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0. 10. 14. 14:16

《착한 에너지 기행》, 김현우 외 6인 지음, 이매진, 2010.

 

인터넷에서 다소 엉뚱하게 유행하는 ‘착하다’는 말. 원래 마음씨 고운 이의 바른 행동을 말할 것인데, 《착한 에너지 기행》을 보니 꼭 사람에게 사용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좋은 에너지를 착하다 하니 더욱 살갑게 다가온다. 내일의 에너지를 걱정하는 젊은이의 고민과 착한 대안을 살펴보는 일은 자체로 의미가 크다.

 

착한 에너지가 있다면 미운 에너지도 있을 터. 미운 에너지는 무엇일까. 《착한 에너지 기행》에서 소개하는 에너지, 다시 말해 태양이나 바람과 같이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고 위험하지 않아 지역 공동체가 쉽게 설치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와 다른 개념의 에너지일 것이다. 저자들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지만 온실가스를 내뿜으며 바다에 온배수를 내보내거나 폐기물로 자손만대의 안위를 위협하는 화석연료나 핵발전, 깊은 산과 바다의 생태계의 기반을 흔드는 대형댐의 수력이나 조력발전이 미운 에너지가 아닐까.

 

압축성장으로 에너지 소비가 남다른 우리나라는 온실가스 배출량도 많은 국가에 속한다. 그러니 착한 에너지를 찾으려면 먼저 고민하고 행동한 국가를 방문해야 한다. 그래서 찾은 곳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일본과 영국, 덴마크와 벨기에였다. 또한 착한 가면을 쓴 미운 에너지를 서구에 공급하다 엉망이 된 타이와 인도네시아 그리고 버마를 다녀왔고 태양광 발전으로 희망을 찾으려는 라오스를 방문했다. 타산지석을 발판으로 이 땅에 착한 에너지를 정착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착한 신념의 발로였기 때문이리라.

 

《착한 에너지 기행》은 착한 에너지의 보급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들 나라의 고위관료와 활동가들을 만났다. 그들은 전혀 유별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에너지 체계로 내일을 지탱할 수 없다는 사실이 행동의 기반이기에 지나치게 점잔을 빼는 말투도 거룩한 표정도 복잡한 의전도 없었다. 같은 마음을 가진 이를 반갑게 만나 기꺼이 도우려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숨길 게 없는 그들은 착한 에너지는 지역 공동체에서 자유롭게 설치해 누구나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걸 강조한다. 따라서 지역에서 만든 전기가 시중의 전기보다 단가보다 높으면 그 차이를 지원해준다. 그래야 착한 에너지가 널리 보급되고 온실가스 배출도 줄어들지 않겠나.

 

최근 대통령이 주제하는 녹색성장위 보고회를 개최한 우리 정부는 “2015년까지 태양, 풍력, 수력 등 신재생에너지 개발에 총 40조원을 투자해 이 분야 세계 5대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핵발전과 조력발전을 포함하지 않아 다행이긴 한데, 우리나라는 지역 공동체를 위한 발전차액 보전이 아니라 거대 에너지 기업에게 신재생에너지 의무할당제를 부과하는 정책을 편다. 거대 기업에 의존하는 에너지 체제를 고수하겠다는 건데, 그 때문에 대형 조력발전과 태양광 발전으로 해양생태계와 산림 생태계가 마구 훼손되는 일이 벌써부터 계획되고 또 자행되고 있다. 착한 가면의 미운 에너지가 되고 만다.

 

결국 에너지도 중앙의 생산자가 아니라 지역의 소비자가 끌어가야 착하게 된다. 착한 젊은이들이 쓴 《착한 에너지 기행》은 그 사실을 독자에게 현장감 있게 알려준다. (시사in, 2010.10.?)

 
 
 

자원·에너지

디딤돌 2010. 2. 8. 15:33

유난스러웠던 추위가 물러서니 따뜻한 햇살에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지구의 자전축이 23.5도 기울어져 계절을 낳았고 지구 표면의 복잡다단함이 지역에 따라 변화무쌍한 날씨를 만들었을 텐데, 사람은 오직 그 변화의 폭에 적응해 살아오고 있다. 지구에 대기가 없거나 자전축이 기울지 않았다면 진화되지 못했거나 진화되었더라도 영하의 지역으로 퍼지지 못했을 사람은 요즘, 조금만 추워도 보일러를 가동하고 조금만 더워도 에어컨 스위치를 누른다. 조상이 물려준 적응력을 과학기술로 위축시킨 주제를 망각하고 환경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만심으로 하늘을 찌른다.

 

육지에 초고층 빌딩을 짓고 사는 인간은 지하 깊은 곳에 자동차와 철도를 내달리게 하더니 물속과 하늘에서 밥먹고 잠자면서 우주공간을 넘어 화성에 정착할 꿈에 젖는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라서 삼치 주산지인 나로도에 우주센터를 짓고 우주선 띄우는 날을 학수고대한다. 막대한 비용과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이다. 과다한 화석연료 소비로 지구온난화가 심화되는 이때 우주개발이 과연 시급한지 따지는 이 드문데, 에너지를 과소비 없이 관리가 안 되는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호화 청사에 따끔한 지적을 사양하지 않은 정부는 ‘살리기’를 참칭하는 ‘4대강 사업’을 지구온난화를 대비한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우기며 반대하는 시민에게 눈을 부라린다.

 

영겁의 세월을 굽이쳐 흐르는 강이 게 있기에 나무와 풀이 풍성한 숲에 수많은 동물들이 어우러지고, 여름에는 범람하다 가을 지나 물줄기를 줄이며 봄에 상당히 마르는 강이 사시사철 물을 흘려주기에 우리네의 삶도 편안했다는 걸 한사코 인식하지 않는 우리 정부는 4대강의 바닥을 화물선이 뜰 수 있을 정도로 긁어내고 강물의 흐름을 거대한 호수로 차단하는 토목공사를 벌이면서 그에 들어가는 화석연료의 양은 고려할 생각이 전혀 없다. 수억 년 이상 지구의 환경을 안정적으로 완충해온 온갖 생물 가치의 생태 공간을 함부로 파헤치는 행위에 대한 도덕적 거리낌이 좀처럼 없다. ‘저탄소 녹색성작’이라는 마패를 쳐들면서.

 

“미 퍼스트!” 한 나라의 대통령이 어줍지 않은 영어를 남발하는 것처럼 외교상 부끄러운 일도 드물 테지만, 그가 보란 듯 외친 “미 퍼스트!”에 짐짓 고개를 끄덕인 코펜하겐 회의장의 인사들과 별도로, 대한민국의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도대체 무엇이 ‘미 퍼스트’의 고갱이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실상을 폭로하는 우리 시민단체 참여자들 앞에서 홍보한 “4대강 파괴 사업”을 염두에 둔 건 설마 아닐 테지. 에너지 소비 줄이기와 국가 성장을 분리할 수 없다고 했는데, 강화도 주변의 조력발전인가? “4대강 토목자본 살리기 사업”의 부스러기 효과인 소수력발전은 낯부끄러울 테니 아닐 게고, 한참 뒤떨어진 풍력과 태양력도 변변한 게 없는데, 도대체 미 퍼스트의 실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아랍에미리트에 400억 달러 어치 수출했다며 신기루를 날린 핵산업일까?

 

분배를 먼저 생각해야 하는 ‘녹색’을 ‘성장’ 앞에 구사하는 언어도단은 예서 따지지 말자. 경제성장이 없어도 호혜와 평등으로 풍요로울 수 있다고 말하는 더글러스 러미스가 “민주주의의 반대는 경제성장”이라고 주장했다는 걸 되새겨보면 정부가 뇌까리는 저탄소 녹색성장의 정체가 얼마나 위험스러울지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소비자의 눈높이에서 에너지의 효율화와 절약을 유도하는 정책보다 공급자의 이권을 도모하는 물량 공세를 예고하기 때문이다. ‘체르노빌’이 최악의 핵발전소 사고의 대명사가 되었듯, 세계 최대와 최고를 꿈꾸는 ‘한국형’이 위험한 실체의 대명사로 세계인에 각인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지만, 핵산업체의 장담처럼 눈에 불을 밝히고 감시한다면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하니 이번 논의에서 빼도록 하고, 역시나 세계 최고를 예고한 조력발전을 살펴보기로 하자. 과연 우리 조력발전이 ‘친환경’의 작위를 받을 만한가.

 

‘조력발전’ 하면 프랑스의 랑스 발전소가 먼저 생각난다. 현재 세계 최대인 랑스 조력발전소는 240메가와트로 영종도, 용유도, 장봉도와 강화도 남부의 갯벌과 해류를 틀어막는 ‘인천만 조력발전소’의 5분의1, 강화 본섬과 석모도, 서검도, 교동도를 북측으로 이어 그 일대의 갯벌과 해류를 틀어막는 ‘강화 조력발전소’의 3분의1에 미치지 못한다. 완공이 머지않은 시화호와 규모가 비슷하고 계획된 가로림만의 2분의1, 천수만의 3분의1에 불과하다. 고작 20메가와트 급으로 랑스에 이어 세계 2위 규모인 캐나다 아나폴리스 조력발전소, 더 작은 러시아의 조력발전소도 가동 중이지만 이들 나라는 조력발전의 증설은 피하고 있다. 경제성도 떨어지지만 환경에 대한 피해가 엄두를 내지 못할 정도로 크기 때문이다. 갯벌의 생태적 가치를 교란하는 강화 일원의 조력발전은 어떨까. 친환경 에너지는 무슨! 섬을 둘러막는 제방으로 부동산 가치가 상승하는 걸 노린 게 아닐까.

 

정부와 인천시에서 추진하는 인천만과 강화 조력발전소는 발전 기업에게 부과된 ‘신재생에너지 의무할당제’ 때문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2012년부터 전체 발전량의 10퍼센트까지 이른바 ‘신재생 에너지’로 충당하지 않으면 벌금이 부여되는 제도로, 벌금의 액수가 상당해 발전 기업마다 사활을 걸고 태양력이나 풍력, 소수력, 지력, 조력과 같은 신재생 에너지원을 확보하려 혈안이 되었다는 건데, 갯벌에 얽힌 강화의 오랜 역사와 문화는 바람 앞에 등불 이 되고, 개벌에 서식하는 플랑크톤, 조개, 갯지렁이, 수많은 도요새와 물떼새, 오리류의 겨울철새, 그리고 천연기념물인 노랑백로를 포함해 저어새에 이르는 생명가치들은 터전과 생명을 내놓아야 할 모양이다. 갯벌에 서식하는 플랑크톤과 어패류가 탄소동화작용과 물질대사로 제거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은 조력발전으로 얻는 친환경 효과를 훨씬 초월하건만, 돈에 눈이 어두운 인간은 ‘저탄소 녹색성장을 위한 친환경’으로 위장할 따름이다.

 

산허리를 뭉텅 자른 넓은 대지에 콘크리트를 깔고 그 위에 광패널을 덮은 태양력 발전도 친환경과 거리가 멀다. 산림의 생태적 효과를 파괴했을 뿐 아니라 정작 전기 소비자와 거리가 먼 곳에 집중하지 않았나. 땅의 가치 상승을 선점하려는 자본의 노림수로 의심받을 소지가 높다. 지열도 풍력도 소수력도 규모가 크고 소비자와 먼 거리에 자본이 시설을 집중시킨다면 대체로 친환경과 거리가 멀다. 친환경이라는 호칭을 받고 싶다면 자연의 생태적 가치를 훼손시키지 않는 범위에서 소비자가 직접 자신의 집이나 동네에 설치해 운영할 수 있는 규모를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소비자 지향의 분산형이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4만 년 전 아프리카를 빠져나온 우리는 고드름과 성애를 보며 겨울을 지냈고, 푹푹 찌는 여름을 보내며 건강했다. 여름은 여름답고 겨울은 겨울답게 살 때 비로소 친환경이다. 신재생 에너지원의 확보보다 에너지 과소비를 억제하는 행동이 진정한 녹색이라는 걸 먼저 인식해야 한다. 자본의 성장을 위한 친환경은 녹색과 무관하다. 내일의 삶을 위협할 따름이다. (작은책, 2010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