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09. 1. 21. 13:24

 

 

모든 생명은 먹을거리, 다시 말해 밥이 그 중심이다. 밥이 없으면 생명활동을 영위할 수 없다. 건강을 유지하며 짝을 짓고 다음세대를 이어가려면 밥을 먹어야 한다. 물론 먹을거리의 에너지 원천은 태양이지만 녹색식물을 제외하고 태양이 쏟아내는 에너지를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그래서 현미경으로 겨우 볼 수 있는 미생물에서 지구촌에서 가장 덩치가 큰 흰수염고래에 이르기까지 밥을 먹는다.

 

밥은 입으로 먹는다. 옛 사람들은 “내 논에 물 들어갈 때와 자식 입에 이팝 들어갈 때 가장 기쁘다.”고 했다. 여기서 이팝은 흰 쌀밥을 말한다. 봄철에 가는 가지마다 자잘한 흰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나무가 있다. 바로 이팝나무다. 누가 나뭇가지에 흰 쌀밥을 잔뜩 묻혀놓은 모습으로 진한 향기를 내뿜는 이팝나무는 시민들이 즐겨 찾는 공원의 입구에 주로 심는다. 밥을 몸으로 넣는 일을 맡은 입은 대개 머리의 눈과 코 아래에 자리잡는다. 평소에 먹던 밥인지 눈으로 살펴본 다음 코로 안전을 확인하고 냉큼 삼킬 수 있는 위치가 거기다.

 

입에서 삼킨 밥은 분명히 몸속으로 들어갔지만 아직 세포 밖에 있다. 얇은 세포막을 통과해 안으로 흡수되어야 비로소 영양분이 되므로 대부분의 동물은 복잡한 과정을 거쳐 밥을 잘게 나눈다. 흡수될 수 있는 분자 상태까지 소화시키는 거다. 그런데 생명체의 세포 속으로 흡수되는 모든 분자들은 밥의 다양한 개성과 관계없이 똑같다. 모든 생물이 가지고 있는 아미노산이나 핵산, 당이나 지방, 비타민이나 무기양양소가 똑같은 건, 같은 조상에서 진화돼 분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그래서 먹고 먹히는 밥 그물망이 복잡하기 짝이 없어도 살아가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먹을 수 있는 상태의 밥이 입 앞에 충분하다면 다음세대를 이어나가는데 큰 문제가 없다. 그 조그만 개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데 아이스크림에 대장균이 몇 마리 들어있는지 과학자들은 어떻게 알까. 이분법으로 세대를 이으며 개체수를 키워가는 미생물의 특징을 이용한다. 조사할 아이스그림의 만분의1을 넣은 영양배지를 인큐베이터 안에 10시간만 놓아 보자. 20분에 한 번 분열하는 대장균 한 마리는 5억 배 넘게 불어, 마침내 점처럼 눈에 띌 것이다. 그 점의 숫자를 세고, 희석한 만큼 곱하면 아이스크림 속 대장균의 총 개체수가 된다. 밥이 충분해 마음 놓게 늘어난 까닭이다. 대장균의 입은 세포막이다. 세포막으로 밥을 감싸 몸 안으로 끌어들여 소화시키고 배설도 한다.

 

환경이 늘 좋기만 한 게 아니다. 좋은 환경은 오히려 아주 잠시 뿐이다. 밥이 없거나 내가 다른 생물의 밥이 될 위기에 몰리기도 한다. 밥이 없거나 날씨가 추워 마음껏 다음세대의 개체를 늘리기 어렵다면 대장균은 유전자를 복제하며 빨리빨리 번식하는 이분법을 포기하고 유전자를 교환하는 방식으로 느리게 세대를 잇는다. 그래야 바뀌는 환경에 적응 가능한 후손을 얻을 확률이 높아진다. 대장균이나 버섯 같은 생물들이 그런 전략으로 세대를 이어가는데, 그들보다 몸이 크고 복잡한 생물들은 대부분 암수가 짝짓기를 하는 유성생식에 의존한다. 그 덕분에 변화무쌍한 환경에서 종을 유지하며 이어오거나 바뀐 환경에 적응하며 새로운 종으로 다양하게 진화할 수 있었다.

 

같은 생태계 안에서 종이 다른 개체들은 서로 먹고 먹히지만 생태계에 천적만 있는 건 아니다.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관계가 오히려 많다. 먹는 자에게 이로운 밥이므로 천적도 넓게 보면 생태계에 도움을 주는 관계로 풀이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생물은 다음세대의 개체를 충분히 생산할 필요가 있겠다. 예측할 수 없이 바뀔 뿐 아니라 조심해야 할 천적이 수두룩한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유전적 다양성을 유지하는 개체들이 많아야 유리할 테니까 그렇다. 내일 만날 환경이 어떤 유전자 개성을 요구할지 미리 짐작할 수 없으니 일단 유전자를 다양하게 가진 후손을 많이 확보해 놓고 볼 일이다.

 

천적이 드문 종류는 대개 덩치가 크다. 바다의 참치나 육상의 코끼리가 그렇다. 뿌리내린 식물을 먹는 코끼리는 여간해서 빠르게 움직이지 않는다. 한데, 그들의 체구가 최근 줄어든다고 한다. 덩치가 충분히 크기 전에 후손을 생산하려는 본능이 작동한다는 거다. 새로운 천적, 다시 말해 문명화된 사람 때문이다. 더 자랄 수 없을 만큼 커진 후 천수를 누리다 죽었는데, 느닷없이 나타난 그물이나 낚시, 총과 독극물에 생명을 속절없이 잃게 되자 어린 나이에 짝짓기에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원주민은 그러지 않았는데 상아 때문에, 아니 돈 욕심 때문에 생명을 잃게 되다니, 코끼리 가운데 상아가 아예 없이 자라는 개체도 늘어난다고 한다.

 

사라져가는 참치의 현실을 세계에 알리려 노력하는 국제환경단체인 그린피스가 얼마 전 우리나라에 와서 시위를 했다. 일본보다 덜하긴 해도 한국 역시 참치 남획으로 악명을 떨친다면서 지나치게 촘촘한 그물로 어린 참치까지 싹 쓸어가는 어업을 참아들라고 당부했다. 문제는 참치만이 아니다. 우리 남해안에서 주로 잡히는 삼치도 비슷한 실정이다. 지나치게 어린 개체를 잡아들인다. 그물에 걸린 삼치의 90퍼센트 이상 한 차례도 알을 낳지 않은 어린 개체라는 게 아닌가. 조기도 갈치도 마찬가지다. 이러다 우리 바다에서 물고기들이 사라질지 모르는데,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어린 조기가 알을 갖기 시작했다고 한다. 식물에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한다. 흙과 공기의 오염이 심해지면서 남산의 소나무는 강원도보다 솔방울을 많이 단다.

 

전국의 가정과 음식점, 그리고 식품가공회사에서 버리는 음식쓰레기는 대부분 바다에 버린다. 공해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자는 ‘런던협약’이 있지만 음식쓰레기는 무시되는데, 앞으로도 계속 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도 그 협약에 1992년에 가입했기 때문이다. 수도권과 서해안의 도시에서 나오는 음식쓰레기는 군산 앞바다에서 가까운 공해에 버린다. 유조선 비슷하게 생긴 커다란 배가 음식쓰레기를 꽁무니로 버리면 삼치와 갈치와 조기들이 새까맣게 달라붙어 허겁지겁 먹어댄다. 그 음식쓰레기에는 온갖 식품첨가물이 섞여 있고, 우리는 그 물고기를 상에 올려놓으니, 돌고 돌아 내가 버린 음식을 내가 다시 먹는 셈인데, 따지고 보면 삼라만상의 생명이 다 그렇다.

 

1960년대, 밖에서 퍼내야 하는 우리 집 화장실은 다섯 가구가 함께 썼다. 한달이면 꽉 찼고, 사람을 불러 해결하지 않으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동네 꼬맹이들이 ‘똥퍼 아저씨’라 하던 이는 어깨에 들쳐매고 온 커다란 들통을 내려놓고 화장실에 고인 인분을 퍼담았다. 그리고 채마밭 가장자리에 파놓은 구덩이에 부었다. 그 인분은 김장김치나 무를 심기 전에 밭에 뿌릴 거름이 되고, 우리 집은 그 밭에서 생산한 배추와 무로 김장을 담가 겨우내 먹었다. 내가 똥이 되고 똥이 다시 밥이 되는 순간이다. 우유도 함부로 먹지 말라고 주장하는 식품학자가 있다. 맑은 물과 공기를 마시지 못하고 오직 사료만 축낸 젖소의 우유에 칼로리는 넘쳐도 영양분이 적다는 것이었다. 젖소에 아무 풀을 먹이면 안 된다. 제초제 성분이 우유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돌고 도는 생태계의 그물은 그렇듯 모두 연결되었다.

 

모든 생물은 밥이 풍성할 계절에 다음세대 개체들을 세상에 내놓는다. 그때가 대개 늦은 봄이거나 이른 여름이다. 그러므로 보통 그 전에 짝짓기에 들어가야 한다. 덩치가 작은 새나 짐승은 이른 봄이거나 늦은 겨울일 때 짝을 찾는다. 초식동물은 새싹이 돋아날 때, 육식동물은 초식동물의 새끼들이 막 태어난 뒤 새끼를 낳는다. 밥을 충분히 먹일 수 있다면 새끼를 두번 낳는 동물도 있다. 먹이가 충분한 여름에 날개가 더 크고 화려한 호랑나비를 비롯한 많은 곤충이 그렇다. 제비와 뿔논병아리도 알을 두번 품는다. 먼저 태어난 형제가 나중에 부화된 동생들을 위해 먹이를 잡아주는 풍경도 관찰할 수 있다.

 

호시탐탐 노리는 천적이 늘어나니 어미들은 제 새끼를 보살피려 무척 애를 쓰지만 불가항력일 경우 어쩔 수 없다. 늑대나 여우가 낳은 많은 새끼 중 많은 개체가 커다란 매나 다른 육식동물의 먹이가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가 부엌에서 일하는 사이 툇마루로 기어나온 아기를 늑대가 물어가는 일은 우리나라에서 드물지 않았고 등에서 잠시 내려놓고 시냇물을 마시는 사이 하늘에서 벼락같이 내려온 매가 아기를 채가는 일은 몽골에서 흔했다고 한다. 한데 사람은 아기를 낳는 계절이 따로 없다. 다른 동물에 비해 밥이 언제나 풍성하기 때문인데, 그건 애완동물도 그렇고, 사람 주변에 사는 쥐도 그렇다. 쥐가 그러니 고양이도 그럴 수 있겠다.

 

늑대가 강보에 싸인 아이를 키웠다는 인도의 사례도 있지만 우리 조상은 아기를 물어간 늑대보다 아기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자신을 탓했다. 호랑이를 몹시 두려워했어도 없애야 할 천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아이를 물어죽은 도사견처럼 반드시 찾아내 즉결처분하지 않았다. 사실 아무리 사나운 도사견도 함부로 사람을 물지 않는다. 호랑이도 늑대도 다른 밥이 주변에 있다면 굳이 위험한 사람 근처에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은 무서운 존재라는 걸 그들은 잘 안다. 천지사방을 뛰어다니며 힘을 과시하려는 개를 묶거나 가두었기에 스트레스가 쌓였을 테고, 만만해 보이는 아이가 지나갈 때 끈이 풀기거나 우리가 열려 폭발했을 뿐이다. 원래 사람을 잘 따르는 개를 묶어나 가두어 몸집을 불린 다음 잡아먹으면 맛있을까. 개의 스트레스가 먹는 이의 몸에 고스란히 전달될 텐데.

 

태국의 한 사원에서 기르는 호랑이는 아주 겁이 많고 수줍어한다고 한 채식주의자는 전한다. 개가 짖으면 슬며시 피한다는데, 사원에서 수행하는 승려들과 똑같이 밥을 먹이며 일체의 고기도 주지 않자 그리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여의도에 여름이면 ‘엽기토기’가 나타난다고 한다. 아이가 하도 보채는 통에 하는 수 없이 기르던 문방구 종이상자 속의 어린 토끼였다. 집을 지저분하게 만들며 자라더니 어느새 귀여운 모습은 사라지고, 아이마저 흥미를 잃자 아이 부모가 한강 둔치의 공원에 슬그머니 버린 것인데, 공원에서 통닭 뼈다귀와 말라버린 삼겹살을 갉아먹다 사나워진 토끼는 나들이 나온 사람에게 접근하며 먹이를 가로챈다는 게 아닌가. 어떤 환경에서 무슨 밥을 먹는가에 따라 성질과 태도가 달라진다고 채식주의자는 주장한다. 초식동물은 대개 순하고 육식동물은 포악한 걸 보면 그럴듯하다.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사람은 잡식동물이다. 고기를 찢는 송곳니와 채소나 곡식을 가는 어금니가 조화를 이룬다. 그런데 송곳니와 어금니 비율에 차이가 있다. 어린이는 송곳니 하나에 어금니가 둘, 어른은 송곳니 하나에 어금니가 다섯, 사랑니라고 말하는 마지막 어금니는 음식을 씹지 못하니 빼면 넷이다. 육식과 채식의 비율을 송곳니와 어금니 비율에 맞추면 가장 이상적이라고 영양 전문가는 주장한다. 식단을 그렇게 유지할 때 몸과 마음이 건강하다고 강조한다. 육식이 반드시 살코기를 뜻하는 건 아니다. 우유나 계란, 물고기도 포함해야 한다. 우리 식단에 육식은 지나치다. 장년과 청소년층마저 병원 신세를 앞당겨 기게 만들 정도다. 요즘 광우병이나 구제역이나 조류독감을 퍼뜨리는 어린 소나 돼지나 닭은 물론이고, 사람과 오래토록 아주 친근한 관계를 유지해오는 개를 잡아먹을 필요는 더욱 없지 않을까.

 

많은 동물은 자기에 맞는 밥을 찾아 머나먼 거리를 기진맥진 이동한다. 건기를 맞아 풀이 말라버린 초원을 떠나 머나먼 길을 재촉하는 아프리카의 동물을 보라. 천적이 길목을 노리지만 필사적으로 밥을 찾아 이동한다. 무리지어야 안전하지만 희생되는 동물도 적지 않다. 육식동물도 그때를 놓치면 제 새끼를 제대로 키울 수 없을 것이다. 혹등고래도 적도에서 낳은 어린 새끼를 데리고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해 크릴새우가 무한정인 남극으로 가야 한다. 짧은 여름이 지나면 크릴새우도 사라진다. 서둘러야 한다. 시베리아 벌판에서 여름철 새끼를 낳고 키운 도요새와 물떼새 같은 철새들도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 우리 서해안의 갯벌로 와야 한다. 가을철 2주일 동안 갯벌에 많은 밥을 식성대로 먹고 몸무게가 두배 이상 늘면 다시 호주나 인도네시아로 떠날 수 있다. 봄이면 다시 찾아와 배불리 먹고 다시 시베리아로 날아갈 것이다.

 

흔히 자연을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라고 말하지만 다정다감하게 서로 돕는 공동체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어른과 아이가 함께 읽으면 좋을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황선미 지음, 사계절, 2000)에서, 계란만 죽어라고 낳던 ‘잎싹’은 어렵게 양계장을 빠져나가 족제비에 어미를 잃은 청둥오리 알을 대신 품으며 모성애를 느끼고, 다 자란 청둥오리를 멀리 보낸 뒤 족제비에 희생되지만 제 운명을 받아들인다. 어린 청둥오리를 지키려는 잎싹의 부리에 찍혀 눈 하나를 잃은 족제비도 제 새끼를 먹여야하는 걸 늙은 잎싹이 이해했던 것이다. 윈드서핑하던 아이가 상어에 물려 죽은 사고가 호주에서 발생했을 때, 관계당국은 그 상어를 찾아내 처단하려 했지만 그 아이의 부모는 극구 말렸다고 한다. 상어의 터전에 침범한 건 자신의 아이였고, 상어로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걸 제 아이도 이해했을 거라는 이유였다. 삼라만상의 생명에게 밥이 그 중심이라는 걸 이해하는 사람의 아량이었을까. (사이언스올, 2008년 1월 21일)

 
 
 

생태계·동물

디딤돌 2006. 12. 4. 02:07

     

1990년대 초반, 생태학술조사를 위해 덕유산국립공원을 답사하던 일행은 인적 드문 길을 찾아 하산을 서둘렀다. 회의시간에 맞춰야 했던 것인데, 계곡이 넓어지면서 대벌레가 눈에 띈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연구원을 채근하며 걸음을 재촉하는데, 어라, 이번엔 대벌레들이 죽어 널브러져 있다. 무슨 일일까. 대나무인양 갈듯 말듯 흔들리는 대벌레를 처음 봐 신기해하던 연구원은 이내 얼굴이 굳어진다.

 

수수께끼는 넓은 등산로에서 풀렸다. 관리사무소에서 백련암까지, 자동차가 이동할 수 있게 잘 닦아놓은 등산로가 좁아질 지점에 방역업체의 트럭이 떡 버티고 섰고, 일단의 인부들이 안개가 낀 듯 주변 숲을 연막으로 온통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런! 여기는 국립공원인데…” 말문이 막힌 연구원은 죽은 대벌레를 들여다보던 카메라를 돌려 방제장면을 찍어댔고, 범상치 않은 젊은이가 이리저리 촬영하는 모습에 놀란 인부들은 초로의 사내를 냉큼 불러왔다.

 

카메라를 내놓으라고 소리 지르며 허둥지둥 달려온 사내는 “하산하는 사람들 모기 물리지 않고 송어회 드시라고 무주군에 어렵게 부탁해 약을 뿌리는 것인데 왜 사진을 찍는 거요!” 거칠게 항의하며 핏대를 세운다. 국립공원에서 연막소독이 정당하다면 젊은이가 사진을 찍든 말든 관계치 말아야할 텐데 송어회 양식장을 경영하는 그 사내는 왜 저리 성화일까. 무주군에서 연막소독을 지원했다면 양식장은 물론 무주군과 덕유산국립공원까지 책임이 확장된다. 국립공원 당국의 허락이나 요청 없이 매포소를 통과하지 못했을 게 아닌가. 젊은 연구원이 아니라 이번엔 나이 든 박사들이 나섰고, 당황한 사내는 기세등등했던 자세를 급히 낮춘다. 좋은 일 한다고 했는데, 한번만 봐달라는 거다.

 

카메라를 빼앗기지 않은 젊은 연구원은 사내 앞에서 언론 고발을 선언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발이 닳도록 찾아온 국립공원 관계자의 읍소가 효력을 발휘했는지, 지도교수는 열혈 제자에게 자제를 당부한 모양이었다. 그 광경을 무심히 바라보던 일행 중 몇 명은 어제 저녁, 문제의 양식장에서 송어회 몇 접시 비웠던 터라 자세가 몹시 민망했는데, 국립공원 내에 방제는 말이 되지 않지만 어찌 양식장 설치와 횟집 영업이 허용될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산 무지개송어는 덕유산국립공원 계곡에 원래 분포하지 않는데 말이다.

 

역시 1990년대 초, 덕유산국립공원에 마련된 1만 명 규모의 캠프장을 놔두고 1만 5천 명 규모의 캠프장을 굳이 설악산 기슭에 조성하던 국제잼버리대회 담당자는 벌목을 항의하는 환경운동가에 맞서 인터뷰를 자청했다. “잡목을 없앤 자리에 잔디를 깔아 놓으니 환경이 좋아졌다!”고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 너스레떤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잡목은 소나무를 제외한 거의 전부다. 한 그루에 수백 종의 동식물이 삶을 기대는 참나무도 당연히 잡목으로 분류한다. 아무튼, 외국인 백여 명에 불과했던 국제잼버리대회는 국내 참가자를 늘여야 했고, 덕유산 잼버리 대회 이상의 성황이었다고 당시 언론은 호들갑떨었다.

 

잼버리 일정에는 야생조류 관찰도 있었다. 캠프장 측은 찾아준 외국인들이 모기 물릴세라 항공방제를 실시했고, 쌍안경을 준비한 잼버리 대원들은 그날 새 한 마리 구경할 수 없었다. 대벌레는 몰라도, 죽어 널브러진 다른 곤충은 무섭게 많이 보았을 거고, 농약 중독된 곤충을 잡아먹다 비틀거리는 비염걸린 야생조류를 발아래에서 관찰한 운 좋은 대원이 있었을지 모른다. 그 대회에 참석한 스웨덴 국왕은 일회성 행사를 위해 천혜의 자연을 파괴한 행위에 안타까워했는데, 현재 잼버리가 열렸던 자리에는 울산바위를 바라보는 고층 콘도미니엄들이 솟아 있고, 차를 놓고 나온 도보 방문객은 경관이 가로막혀 기막혀한다.

 

백두대간에서 힘차게 뻗은 한남정맥의 끝자리에 우뚝 선 계양산은 얼마 전까지 황해를 굽어보았던 인천의 진산이다. 민족상잔의 전쟁 뒤에 헐벗은 백성에게 땔감을 내주고 벌거숭이가 되었다가 서서히 회복되는 생태계에는 반딧불이를 비롯하여 도롱뇽, 버들치, 민물가재와 같이 청정지역을 대표할만한 동물들이 터 잡고 있다. 그중 북사면의 생태계가 가장 양호한데, 바로 그 자리에 한 여성이 50일 가까이 나무 위에 올라 내려오지 않는다. 내놓으라 하는 대기업에서 하필 그 자리에 골프장을 건설하겠다는 계획을 접지 않기 때문이다.

 

산이 좋아서 찾는 인파로 인해 등산로가 천지사방으로 얽힌 계양산은 이미 신도시로 연결되는 송전탑으로 등성이가 패였고 기슭마다 차오른 주택으로 몸살을 앓는데, 한 줄기는 공항으로 빠지는 넓은 아스팔트로 잘려나간 지 오래다. 계양산에 오래 전부터 터 잡던 다람쥐와 너구리는 협소한 공간에서 근친교배에 의존하다 악성유전자가 축적되었는지 사라지고 말았지만 간판 화려한 음식점은 목하 성업 중이다. 인천시는 에코다리를 지어 잘라진 줄기를 연결하겠다는데, 목숨 겨우 부지한 몇 안 되는 동물들은 그 다리를 사양할 듯하다. 많은 예산을 들여 기왕에 만든 다리, 사람도 함께 이용하겠다 하므로.

 

23층 4채가 네모꼴로 마주하는 단지의 가운데 공간은 주차장이고 놀이터가 저 멀리 있는 아파트에서 엄마는 아이들을 놀이터로 보내지 않는다. 우범지대가 되고 날았기 때문인데, 그 아파트단지에 어떤 시댁의 함이 들어섰다. 한 무리의 청년들이 기대에 찬 목소리를 모아, 일제히 “함 사시오!” 외치자 여기 저기 베란다에 문이 열리고, 주민들은 호기심어린 고개를 내민다. 추억이 서린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을 텐데, 어디선가 “여기가 너네 집 앞마당이냐! 조용하지 못해!” 거친 공명이 밤 공간을 찢는다. 때까치는커녕 참새 한 마리 볼 수 없이 삭막한 아파트단지에서 옛 정취는 사치였던가. 깜짝 놀란 청년들이 후다닥 사라져 적막해진 아스팔트 광장. 잠시 후 대리운전 승용차가 멎더니 흐느적거리는 취객의 발걸음이 밤공기를 교차한다.

 

매미가 시끄럽다고 다 자란 나무들을 간선도로 사이의 둔덕에서 베어내자 질주하는 자동차와 폭주족의 소음이 밤낮 없이 베란다를 넘어온다. 절박한 메뚜기 한 마리의 호소를 들은 지율스님은 100일이 넘는 단식으로 천성산의 생태계를 보전하려 애썼는데, 길거리 고양이를 향해 비비탄을 발사하는 아파트단지의 아이들은 가축들의 살처분에 도무지 무감각하다. 조류독감이나 구제역 발생지역과 가깝다는 이유로 멀쩡한 가축들이 무더기로 살처분되지만, 닭과 양념치킨, 소와 불고기의 관계를 짐작하기 어려운 만큼 가축의 고통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생산과 소비가 철저하게 분리된 도시에 자연이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넓은 프라이판에 기름을 둘러 계란을 까 넣어보자. 독일의 경우, 노른자는 도시이고 노른자를 둘러싼 흰자는 시골이다. 넓은 검은 색 프라이판은? 울창한 숲이다. 그런 도시에 녹지축을 가로, 세로, 동심원으로 배치하고 차는 서행한다. 그러자 5분 걸어 반가운 이웃 만날 수 있는 자투리공원마다 부리가 붉은 새들이 모여들어 찾는 이에게 예쁜 울음소리를 선사한다. 영국 런던의 자랑인 하이드파크에서 방문객을 즐겁게 하는 다람쥐는 박물관이 즐비한 미국 워싱턴DC에도 흔하다.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일본 동경에 조성한 우에노공원의 습지에는 철새가 몰려들어 장관을 이루는데, 도시를 더욱 자랑스럽게 하는 그 동물들은 자동차나 콘크리트를 따라 들어왔을 리 없다.

 

멀지 않은 과거만 해도 논두렁과 밭두렁이 넓었던 곳에 우후죽순처럼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더니 녹지가 부족한 도시에는 한 뼘의 습지도 없다. 최근 뜻 있는 사람들은 개발될 예정인 논과 밭을 보전해 물려주자고 민원을 띄우느라 애쓴다. 그들의 노력에 힘입은 지방자치단체가 논두렁 밭두렁 사이에 그 땅에 오래 어우러졌던 풀과 나무를 심고 샘물이 솟는 자리에 습지를 조성했더니, 이처럼 반가울 수가! 한동안 볼 수 없었던 때까치도 다시 찾고 철새도 내려앉는다. 어떻게 알았는지 족제비와 너구리도 흔적을 남긴다. 그뿐이랴. 봄이면 저녁에 개구리 울고, 새벽이면 새 울음소리가 교교하다. 자연에 허기졌던 생물들이 사람이 배려한 한줌의 생태공간이라도 그게 어디냐며 모여든 것이리라.

 

사람은 논두렁 밭두렁이 건강할 때 몸과 마음이 건강했다. 주위의 동물과 식물도 건강했다. 건강한 논두렁 밭두렁은 사람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을 보장해주었던 것인데, 논두렁 밭두렁이 사라진 회색도시에 사는 우리는 자연을 위해 무엇을 마련하면 좋을까. 대단한 생태공간이 우선은 아니다. 그들과 함께 공존하려는 작은 배려가 아닐까. 자연만이 아니다. 삭막한 회색공간에서 여유를 잃어가는 자신을 위해 더욱 시급한 노릇임에 틀림없다. (코오롱건설 사보, 2006년 11-12월호)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06. 11. 16. 14:51

 

     요즘 대학의 큰 강의실은 컴퓨터와 빔프로젝터가 비치돼 있다. 어두운 교실에서 편집한 영상화면을 비춰주며 강의하는 교수의 모습은 새롭지 않다. ‘첨단 강의’는 빔프로젝트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런닝 e-learning’ 이라 이름붙인 온라인 강의를 모니터 앞에서 들여다보는 학생도 적지 않다. 첨단으로 갈수록 사소한 고장이 잦지만 문제는 학생들과 눈을 마주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꺼번에 많은 학생을 상대할 때 효과적인 첨단 강의는 수강생의 이해 정도를 따지지 않는다. 학생의 개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얼마 전 정부는 미터법을 사용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부과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국민주택 규모 아파트는 전용면적 25.7평이 아니라 85평방미터 이하라 해야 한다. 벌금을 피하려면 하는 수 없다. 금 한 돈은 몇 그램일까. 그건 중요지 않다. 1986년 1월 28일, 발사 60초 만에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폭발한 이유가 서로 다른 도량 단위였다. 표준화를 기반으로 첨단으로 치닫는 세계화 시대에 미터법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다양성을 배려하는 문화와 전통은 세계화의 걸림돌이다.

 

첨단일수록 복잡하고, 복잡할수록 정교한 공업기술사회는 예측 가능해야 한다. 농작물도 축산물도 예측 가능해야 하고 법과 경제는 물론 교육도 예측 가능해야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래야 기업이 원하는 인재가 된다. 교육부가 아니다. 교육인적자원부다. 교육인적자원부도 미터법을 원한다. 원어민 교사는 미국 영어를 구사해야 하고, 강남 고액학원에서 진두지휘하는 논술을 달달 외워야 대기업에 줄 서 들어가는 일류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 정 맞을 모난 개성은 교육인적자원부도 기업도 원하지 않는다.

 

신도림역에서 안내방송이 나온다. 지하서울역 선로에 장애인들이 연좌농성하기 때문에 지하철이 지연되고 있다고. 눈앞의 현상만 들여다보고 내놓는 해석은 천박할 뿐 아니라 무책임하다. 이 땅의 장애인들은 심심풀이로 지하철 선로를 점거할까. 안내방송 마이크를 잡은 지하철 노동자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운 장애인들의 고충을 이해해야 한다. 임금임상을 원하는 그들도 가끔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을 불사하지 않던가. 시위대의 거리행진 대열에 자신의 자동차로 돌진한 사람은 파업을 하지 않을까. 운전자를 두둔하는 중앙 일간지의 기자는 파업이 불필요한 직장을 다니는 선남선녀일까. 남을 그의 처지에서 배려하지 못하는 기사는 획일적인 사회에서 누구에게 충성할까.

 

건강한 숲은 키 큰 나무만 즐비하게 심은 여의도나 뚝섬과 모습이 다르다. 상층을 이루는 나무보다 중층, 중층보다 훨씬 많은 하층에 무수한 나무들이 자라 올라간다. 크고 작은 나무들의 생존이 배려되는 숲은 앞으로 닥칠 환경변화를 너끈히 이겨낼 것이다. 삼계탕용으로 집단 사육하는 닭은 극도로 육종돼 유전자가 아주 단순하다. ‘과학축산’이 권장하는 엄격한 방식으로 사육해야 35일 만에 뚝배기에 쏙 들어가지만 창문이 열리기라도 하면 몰살된다. 반면 발로 흙을 헤집고 다니는 마당의 닭은 모진 풍파에도 끄떡없다. 간장독과 아이들은 밖에 내놓아도 겨울에 얼지 않는다 했는데, 아파트에 간장독이 사라진 요즘, 겨울이 여름 같고 여름이 겨울 같은 획일적 환경에 길든 아이들은 대입준비 선행학습으로 친구 사귈 시간이 없다. 겨울에 내놓을 수 있을까.

 

방아쇠를 당기는 힘은 남여에 차이가 없으므로 여성도 군대에 갈 수 있다는 표어를 보았다. 같은 논리로, 남성도 군대 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될까. 기린은 높은 가지의 잎을 따먹으려 목이 길어진 것이 아니다. 입 높이의 나뭇잎을 양보하다 그렇게 진화된 것이다. 다양한 환경으로 적응하는 개체들을 배려하는 생태계에서 기린은 목이 긴 개성을 갖게 되었다. 생태계는 그렇게 다양해진 생물종이 다채롭게 어우러져 건강하고 아름답다. 사람도 생태계의 자손이다.

 

순환과 다양성이 보장되는 생태계에는 개성이 존중된다.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는 생태적으로 건강하다. 표준을 강요하는 획일적 신자유주의에서 생태사회는 한낱 꿈이어야 하나. (환경과생명, 2006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