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2. 7. 24. 18:45

     놀이터를 주차장으로 바꾼 어른들

 

생태도시와 자연 에너지 자급에 관심을 갖다보니 이따금 독일을 다녀올 기회가 생긴다. 얼마 전에도 다녀왔다. ‘환경수도라 흔히 칭하는 독일 남부 프라이부르크의 신도시, ‘보봉 마을을 다시 방문했다. 벌써 세 번째다. 프랑스 군이 2차대전 뒤부터 주둔했던 프랑스 인접 지역인데, 신도시를 조성하면서 에너지와 물을 자급하고 대부분의 생활이 지역에서 가능한 컴팩시티를 최대한 추구했다. 안정된 보봉 마을은 공동주택 몇 동을 신축하고 있는데 외부 에너지가 전혀 필요 없는 이른바 패시브 하우스였다.


승용차가 보이지 않는 보봉 마을은 보행자와 자전거의 천국이다. 뒤에서 차가 다가오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으니 마을을 천천히 걷거나 자전거 타는 이의 표정은 밝다. 시내로 연결되는 경전철이 확보돼 있으니 자동차를 아예 없애는 주민도 더러 있는데, 대부분의 주민들은 마을 외곽에 따라 마련한 공동 주차장에 차를 넣는다. 마을 밖의 직장이나 프라이부르크 시내의 대학을 오가는 이는 경전철을 이용하거나 태양광 발전 패널로 지붕이 장식된 커다란 주차 빌딩에 둔 차를 사용하는데, 걷는 속도보다 느리게 움직이는 공사 차량 이외의 자동차가 없는 마을에서 아이들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살린 놀이터에서 마음껏 뛰어논다.


방문자가 워낙 많은 탓도 있겠지만, 낯선 이를 향한 보봉 주민들의 시선은 대개 따뜻하고, 생활은 편안해보인다. 여유가 있기 때문일 텐데, 우리네 아파트 단지에서 이웃은 언제나 낯설다. 마을 안에서 만나 이야기 나눌 기회도 장소도 없는 탓이리라. 나무를 숲처럼 조성한 언덕에 미끄럼틀을 놓고, 그늘마다 등걸 의자를 배치한 보봉 마을의 놀이터에 어린이만 모이는 건 아니다. 엄마의 손잡고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이 물장난과 모래장난을 하면 엄마들은 그늘에서 수다를 떤다. 남녀노소가 모여 마을 대소사를 이야기하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하는 놀이터는 마을 공동체의 소중한 공간인데, 우리는 어떤가.


연수구의 한 아파트 단지를 보자. 커다란 나무들이 그늘을 드리우는 가운데 모래가 깔린 시소와 그네가 마련되고 사각의 지붕 아래 긴 의자가 배치된 놀이터에 초등학생 이상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학교와 학원을 순례하는 사이 가끔 들여다볼 따름이었지만 아기를 데리고 나온 엄마와 손주 손잡고 나온 할머니들은 자주 보였다. 아이들이 안전한 모래밭에서 놀 때, 엄마와 할머니들은 그늘에서 수다를 떨었다. 저녁이면 학원에서 자유로운 청소년들이 가끔 모여 일감 벌이지만 그들도 모일 장소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놀이터는 시방 없어졌다. 시설물을 들어낸 자리에 아스팔트를 깔아 30대 가까운 승용차가 주차될 따름이다.


저녁 시간이 지나면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 돌아야 하는 경우가 많아도 주차를 못하고 집에 들어간 적은 없었는데, 알량한 어린이 놀이터를 없애야 했을까. 근린공원에 화강암 사이의 바닥분수가 마련돼 있거나 화학제품 쿠션 위로 물이 샤워기처럼 떨어지는 시설이 있어 초등학생 또래 아이들이 시끌벅적 뛰어놀지만, 어른들은 얼씬하지 않는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들이 물놀이에 동참하기 부적당하고, 아기를 데리고 온 엄마나 할머니 할아버지는 뜀박질하는 이웃과 자전거 타는 학생들이 뒤범벅인 근린공원에서 마땅히 쉴 곳도 없다. 자동차에 밀려 소외되고 말았다.


10년을 살아도 만나면 반가운 이를 만나기 어려운 우리의 아파트 단지는 언제나 익명의 공간이다. 친구들을 학교와 학원, 때로 컴퓨터 게임방에서 만나는 우리 아이들의 정서는 삭막하다. 고급 자동차의 종류와 가격을 훤히 알아도 근린공원을 날아오는 새들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종류인지, 거의 모른다. 아파트의 지명도와 평수에 따른 가격 차이로 자신을 평가하는 아이들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나 자연의 생물에 대한 동정심이 약하다. 어려서부터 입시를 준비하는 경쟁에서 몰입하는 아이들은 공동체 안에서 어려움을 이웃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익히지 못한다. 그럴 기회가 아예 없다.


학자들은 자신의 사는 곳의 녹지가 30퍼센트 미만이면 나무가 우거진 자연을 찾아 나가려 한다고 주장한다. 승리를 위한 속도와 경쟁으로 점철하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건축물에 치이는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기 때문이라는 건데, 회색도시의 그런 부작용을 먼저 경험한 독일은 도심에 나무가 우거진 숲을 공원을 확보하고, 주민이 거주하는 공간에 30퍼센트 이상의 녹지를 조성하려 노력한다. 신도시의 녹지는 50퍼센트를 지향한다. 그래야 범죄도 크게 줄어든다고 한다. 녹색 공간에서 이웃을 반갑게 만날 수 있는 마을에 삶이 뿌리내리기 때문이라는 학자들은 풀이한다. 녹지공간인 마을의 놀이터는 그래서 중요한데, 우리는 속도와 경쟁의 도구인 자동차에 밀려나고 말았다.


경쟁과 속도가 아무리 높은 수입과 안락함을 보장한다고 해도, 성공은 혼자 이룰 수 없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 뿐 아니라 생태계의 도움 없이 성공은 물론이고 행복도 지속될 수 없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는 이 시대의 어른들은 놀이터를 없앴다. 이제 좀 되돌아보자. 아이의 성공을 위해 학원을 순회하게 강요하는데, 우리 청소년의 행복 정도는 세계 최하위 수준을 맴돈다. 학원을 전전하는 아이들은 자신의 내일을 스스로 준비하지 못한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스트레스가 되는데, 깊게 생각해보자. 아이가 생각하는 실패는 기실, 어른의 강박관념일 뿐이 아닌가, 마음 맞는 친구들과 산과 들을 쏘다니며 자신의 내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이 땅의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성적에 얽매이게 하는 건, 차라리 죄다. 어른들의 강박관념 때문에 어린이 놀이터는 적막하지만, 그러므로 놀이터를 없앨 수 없다.


     놀이터가 사라진 아파트 단지 아이들의 행복과 건강은 그만큼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곧 어른이 될 아이들의 행복과 건강을 진정 생각한다면, 알량한 놀이터를 부슬 게 아니라 어른이 양보해야 한다. 자동차를 과감히 포기하여 주차 면적을 줄이는 만큼 녹지를 조성해야 이 삭막한 시대에 어른다운 일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부모는 집에 일찍 들어와 학원보다 친구와 놀이터에서 논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편이 아이의 내일을 위해 이롭다. 그러다 시간이 남으면 이웃과 녹지에서 만나 다정하거나 진지한 이야기를 즐겁게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새로 꾸몄더라도, 놀이터를 짓밟은 주차장은 본래의 모습을 빨리 회복되길 강력히 희망한다. 도대체 부끄러워 아파트 단지의 아이들을 바라볼 없으니. (인천in, 2012.7.24)

 
 
 

공동체·인간

디딤돌 2010. 2. 7. 20:11

프랑스의 사르르 드골 공항. 바삐 움직이던 한 사내가 그만 대리석 바닥에 꽈당 넘어졌다. 말쑥한 복장으로 걸음을 재촉하던 그는 개 배설물을 밟은 것이다. 알프스에서 조난객을 구조할 만큼 덩치가 큰 그 개는 공항 바닥에 큼지막하게 실례를 했고 낯선이에게 봉변을 안겼지만 개 주인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자신은 굵은 끈으로 개를 묶었고, 개 배설물을 치워야 하는 의무는 없다는 태도였다. 하긴, 프랑스에는 공공장소마다 개 배설물만 치우는 청소부가 있다.

 

우린 프랑스와 다르다. 개 배설물 청소부가 없을 뿐 아니라 끈 없이 개와 산책하는 이도 아직 많다. 운동할 공간이 드문 도시에서 산책 나선 개는 네발짐승답게 겅중겅중 뛰며 밖에 나온 기분을 만끽하는데, 그 점이 간혹 이웃을 놀라게 한다. 입양한 주인이야 자신의 개가 미덥겠지만 어디 이웃이야 그런가. 실내에서 주로 키우는 작은 품종은 덜하지만 북극권에서 썰매를 끌어도 충분할 만큼 커다란 개는 아무리 고분고분해도 지나는 이에게 공포를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동물을 입양하는 이는 요즘 동물 앞에 ‘애완’보다 ‘반려’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대상이 아니라 남은 삶을 함께 보낼 동물이라는 의미를 갖는 걸 텐데, 공원이나 주택가의 보행자도로를 걷다보면 우리네에게 아직 반려동물에 대한 책임과 의무에 충실하지 못한 모습이 많다. 지나가는 이에게 짖거나 공격하는 일은 무척 드물어졌지만 소변으로 영역을 표시하려는 개의 행동을 수수방관하는 일은 비일비재하고 배설물을 방치하는 주인도 적지 않다.

 

염려스러운 것은 키우다 싫증나면 함부로 버린다는 거다. 해마다 유기견으로 포획돼 안락사되는 개와 고양이가 광역시 단위의 대도시마다 수천 마리에 달할 정도다. 그를 대비하려는 건지, 입양할 때 동물의 몸에 주인을 인식할 수 있는 반도체를 삽입하자는 제안이 나오고 받아들인 지방자치단체도 늘어나고 있다. 그럴 경우 반려동물의 위생을 체계적으로 관리될 수 있으며 입양한 동물을 함부로 버리는 행위를 막을 뿐 아니라 잃었을 경우 발을 동동 굴리는 주인에게 쉽게 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아파트단지와 근린공원의 어린이 놀이터의 바닥에 다시 모래가 깔리는 추세다. 한때 푹신한 화학물질을 깔았지만 바꾼 것이다. 금방 지저분해질 뿐 아니라 그때마다 교체가 어렵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다. 아무리 푹신해도 뛰놀다 넘어지는 어린이에게 상처를 입일 수 있고 화학물질에서 배어나오는 성분이 어린이에게 위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인데, 지자체들이 깨끗한 모래로 바꾸는데 망설였던 건 반려동물의 배설물이었다. 배설물을 치우지 않는 주민에 의해 어린 이웃들의 건강이 염려되었던 거다.

 

기상관측 이래 가장 많은 눈이 내린 뒤 연일 추위를 경신할 때 아파트단지 옆 보행자도로에서 위험했던 일을 목격했다. 텔레비전 동물 프로그램에서 인기리에 등장해 급속하게 보급된 ‘시츄’라는 품종의 개가 한 정신박약 어린이를 뒤따르며 짖어댔고 놀란 아이는 개를 쫓아내려는 엄마의 품을 벗어나 빙판길이 된 차도로 뛰어든 게 아닌가. 자칫 끔찍한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산책 나온 주민은 제 눈에 귀엽고 덩치가 작으므로 끈을 묶지 않았던 모양인데, 아무리 작은 개도 뒤로 물러서는 어린이를 충분히 위협할 수 있다. 본성이 억제되지 않은 개는 크던 작던 자신을 두려워하는 상대를 공격하고 싶은 유혹을 떨치지 못한다.

 

입양한 이는 반려동물을 당연히 존중해야 하지만 자신의 동물로 인해 이웃에게 혐오감이 전해지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한밤중에 짖어대는 아파트단지의 개만이 아니다. 옷과 스카프는 물론 양말과 운동화를 신기고 색안경에 망토까지 씌운 개와 산책하는 행위도 민망하기 그지없지만 그런 개를 품에 앉고 대중교통 시설을 이용하는 태도는 심각한 결례다. 그리고 무엇보다 끈에 묶어 데리고 나가는 일이야 말로 자신의 반려동물과 이웃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것 잊지 않아야 한다. (요즘세상, 2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