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7. 15. 12:24

 

세상의 모든 위기는 근본에서 원인을 찾아야 극복 가능한 대안을 확실하게 마련할 수 있다. 먹을거리 위기도 예외가 아니다. 투기의 대상으로 남아 있는 한, 남아돌아 버려지는 세계의 농산물도 굶주리는 지역에 나눠질 수 없다. 투기를 막으려면 농작물로 큰돈을 벌 수 없어야 하고, 그러자면 궁극적으로 예전에 늘 그랬던 것처럼 마을에서 자급자족하는 농작물을 이웃과 나눠야 한다. 말은 참 쉽지만 현실에서 실천은 사실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농사지을 땅이 부족한 마당에 농사지을 인구도 태부족하고, 무엇보다 주도권을 굶주리는 자들이 행사할 수 없다.

 

완벽한 극복은 당장 어렵더라도 노력에 따라 위험 요인을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다. 원인을 제공한 국제사회가 굶주리는 당사자와 함께 대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겠다. 먹을거리 자급을 위한 기술과 자본을 굶주리는 지역에 제공하고 수출용 환금작물을 재배하는 다국적기업 소유의 기름진 농토를 주민에게 돌려주면서 국가 채무를 획기적으로 탕감해줄 수 있어야 한다. 노예무역과 자원 약탈에 얽힌 반성과 합당한 배상을 생각한다면 서구의 자본은 의당 그래야 할 지 모른다. 그를 위한 국제 시민사회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할 텐데, 아직 움직임이 미약하니 안타깝다. 먹을거리를 지역에서 자급한다면 굶주리는 인구의 증가도 꽤 줄어들 것이다. 제 아이가 잘 자랄 거라는 확신이 생기면 더 낳기를 중단할 테니까 그렇다.

 

출산율이 형편없이 낮은 우리는 농촌 인구가 급격이 줄어들고 농토가 각종 개발로 거듭 잠식되고 있다. 농산물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공산품이 벌어들이는 외화로 아직은 필요한 먹을거리를 충분히 수입할 수 있고, 그 결과 비만과 성인병이 전에 없이 늘어났지만 그런 호사가 지속될 수 없다. 시시각각 변하는 국제 정치와 무역의 이해관계가 언제까지 우리에게 호의적일지 알 수 없지만 지구온난화로 수입할 수 있는 먹을거리마저 바닥을 드러낼 가능성이 점쳐지기 때문이다. 역시 대책은 자급자족일 수밖에 없다.

 

자급자족을 위해 경작지를 보전하고 나아가 골프장을 장차 농토로 활용할 방안을 연구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당장 농사지을 사람을 획기적으로 늘려야 한다. 화학비료나 농약, 관개농업과 기계화는 농업에서 얻는 에너지에 비해 들어가는 에너지가 오히려 많아 역행하므로 예전처럼 가족 중심의 자급자족 체제를 회복해야 한다. 생태계를 교란하는 유전자조작 농산물로 위기에 대처한다거나 그런 농산물을 수출하겠다는 일부의 발상은 위험을 증폭시킬 것이다. 농촌으로 돌아가는 운동이 필요한데 그러자면 농촌이 도시보다 정신과 육체적 삶의 질이 풍요롭고 행복해야 한다.

 

대량으로 생산해 대량으로 수송하는 수입 농산물과 그 농산물에 온갖 첨가물을 넣어 가공한 먹을거리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한 이때, 소비자들은 자신이 먹을 농산물을 스스로 재배해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에 주로 사는 소비자들은 그럴만한 땅도 시간도 경험도, 관심과 경각심마저 없다. 텃밭은 어떨까. 우리보다 먼저 고민한 국가들은 근교에 시민을 위한 땅뙈기를 마련해 저렴하게 임대해주는데, 텃밭에서 스스로 재배한 채소를 그때그때 먹는다면 식비의 절감은 물론 식구의 건강도 꽤 챙길 수 있다. 그도 저도 어렵다면 잘 아는 농민이 재배한 농산물을 받으면 좋다. 얼굴은 아는 사이에 허투루 생산한 농산물을 내놓지 않을 것이다. 아는 사람이 없다면? 신뢰를 바탕으로 농촌의 생산자와 도시의 소비자를 연결하는 생활협동조합과 같은 유통공간이 동네마다 열려 활발하게 움직인다.

 

되도록 제 철 과일과 채소를 선택하는 게 좋다. 비닐하우스로 들어가는 에너지가 없으니 지구온난화에 역행하지 않는다. 제 고장의 농작물에 우선하자. 아무래도 환경조건에 잘 맞을 테니 살충제와 제초제보다 천적이 유효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무엇보다 익숙했던 음식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재료가 아니겠는가. 가공식품을 피하려면 농산물로 직접 조리하면 된다.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슬로푸드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가족과 더욱 친밀해지는 건 물론이고 음식물 쓰레기도 훨씬 적게 나올 것이다.

 

내 땅에서 생산한 농산물의 인기가 늘어날수록 떠나는 농민보다 들어가는 농민이 늘어날 것이다. 귀농 인파가 그 가능성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귀농 희망자를 위한 중앙과 지방정부의 정책적 배려가 요긴하며 나중에 귀농하려는 이를 위한 교육의 기회를 적극 마련할 필요가 있다. 안전한 농산물을 생산하는 농민은 땅 뿐 아니라 먹는 이의 건강을 보전하니 애국자일 뿐 아니라 환경 파수꾼이고 국토의 안보를 책임지는 자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농산물을 앉아서 받아먹는 소비자는 생산자에게 고맙고 미안해할 의무가 있고 다시 활기차질 농촌은 살맛과 함께 자부심도 배양될 것이므로 자급자족의 규모는 더욱 확대될 수 있다. 그를 위해 농민들은 기업에서 판매하는 씨앗보다 환경변화에 강한 전통 씨앗을 다양하게 확산시킬 책임이 있다.

 

돈벌이에 유난히 신통한 과학기술보다 자급자족의 가치를 되살릴 과학기술이 동원되어야겠지만 우선 골프장이나 주택단지로 허물어지는 경작지를 절대 보존해야 하고, 육지의 어떤 경작지보다 많은 영양분을 제공해온 갯벌을 되살려야 한다. 탄산칼슘 껍질을 가진 조개들과 식물성 플랑크톤이 풍부한 갯벌은 수많은 어패류의 산란장일 뿐 아니라 지구온난화를 효율적으로 예방하는 ‘바다 숲’이기도 하다. 식물성플랑크톤의 막대한 탄소동화작용은 바다 생태계의 원천이기도 하다.

 

먹이사슬의 단계를 거치지 않아 에너지 효율이 높은 채식 위주의 식사법을 회복하는 것이 지구는 물론 먹는 이의 건강을 도모할 것이다. 밀집시킨 가축에 곡물 사료만 먹이며 공장처럼 대량 사육해 얻는 고기를 되도록 마다하고, 자연에서 구한 여물 위주로 사육한 가축이나 강이나 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조금만 먹는 육식이 바람직하다. 어금니가 송곳니보다 적은 것처럼. 채식도 조리과정이 단순할수록 영양분 파괴가 낮으니 좋을 몸에 좋다. 내 나라 땅에서 자급자족할 수 있는 규모의 인구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인구는 이미 넘친다. 우선 우리 전통과 입맛에 맞는 농산물을 생산해 신뢰를 바탕으로 제공해 줄 수 있는 지역을 모색할 필요는 있겠다.

 

밥 한 공기를 나눠먹던 두 아이가 한 공기 씩 먹겠다고 할 때 정신이 퍼뜩 들었다는 가장이 있었다. 세계의 곡간에 먹을거리가 넉넉한 것 같아도 사정이 생기면 금방 사라질 수 있다. 곡간에 아직 여유가 있을 때 생산성 있는 농토를 소비자와 가장 가까운 곳에 확보하고 변화될 환경에 이겨낼 수 있는 품종의 씨앗을 다양하게 심어야 21세기에 닥칠 위기를 극복할 능력이 배양될 것이다. 결국 자연스러움이다. 가장 기초적인 식욕을 먼저 안전하게 충족시키기 위해 먹을거리를 나누던 시절의 풍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일까. 도저히 실현가능한 상상일까. 그렇다면 코앞까지 다가온 지구온난화를 바라보면서 어떤 한가로운 대안을 제시해야 할까. 먹을거리의 위기는 지구온난화보다 먼저 올 텐데. 신자유주의의 한계가 드러난 요즘 다시 주목받는 경제학자 칼 폴라니는 경제논리보다 우정과 환대로 나누는 것이 전통이었다는 점을 귀띔하지만 사실 우리는 얼마 전까지 늘 그랬다. (사이언스올, 2009년 7월 4째 주)

수입밀의 가격이 올라서 우리밀의 가격경쟁력이 어느 정도 올라갔다고 합니다. 위정자들이 조금만 노력을 한다면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겠지요. 강바닥을 긁어내서 그나마 농업용수까지 부족해지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ㅡ.ㅡ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7. 15. 12:22

 

150년 전 미국의 재야 철학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는 모든 동물은 체온 유지를 위해 식(밥)과 주(집)만이 필요한데 사람은 의(옷)까지 요구한다고 말했다. 사람에게 털이 없기 때문일 텐데, 동물 중에 주마저 필요 없는 경우도 있다. 그저 추워지면 후손에게 생을 넘겨주고 마는 곤충들이 그렇다. 번식기 이외의 새들도 딱히 집이라 할 만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소로우는 척추동물을 생각했나보다. 한데, 의식주 중 모든 동물이 피할 수 없는 필수 요소가 있다. 짐작하듯, 식이다. 밥을 먹지 않으면 아무도 살아갈 수 없다.

 

사람의 많은 욕구 중에서 식욕이 가장 원초적이다. 군종장교도 고된 훈련으로 허기지면 평소에 사병에게 나누어주던 배급 건빵을 슬쩍 숨긴다지 않던가. 금욕이나 명예욕도 배가 고프지 않을 때 한하는 이야기일 텐데 요즘 우린 배고픈 고통을 모른다. 도처에 먹을거리가 넘치니 굳이 챙기지 않아도 굶을 이유가 없고 극구 사양하지 않으면 거북해진 위장을 감당하지 못할 경우가 많다. 노인들이 회고하는 어릴 적 ‘보릿고개’를 예로 들지 않아도 과거에 굶주림이 일상이었다던데, 역사상 먹을거리가 가장 풍족한 이른 21세기. 하지만 전문가들은 21세기에 심각한 식량 위기가 닥칠 것으로 전망한다.

 

요즘 어디를 둘러보아도 먹을거리는 넘친다. 거리에 나가면 비만이 눈에 띄게 늘었다. 어린이 비만이 사회문제가 된지 오래고, 많은 사람들이 적게 먹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입맛을 없애는 약을 판매하기도 하고 심지어 위장을 잘라내는 수술도 낯설지 않다. 명절이나 생일상에 조금 올라오던 고기와 계절을 앞당긴 과일이 식품매장을 가득 채웠고 주차장이 완비된 식당마다 임금님과 진시황이 부럽지 않은 식단을 앞다투어 선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갑작스런 풍요는 지구촌에서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다. 한쪽의 영양실조와 기아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데 다른 쪽은 살을 빼려고 시간과 돈을 퍼붓는다. 그에 들어가는 돈이면 지구촌의 기아를 해결하고도 남는다고 한다. 먹을거리가 남아돌아도 배고픈 인구는 늘어만 가는 현실에서 역설적인 현상은 풍요로운 지역에서 비만은 가난의 상징이라는 거다. 누구나 지적할 수 있는 분배와 균형의 왜곡일 텐데, 앞으로 분배할 식량 자체가 줄어들면 어떤 혼란과 비극이 연출될 수 있을까. 그 위기의 시험대를 안고 있는 21세기. 누군가 말한다. 위기(危機)는 위험(危險)과 기회(機會)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걱정하는 지구온난화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위험의 원인일 것이다. 바다는 이미 아열대화가 진행돼 명태와 대구와 같은 한대어종은 자취를 감췄고 온대어종인 오징어가 풍어를 이룬다. 문제는 우리가 먹지 않는 보라문어를 비롯한 아열대와 열대어류가 속속 올라올 뿐 아니라 어업을 방해하고 어부를 위험에 빠뜨리는 아무르불가사리나 노무라입깃해파리들이 떼를 이뤄 출몰한다는 거다. 수온이 변한 바다에 해조류가 달라붙지 않는 백화현상이 만연되고 해조류가 없는 바다에서 먹이와 알 낳을 장소를 찾지 못하는 물고기들이 사라지는 현상은 이제 일상이 되었건만 대형 선단을 동원하여 알을 가진 생선까지 싹 쓸어 잡는 자본의 남획은 그칠 줄 모른다.

 

육지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즐겨 먹는 품종의 사과나무가 남쪽 지방에서 통 자라지 못한다. 예전에 어림도 없던 강원도 홍천에 심어야 제대로 된 수확을 얻을 수 있다. 감나무 북방한계선은 자꾸 올라가 이제 북한 지역에서 감을 가져와야 할 날이 멀지 않았다. 어떤 이는 우리도 열대과일이나 작물을 심자고 제안하지만 농작물 재배 환경은 간단하게 변하는 게 아니다. 보수적인 식습관 때문만이 아니다. 어릴 적부터 익숙해진 음식을 간단히 포기할 사람은 흔치 않을 테지만 그보다 농작물이 싹터 열매 맺는 때까지 영향을 주고받는 생태계의 복잡다단한 관계를 결코 사람이 재현할 수 없다.

 

지구온난화로 해수면이 상승했을 때 문제가 심각하게 발생할 것이다. 태평양에 흩어진 작은 국가들의 농토에 바닷물이 침입하기 시작했고 국가 재난을 선포한 투발루는 전 국민의 이주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지경에 빠졌는데, 온실가스는 좀처럼 줄어들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지구온난화 극복의 시나리오로 잘 알려진 영국의 ‘스턴 보고서’는 현재에도 늘어나는 온실가스를 당장 줄일 수 없으니 2015년에 최대가 된 이후 해마다 1퍼센트 씩 줄이자고 제안한다. 2050년에 지금보다 평균 3도 오르는 정도에서 멈출 것으로 기대하면서.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3도 상승은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3도 이상으로 오르면 상승효과가 가속돼 6도까지 오르는 걸 막기 어렵다고 분석하기 때문이다. 그 정도에 이르면 인류는 물론이고 지구촌의 생물 대부분이 멸종하게 될 것으로 시나리오는 예측한다.

 

요즘과 같은 추세로 더워지면 5년 이내에 여름철 북극권의 얼음이 다 녹을 것으로 예측하는 학자들은 지금보다 3도가 오르면 아마존이 사막으로 변하고 호주가 타버리며 도시는 거대한 태풍에 시달릴 것으로 예상하는데, 그린란드도 완전히 녹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면 해수면은 7미터 이상 상승할 테니 주로 해안에 분포하는 세계의 곡창지대는 버림받게 될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 없다. 온실가스 배출을 당장 획기적으로 줄이지 않을 때 벌어질 수 있는 21세기의 재앙을 수천 명의 기후학자들이 그리 연구해 냈다.

 

기계화된 농토에 일제히 심는 농작물의 씨앗은 과거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불과 얼마 전까지 농부들은 이듬해에 심을 씨앗을 겨우내 엄격히 보관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기업에서 다수확품종의 씨앗을 산다. 다른 기업의 씨앗보다 소출이 늘어야 내년에 수입을 늘릴 수 있는 까닭에 종자회사들은 연구개발 경쟁에 치열하고, 그럴수록 씨앗이 가지고 있던 유전적 다양성의 폭은 줄어들게 된다. 일손이 크게 줄어든 농촌에서 값비싼 기계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농사꾼들은 수지를 맞추려면 몇 안 되는 품종의 농작물을 넓은 농토에 획일적으로 심는데 그런 농산물은 씨앗이 요구하는 조건을 잘 맞추지 못하면 수확이 기대 이하로 떨어진다. 따라서 종자회사가 지시하는 대로 화학비료나 농약을 그때그때 뿌리며 재배 환경을 유지해야 한다. 외상으로 구입한 농기계와 씨앗 비용을 갚고 식구를 건사하려니 다른 도리가 없다. 한데 온난화되는 지구의 환경은 점점 안정을 잃어가고 있다.

 

소출은 늘었어도 품종이 단순해진 농작물은 자급자족과 관계없이 오로지 상품이 되었다. 농부들은 수확한, 아니 수확도 하기 전의 농산물을 전부 거래처에 팔아넘기고 자신이 먹을 농산물을 따로 구입해야 한다. 수확한 농작물을 조금씩 팔기 귀찮고 보관비용도 만만치 않으니 커다란 창고를 가진 기업에 팔게 되는데, 지역과 국가, 국제 간 거래에 따라 농작물을 농민에게 구입하는 기업의 규모는 차이가 크다. 농산물의 국제 거래를 독과점하는 다국적기업은 자급 기반을 잃은 국가에 군림할 정도로 영향력이 지대하다.

 

막대한 규모의 창고와 운송 능력 가진 다국적기업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농산물을 파는데, 그 과정에서 투기가 개입한다. 세계 경제 상황에 따라 요동치는 원유가격이 생산량과 관계없듯, 국제 곡물 가격이 오르내리는 현상도 투기자본 때문인데, 가난한 국가는 남아도는 농산물을 충분히 구입하지 못한다. 한데 선박으로 오랜 시간 운송하는 농작물은 도중에 상하지 않도록 농약을 집중 살포해야 하고 비행기로 나르는 농작물은 가격이 지나치게 높으니 아무나 먹지 못한다. 그런데 유전적 다양성은 폭이 줄어든 농작물은 환경변화에 매우 취약하다. 멸종 가능성이 점쳐질 정도다.

 

농토가 사라진다. 해수면 상승을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자에 의한 각종 개발과 분별없는 산업화로 농작물 재배 공간이 거듭 줄어들거나 오염되고 있다. 농토가 도시에 잠식되는 사례는 신도기 개발 열기에 휩싸인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가 공통이고 생산성이 아주 뛰어난 갯벌을 매립하는 행위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사례다. 대규모 산림벌채로 목장이나 농장을 만든 후 토양이 황폐된 아마존이 있고 대형 댐으로 드넓은 농토가 수몰되는 인도와 같은 국가도 있다. 지구온난화에 의한 사막화로 목초지가 메말라가는 중국과 몽골도 21세기를 걱정해야 한다. 겉보기 멀쩡한 농토도 과다한 농약 사용과 대기오염으로 인한 산성비 전에 없이 부실해졌다.

 

최근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꿀벌이 사라져 걱정이 태산이다. 아직 그 구체적인 실태가 파악되지 않은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닐 텐데, 대기오염과 과다한 농약이 원인으로 지목되는 가운데 전문가들은 지나친 인공 증식으로 타고난 유전적 다양성을 잃은 상태에서 꿀벌의 개체군이 지나치게 늘어난 현상에 주목한다. 유전적 다양성의 폭이 현저히 좁아진 꿀벌 집단에 천적인 응애가 급격히 늘어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벌통이 경작지를 따라 국내는 물론 세계를 오고가는 현실이 아닌가. 겨우내 비닐하우스 용 꿀벌을 수입하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일 텐데, 어떻게 계산했는지 모르지만,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사라지면 4년 내에 사람도 견디기 어렵다고 예측했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우리나라의 인구는 세계 최하의 출산율 덕택에 머지않아 줄어들 것으로 전망하지만 세계의 인구는 여전히 늘어나고 있다. 분쟁과 벌목과 사막화로 농토가 황폐해지고 마실 물이 오염되었으며 수출작물에 자급 기반을 빼앗긴 국가 위주로 늘어난다. 아이가 자꾸 죽어가는 탓에 더 낳자 배고픈 인구가 더욱 늘어나는, 역설이라기보다 인지상정이 지배하는 지역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다. 사회적 약자, 다시 말해 남성보다 여성, 어른보다 어린이나 노인들이 먼저 굶주린 뒤 병에 걸리고, 치료와 영양공급의 순위에서 밀려나는 여자 아이와 할머니부터 희생되는데 그 수가 해마다 2천만 이상을 헤아린다. 그들도 먹어야 살 수 있다. 먹을거리에 얽힌 21세기의 풍속도가 시방 이렇다. (사이언스올, 2009년 7월 셋째 주)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9. 2. 17. 12:31

 

도심을 지나는 고속도로에는 시간에 따라 막히는 구간이 거의 정해져 있다. 각오를 하고 천천히 지나다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챙 넓은 모자에 마스크로 얼굴 가린 사람들. 훔친 카드로 현금 찾으러 현금인출기 앞에 모습을 드러낸 범죄자 같은 행색으로 뻥튀기나 오징어를 파는 그들은 햇볕과 매연을 극도로 경계하는데, 소용 있을까 싶다. 차가 막히는 틈에 장사한다지만 돈 받고 물건을 건네면서 거스름돈을 내주려 이리저리 뛰는 그들이 오히려 도로를 막히게 하는 건 아닐까. 어쩌다 순찰대가 보이면 차선을 가로질러 꽁지 빠지게 달아나는 그들의 건강은 내내 괜찮을지.

 

고속도로와 접속되는 도로 한쪽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좌판이 있다. 신호대기하는 자동차를 상대로 바나나를 파는데, ‘국민타자’ 이승엽 선수가 1루에서 사용하는 야구 글러브를 두개 엎어놓은 듯 커다란 바나나 한 송이가 오전에 3천원, 오후면 2천원이다. 한 송이만 사도 온 가족이 실컷 먹을 것 같은 바나나. 멀지 않았던 과거, 선망의 대상이었다. 1980년대 초, 생태조사를 위해 제주도로 간 대학원생은 호주머니와 한참 상의를 한 후 달랑 한 쪽을 사서 일행과 나누어먹었다. 대학 등록금이 지금의 10분의1도 되지 않았던 당시 5백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산 바나나는 제주도의 한 온실에서 재배한 것이었다.

 

1980년대 말, 그 대학원생은 미국에 갈 일이 있었다. 부자나라라 그런가. 그리 고급도 아닌 호텔의 로비에 바나나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마음대로 방에 가져가도 된다는 게 아닌가. 주위 눈치도 살펴야하니 딱 한 송이만 가져갔는데, 호텔을 옮길 때까지 시커멓게 변한 바나나를 몇 쪽 먹지도 못했다. 맛난 음식 먹을 일 많은 일정 중에 바나나에 미처 손이 가지 않았던 거다. 그 후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도 바나나가 흔해졌다. 흔해서 그런 건 아닌데, 웬만큼 배고프지 않으면 식품매장에 쌓인 바나나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참 좋은 식품임에 틀림없지만 좀 찜찜하다. 생산지에서 먼 길 수송되는 과정에 흥건히 뿌렸을 농약이 과육에도 스몄을 것 같다.

 

다년생 풀에서 재배하는 만큼 과일이라기보다 채소에 가까운 바나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농장에서 껍질이 파란 상태에서 출하돼 지구를 반 바퀴 돌아 우리 고속도로 입구에 잔뜩 포개져 있을 정도로 흔하지만 전문가는 멸종위기를 점친다. 품종이 지나치게 단순해 변화된 환경에서 여전히 재배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는 거다. 너나 할 것 없이 다수확 품종만을 심어 곳곳에 널렸어도 지구온난화로 재배 환경이 바뀌면 일거에 사라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정도로 유전적 다양성이 협애해진 요즘의 바나나는 머지않아 다시 선망의 대상으로 바뀔지 모른다.

 

사탕수수와 담배가 여전히 유명한 쿠바는 한때 그 사탕수수와 담배 때문에 굶주려야 했다. 몇 가지 안 되는 품종을 획일적으로 광활하게 심는 ‘단작’(單作, monoculture)이 원인이었다. 비옥한 땅의 끝에서 끝까지 사탕수수와 담배를 심은 쿠바의 농장을 소유했던 미국의 농업 자본은 지금부터 50년 전 아바나에 입성한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끌던 혁명군에 쫓겨 혼비백산 탈출하기 바빴고, 쉽게 돌아오리라 믿었지만 미국에 주저앉아야 했다. 독재정권의 착취에 진저리를 친 민중이었기에 혁명세력에 대한 지지가 워낙 단단해 막강한 미국의 지원을 받은 반군의 몇 차례 침입도 소용이 없었지만, 경제 사정이 이내 호전되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턱밑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묶어두려는 소련에서 사탕수수와 담배를 시세보다 훨씬 비싸게 구입했던 거다.

 

그런 소련이 무너지자 미국은 재빨리 경제 봉쇄에 나섰고 판로가 막힌 사탕수수와 담배를 식량 대용으로 쓸 수 없는 쿠바는 굶주림을 한동안 감내해야 했다. 오로지 사탕수수와 담배만을 재배하다 호되게 혼난 쿠바는 지금 대부분의 식량을 자급자족한다. 아바나 곳곳에 유기농장을 만들어 이웃과 나누면서 건강도 자존심도 회복되었다고 한다.

 

호주에도 사탕수수를 끝 간 데 없이 심었다. 호주에 원래 사탕수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사탕수수 잎을 갉아먹는 해충이 있을 리 없지만 나타났다. 천지사방이 사탕수수로 가득하니 어떤 풍뎅이가 건드려 보았을 거고, 달짝지근한 게 먹을 만하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중간 중간에 다른 작물을 심었다면 풍뎅이는 그렇게 늘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청정한 습기가 보전되었다면 개구리가 풍뎅이를 먹으며 늘었을 테고, 개구리를 잡아먹으려 다가온 뱀과 족제비도 풍뎅이를 조절했겠지만 오로지 사탕수수만 심은 관계로 한 번 맛들인 풍뎅이는 사탕수수밭에서 제 세상을 만끽했던 게다.

 

풍뎅이가 눈에 띄게 늘자 살충제를 뿌렸던 농장주는 해마다 보강시킨 살충제도 소용없게 된 순간을 맞아야 했다. 알을 많이 낳는 풍뎅이는 세대를 거듭하면서 독성을 이겨내고 있었던 거였다. 독성을 갱신한 살충제는 엉뚱하게 남았던 개구리를 몰아냈고, 개구리를 먹던 다른 동물도 쫓아냈으니 방법이 없어 고민하던 농장주는 하와이의 수수두꺼비를 들여오기로 했다. 과연 덩치가 축구공 반 만한 그 두꺼비는 풍뎅이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웠고 걱정은 드디어 물 건너가는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데에서 그만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이번엔 호주에 천적이 없는 수수두꺼비가 막대하게 늘어나는 게 아닌가.

 

경사가 심한 하와이에서 엉금엉금 기는 습성을 지닌 수수두꺼비는 평지인 호주에 오자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사탕수수밭에서 풍뎅이를 원 없이 잡아먹으며 집단을 키운 그 두꺼비는 떼를 이뤄 움직이는데, 멀리서 보면 땅이 들썩이는 듯해, 보는 이를 섬뜩하게 만들 정도였다. 풍뎅이로 양이 차지 않자 토종 곤충과 희귀한 개구리까지 먹어치우는 바람에 여간 골칫거리가 아닌 수수두꺼비를 주목하지 않던 언론은 악어가 죽자 난리를 쳤다. 당국은 뭐하냐는 거였다. 처음 보는 통통한 두꺼비를 냉큼 삼킨 호주 특산 크로커다일 악어가 수수두꺼비의 피부 독에 중독돼 자빠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하는 수 없어 수수두꺼비 두 마리에 생맥주 한 컵을 경품으로 내놓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아무리 할일 없는 주당이라도, 일단 취하면 더 잡으려들지 않았던 거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당국은 유전자조작 기술로 불임유전자를 삽입해 멸종으로 유도하겠다고 발표했지만 글쎄, 농작물에 대한 유전자조작도 대단히 어려운데, 수수두꺼비에 대한 유전자조작이 쉬울지 알 수 없지만, 만일 성공한다면 그 뒤가 더 걱정일 수 있다. 조작된 유전자가 악어에 삽입된다면? 수수두꺼비를 회피해야 한다는 각인이 악어의 뇌리에 박히지 않는다면 사탕수수를 끝 간 데 없이 심도록 허용한 호주 당국은 악어마저 멸종될 우려를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어디 악어에서 그치겠는가.

 

청송과 영양에서 오래 생산해 유명해진 청양고추는 청양에도 심지만 회사에서 구입해야 하는 씨앗의 유전자는 극히 단순해졌다. 고추를 비롯해 우리나라에 심는 대부분의 채소 씨앗의 사정이 그렇다. 유전적 다양성을 상실한 씨앗을 넓게 심은 농부는 로또하는 기분이 들겠다. 수확이 모 아니면 도이기 때문이다. 모든 조건이 좋았는데 수확을 앞두고 질병이 돌면 일거에 못쓰게 되는 마술.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는 비닐하우스에 심으면 탈이 없지만 비용이 들어가 원가가 상승한다. 다른 농토에 질병이 돌고 나만 괜찮아야 로또에 당첨될 수 있는데, 운이 좋을 때는 그리 많지 않다.

 

유전자가 단순한 씨앗은 한꺼번에 꽃피고 열매를 맺으니 그때 농부는 몹시 바빠야 한다. 때를 놓치면 허탕이니 인건비가 적지 않게 들어가야 한다는 뜻이다. 일본에 거액의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는 하우스용 딸기가 그렇다. 스페인에서 재배하는 유럽의 가지가 그렇다. 그렇게 ‘소품종 다량생산’으로 수확한 가지를 보조금 받아 원가를 낮춘 다음에 수출하면서 사단이 났다. 지역 특산 가지들이 자국 시장에서 추풍낙엽처럼 사라지는 게 아닌가. 한데, 지역 농부들의 파산을 부른 소품종 다량생산은 인큐베이터처럼 재배 환경을 통제하는 거대한 비닐하우스에서 싹틀 뿐이다. 지구온난화로 환경이 바뀌면 사라질 가능성이 지역의 가지에 비해 현저히 높다. 유전적 다양성을 상실한 씨앗이기 때문이다.

 

아마존의 원시림 지대를 흐르는 커다란 강은 물이 항상 많고 맑아 그냥 떠 마실 수 있다. 아니 있었다. 아마존 숲을 끝 간 데 없이 불태워 콩을 심기 전까지 그랬다. 아직 공식적으로 유전자조작 콩은 아니라지만 분명한 건, 그 콩의 유전적 다양성도 매우 낮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재배 방식은 제한적일 테고, 살충제와 제초제가 적지 않게 들어갈 게 틀림없다. 원시림에서 사냥하며 식솔 먹였던 터전에 광활한 콩 농장이 들어서자 원주민은 사냥감만 잃은 게 아니다. 마실 물마저 말라버렸다. 웅덩이에 고인 물에는 비행기에서 살포한 농약이 뿌옇게 스몄는데 등에 업힌 아이와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은 목마르다 아까부터 보채니 엄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흙탕을 가라앉힌 물통에서 뿌연 물을 한 컵 떠 주자 허겁지겁 마시는 아이들. 그들은 전에 없던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 속절없이 죽고, 미국을 제친 브라질은 세계 최대 콩 수출 국가로 화려하게 등극했다.

 

옥수수가 원산지인 멕시코에서 원주민의 주식은 당연히 옥수수다. 옥수수를 갈아 반죽한 또르띨라를 화덕에 만두피처럼 둥글게 구워, 다진 풋고추와 잘게 자른 양파와 으깬 토마토를 넣고 말아서 먹는다. 그 3가지를 멕시칸소스라고 말하는데, 멕시코 국기는 초록색과 흰색과 붉은색으로 구성돼 있다. 멕시코에 일찍이 옥수수가 없었다면 마야도 잉카도 찬란한 문명을 꽃피울 수 없었다. 멕시코 원주민은 개구리를 신격화한다. 개구리가 있는 곳에 물이 있을 거고, 물이 있다면 옥수수를 재배할 수 있지 않은가. 그래서 멕시코 원주민들은 옥수수를 가축에 함부로 먹이지 않는다. 성스러운 곡물이기 때문이다.

 

옥수수에 포함되는 탄소는 다른 곡물의 탄소와 동위원소가 다르다. 학자들은 탄소동위원소를 측정해 옥수수 섭취량을 국가 별로 비교한다. 아침에 우유를 부어 먹는 옥수수 가공식품 이외에 식단에 자주 옥수수 요리를 올리지 않는 미국인을 멕시코인과 비교했더니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잡식동물의 딜레마》를 쓴 마이클 폴란이 “걸어 다니는 콘칩”이라고 해야 할 지경으로 미국인이 옥수수를 많이 먹는다는 게 아닌가. 원인은 음료수에 들어가는 옥수수 시럽과 고기였다. 미국에서 사육하는 대부분의 가축은 옥수수 사료를 먹는다. 그것도 유전자가 조작된 걸로.

 

하늘에서 보아도 끝이 없는 밭에서 걷은 옥수수의 양은 실로 막대한데 대부분 가축사료로, 일부가 시럽으로 가공되고 일부는 수출된다. 과학자의 성과로 옥수수 시럽의 당도가 설탕보다 높아지면서 가격까지 저렴해지자 코카콜라를 필두로 옥수수 시럽으로 설탕을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제 대부분의 음료수는 옥수수 시럽으로 단맛을 낸다. 그렇게 기업 수익을 늘린 음료수는 비만을 부추기는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다. 미국을 비롯한 북중미와 유럽의 많은 국가가 그렇다. 일회용 1리터 용기를 구입하면 대형 매장의 문을 나서기 전까지 몇 번이고 리필이 가능한 까닭에 가난한 이가 선택하게 된다. 옥수수는 고기의 값도 크게 낮췄다. 원료를 궁금하게 하는 다진 고기는 싱싱한 채소보다 가격이 쌀 뿐 아니라 갈증마저 부추긴다. 서구의 비만은 역설적으로 가난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민족 대 이동 현상이 전국에서 연출되는 추석, 혼자 사는 어떤 이는 반드시 차를 몰고 고향에 간다. 시골의 부모님이 이런저런 농산물을 잔뜩 싸주기 때문에 열차를 이용할 수 없다고 너스레떠는데, 멀지 않았던 과거, 우리 농촌이 다 그랬다. 이른바 ‘다품종 소량생산’이다. 지난 가을에 갈무리한 온갖 채소와 곡식의 씨앗을 여기저기에 심어 계절에 따라 다양한 풍미를 맛볼 수 있게 하는 다품종 소량생산은 해충 피해를 최소화할 뿐 아니라 가족의 영양을 높였고 무엇보다 자급을 가능하게 했다는 게 자랑이었다. 환경이 변해 어떤 곡식의 소출이 줄면 다른 곡식이 잘 돼 벌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곡식도 품종에 따라 심는 장소도 날짜가 달랐다. 50의 나이에 철학교수를 그만둔 초보 농사꾼인 윤구병은 《잡초는 없다》에서 자신의 경험담을 소개한다. 할머니에게 콩 심는 시기를 물으니 “그 손 펴봐!” “그건 감꽃 필 때 심고, 저쪽 손!” “그건 감꽃 질 때 심는 거여.” 했다는 거다. 오랜 개성을 간직한 삼라만상의 생명에 곡식과 잡초가 따로 나누어질 리 없다는 걸 윤구병은 깨닫는다. 미안한 마음으로 곡식만 골라 심지만 개성을 배려하면 몸도 마음도 생태계도 건강하다는 걸 배웠다.

 

단작은 씨앗과 지역의 문화와 개성을 무시한다. 때와 장소에 따라 토지의 환경이 다르건만 단작은 오로지 그 씨앗에 맞는 경작 조건을 요구한다. 만일 유전적 다양성의 폭까지 좁다면 경작 방식은 더욱 협애해지고, 유전자마저 조작했다면 환경변화에 극도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씨앗은 동네 어른이나 선배의 충고를 배척한다. 종자회사의 매뉴얼을 잘 살펴야 로또에 당첨될 자격을 허용할 따름이다.

 

단작은 지구온난화를 맞을 후손에게 부메랑으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바뀐 경작 환경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단작의 유혹에 길들어 조상이 다채롭게 물려준 전통 씨앗들을 잃어버리지 않았던가. 늦기 전에 획일적 편의에 길들여진 타성을 다양성으로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개성이다. 농작물에 국한하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사이언스올, 2009년 2월 3번 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