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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딤돌 2009. 9. 19. 16:31

 

옛말에 돈을 잃으면 조금, 건강을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지만 신뢰를 잃으면 모든 걸 잃는 거라고 했다. 그만큼 신뢰, 다시 말해 상대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는 건데, 주로 도시에서 소비자를 만나고 농촌에서 생산자와 만나는 생활협동조합은 신뢰를 기반으로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한다. 그걸 모토로 삼는다.

 

도매시장에 밭떼기나 차떼기로 넘길 농산물은 상품성을 높이려는 상인의 주문대로 화학비료와 농약을 듬뿍 뿌리지만 제 식구가 먹을 건 유기질 비료를 주며 온갖 정성을 다해 재배한다던데, 상식을 가진 농부라면 저와 친밀하게 지내는 이에게 알고는 먹기 찜찜한 농산물을 내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농부가 정성을 다한 유기농산물은 그만큼 자존심이 크다. 그런 농산물을 아무렇게나 팔아치우려는 농부는 없을 터. 하지만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소비자가 많지 않은지라 어렵게 생산한 유기농산물을 중간상인에게 넘길 때가 많은데, 헐값으로 가져간 유기농산물이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의 식품매장에 높은 가격으로 전시된 걸 보면 속이 상한다.

 

가족과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농산물을 구입하고자 하는 소비자도 걱정이 많다. 잘 알고 지내는 농부가 있는 게 아니라서 그나마 공신력이 있는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를 찾는데, 식품매장의 유기농산물은 가격이 터무니없이 높으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허구헛날 일반 농산물이나 그 가공식품을 고르자니 영 탐탁하지 않다. 사실 생산자인 농부에게 돌아가는 몫을 생각해보면 일반 농작물의 가격이 그리 낮은 것도 아니다. 소비자에게 불만을 사는 농산물 시장은 열심히 농사짓는 농부의 의지를 꺾어놓기 일쑤다.

 

‘공정무역’이란 게 있다. 여러 단계의 중간상인을 거쳐 복잡하게 가공된 뒤 유통 단계에 이르면 최종 소비자에게 팔리는 가격이 최초 농산물에 비해 어처구니없이 높아지는 무역의 불합리를 바로 잡으려는 시민운동이다. 커피나 초콜릿을 보자. 정작 농토에서 노예처럼 일하는 이에게 돌아가는 보수가 지나칠 정도로 작다. 대개 최종 소비자에게 팔리는 가격의 1퍼센트 미만이라고 하니 시민단체가 나섰다.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한 농산물을 유통과 가공 단계를 획기적으로 줄여 소비자에 되도록 값싸게 제공하는 운동을 펼치는 거다. 커피, 초콜릿, 설탕, 바나나와 같은 농작물에서 시작한 공정무역은 티셔츠와 청바지와 같은 의류제품까지 지평을 넓혀가고 있다. 다만 공정무역 제품은 대개 다국적기업이 장악해 판매하는 상품에 비해 가격이 다소 높고 익숙해진 미각이나 촉감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막강한 기술력을 가진 거대한 자본처럼 한꺼번에 많은 물량을 사들이지 못하고 입맛을 말초적으로 길들이는 첨가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지만 공정무역의 정신을 십분 이해하는 소비자들은 흔쾌히 양해하며 구입한다. 몸에 더 좋다는 걸 확신하는 이웃의 경험이 주효한 까닭이기도 하다.

 

무역만 공정해야 하는 건 아니다. 수확하기 전부터 계약하는 중간상인에 헐값으로 넘기고도 먹고 살만큼 이윤을 남기려면 많은 양의 농산물을 생산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농부는 화학비료와 농약에 의존하는 다수확 품종 농작물의 씨앗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자 몸만 축나는 게 아니었다. 조상이 물려준 땅도 엉망이 되고 말았다. 미생물에서 곤충과 개구리, 두더지와 뱀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지던 농토는 어느새 전설이 되었다. 하지만 외상으로 산 씨앗과 비료와 농약 값을 갚고, 생활비를 벌어들이려면 다른 도리가 없다. 농작물을 건강하게 만들던 생물이 사라진 농토는 그만 생산 능력을 잃어버렸다. 척박해진 땅에 뿌리는 농약과 화학비료는 증산이 아니라 감산을 모면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그래서 생활협동조합이 나섰다. 신뢰를 바탕으로 도시의 소비자와 농촌의 생산자를 공정하게 연결하려는 시민운동의 일환이다.

 

생산자에게 합리적인 가격을 보장하는 생활협동조합은 복잡한 유통단계를 줄여 소비자에게 돌아가는 가격을 최대한 낮추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다. 농업은 땅을 살리고 먹는 이의 생명을 살리는 산업이어야 하기에 화학농법을 마다하고 유기농업을 적극 환영한다. 덕분에 생활협동조합은 외국의 유기농산물이나 그 가공식품을 버젓이 전시하는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와 달리 식품매장의 유기농 코너에 가야 알현할 수 있는 지체 높은 농산물보다 훨씬 저렴한 유기농산물을 소비자에게 저렴하게 제공할 수 있다. 물론 화학농업으로 생산한 시중의 농산물보다 가격이 다소 높은 경우가 많지만 그건 땅을 살리며 힘겹게 농사지은 생산자에 제공된 몫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생활협동조합의 일꾼에게 충분한 급여를 제공하는 건 아니다. 시민운동의 차원인 까닭이다.

 

많은 이들은 여유 있는 계층만이 생활협동조합을 이용할 수 있다고 아쉬워하는데, 그건 눈앞의 현상만 짧게 해석한 오해다. 물론 당장 돈이 더 들어가는 건 맞지만 유기농산물은 먹는 이의 건강을 나이든 뒤까지 도모할 테니 불필요한 의료비 지출을 사전에 막을 수 있다. 주머니에 돈이 부족하다면 덜 구입하면 된다. 우리나라 도시의 소비자 대부분은 시방 영양이 많아 걱정이지 않은가. 다이어트에 들어가는 돈으로 생활협동조합의 유기농산물을 구입해 가족과 오순도순 조리해 먹는 선택을 권하고 싶다. 비교적 가격이 높은 고기를 구입하지 않거나 줄이는 것도 비용을 아끼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유기농이든 화학농이든 고기를 생산하는데 들어가는 에너지가 채소나 곡물에 비해 훨씬 많지 않던가.

 

어떤 이는 유기농업에 전적으로 의존할 경우 화학농업에 비해 생산량이 줄어 식량부족을 자초하게 된다는 점을 꼬집는데, 그건 하나만 보고 그 이상을 보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걸 드러내는 일일 것이다. 땅이 척박해질수록 석유를 가공한 농약과 화학비료를 많이 뿌려야 하는 화학농업은 생태계의 안정을 해칠 뿐이 아니다. 변화된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화학농업에 적합하도록 개량해서 종자회사가 파는 씨앗은 유전적 다양성을 상실한 까닭에 환경변화에 아주 약하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그런 씨앗을 믿다 석유위기가 닥치거나 지구온난화가 심해진다면 식량위기는 돌이킬 수 없게 될 테고, 인류는 파국을 맞을 가능성이 그만큼 높이진다. 따라서 내일의 식량을 진심으로 걱정한다면 이제 겨우 기지개를 펴기 시작한 유기농업이 어서 화학농업을 압도할 수 있기를 성원해야 한다. 그를 위한 사회적 논의가 시급하다.

 

생활협동조합은 조합원에게 유기농산물을 판매하는 유통 기능에서 그치면 안 된다. 고향의 정취를 잊어가는 도시의 소비자 조합원을 흙으로 안내할 필요가 있다. 생산자 조합원이 바쁜 시기에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연결하는 일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농촌을 찾아간 다음세대들은 농산물이 어떻게 재배되는 걸 알게 될 뿐 아니라 농부의 노고에 고마운 마음을 느끼고, 맨발로 흙을 디디면서 고향의 정취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농부들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체험할 수 있다면 유기농산물의 가격이 결코 비싼 게 아니라는 걸 절절하게 이해하면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신뢰는 더욱 깊어질 게 아닌가.

 

생활협동조합은 조합원 교육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아무래도 소비자가 생산자를 끌어가는 게 낫다. 소비가 안 돼 기껏 생산한 유기농산물을 버리는 것보다 늘어난 소비자가 화학농업에서 벗어나려는 농부를 유기농업으로 전환하게 이끄는 편이 바람직하므로. 그를 위해 생활협동조합은 유기농업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농산물이라면 기꺼이 소비자에게 소개하며 판매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척박해진 땅이 유기농업으로 기름져질 때까지 생산량이 급감하는 전환기 농부를 격려하며 지원해야 하므로. 필요하다면 농산물의 가격에 전환기 농부 지원 기금을 포함하는 것도 검토할 수 있지 않을까. 생활협동조합에서 소비자는 왕이 아니다. 생산자에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가진 조합원이어야 한다. 물론 생활협동조합은 생산자와 소비자 조합원 모두에게 신뢰를 잃지 않도록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영리가 아니라 운동이어야 하는 생활협동조합은 생산자 조합원과 소비자 조합원의 충분한 의견을 모아 운동의 질적 양적 확산에 주력할 필요가 있지만 그런 행동이 자칫 생활협동조합 사이의 세력 불리기 위한 경쟁으로 비화된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을 것이다. 초심을 잃을 것이고, 쌓았던 신뢰가 무너질 수 있다. 외국의 유명한 유기농 매장이 가격공세로 밀고들어올 경우 경쟁력도 사라질 수 있다. 한데 외국의 유기농산물은 엄밀한 의미에서 유기농이라 해석할 수 없다. 운송 과정에서 막대한 에너지를 소비하니, 크던 작던 지구온난화를 부추긴 까닭이다. 그렇다면 생활협동조합은 최대한 제철 제고장 농산물을 취급하는 원칙을 고수해야 옳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를 최소화할 때 땅과 생명이 가장 건강할 뿐 아니라 그만큼 지역의 문화도 보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이언스올, 2009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