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8. 3. 23. 01:29
 

10여 년 전, 푸에르토리코에서 3살 여아가 월경을 했다. 원인은 계란에 있었다. 울며 보채는 아이를 노른자로 달랬던 엄마는 값싼 미국산을 구입했는데, 그 계란에 상당량의 여성호르몬이 함유되었던 거다. 남보다 더 많은 돈을 빨리 벌어들이려고 대낮처럼 불 밝힌 철망상자 속의 닭에게 여성호르몬이 첨가된 사료를 24시간 먹인 결과였다. 이후 중국에서 비슷한 뉴스가 나왔지만 세상은 놀라지 않았다. 화학농업과 공장식 사육으로 인한 농축산물의 오염 소식에 이미 식상한 것이다.

 

농산물과 식품의 오염 문제를 방영하기 무섭게 매진되는 유기농산물은 우리 중산층이 선호하는 웰빙의 표상이 되었다. 여유 있는 주부는 다급히 가까운 유기농산물 직거래 매장에 회원 가입해 안심할만한 농산물을 한아름 구입하지만 그 열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가격이 비교적 높지만 사실 가격 때문만은 아니다. 먹지 않으면 없어도 생존하는데 큰 지장이 없는 공산품에 비하면 농산물은 그리 비싸지 않다. 유기농산물 구입 열기가 냄비처럼 식는 건 농작물 오염 현상의 원인을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브룩스가 자신의 책 《보보스》(동방미디어, 2001)에서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중산층의 삶”을 긍정적으로 조명한 이후, 그들이 추구하는 ‘생태적 삶’은 세계 중산층의 선망이 되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부르주아와 정신적 여유가 넘치는 보헤미안의 장점을 지니는 이른바 ‘보보스’ 족은 부를 과시하기보다 삶의 여백을 추구하며 많이 먹기보다 잘 먹는데 관심이 많다. 그들은 자신의 고상한 노후와 아이의 건강한 내일을 위해 유기농산물을 고르고, 시민단체에 가입해 회비를 내는 걸 거리끼지 않는다.

 

‘생태적 삶’을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 ‘생태적 골프장’과 ‘생태적 개발’이라는 구호가 난무하는 와중에 냉소적 반응을 유발시키기도 하는 ‘생태적 삶’은 생태계가 그렇듯, “순환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삶”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은 물론, 그 땅에 자생하는 숱한 나무와 풀과 미생물과 곤충과 새와 짐승의 생명이 존중하는 골프장이라면 생태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산을 길게 뚫고 광활한 갯벌을 매립하는 개발도 생태적일 수 없다. 그렇다면 유기농산물은 생태적일 수 있을까. 어떤 유기농산물을 누구에게 어떻게 구입해 먹는가에 따라 판단을 달리할 수 있을 것이다.

 

유기농산물은 먹는 이와 재배하는 이의 건강은 물론, 땅을 살리는 농산물이어야 자격을 얻는다. 유기농산물은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 유기적 연결을 도모한다. 나와 내 가족의 건강을 약속하는 유기농산물일지라도 생산자인 농사꾼의 삶을 위협한다면 유기적일 수 없다. 힘겹게 생산한 유기농산물이 유통과정에서 터무니없는 이윤이 덧붙어 판매된다면 소비자에게 위화감을 선사한다. 생산자가 중간상인과 소비자에 종속돼 자존심을 잃는다면 유기농산물의 지속가능한 공급은 위태로워진다. 땅의 생태성도 파괴되기 쉽다.

 

수입 유기농산물은 그 나라의 농토와 농민을 살리는데 기여했을지 모르지만 소비자의 땅을 살리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 운송하는 과정에서 많은 에너지를 소비, 온난화를 부추겼다. 물론 예외는 있다. 소비자가 사는 땅에서 생산이 불가능한 농산물이라면 수입하지 않을 수 없다 반드시 필요해 수입하는 경우라도 생산자의 적정 이익을 산정한 유기농산물이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유통 이윤을 최소화했다면 수입을 환영할 수 있다. 이른바 ‘공정 무역’이다. 그런 설탕과 커피가 유기농산물 직거래매장에서 판매된다.

 

우리 땅에서 재배한 유기농산물이라도 농민이 소비자에 직접 판매하기 실질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중간상인의 이윤을 최대한 배제한 판매자가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한다면 ‘공정 교역’일 것이다. 유기농산물 직거래매장이 그렇다. 그런 매장에서 유기농산물을 구입하는 소비자는 생산자의 고충을 이해하고 고마워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덕분에 나와 내 가족의 건강이 도모되지 않던가. 땅이 살아야 농부가 살고, 농부의 삶이 보장되어야 소비자의 건강도 보장된다. 유기적인 관계가 건강해진다. 바로 ‘웰빙’이다.

 

웰빙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이 생태적 삶을 즐기는 보보스이길 바란다면 이웃을 배려해야 한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웃’의 웰빙까지 도모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웃에는 가족은 물론, 유기농산물을 재배하는 농부, 그 농부의 땅, 그 땅을 풍요롭게 하는 생태계, 그리고 그 땅을 물려준 선조가 우리에게 베푼 문화와 역사, 그 문화와 역사를 이어갈 후손이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그들의 생태적 삶이 두루 보장되는 웰빙만이 비로소 웰빙이다.

 

비만이 가난의 상징이 된 요즘, 지나치게 빠른 2차성징과 성 정체성을 교란하는 내분비교란물질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먹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 거기에 더, 세계 식량 비축량이 위축되는 이때, 안전은 물론 안보 차원에서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 소비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농작물의 오염은 마땅히 피해야하지만 그 이전에 생산자에 대한 적절한 분배를 고려해야 하고, 지역의 자급기반을 손상시키지 않아야 한다. 참고로, 쌀을 포함한 우리의 식량자급은 27퍼센트에 불과하다. 지속가능한 웰빙에 턱없이 모자라는 기반이 아닐 수 없다. (삼성생명 사보, 2008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