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20. 12. 11. 22:54

 

반년 넘게 아침 10시 뉴스에 신경을 쓴다. 전날 자정까지 집계한 코로나19 현황을 질병관리청에서 발표하기 때문이다. 확진자가 하루 10명 이내로 사나흘 진정돼 다행이라 여겼던 때가 있었건만, 어느새 까마득하다. 누군가 거리두기를 무시하다 대규모 감염이 폭발하고, 그 여파로 어딘가 소규모 집단감염이 발생하길 벌써 수개월이다. 확진자 상황에 하루하루 일희일비하는 건, 추이가 수업과 연계될 거라 학교에서 통보한 까닭이다. 이러다 비대면 온라인수업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 아닌가?

 

호사다마라 했던가? 하루 누적 확진자가 10명 이하로 내려가며 숨쉬기 편해질 즈음, “코로나 개나 줘라!” 하며 춤추던 클럽에서 용인66확진자가 나왔고, 믿었던 탑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광복절에는 대구 신천지교회의 31번 확진자가 무색해지는 일이 벌어졌다. 백주대낮에 테러하듯 불특정다수에 바이러스를 쏟아내는 황당무계한 종교인이 출몰한 것인데, 오호통재라! 한술 더 뜨는 사건이 벌어졌다. 젊어서 잠시 집중력 높은 노동 경력을 거치면 평생 넉넉한 기득권이 보장되건만, 남의 목숨을 걸고 파업하는 전교 1의료인들이 기세등등한 게 아닌가. 코로나바이러스는 기득권을 외면하나?

 

 

인수공통 RNA 바이러스

 

인류가 바이러스라는 존재를 알아낸 건 오래전이 아니다. 20세기 초였다. 바이러스보다 훨씬 큰 세균도 그 직전에 겨우 알았다. 사람이 몰랐을 뿐, 코로나바이러스는 분명히 있었을 텐데, 그때 감염 증상은 어떠했을까? 시시했을까? 세계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 이번 코로나바이러스는 중국 우환의 수산시장에서 비롯되었다는 소문인데, 그 시장은 다양한 야생동물도 식자재로 팔았다고 한다.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소문처럼 박쥐가 원천일까?

 

코로나19는 어떤 과학자가 폭로했듯, 중국 우한에 있는 바이러스 연구소가 시발점일까? 거액의 연구비를 미국에서 받아온 그 연구소에 특별한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던데, 어떤 말 못 할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미국은 위험도가 높은 세균이나 바이러스 연구를 다른 나라에 의뢰하거나 비밀리에 남의 나라에서 수행하는 버릇이 있다. 우한에서 코로나19 변형을 연구했다면, 그 연구는 누가 지원했을까? 우리는 알 도리도 없다.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 탄저병을 미군 주도로 연구하는지 알 도리 없는 것과 마찬가지겠지. 코로나19의 원인이 중국? 미국? 연구소? 박쥐? 천산갑? 역시 모르는데, 꼭 알아야 하나? 알아야 할 건 따로 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1937년 닭에서 발견했다. 개와 돼지, 사람도 감염될 수 있다는 걸 나중에 알았지만, 인류는 백신이나 치료제를 개발하지 않았다. 위험성이 높지 않아 후속 연구가 활발하지 않았다고 분석하는 전문가도 있는데, 무증상으로 전파되는 신종으로 변하자 기저질환 가진 노년층에 치명성이 두드러진다. 코로나바이러스는 언제부터 무증상으로 감염되었는가? 원래 그랬을까? 유전자가 변형된 결과일까? 그런 변형은 코로나19 이외에 없을까? 사람의 일상과 유난히 가까운 감기나 독감은 어떨까? 19181차대전에 발생한 스페인독감은 애초 위험성이 높지 않았지만 변성되자 세계 인구의 2% 이상 사망케 할 정도였다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사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그림. 내부에 한 가닥의 RNA 염기로 구성돼 있으며 박쥐에서 유래되었다는 걸 암시한다.(출처는 인터넷)

 

2002년 말부터 이듬해까지 중국을 비롯해 29개국에서 774명의 사망자를 낳은 사스, 2015년 초여름 36명을 사망하게 해 우리를 비상사태로 몰아넣은 메르스는 시방 조용해졌다. 사스와 메르스도 코로나바이러스의 일종이라는데, 백신은 물론이고 이렇다 할 치료제가 없는 그 바이러스는 사라졌을까? 드물게 남아있지만, 변형된 뒤 증상이 가볍거나 뚜렷하지 않아 모르고 지나는 건 아닐까? 언젠가 무서워져 다시 나타나는 건 아닐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점점 고약해진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별안간 사스나 메르스처럼 돌변하면 어떡하나?

 

사람과 동물을 모두 감염시키는 인수공통바이러스는 지구 생태계에 얼마나 존재할까? 티베트나 툰드라 지대의 영구동토층에 얼어붙은 척추동물의 몸에 인수공통바이러스가 유전자 상태로 남아있을 것으로 확신하는 전문가들은 지구온난화를 경고한다. 그 바이러스가 온난화된 지구에 다시 창궐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먼 이야기이므로 무시해도 될까? 그런 궁금증을 해소할 연구는 진행되고 있는가?

 

고양이와 애완견도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된다던데, 문제를 일으킬 만큼 자주 발생하지 않는 모양이다. 한데, 네덜란드의 한 밍크 축사에서 코로나19 감염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코로나19 이후 네덜란드 정부가 밍크 사육을 금지했다지만, 비위생적인 축사에서 끔찍하게 사육되는 동물은 밍크에 한정하지 않는다. 걸핏하면 조류독감이 창궐하는 까닭은 동물복지는커녕 비참하게 밀집 사육하는 공장식 사육과 무관하지 않은데, 잊을만하면 구제역을 창궐하게 하는 공장식 돼지 축산은 어떤가? 인간의 탐욕이 만든 공장식 축산을 인수공통바이러스의 창궐의 추악한 진면목으로 분석하는 학자가 있던데, 공장식 축산은 세계와 우리나라의 표준이다. 지구촌 곳곳이 이미 바이러스 무풍지대다.

 

아프리카를 비롯해 여전히 많은 지역에서 감염자와 희생자를 낳는 에이즈도 바이러스에 의한다. 한 세대 전, 미국을 중심으로 유명인사들의 죽자 경각심으로 이어졌고 연구가 집중돼 유효한 치료법이 개발되었지만, 혜택은 가난한 지역에 멀기만 하다. 학자들은 아프리카 침팬지를 사람에게 전이된 에이즈 바이러스의 원천으로 의심한다. 그렇다면 멸종위기에 몰린 침팬지들은 면역결핍으로 현재 고통받고 있을까? 아니다. 인간의 생태계 파괴로 터전을 잃었어도 에이즈 바이러스가 위험요소라는 증거는 불분명하다.

 

발굽 있는 동물에 치명적인 구제역도 바이러스 질환이다. 사람에게 어쩌다 나타나는 증상은 가볍고 이내 회복된다니 대행인데, 인수공통전염병 대부분은 야생동물을 가축화한 이후 발생했거나 생태계 교란이 원인으로 나중에 밝혀진다. 인수공통전염병을 일으키는 매개체 종류는 다양한데, 바이러스가 많다. 홍역과 결핵 그리고 천연두는 소에서, 말라리아는 닭과 오리에서, 독감은 돼지와 오리에서 유래했다고 제래드 다이아몬드는 , , 에 썼다.

 

현존하는 대부분 생물은 진화 과정에서 다른 생물의 수많은 유전자가 모여 구성된 유전자를 가진다고 학자들은 주장한다. 덩치 큰 생물에 먹힌 작은 생물의 유전자가 소화되지 않고 커다란 생물의 유전자 사이에 끼어들었고, 결국 공생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바이러스 감염과 비슷한 데가 있다. 병원성 바이러스에 감염되어도 숙주의 면역력이 높으면 발현이 억제된다. 자신의 유전자를 숙주 유전자 사이에 삽입한 채 기회를 노리던 바이러스는 숙주의 면역력이 약해지면 무한 복제해 병을 일으킬 것이다. 기회를 찾지 못한 바이러스는 아예 숙주 유전자의 일부가 되어 진화의 노정을 동행한다는 주장인데, 그렇게 공존하는 과거 바이러스를 전문가는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라고 정의한다.

 

현존 생물 유전자 안에 존재하는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는 대략 0.5%가 넘을 거로 전문가는 추정한다.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는 숙주가 된 생물에 위험하지 않더라도 다른 생물의 몸에 들어가면 돌변할 수 있다. 돼지 같은 동물의 장기를 사람에게 이식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가축화와 생태계 파괴는 동물의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를 비롯해 다양한 바이러스가 사람에 침입하는 계기를 만들었고, 초기 무서운 전염병 창궐로 이어졌다. 홍역과 천연두가 그랬다. 백신과 치료제 등장으로 두려움을 차차 극복했지만, 독감은 다르다. 백신과 치료제가 최신으로 공급하더라도 희생자가 적지 않다. 이중나선인 DNA가 아니라 안정적이지 않은 RNA 단일나선이므로 RNA 바이러스는 복제과정에 많은 변성이 반복된다고 전문가는 분석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가 그렇긴 해도 젊은이는 괜찮다고?

 

 

코로나19 이후의 일상

 

포스트 코로나19는 뉴노멀이어야 한다.” 언론에 자신을 과시하는 지식인의 말이다. 코로나19가 진정되어도 전처럼 살아갈 수 없으니, 싫든 좋든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인 모양인데, 아리송하다. 이해하기 쉬운 우리말이려면, “뉴노멀이 아니라 새로운 일상?”일 텐데, 코로나19가 진정되면 우리는 어떤 일상을 살아야 할까?

 

세계 보건당국의 협력으로 효능 있는 치료제와 백신이 개발돼 널리 보급한다면 비로소 한숨을 돌릴 거라는데,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그때까지 긴급 재난수당이 이어져 시민들이 코로나19 시국을 견뎌냈다고 하자. 예전 일상을 학수고대하던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이착륙하는 비행기로 국제공항이 혼잡해지고 대형호텔과 크루즈선에 여행자가 가득하며 고속도로마다 자동차로 미어터질까? 공장지대와 대도시의 대기가 다시 시커멓게 오염돼 초미세먼지로 뒤덮일까? 그래야 할까?

 

지난 422, 비상경제회의를 주재한 자리에서 대통령은 코로나19로 인한 국난 극복과 절박한 생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 “한국판 뉴딜을 천명했다. 그를 위해 240조 원의 예산을 동원할 정부는 항공, 해운, 자동차, 조선, 기계, 전력, 통신, 7대 기간산업에 자금난을 덜어주어 고용을 안정시키고, 대리운전 기사 같은 특수고용직의 고용 안정과 소상공인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주요 교역국의 어려움이 깊어지면서 위기가 가중되는 금융시장을 지원해 실업을 막겠다고 덧붙였다.

 

발맞춰 기획재정부는 57, “토목사업 위주의 경기 부양성 뉴딜과 확연히 구별되는 디지털 기반의 일자리를 창출하고 경제혁신을 가속하겠다.”라고 한국판 뉴딜의 밑그림을 제시했다. 장관은 디지털 인프라 구축’, ‘비대면 산업 육성’, ‘사회간접자본의 디지털화를 주요 사업으로 호응했는데, 전혀 새롭지 않았다. 토목과 겉모습만 다를 뿐, 예전과 같은 콘크리트 전략이었다. 코로나19 이후의 경제구조를 고도화해야 한다던데, 그러면 코로나바이러스는 재발하지 못할 것인가? 정부는 상당한 추경을 예고하는데, 디지털로 어떤 일자리가 확보될까? 기획재정부는 예전부터 환경단체와 의견이 일치한 적 없었는데, ‘그린뉴딜도 예외가 아니다. 환경단체들이 건의하는 기후변화와 경제 문제를 동시에 풀기 위해 신재생 에너지 같은 친환경 사업에 대규모 투자하여 일자리를 늘리며 경제를 살리는 정책은 쏙 빠졌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의 심층 취재를 2019년 엮어 펴낸 지구에 대한 의무는 세계 소비량의 절반 가까이 생산하는 중국의 시멘트를 주목했다. 중국의 1년 생산량을 영국에 붇는다면 영국 땅은 베란다처럼 편평해질 것이라 덧붙였는데, 코로나19로 고통받은 중국을 생각해보자. 거대한 땅덩어리를 대한민국보다 빠르게 압축적으로 개발한 중국의 생태계는 갑자기 단순해졌다. 콘크리트 때문인데, 중국인들은 야생동물을 먹는 예전의 습관을 여전히 버리지 못했다.

 

속도와 높이를 자랑하는 아스팔트와 철근콘크리트는 거대자본이 선호하는 효율성에 단단한 기반을 제공하지만, 다채롭던 생물은 생존 기반을 잃고 단순해진 생태계는 완충력을 잃었다. 생물다양성과 완충력을 잃은 생태계는 기후변화가 몰고 온 기상이변에 속수무책이다. 빗물과 먼지를 붙잡지 못하고 기상이변에 대비하기 어려운 세상은 거대한 에너지를 요구하는 장비가 없다면 재해에 쉽게 노출된다. 같은 맥락으로, 회색도시에서 사람들은 질병에 쉽게 노출되지만, 완충력이 살아있는 생태계에서 사람을 포함한 생물종의 질병은 자연스레 치유된다. 다양한 생물이 그물코처럼 어우러지는 생태계만이 아니다. 다양한 농작물을 유기적으로 생산하는 농촌은 회색도시보다 건강하다.

 

국제사회는 우리나라를 주요 기후악당국가중의 하나로 지목한다. 그도 그럴 게, 자국의 석탄화력발전소를 중단 없이 늘리는 것도 모자라, 남의 나라까지 가서 지어주지 않던가. 코로나19는 화석연료 과소비가 이끈 기후변화와 무관하지 않은데, 석탄화력발전소가 넘치는 우리나라는 코로나19 이후에 어떤 한국판 뉴딜을 구상해야 할까? 비대면? 디지털 온라인으로 요약하는 비대면은 화석연료 과소비와 무관할까? 온라인 플랫폼을 선점한 인물 몇을 세계적 부호의 반열로 끌어올린 무선 인터넷 사업은 유선보다 10배 가까운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모르거나 무시한다.

 

코로나19 이후의 새로운 삶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적어도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산업은 아니어야 옳다. 고속도로를 없애거나 최소화하고 그 자리에 녹지와 습지를 확대하는 뉴딜은 어떨까? 생태계를 파괴하는 공항 계획의 철회는 물론이다. 쓸모가 줄어든 기존 공항을 대폭 철거하거나 없애고 그 자리에 농민이 운영하는 전통 유기농단지를 조성하는 뉴딜은 어떨까? 생물 다양성이 확대되면서 생태적 완충력이 높아질 테니 외래종이 느닷없이 창궐할 가능성은 작다. 코로나19 이후의 바이러스 창궐도 억제될 것이다.

 

예단할 수 없지만, 세계의 기저질환 노년층의 희생을 딛고 이번 미증유의 위기를 결국 극복할 거라 세계 보건당국은 믿는다. 하지만 인간이 만든 백신과 치료제는 한계가 분명하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끝이 아니다. 동토에서 깨어날 과거의 인수공통바이러스들이 완충력을 잃은 생태계에 다시 노출된다면 보건당국은 희생자 없을 대책을 신속하게 마련할 수 없다. 손 씻기, 마스크 착용, 그리고 출입국 관리보다 근원적인 대책은 무엇일까?

 

인간은 본디 거리를 둘 수 없는 존재다. 사회적 동물로 진화한 이래 인류사회에 거리두기는 없었지만, 콘크리트 문화가 지배하면서 거리두기는 어느새 일상이 되었다. 거대자본은 거추장스러운 다양성을 효율화로 제거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획일적인 세상에서 의사결정은 독점된다. 목표와 과정이 단순한 세상은 차별을 낳는다. 개성이 불필요한 세상에서 개인은 주어진 상황에 길들어져야 소외되지 않는다. 거리두기가 이렇듯 체계화된 세상에 파고든 코로나19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를 매개로 쉽게 퍼져나간다.

 

간디는 70만 개의 마을이 느슨하게 연대하는 인도이길 희망했다. 마을에서 자급 자립하는 삶이다. 식량과 에너지에서 그치지 않는다. 곡물의 4분의 3을 외부에서 가져와 음식쓰레기를 산더미처럼 버리는 삶, 거대 선박으로 외국의 화석연료를 분별없이 수입해서 겨울을 덥게 여름을 춥게 보내는 세상은 자급자족과 거리가 멀다. 산후조리원에서 요양원까지, 낯 모르는 이에게 가족의 생사를 맡기는 익명의 세상이 아니다. 다정한 이웃과 가족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돌보는 마을에서 식량과 에너지를 최대한 자급해야 대대손손 건강할 수 있다고 간디는 설파했다. 한데, 간디는 존경한다는 자의 습격으로 사망했다.

 

점보 비행기가 1분마다 이착륙하는 비행장. 수십만 호텔과 고속도로로 연결되는 관광지. 끝없이 펼쳐지는 유전자조작 옥수수밭. 구제역과 조류독감 빈발하게 하는 공장식 축산. 끊임없는 경제성장을 요구하는 은행. 기득권을 향해 발돋움하는 수만 명의 박사와 수백만의 대학생을 배출하는 대학. 코로나19 이후의 일상에서 거리가 멀다. 기후위기를 넘어 생태계 파국의 원천이다.

 

주택가에 퓨마가 기웃거리고 큰길에 사슴과 코요테가 활보하는 상황은 흥미로울 뿐, 회색도시에서 이어지기 어렵다. 사람이나 동물에게 바람직하지 않다. 코로나19로 대오각성한 사람들이 자신만의 삶터를 크게 줄이고 조상의 소박했던 생활로 돌아가지 않는 한, 상상하기 어렵다. 어쩌면 코로나19는 인류에게 탐욕을 버리라고 강하게 요구하는지 모른다. 아픈 식구와 이웃을 끌어안던 삶, 생태계의 다채로움을 파괴하지 않는 삶, 코로나19를 몰랐던 시절에 일상이던 조상의 삶, 바로 거리두기를 모르던 생태적 삶이다. (인천문화재단 기획, 코로나19를 감각하는 사유들, 51-58)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8. 3. 23. 01:29
 

10여 년 전, 푸에르토리코에서 3살 여아가 월경을 했다. 원인은 계란에 있었다. 울며 보채는 아이를 노른자로 달랬던 엄마는 값싼 미국산을 구입했는데, 그 계란에 상당량의 여성호르몬이 함유되었던 거다. 남보다 더 많은 돈을 빨리 벌어들이려고 대낮처럼 불 밝힌 철망상자 속의 닭에게 여성호르몬이 첨가된 사료를 24시간 먹인 결과였다. 이후 중국에서 비슷한 뉴스가 나왔지만 세상은 놀라지 않았다. 화학농업과 공장식 사육으로 인한 농축산물의 오염 소식에 이미 식상한 것이다.

 

농산물과 식품의 오염 문제를 방영하기 무섭게 매진되는 유기농산물은 우리 중산층이 선호하는 웰빙의 표상이 되었다. 여유 있는 주부는 다급히 가까운 유기농산물 직거래 매장에 회원 가입해 안심할만한 농산물을 한아름 구입하지만 그 열기는 오래가지 못한다. 가격이 비교적 높지만 사실 가격 때문만은 아니다. 먹지 않으면 없어도 생존하는데 큰 지장이 없는 공산품에 비하면 농산물은 그리 비싸지 않다. 유기농산물 구입 열기가 냄비처럼 식는 건 농작물 오염 현상의 원인을 충분히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데이비드 브룩스가 자신의 책 《보보스》(동방미디어, 2001)에서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중산층의 삶”을 긍정적으로 조명한 이후, 그들이 추구하는 ‘생태적 삶’은 세계 중산층의 선망이 되었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부르주아와 정신적 여유가 넘치는 보헤미안의 장점을 지니는 이른바 ‘보보스’ 족은 부를 과시하기보다 삶의 여백을 추구하며 많이 먹기보다 잘 먹는데 관심이 많다. 그들은 자신의 고상한 노후와 아이의 건강한 내일을 위해 유기농산물을 고르고, 시민단체에 가입해 회비를 내는 걸 거리끼지 않는다.

 

‘생태적 삶’을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 ‘생태적 골프장’과 ‘생태적 개발’이라는 구호가 난무하는 와중에 냉소적 반응을 유발시키기도 하는 ‘생태적 삶’은 생태계가 그렇듯, “순환과 다양성이 존중되는 삶”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람은 물론, 그 땅에 자생하는 숱한 나무와 풀과 미생물과 곤충과 새와 짐승의 생명이 존중하는 골프장이라면 생태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산을 길게 뚫고 광활한 갯벌을 매립하는 개발도 생태적일 수 없다. 그렇다면 유기농산물은 생태적일 수 있을까. 어떤 유기농산물을 누구에게 어떻게 구입해 먹는가에 따라 판단을 달리할 수 있을 것이다.

 

유기농산물은 먹는 이와 재배하는 이의 건강은 물론, 땅을 살리는 농산물이어야 자격을 얻는다. 유기농산물은 관계를 소중히 여긴다. 유기적 연결을 도모한다. 나와 내 가족의 건강을 약속하는 유기농산물일지라도 생산자인 농사꾼의 삶을 위협한다면 유기적일 수 없다. 힘겹게 생산한 유기농산물이 유통과정에서 터무니없는 이윤이 덧붙어 판매된다면 소비자에게 위화감을 선사한다. 생산자가 중간상인과 소비자에 종속돼 자존심을 잃는다면 유기농산물의 지속가능한 공급은 위태로워진다. 땅의 생태성도 파괴되기 쉽다.

 

수입 유기농산물은 그 나라의 농토와 농민을 살리는데 기여했을지 모르지만 소비자의 땅을 살리는데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 운송하는 과정에서 많은 에너지를 소비, 온난화를 부추겼다. 물론 예외는 있다. 소비자가 사는 땅에서 생산이 불가능한 농산물이라면 수입하지 않을 수 없다 반드시 필요해 수입하는 경우라도 생산자의 적정 이익을 산정한 유기농산물이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유통 이윤을 최소화했다면 수입을 환영할 수 있다. 이른바 ‘공정 무역’이다. 그런 설탕과 커피가 유기농산물 직거래매장에서 판매된다.

 

우리 땅에서 재배한 유기농산물이라도 농민이 소비자에 직접 판매하기 실질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중간상인의 이윤을 최대한 배제한 판매자가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한다면 ‘공정 교역’일 것이다. 유기농산물 직거래매장이 그렇다. 그런 매장에서 유기농산물을 구입하는 소비자는 생산자의 고충을 이해하고 고마워해야 할 필요가 있다. 덕분에 나와 내 가족의 건강이 도모되지 않던가. 땅이 살아야 농부가 살고, 농부의 삶이 보장되어야 소비자의 건강도 보장된다. 유기적인 관계가 건강해진다. 바로 ‘웰빙’이다.

 

웰빙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이 생태적 삶을 즐기는 보보스이길 바란다면 이웃을 배려해야 한다. 나를 존재하게 하는 ‘이웃’의 웰빙까지 도모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웃에는 가족은 물론, 유기농산물을 재배하는 농부, 그 농부의 땅, 그 땅을 풍요롭게 하는 생태계, 그리고 그 땅을 물려준 선조가 우리에게 베푼 문화와 역사, 그 문화와 역사를 이어갈 후손이 당연히 포함되어야 한다. 그들의 생태적 삶이 두루 보장되는 웰빙만이 비로소 웰빙이다.

 

비만이 가난의 상징이 된 요즘, 지나치게 빠른 2차성징과 성 정체성을 교란하는 내분비교란물질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먹는 일이 더욱 중요해졌다. 거기에 더, 세계 식량 비축량이 위축되는 이때, 안전은 물론 안보 차원에서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 소비자의 건강을 위협하는 농작물의 오염은 마땅히 피해야하지만 그 이전에 생산자에 대한 적절한 분배를 고려해야 하고, 지역의 자급기반을 손상시키지 않아야 한다. 참고로, 쌀을 포함한 우리의 식량자급은 27퍼센트에 불과하다. 지속가능한 웰빙에 턱없이 모자라는 기반이 아닐 수 없다. (삼성생명 사보, 2008년 4월호)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8. 3. 21. 07:57
 

어느 기독교 신자가 담배 끊기에 성공했다고 자랑했다. 거울을 보고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자신의 콧구멍이 아래를 향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느님께서 담배 피우라고 창조했다면 콧구멍은 분명 위로 뚫려야 할 텐데, 아니었던 거다. 그는 자신의 코에 행한 난폭한 행동을 반성했고 이윽고 마음 편하게 담배를 끊을 수 있었다고 너스레떨었다.

 

지하철에는 광고가 많다. 아름다움을 높인다는 성형외과 광고도 한몫한다. 과연 그 병원은 아름다움에 대해 어느 정도 전문성을 가질까. 전문의를 수료하는 과정에서 미학(美學)을 충분히 공부했을까. 성형외과가 판단하는 “잘 생겼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그 기준으로 못생겼다면 ‘환자’일까. 만일 연예인의 사진으로 수술을 참고했다면 환자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남의 이목에 굴종해 타고난 개성을 뜯어 고치려는 ‘의뢰인’으로 표현하는 게 더 합리적 것이다.

 

1960년대. ‘봉봉4중창단’은 <사랑을 하면은 예뻐져요>라는 곡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 “아무리 못생긴 아가씨도 사랑을 하면 예뻐진다.”는 내용이었다. 물론 사랑만 하면 저절로 예뻐지는 건 아니다. 서양미술사학자 곰브리치가 “알면 보인다!”고 설파했듯, 자주 만나면 속속들이 알게 되고, 모든 걸 이해하면 사랑하게 된다는 뜻일 게다. 그래서 <숙녀에게>에서 변진섭은 초겨울 새벽녘의 반가운 눈처럼 다가온 연인에게 “나 그대 아주 작은 것까지 알고 싶지만 어쩐지 말을 안 해요.” 하며 안타까워했다.

 

바나나가 멸종위기라고 한다. 자동차가 막히는 구간마다 수북이 쌓인 바나나가 왜 멸종위기라는 걸까. 야구 글러브를 겹쳐 놓은 듯 묵직해도 2천원이면 족할 정도로 지천이지만 재배 종류가 아주 단순한 까닭이란다. 다국적기업의 농장마다 다수확품종을 선택했는데, 유전적 다양성을 없앤 바나나는 재배조건이 까다로워 환경변화에 매우 취약하다는 거다. 그래서 다가올 지구온난화에 치명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전문가는 전한다. 이윤을 위해 다양했던 개성을 희생시킨 결과다.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농작물이 바나나에서 그치지 않는데, 지난 해 중복, 우리의 모든 군장병이 점심으로 삼계탕 한 그릇 씩 비웠다. 100만 마리 이상의 어린 닭이 한꺼번에 조리되었을 텐데, 그 물량을 어떻게 충당했을까. 35일 사육하면 뚝배기에 쏙 들어가는 닭을 일시에 출하할 수 있도록 과학축산이 예측 가능한 양계법을 개발했기 때문인데, 그 닭은 인큐베이터와 같은 환경에서 사육되어야 한다. 창문만 열려도 큰일난다. 걱정되는 건 조류독감만이 아니다. 몸집을 제각각으로 만드는 기온변화는 상품가치를 해친다.

 

공장처럼 밀집시켜 사육하는 소와 돼지는 물론, 끝없이 면적에 재배하는 곡물과 채소를 획일적으로 가공하는 패스트푸드의 맛과 향은 세계가 공통이다. 그로 인한 질병은 세계인이 공통이다. 개성을 잃은 건 음식에서 그치지 않는다. 의식주가 대체로 그렇지만 표준 경쟁이 치열한 공산품은 정도가 더하다. 에너지 과소비를 전제로 이어지는 공산품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위한 대량운송의 결과는 대량폐기로 이어져 지구는 더워지고 물과 공기는 오염되었으며 대지는 쓰레기 몸살을 앓는다.

 

연예인을 흉내내는 유행은 획일적이다. ‘선진국’을 흉내내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도 마찬가지다. 언어도 그렇다. 교육도 예외가 아니다. 오직 일류를 지향하는 입시와 취직을 위한 교육은 개성을 배려하지 않는다. 모나면 정 맞거나 부적격자로 제쳐놓는다. 용도에 따라 대량생산해 공급되는 공산품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창의력이 배려되지 않는 교육은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다.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할 경우 잠시 승승장구하지만 기준이 바뀌면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용도폐기되고 만다.

 

한 말썽쟁이가 있었다. 그는 오토바이에 빠져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오토바이를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졸업하고 구입한 오토바이 잡지는 일본어였고 그는 하는 수 없이 일본어를 공부했다. 그러자 능숙해진 일본어가 재미있었고, 지금은 잘 나가는 일본어 강사가 되었다고 어떤 이는 전한다. 흥미로운 건 세계인의 입맛을 획일화시킨 패스트푸드의 창업자의 대부분이 대학을 다니지 않았거나 중퇴했다는 사실이다. 공부 방향이 전공으로 정해진 대학은 상상력을 제한하는 까닭일지 모른다.

 

“할머니 콩을 언제 심어요?” 50의 나이에 농사꾼이 된 전직 철학교수는 할머니에게 물었다. “으응, 그 콩은 감꽃 피기 전에 심는 거여.” “그건 감꽃 질 때 심게.” 《잡초는 없다》로 자신의 초보농군의 경험을 전하는 윤구병은 삼라만상은 개성이 있고, 그에 맞게 살아갈 이유가 있다고 이야기한다. 바퀴는 바퀴약을 뿌리라는 신호가 아니다. 집안에 바퀴가 좋아하는 물질, 보이지 않는 음식 찌꺼기가 있으니 깨끗이 청소하라는 뜻이다. 방향제는 악취의 원인을 찾지 못하게 한다. 개성을 말살하면 원인을 진단하기 어렵다.

 

생태계는 다양한 생물종이 순환한다. 생태적 삶은 숱한 개성을 배려하는 삶이다. 생태교육도 그렇고, 생태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도 그러하다. 다양성은 환경변화에 대한 충격을 완충한다. 지속가능성을 높인다. 나와 내 노후, 이웃과 후손은 물론 생태계의 개성을 배려하는 삶, 곧 건강한 내일을 약속하는 ‘생태적 삶’이다. (야곱의우물, 2008년 9월호,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