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추억

디딤돌 2010. 6. 25. 16:10

《인간, 우리는 누구인가?》, 헤닝 엘겔른 지음, 이정모 옮김, 을유문화사, 2010.

 

 

사람만이 갖는 특징은 무엇일까. 데즈먼드 모리스는 귓볼이라 말할 것이다. 귀가 제아무리 큰 토끼도 귓볼은 갖지 못했다. 데즈먼드 모리스는 귓볼을 일부일처제를 강화시키는 성적 신호라고 주장한다. 번식기가 따로 없는 인간에게 특별히 주어진 신체기관이라는 해석이다. 중학생 땐가 체육선생님은 수영을 배운다는 특징을 가졌다고 말했다. 물에 빠지면 죽는다는 걸 잘 아는 인간은 사전에 수영을 배워둔다는 건데, 그런 식의 특징에는 예외가 아주 많을 것 같다.

 

진화라는 태엽을 다시 감았다 놓으면 지구에 사람이 당연히 탄생할까. 스티븐 제이 굴드는 아니라고 강조할 것이다. 진화의 험로에서 인간으로 이어진 좁디좁은 길은 다분히 우연의 연속이었기에 그 이정표를 정확히 재현할 확률은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변화무쌍했던 당시의 환경조건까지 정확히 재현된다는 건 불가능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현재 인간은 진화 단계에서 지고의 경지인가. 인간보다 더 진화하는 생물은 있을 수 없는 걸까. 그렇다고 이야기하고 싶은 이가 많겠지만, 냉정하게 아니라고 다시 살아난다면 스티븐 제이 굴드는 고개를 저을 게 틀림없다. 진화는 그저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과 결과일 따름이므로. 사람이든 침팬지든, 하다못해 아메바든, 자신이 현재 처해있는 환경에 최적으로 적응돼 있다면 가장 진화한 것으로 해석해야 하므로 그렇다는 거다.

 

그건 그렇고. 해묵은 질문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 동서고금을 통틀어 입이 있는 현인 치고 인간이란 무엇인지 말하지 않은 이가 없을 텐데, 인간이란 무엇인지 묻는 질문이 여전히 유효한 까닭은 무엇일까. 설명이 부족하다기보다 고민이 깊은 자에게 살갑게 이해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탓은 아닐지. 젊은 베르테르는 왜 4월에 자살을 했을까. 4월은 원래 잔인해서? 아니다. 대부분의 젊은이는 4월에 봄을 만끽한다. 한데, 젊은 시절 상사병으로 삶이 엉망이 되었다고 이실직고한 독일의 생물학자이자 과학저술가 헤닝 엘겔른이 인간이 누구인지 다시금 묻고 나섰다. 과학적 사실과 환경적 요인을 버무린 진화심리학으로 나름대로 흥미롭게 분석하려고 애쓰는 그는 어쩌면 천생 이야기꾼인지 모른다.

 

그는 인간이 어디에서 기원했는지 먼지 덮인 고생물학을 다시 뒤진다. 그 방면에 특별한 흥미를 가진 이를 제외한 대부분의 독자들이 관심을 거둔 분야일지라도 다음의 이야기를 풀어가자면 어쩔 수 없었을까. 조상의 뼈들을 세심하게 들어다본 뒤, 분명한 건 현대인이 결코 유럽에서 기원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끌어낸다. 서 있는 현대인의 골격을 하나하나를 살펴보아도 세련된 생김생김은 물론 뇌 용량과 키가 아프리카에서 발견되는 원인과 차이가 현저하다. 유럽에 많은 동굴에 남긴 흔적도 아프리카누스니 아파렌시스니 하는 원시인에 비해 월등한 수준 차이를 드러내므로 현대인은 당연히 유럽일 거라 믿는 이가 유럽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적이 있었지만, 아니라는 데 굳이 방점을 찍으려는 이유는 다음에 풀어간다. 크로마뇽인이냐 네안데르탈인이냐 하는 아직 약간의 논란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유럽 기원설과 관계없다.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두 차례 나와 세계로 퍼져나갔다는 사실은 이제 뒤집을 수 없을 것 같다.

 

화석이 오늘날까지 지층에 온전하게 남을 확률은 아주 희박하다. 하필 퇴적층에서 사고를 당해야 하고 산소가 없어 부패가 차단되어야 하며 그 지층이 융기되거나 물에 씻겨나가 학자의 눈에 띄어야하는데, 어디 그게 쉬운가. 그래도 집요하리만큼 꼼꼼한 학자들은 해골 반쪽, 부서진 아래턱, 대퇴부 하나로 그럴싸한 해석을 펼친다. 그런 결과로 명명된 인류의 조상은 얼마나 되나. 헤닝 엥겔른이 고생물학자들이 힘겹게 맞춘 퍼즐을 다시 설명하는데, 듣는 순간 머리가 복잡해진다. 분명한 것은 현 인류의 조상은 가지는 꽤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오직 한 가지만이 현재에 이르렀고 나머지는 완벽하게 사라졌다. 모두 어디로 갔을까. 히말라야 설인? 그런 건 설화일 뿐, 설인은 없다고《인간, 우리는 누구인가?》의 저자는 강변한다.

 

숱한 가지 중에 오로지 한 가지가 돌이킬 수 없는 우여곡절들을 거쳐 현재 지구촌을 뒤덮다시피 생존하게 된 운명을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법. 이제 현 인류를 생각해야 한다. 왜 인류는 남녀가 다른 모습으로 다른 태도를 연출하면서 사랑하고 다툴까. 유전자의 차이로 결정된 걸까 어려서부터 부지불식간에 학습된 걸까. 헤닝 엥겔른은 인류가 보편적으로 보여주는 행동과 심리 몇 가지를 추적해 들어간다.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사랑의 감성은 여성과 다르다는 것, 남성은 처음 만나는 여성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만 여성은 불쾌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유전인가 환경인가. 성호르몬으로 남성을 여성으로 바꿀 수 있을까. 육체만 따지는 게 아니다. 정신이 뒷받침되지 않는 육체는 갈등을 유발하게 된다는 사례로 제시한다. 포경수술을 실패한 신생아의 신체를 여성으로 전환하고 엉뚱한 호르몬을 계속 주입했건만 결국 재수술로 원래의 성으로 돌아간 일란성쌍둥이가 그 예인데, 역시 일반화하기 어려울 것 같다.

 

여중생을 성폭행한 뒤 살해하는 사건을 비롯해 우리나라를 비롯해 많은 문명사회는 동물에게 미안하게도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악인을 잊을만하면 나타나게 한다. 선과 악은 특정 인간의 본성인가 환경의 지배를 받은 결과인가. 본성은 이기적으로 행동하도록 인간을 내모는 유전적 특징을 가지는가. 학습의 결과인가. 그런 이야기들을 흥미롭게 분석하는 헤닝 엥겔른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사랑, 우정, 신뢰, 기쁨, 분노, 공포, 슬픔, 질투심과 같은 감정들이 테스토스테론이나 세로토닌과 같은 호르몬의 영향인지, 그 호르몬을 분비하게 만드는 사회의 환경인지 독자를 고민하게 만든다. 유전자인가? 아니면 뇌가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가? 유전자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발현한다고 하고, 뇌는 유전의 지배를 받는다는데, 도대체 무엇이 보편적인 인류의 행동거지를 지배하는가.

 

이제 이 복잡한 세상에서 인간은 어디로 가야 앞으로도 행복할까. 인공지능의 연구로 오직 나에게 순종적인 로봇을 만들어 편의를 추구하면 어떨까. 그러다 온갖 로봇이 반란을 펴면 어쩌나. 공상과학영화를 지나치게 많이 본 게 아니다. 현재 인간은 별의별 연구를 다 한다. 로봇이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갈 일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전투 상대는 로봇이 없으니 당하기만 할까. 그렇지 않을 텐데, 이러다 로봇끼리 다투는 건 아닐까. 그 다음엔? 헤닝 엥겔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된다. 그가 독일인이라 그런지 창조주와 연계하는 고민거리를 넌지시 비치기도 하는데, 창조세계를 감히 염탐하는 인간이 드러내는 초월이니 유체이탈과 같은 현상을 물질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저 훈련된 이의 물질적인 현상인가 범접할 수 없는 정신세계로 경배해야 하나. 여전히 독자는 헷갈린다. 어찌되었든, 인간은 “진화 과정에서 더 진행되지 못한 일시적인 최종 산물”이라고 독자에게 동의를 구하는데, 그건 인간만이 아니다. 삼라만상의 생명들이 다 그렇다.

 

유전자를 조작하고, 시험관에서 새 생명을 받아내는 걸 넘어, 생명을 복제하려고 시도하는 요즘의 인간은 진부한 유전자를 ‘더 좋은’ 유전자로 바꾸고 장기를 순정부품으로 주기적으로 교환할 단꿈에 젖는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일까. 헤닝 엥겔른은 유전자가 감시의 기재로 악용될 때 발생할 두려움도 상상하지만 궁극적으로 기술보다 현실의 환경을 걱정한다. 이렇군! 저렇군! 기대와 희망으로 들떠 있는 지금, 지구촌 대기의 온실가스는 전에 없이 그득해졌다는 거다. 지금의 인간이 할 일은 지구온난화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책을 마친다. 이제 독자들은 흥미로운 상식을 제법 두툼하게 제공하는 《인간, 우리는 누구인가?》의 책장을 아쉬움 속에 덮을 수 있게 되었다. (사이언스타임즈, 2010.6.25)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5. 9. 20. 01:56
 

지겹다는 민원을 의식했는지 텔레비전 방송사들은 추석 연휴 프로그램으로 성룡 대신 옛 영화를 골랐다. 덕분에 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갓 결혼한 클락 게이블은 비비안 리에게 뉴올리언스에 가서 즐기자고 권한다. 그땐 즐거웠나본데, 지금 그곳엔 즐거움은 없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의 어두운 이면만이 적나라하다.


산업화로 인한 이산화탄소의 증가는 온실효과를 높였고 최고 기후 8번이 1990년 이후에 몰려있다. 당연한 수온 증가는 허리케인을 3배, 태풍을 2배 이상 강력하게 했고, 이재민의 참상도 키웠다. 방제시설 강화와 관계없이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의 범위와 정도는 기록만 갱신한다.


이라크 군사비 지출에 밀려 막을 수 있던 참상을 불러들였다는 주민들의 분노를 충분히 이해한다. 물과 전기가 끊기면 견디기 어려운 게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인데, 홍수로 집과 일터는 물론 탈출로까지 잃은 주민들에게 남은 선택이 무엇일까. 갈증으로 죽어가는 부모와 자식을 차마 볼 수 없는 주민들은 식품이 가득한 쇼핑몰을 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구호에 늑장부린 자들이 폭도라고 매도하다니, 총부리 앞의 뉴올리언스 시민들은 얼마나 원통할까.


따뜻한 미 남부해안은 개발 전 어떤 모습이었을까. 뉴올리언스의 이웃 플로리다 자연공원처럼, 맹그로브 숲으로 뒤덮인 저지대 습지가 아니었을까. 맹그로브 숲이 아직 남아있었다면 지난 쓰나미를 완충해준 일부 남아시아처럼, 재앙이 크지 않았을 텐데. 도시와 근교에 경작지와 농부가 남아있었다면 늑장대응과 관계없이 약탈로 재앙을 극복하려 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유기농업으로 어렵사리 생산한 복숭아만 먹어치우거나 지분거린 멧돼지는 가을걷이를 앞둔 농부의 억장을 무너뜨린다. 멧돼지의 잘못일까. 멧돼지가 사는 산 구석까지 과수원을 내는 인간의 분별없는 분노는 추가 융자금으로 풀어질까. 강둑이 무너져 농축산과 화해단지가 반복적으로 파괴되는 건, 강둑이 약하기 때문으로 해석할 일이 아니다. 강둑 아래에 만든 인간의 시설에 문제가 있다는 걸 웅변한다. 그 곳은 본디 자연의 터전인 것이다.


참혹한 뉴올리언스는 삼협댐으로 가로막힌 장강의 내일을 반영한다. 해발 30미터에 불과한 무한에는 850만 명이 시멘트와 아스팔트에 의존해 산다. 2009년에 완공될 삼협댐은 장강의 수위를 해발 175미터까지 높인다. 1998년 홍수 때 허리까지 잠겼던 무한을 살리자고 중국당국은 상류의 둑을 허물었다.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댐에 익숙해진 인간들은 자연에서 대안을 못 찾는데, 앞으로 어떨까. 자연에 의해 인간의 시설이 무너질 때 자연은 사회적 약자부터 징벌한다. 어떤 경고일까. 삼협댐은 장강에 비해 수명이 훨씬 짧은데.


인간의 즐거움은 자연스런 삶에서 비롯될 때 벅차다. 기계음보다 자연의 소리가 반갑고 유행가보다 문화가 빚은 즐거움이 편하고 오래간다. 클락 게이블이 말한 뉴올리언스의 즐거움이 어떤 모습인지 모르지만, 자연을 밟은 인간은 제 참상을 키우기만 한다. 제초제 없어 벌레 많은 과수원은 까치 피해가 적다는데, 내일을 위해 우린 어떤 삶을 준비해야 할까. (이공대신문, 2005년 10월호)

자연의 자리를 차지한 인간이란 말이 가슴을 콱콱 칩니다.
... 어찌해야 하나... 저도 자연스러운 삶을 갈망하지만
늘 제가 앉았던 자리에는 자연이 파괴되어 있던걸요~ ㅠㅠ

좋은글 읽고 갑니다.
얼마전 제주환경운동연합에서 마련한 강의를 잘 들은 아줌마입니다. (유전자조작. 생명복제에 관한 먹거리 문제)
종종 들러서 좋은글 읽고 많은 생각할께요~

 
 
 

서평·추억

디딤돌 2005. 9. 1. 14:39
 


《자연의 재앙, 인간》, 프란츠 부케티츠 지음, 박종대 옮김, 시아출판사 2004년



다윈은 평생 돈벌이에 나서지 않았다. 물려받은 재산으로 연구하며 대가족을 건사할 수 있었다. 그런 다윈은 진화론으로 엄청난 인세를 받았다는데, 출간하기 무섭게 교회에서 모조리 사들였다는 일설이 있다. 당시 한 고위 성직자의 부인은 “맙소사! 원숭이가 사람의 조상이라니. 그게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읽을 수 없도록 합시다!” 제안했다고 하므로.

 

자신의 조상이 원숭이라는 데 충격을 받는 사람에게 체절을 가진 지렁이와 인간의 해부학적 유사성을 일러주면 어떻게 반응할까. 하등동물이 된 낭패감으로 몸서리칠까. 멀지 않은 과거, 한 골격 해부학자는 하등에서 고등, 원숭이에서 흑인, 흑인에서 백인으로 진화되는 모습을 그려낸다는데, 진화는 진보의 개념이고, 인간은 진화의 찬란한 종착점일까. 생물과 사회의 진화에 관심이 많은 프란츠 부케티츠는 단호히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재앙이라고 《자연의 재앙, 인간》에서 강조한다.

 

무심코 거울을 본 어떤 기독교 신자는 담배를 끊었다. 하느님께서 담배 피우라고 창조했다면 콧구멍이 하늘을 향했을 텐데 아래로 뚫렸다는 게 이유였다. 사람의 코는 안경을, 귓볼은 귀걸이를 위해 달려있을 리 없다. 기린의 목은 높은 가지의 잎을 따먹기 위해 길어졌을까. 그렇게 주장하는 합목적적 해석은 사람의 진화는 예정된 것으로 주장한다. 진화의 마지막은 노벨상 많이 타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운동경기에서 주로 우승하는 백인일까. 혹시 백인 앵글로색슨 기독교인 남자?

 

1988년 올림픽과 2004년 월드컵 때, 복중으로 한정하지 말라는 사철탕이 거리 뒷면으로 사라져 우리 민속학자를 분노케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GNP와 선진국 타령에 목이 쉰 행정당국이 알아서 긴 처사였다. 주로 백인 남자인 “외국인이 우릴 어떻게 평가할까”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말끝마다 ‘원더풀!’과 ‘그레이트!’를 붙이는 서양인들의 언어습관에 황송해하는 옥시덴탈리즘이 빚은 문화상대주의의 자학이자 오리엔탈리즘을 스스로 증명하는 작태였다. 그렇다면 ‘삶의 방식’인 문화에 우열이 있을까. 오랜 환경에서 우러나오는 문화는 다양성을 그 가치로 한다. 다양성에는 우열이 없다.

 

현대의 삶이 과거보다 진보한 것일까. 획일적 가치를 추구하는 현대문명은 언제 어디서나 공정하며 정확할까. 편의와 속도는 감당할 수 없는 환경문제를 일으키고, 사람과 자연, 남성과 여성, 북과 남, 당대와 후손의 갈등을 초래한다. 사고와 전쟁을 사양하지 않는다. 배기가스 촉매제를 강요하면서 격자형 고속도로로 산허리를 절단내고, 야생동물을 자연으로 돌려보내면서 갯벌을 매립하고, 핵발전소를 폐쇄하면서 초대형 댐으로 강을 틀어막는 현대 인간은 진보한 것일까. 자연과 여성과 남과 후손의 처지에서 재앙이 아니고 무엇이랴.

 

인류는 절대 진보하지 않았다. 과거 악습이 감당할 수 없이 복잡하게 바뀌었을 따름으로 해석하는 저자는 진화를 진보로 착각하는 이유를 “문제가 심각한 현재를 대신할 희망을 기대하기 때문”으로 풀이한다. 찬란한 유토피아를 바란다는 것인데, 다양했던 자신의 문화대신 파괴를 일삼는 ‘죽음의 충동’이 지배하는 한, 인간에게 희망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생명공학이라는 새로운 악습이 후손의 생명을 위협하는 현실에서 우리는 《자연의 재앙, 인간》을 아프게 읽어야 하지 않을까. (발간 예정 서평집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