 과일을 건드려보지만 익지 않아 떫기에 진작 흥미를 잃고 만다. 유기농 과수원은 그물을 치는 과수원보다 벌어들이는 돈은 적지만 쓰는 돈이 적어 큰 걱정을 하지 않는다. 비록 소출이 작아도 가격을 더 쳐주는 유기농 과일이라 수입이 만족스럽다.

 

한나 노드하우스는 단작이 광범위하게 지배하는 미국식 농업의 한계를 굳이 언급하지 않았지만, 탐욕이 인도하는 단작의 문제는 분명하게 인식한다. 미국 농산물이 자국 뿐 아니라 한국과 같은 국가의 식량으로 공급되는 현실을 감안하기에, 근본적인 대안을 자신의 책에서 굳이 내색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꿀벌집단붕괴현상이나 응애의 습격, 그리고 낭충붕아부패병은 지금과 같은 대규모 양봉이 갖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걸 꿀벌을 지키는 사람의 독자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대형 양봉가부터 생각하는 미봉책은 나중에 닥칠 더욱 큰 문제를 피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대안은 지역에서 자족할 수 있는 소박한 양봉과 단작을 회피하는 소농이어야 한다. 세탁기에서 나온 옷 보푸라기가 사람을 역습하는 시대에 하수처리 개선은 의미가 없다. 마이크로플라스틱을 배출하는 원단을 포기해야 한다. 석유 없이 재배하는 제철 제 고장 딸기로 만족하자는 거다. (녹색평론, 20123-4월호)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12. 1. 21:06

 

물리학자들은 변수가 많아도 그걸 모두 염두에 두고 결과를 계산할 능력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많은 이들이 20세기 물리학자의 최고봉이라는데 생각을 일치하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사라지면 사람은 4년을 버티기 어렵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 근거가 궁금한데, 분명한 것은 사람이 먹는 수많은 과일과 채소들은 꿀벌이 꽃가루를 암술에 묻혀주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언제부터인지 우리에게 낯익은 견과일이 된 아몬드. 대부분 미국의 캘리포니아에서 생산하는 그 아몬드가 일종의 살구 씨라고? 하긴 오돌토돌한 모습이 살구 씨와 비슷하기는 하다. 3월 말이면 살구나무는 배드민턴공의 날개처럼 퍼진 가는 가지마다 연분홍빛이 감도는 꽃을 가득 피워내는데, 그 화사한 꽃들은 꿀벌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꿀벌이 찾아와야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일 텐데, 꿀벌을 기다리는 건 살구나무의 꽃만은 아니다. 복숭아도 사과와 배도도 꿀벌이 없으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한데 캘리포니아는 얼마나 많은 아몬드나무를 심었기에 우리나라에도 그렇게 많은 아몬드를 수출할 수 있을까. 열매 하나에 겨우 아몬드 하나 나올 텐데.

 

젊은 시절의 신사임당이 아름다운 꽃 그림을 보고 벌과 나비가 없어 향기를 느낄 수 없다고 말했다던가. 꿀벌과 꽃의 관계는 그들이 진화한 이래 지금까지 계속되었고 앞으로 변함없을 텐데, 꿀벌이 급속히 사라진다는 소식이 들린다. 미국과 유럽발 외신은 꿀벌이 예년에 비해 70퍼센트 이상 줄었다고 전하는데, 우리나라도 전 같지 않다고 한다. 한 신문은 사람이 벌을 대신해 과수원에서 붓으로 일일이 가루수정을 하는 사진을 내보냈다. 벌이 드물어졌기 때문이라는 건조한 설명과 함께.

 

꿀벌이 사라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꿀벌집단붕괴’라 하는데, 전문가의 의견을 인용하는 외신은 농약도 무시할 수 없지만, 유전자조작 농산물의 광범위한 파종과 이동전화를 의심한다. 해충 방제 목적으로 조작한 농작물의 유전자가 수평이동해 꿀벌의 유전자를 교란했을 가능성과 더불어 세계를 뒤덮은 이동전화와 그 기지국에서 내보내는 전자파가 꿀벌 사이의 정보교환을 방해했을 가능성을 의심하는 건데, 《꿀벌 없는 세상, 결실 없는 가을》의 저자 로완 제이콥슨은 집단 붕괴를 일으킬 정도로 영향이 큰 건 아니라고 전문가의 연구를 근거로 주장한다. 제주왕나비를 죽이는 것으로 드러난 해충 저항성 유전자조작 농산물이 꿀벌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이동전화 기지국과 꿀벌집단붕괴는 연관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이동전화 전자파와 관계가 없다니 다행이긴 하다. 만일 관계가 있다는 결과가 나온다 해도 사람들이 이동전화를 당장 포기할 것 같지 않고, 관련 기업이 순순히 사업을 접을 가능성이 아주 낮을 테니까. 유전자조작도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다. 인과관계가 정확하게 밝혀질 때까지 사업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양봉업자들은 일단 꿀벌 애벌레의 몸에 알을 낳는 응애를 의심했다. 응애가 들어와 벌통을 버린 경험이 많기 때문인데, 응애 피해 없는 벌통의 꿀벌도 붕괴되는 거로 보아 아니었다. 다음으로 바이러스를 의심했지만 비슷한 이유로 아니었다. 결국 농약일까. 농약의 독성이 강해지고 꿀벌이 농약에 약한 건 사실이지만 세계에서 거의 동시에 급격히 줄어드는 현상을 설명하는데 무리가 있었다.

 

로완 제이콥슨은 유전적 다양성이 줄어든 것을 가장 큰 이유로 꼽는다. 사납지 않고 꿀을 많이 가져오는 종류로 세계가 획일화되면서 꿀벌의 유전적 다양성이 크게 위축되었다는 주장인데, 거기에서 그친 게 아니란다. 그런 꿀벌이 한 지역으로 모였다 퍼지며 질병을 공유하게 되었다는 걸 주목한다. 바로 아몬드를 보자. 세계 소비량의 80퍼센트를 떠맡을 정도로 아몬드 과수원이 밀집된 캘리포니아는 꽃이 피는 2월이면 미국 전역에서 벌통이 몰려와 북적인다고 한다. 아몬드를 많이 생산하는 나무로 획일화되어 동시에 핀 꽃을 한꺼번에 꽃가루 수정하려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데, 그 과정에서 꿀벌들이 바이러스나 곰팡이에 쉽게 감염된다는 게 아닌가. 중국에서 벌꿀이 수입되면서 수익이 낮아진 양봉업자들은 아몬드 꽃을 수정시키는 대가로 벌어들이는 수입을 포기할 수 없겠지만 그를 위해 미국의 전역에서 덜컹거리며 달려온 꿀벌들은 기진맥진해진 상태에서 질병에 쉽게 노출된다는 거다.

 

아카시아 꽃이 피는 시기를 따라 제주도에서 강원도까지 벌통이 몰려다니는 우리나라도 상황이 비슷할 것이다. 과수원에 심은 나무의 유전적 다양성이 낮아 한꺼번에 꽃봉오리를 여니 그때마다 벌통을 옮겨와야 한다. 꿀벌에게 피해주지 않고 오로지 응애만 죽이는 살충제는 결국 응애의 내성을 높였고 꿀벌의 병원균과 바이러스도 백신을 거듭 이겨내는데, 벌통 속 꿀벌의 유전적 다양성의 폭은 좁아지기만 했다. 그런 벌통이 한 군데 모였다 퍼지면 질병은 급속히 확산될 수밖에 없다. 낯선 지역으로 옮겨지면서 기력이 떨어진 만큼 농약에 맥없이 쓰러질 수밖에 없다. 꿀벌이 집단적으로 붕괴하는 현상은 결국 사람의 탐욕이 원인을 제공한 것인데, 꿀벌이 없으면 4년을 버틸 수 없는 사람은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까.

 

역시 자연스러움이다. 자연 속의 다양한 꽃에서 꿀과 꽃가루를 모아 먹으며 꿀벌의 면역력을 높이는 것은 물론이고, 획일적인 양봉산업과 관계없는 개체를 찾아 교배시키며 꿀벌의 유전적 다양성을 넓혀야 한다. 로완 제이콥슨은 극동아시아의 꿀벌을 지목했다. 바로 우리의 토종벌을 의미한다. 벌통을 고정시켜 한해에 딱 한 차례 벌꿀을 따는 우리 시골의 토종벌은 사납지만 활발하고, 모으는 꿀의 양은 적어도 건강하다고 한다. 미국과 유럽의 양봉벌과 달리 여왕벌이 자연에 나가 많은 수벌과 교미하기 때문일지 모른다. 꿀벌이든 아몬드든, 과일이든 채소든, 자연스러울 때 가장 건강한 것은 상식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학교와 학원에 틀어박혀 국어, 영어, 수학, 과학과 사회탐구 시험문제에 몰입하면 좋은 대학과 월급이 많은 기업에 잘 들어갈지 모르지만 창의력은 그만큼 위축된다. 길들어진 만큼 시키는 일을 잘하겠지만 거기까지다.

 

꿀벌이 줄어들자 꿀이 잘 든 남의 벌통을 빼돌리는 양봉업자가 늘어난다는 뉴스가 등장하건만 우리는 조용하다. 로완 제이콥슨의 기대와 달리 우리 토종벌도 전 같지 않다는데, 대책을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 사람보다 먼저 진화한 꿀벌은 사람이 없어도 잘 살아가지만 사람은 아니다. 꿀벌 덕분에 밥 먹고 사는 우리는 꿀벌이 사라지기 전에 지나친 꿀벌 착취부터 반성해야 옳지 않을까. (사이언스올, 2009년 12월)

선생님. 이 글 제 블로그로 퍼 갑니다. 괞찮지요? 선생님 블로그만 가지고도 환경공부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물론 가능합니다. 앞으로도 어느 글이든 필요하시면 활용하십시오.

 
 
 

생태계·동물

디딤돌 2006. 6. 14. 10:40
 

아동문학가이자 시인인 박화목은 ‘과수원 길’ 속에서 어릴 적 기억을 더듬는다. “동구 밭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그렇게 운을 뜨는 시인은 향긋한 아카시 꽃냄새에 취해 말없이 걷던 친구, 그리고 그 친구와 단둘이 걸었던 먼 옛날의 과수원 길을 아련히 떠올린다. 과수원 길을 걷다 얼굴 마주보며 쌩끗 웃던 시인의 친구는 누구였을까. 박화목 시인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어서 함께 걸었던 친구가 누구인지 알 길 없지만, 말없이 초여름을 만끽했을 그들은 당시 참 맑았을 것 같다.


그때 과수원은 논이나 밭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동네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동산에 있었을 거고, 과수원으로 오르는 언덕은 아마도 아카시 나무로 둘러싸였을 것이다. 군수용으로 수목을 마구 강탈했던 일제는 나무가 사라진 비탈에 아카시를 심었다. 산사태를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박화목 시인이 걷던 과수원 길, 어쩌면 원래 울창한 숲이었을지 모를 일인데, 시인이 아카시아라고 노래한 나무는 아카시라 해야 맞다. 땅 표면으로 뿌리가 넓게 퍼지는 특징이 있어 일제가 사방용으로 선택한 아카시는 열대 아프리카 원산인 아카시아와 분명히 다른 종류다.


1924년에 태어난 박화목 시인은 먼 옛날 과수원으로 오르는 길을 회상하며, 눈빛만 보아도 마음이 통했던 친구와 아카시 향기를 기억해냈는데, 계절은 숲 속이라면 그리 덥지 않았을 거다. 아카시는 그런 계절에 꽃을 피워낸다. 주렁주렁 포도송이처럼 늘어뜨리는 하얀 꽃망울은 마침 향기도 진하지만 꿀도 어지간하다. 그래 그런가, 꽃의 맛도 좋다. 아마 시인은 봉오리가 막 펴지는 새하얀 아카시 꽃송이를 따 먹었을지 모른다. 박화목 시인의 다음세대에 해당하는 나도 그랬으니까. 그런데 꿀이 충만한 아카시 꽃을 따 먹을 때에는 조심해야 한다. 요즘은 오염이 먼저 걱정이지만, 당시에도 꿀벌이 덤벼들었을 테니까.


아무리 잘라도 뿌리에서 줄기를 내미는 까닭에 어떤 학자는 깡패식물이라며 저주했지만, 헐벗은 산에서 사태를 막아준 고마운 식물인 아카시는 양봉업자의 소중한 밀원식물이다. 억지로 베어내면 살아있는 뿌리에서 맹아를 연실 내어놓지만 숲이 안정되면 전통 참나무에 자리를 내어주며 소임을 마치는 효자식물이다. 아직 전국의 숲이 안정되지 않아 아카시는 남았고 양봉업자 벌통 속의 꿀벌은 할 일이 남았다. 단풍이 위도를 내려가는 것과 반대로 초여름 벌통은 제주도에서 아카시 향기를 따라 북상한다.


유럽과 아프리카 원산인 양봉용 꿀벌은 아카시 꿀을 찾아 전국을 유람하지만 토종꿀은 제자리에서 온갖 들꽃의 꿀을 모은다. 이때 유명한 꿀벌의 엉덩이춤이 등장한다. 1973년 노벨상은 동물행동학을 생물학의 한 분야로 정착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았다. 꿀벌의 행동을 연구한 칼 폰 프리쉬는 거위 행동을 연구한 콘라드 로렌즈와 가시고기의 행동을 연구한 니콜라스 틴버겐과 더불어 노벨의학상을 받은 것이다. 벌통 위에서 원을 그리면 가까운 곳에, 누운 8자를 그리면 먼 곳에, 8자 춤이 빠르면 좀 가깝고 느리면 멀며, 8자 춤 사이의 방향은 꽃이 있는 쪽을 가리킨다고 수상자는 연구해 밝혔다.


삼천리금수강산의 들꽃과 아카시 꿀을 모아 전 국민의 자양강장을 도모하는 꿀벌은 민간의료의 한 몫을 책임진다. 페니실린의 천배 이상의 소염 효과는 고혈압, 동맥경화와 같은 순환기 질환을 비롯하여 만성두통, 불면증, 정신분열, 안면신경마비와 같은 신경질환, 오십견, 좌골신경통, 통풍, 관절염, 류마티스와 같은 퇴행성질환, 무좀과 습진과 비듬과 같은 피부질환, 자궁내막염, 냉대하, 생리통과 같은 여성질환에 걸쳐 두루 적용될 정도다. 수천 년 전 히포크라테스도 ‘신비의 의약’으로 칭송했을 뿐 아니라 코란에도 인체에 유용하다고 기록돼 있는 민간요법 ‘봉침(蜂針)’은 정작 벌꿀 소비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우습게 여긴다. 전문병원이 따로 있는 다른 나라와 달리 봉침 치료가 오래 전부터 전래돼 상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법의료행위로 규정해 탄압한다.


제 새끼들을 먹이려 모아온 꿀을 빼앗기 것이 영 탐탁하지 않는 꿀벌은 인간에 의한 봉침이 흔쾌할 리 없다. 꿀이야 다시 모아오면 벌충되지만 엉덩이의 침은 생명 자체를 요구하지 않던가. 핀셋으로 가만히 집어 꿀벌의 엉덩이를 처치 부위에 슬쩍 가져다 대 간질이면 꿀벌은 갈고리처럼 꼬부라진 침을 본능처럼 꽂아 넣는데, 침을 꽂은 꿀벌을 떼어내는 과정에서 침에 연결된 내장까지 잃고만 녀석은 그만 생명마저 빼앗기는 것이다. 인간의 요구에 의한 꿀벌의 일방적인 희생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에어컨 풀가동으로 여름을 겨울답게, 석유를 펑펑 쓰며 겨울을 여름답게 보내는 인간은 한 겨울에 딸기를 먹자며 꿀벌을 괴롭히는 까닭이다.


비닐하우스 속의 딸기와 참외와 수박은 그냥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가루수정이 필요한데, 겨울에 꿀벌은 활동하지 않거니와 비닐하우스에 꿀벌이 들어가지 테니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수술의 화분을 암술에 묻혀주어야 한다. 그런데 누가 그 힘겨운 작업에 흔쾌할 것인가. 인건비도 감당할 수 없을 노릇을. 첨단 농법은 꽃이 핀 비닐하우스에 꿀벌을 한동안 풀어주어 가루수정을 유도하지만 농부는 꿀벌의 안위에 관심이 없다. 가루수정이 마무리될 즈음, 비닐하우스는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흥건해지니, 엄한 계절에 비닐하우스로 들어온 꿀벌은 그만, 배은망덕한 인간에 의해 몰살당하고 만다.


독도를 제 땅이라 우기는 일본에게 벌침을 놓겠다는 어떤 이는 분봉하려는 여왕벌을 일장기에 놓고, 꿀벌로 뒤덮인 일장기를 밟아대는 포퍼먼스를 인터넷에 연출한다. 배타적 경제수역을 놓고 한일정부 사이의 의견 좁히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 장면을 본 많은 네티즌은 속이 시원했을지 모르지만 숱한 꿀벌은 새집으로 이사 가기도 전에 짓밟혀죽고 말았다. 꿀 빼앗다 침과 생명까지 빼앗는 인간은 농약 중독으로 죽이더니, 이젠 밟아 죽인다. 삼국시대부터 양봉과 봉침으로 제 몸 보살피던 백성은 꿀벌을 그렇게 대접한다.


아카시든 꿀벌이든 초여름은 생태계의 대부분의 생명들이 번식을 위해 바쁜 계절이다. 과수원의 농부도 마찬가진데, 강화군은 제철 밭 딸기로 관광객을 끌어들인다고 한다. 5년 전부터 싱싱하고 당도 높은 초여름 딸기를 6월까지 생산한다는데, 인기가 이만저만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철모르던 시절 벌통 열어 꿀 찍어 먹다 혼난 기억이 생생한 이들이여, 꿀벌에 감사하자. 아카시의 벗인 꿀벌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해하자. 꿀벌 덕분에 살아가는 걸 잊다 큰 벌 받을라.(물푸레골에서, 2006년 7월호)

기껏 꿀을 빼앗고 설탕물 주는 인간의 약바른 욕심에만 흥분을 했었는데...
그 자그마한 곤충, 디즈니 만화에서 귀여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꿀벌에게도 우리는 너무 몹쓸 짓을 하고 있다는 깨달음에 낯이 화끈해지는구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