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인천

디딤돌 2010. 1. 15. 15:22

 

기상관측 이래 하루 최대 강설량을 기록한 이번 겨울은 몇 년 만에 최저 수은주 눈금을 기록하더니 이제 한풀 꺾였다. 슈퍼컴퓨터를 돌리는 기상청은 예년 제트기류에 묶여 북극에 멈춰 있던 시베리아의 한랭전선이 남쪽으로 풀려 혹한이 세계 곳곳에 몰아치게 되었다고 현상을 분석하지만 왜 제트기류가 풀렸는지 그 원인을 파악하지 못한다. 혹 지구온난화와 관계없는 걸까. 아무튼 모처럼 눈이 녹은 길을 마음 놓고 걷게 되면서 마음은 벌써 봄을 기다린다.

 

봄은 언제 오나. 어린이에게 물으니, 눈이 녹으면 온다고 했다던데, 반짝 추위가 없지 않겠지만 1월 초순부터 계속되던 한파는 대한이 지나면서 봄기운에 녹아내리겠지. 대한 뒤에 입춘이 기다리지 않던가. 옛 시인은 들판에 노고지리가 울면 봄이 왔다고 노래했다. 그렇게 학교에서 배웠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며, 봄이 왔으니 부지런한 농부는 쟁기 들고 밭에 나간다고 했다. 한데 요즘 노고지리, 다시 말해 종달새는 통 보이지 않는다. 종달새가 알을 낳는 초원이나 봄보리 밭이 동네에서 사라지기도 했지만 겨울이 지나치게 더워 언제 왔는지 모르게 봄이 후다닥 지나가는 일이 그만큼 잦았기 때문일까.

 

끝 부분이 검고 다리만큼 긴 부리를 가진 알락꼬리마도요는 우리 갯벌을 봄가을이면 어김없이 찾는 나그네새지만 뉴질랜드 마오리족에게는 봄의 전령이다. 마오리족은 알락꼬리마도요를 보아야 비로소 봄이라는 걸 깨닫고 시인을 명상에 잠시고 화가는 화구를, 농부는 쟁기를 챙긴다는 거다. 한데 요즘 마오리족은 춘래불사춘(春來不思春), 봄이 와도 봄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갯벌을 본격적으로 광활하게 매립하면서 이동 중간에 충분한 휴식과 먹이를 먹지 못한 알락꼬리마도요가 뉴질랜드 해안을 예년처럼 찾기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오리족은 한국에 매립 자제를 당부한다는데, 우리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살리기’를 빙자하는 4대강 사업이 거대한 예산의 뒷받침 하에 얼음이 단단히 언 낙동강 일원에서 본격적으로 착공되고 있다. 국민 절대다수가 반대하거나 말거나, 일방적으로 “지구온난화 시대의 선택이 아닌 필수” 라면서 ‘녹색성장’의 기치를 함부로 드높인다. 한데, 녹색성장에 대한 개념은 우리 사회나 세계나 정립된 바 없다. 4대강 사업이 과연 온실가스 감축에 기여하는 바 있을까. 동원되는 중장비가 쏟아내는 온실가스만이 아니다. 막대하게 들어가는 각종 토목건설 자재들도 에너지를 투여해야 가공, 운송, 시공된다. 시멘트는 온실가스 배출 없이 생산된다던가. 한데 더 큰 문제는 10미터가 넘는 대형 보 아래에서 썩어들어갈 유기물질이다. 상류에서 홍수 때마다 휩쓸려 들어와 쌓일 낙엽이나 축산폐기물들은 무시할 수 없는 온실가스를 배출한다고 세계의 댐 전문가들은 주장한다.

 

토목과 생태 관련 수천 명의 교수와 연구자들이 4대강 사업은 지구온난화의 대책일 수 없으며 돌이킬 수 없는 생태계 파괴로 후손에게 영속적인 피해를 안길 것이라 구체적이며 양심적 논거를 가지고 목이 터지게 주장하지만 귀를 틀어막은 정부는 텔레비전을 비롯한 주요 언론을 장악한 상태에서 국민을 그저 홍보대상으로 여긴다. 납득할만하게 투명하고 민주적인 토론회는 물론 열리지 않았다. 창세기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처럼, “4대강은 지구온난화의 대안이다!” 하고 말씀하시자, 일류대학교 법학대학을 나와 고시를 척 통과한 국회의원도, 과외공부 지독하게 한 뒤 외국어고등학교 나온 정부고관들과 건설업계와 결탁된 이른바 영재들도 “할렐루야!”를 외친다. 교활하다. 삽자루가 두드리는 돈의 장단에 자칭 똑똑하다던 사람들의 얼이 빠져나갔다. 세종시의 경우는 아니 그런가.

 

마오리족은 알락꼬리마도요를 보고, 우리 조상은 노고지리의 울음소리를 듣고 봄을 느끼는데, 한 시인은 이제 강가에 나와 시를 쓰거나 읊지 못하게 될 내일을 생각하며 시름에 잠긴다. 아폴로11호가 달에 내려간 날, 1969년 7월, 미국에 종속된 우리도 덩달아 급작스런 공휴일을 맞았지만, 어떤 이의 얼굴은 달나라에 계수나무와 토끼가 더는 살지 않을 거라며 어두워졌다. 4대강 곳곳을 15개의 철근콘크리트 보가 가로막고 주변 강가에 물깊이보다 훨씬 깊고 높은 콘크리트 제방이 지천과 사람의 접근을 차단한다면 우리는 오랜 정서를 잃을 것이다. “강이 풀리면 배가 오겠지, 배가 오며는 임도 오겠지. 임이 안 타면 편지야 타겠지” 하며 강가에서 노래하던 가곡도 용도 폐기될 것이다.

 

인천시가 갯벌을 보존하려 나섰나? ‘습지보호지역’을 지정고시하겠다고 나서기에 이르는 말이다. 단순히 그 내용만 듣자면 시민들이 드디어 인천시의 처사를 전향적으로 평가하게 될 것으로 상삼이사들은 생각할지 모르지만, 환경단체들은 기망행위라며 발끈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천시가 지정한 6.11제곱킬로미터의 갯벌은 요란스런 개발 행위로 철새들이 외면하는 송도매립지 6과 8공구의 일부를 굳이 포함했지만 정작 보호가 요청되는 11공구의 대부분을 매립하겠다는 속셈이 아닌가. 지금까지 53.4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송도갯벌을 거의 매립한 결과, 작년부터 세계적 희귀조인 저어새를 품던 10.3제곱킬로미터만이 가녀리게 남았건만 그 11공구의 60퍼센트 가까이 추가로 매립하겠다는 의지를 인천시는 습지보호지역 지정고시로 위장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2천 여 마리만 남은 저어새는 습지 생태계의 위기를 알리는 탄광의 카나리아와 같은 존재다. 주걱처럼 생긴 부리를 습지에 넣어 휘저으며 먹이를 찾는 습성이 이채로워 세계 생태학자와 탐조객의 주목을 받는 저어새는 사람의 방해를 피해 인천 주변 서해안의 작은 무인도에서 번식을 해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작년에 공사차량이 밤낮없이 질주하고 온갖 소음과 자동차 전조등이 난무하는 송도신도시 개발현장의 근처에 둥지를 틀었다. 무턱대고 접근하는 사람들의 등쌀 때문에 무인도를 피하려한 건지, 거듭된 매립과 오염으로 멀쩡했던 갯벌이 급속히 사라지자 그 무인도를 찾는 새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나 성가셨기 때문인지, 악취가 진동하는 남동산업단지의 유수지의 작은 인공 섬을 찾은 것이다.

 

커다란 부리를 휘두르며 새끼들을 거의 다 키운 재갈매기들을 내쫒은 저어새들은 송도11공구의 갯벌에서 새끼들을 먹일 먹이를 챙길 수 있기에 지독한 악취를 참았을 것이다. 주변 송도신도시에 솟아오른 타워크레인을 요리조리 피하며 유수지의 인공 섬과 갯벌을 연실 왕복했을 것이다. 한데, 인천시는 그 갯벌의 대부분을 기필코 매립하고야 말겠단다. 여전히 최첨단 타령을 배경음악으로 깔면서. 하지만 최첨단은 곧 구닥다리가 된다는 의미와 통한다. 숱한 경험을 미루어볼 때 제아무리 최첨단이라 해도 그것은 지역에 정착된 문화와 역사에 어떤 행복도 얹어주지 못한다. 돈 잔치에서 이권을 챙길 세력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어김없이 과학기술을 앞세우지만, 멀지 않은 역사가 증명하듯 사회를 먼저 생각하지 않는 과학기술은 쉽게 재앙을 불러오곤 했다. 핵이 그랬고 앞으로 생명공학이 그럴 것이다. 1986년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했을 때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칸트의 명제를 빌어 “과학적 성찰이 없는 사회는 맹목이지만 사회적 성찰이 없는 과학은 위험하다!”고 말했다.

 

갯벌은 지구온난화를 예방한다. 갯벌 1그램에 수억 마리로 분포하는 플랑크톤이 생산하는 산소와 갯벌에서 탄산칼슘 껍질을 키우는 조개와 게들은 이산화탄소를 잡아주지만 그뿐이 아니다. 완만하게 드넓은 갯벌은 뜨거워지는 바다에서 몰려오는 파고를 완충해준다. 이미 우리나라의 바다는 세계 평균보다 두 배 이상 뜨거워졌다. 서해안도 마찬가지다. 그 갯벌을 매립한 자리에 솟아 올린 초고층빌딩 숲은 막대한 에너지 사용 없이 단 한시도 온전하게 가동되지 않는다. 냉난방만이 아니다. 창문을 열 수 없으므로 환기장치를 온종일 가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첨단을 내세우는 그런 건물들이 갯벌을 깔고 앉아도 우리는 내일의 안전을 확신할 수 있을까. 거대한 쓰나미가 해안을 덮치는 영화 해운대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올 겨울의 추위만이 아니다. 해마다 경신되는 더위, 종잡을 수 없는 기상이변은 지구온난화가 그리 멀지 않았다는 걸 웅변한다. 해안이 몇 십 센티미터만 상승해도 파고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이미 동해안은 너울성파고로 고통을 받기 시작하지 않았나. 갯벌을 매립한 송도신도시. 마냥 안심해도 될까.

 

철새는 고향을 찾아온다. 찾아오지 않으면 삶을 영속할 수 없다. 그건 사람도 마찬가지다. 고향의 정서를 잃은 사람, 삶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은 싫든 좋든 혜택을 쟁취하기 위한 경쟁사회에 내몰리게 되고, 그럴수록 남을 배려하기 어렵다. 거주하는 익명의 공간에서 정주의식은 깃들지 못한다. 그런 사회는 강호순 사건과 같은 ‘묻지마 범죄’가 빈발할 수 있다. 인천의 오랜 정서는 바다, 그 중에도 갯벌에 있다. 갯벌과 얽힌 숱한 문화와 역사, 그리고 전설이 곳곳에 깃들어 있지 않은가. 10여 년 전, 인천의 문인들은 《인천에 바다가 없다》라는 무크지를 발간했다. 갯벌을 잃은 고향에서 살가운 이웃을 만날 수 없느니 더는 시나 소설을 쓰기 어렵고 그림도 그릴 수 없다는 걸 호소한 책이었다.

 

가녀리게 남은 송도11공구는 인천의 마지막 갯벌이다. 저어새가 찾기 시작했고 알락꼬리마도요가 봄가을이면 반드시 찾는 고향이다. 마오리족에게 어쩌면 수 만년 봄을 선사해준 갯벌이기도 하다. 삼라만상이 그물코처럼 엮여 있는 세상에서 우린 알락꼬리마도요나 저어새, 그리고 마오리족 없이 온전히 살아갈 수 없다. 건강하고 행복한 내일을 기대할 수 없다. 남들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 되는 투기보다 다정한 이웃을 배려하는 인천을 생각한다면 최첨단이나 초고층빌딩을 짓기보다 갯벌을 보존하는 것이 정당하다. 돈 벌면 뜨려는 거주민보다 주민등록을 옮기고 싶은 시민이 늘어나는 인천으로 거듭나려면 자연과 정주의식을 고민해야 한다. 이제 곧 봄이 올 것이다. 알락꼬리마도요가 날아오고 저어새가 날아 올 테지. (인천IN, 2010.1.?)

 
 
 

도시·인천

디딤돌 2009. 4. 20. 17:19

 

배다리. 거기는 인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친 장년층에게 남다른 곳이다. 문화의 갈망이 어린 기억의 고향이랄까. 지금은 더러 쇠락해도 인천의 기억을 오롯이 간직하는 배다리에 가면 여전히 헌책방 거리를 만날 수 있다. 시절을 풍미했던 양조장은 지역문화를 지키려는 젊은이가 꾸민 전시와 기획공간으로 활짝 열렸으며, 지역문화에 공감하려는 의지가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찾아가 따뜻한 찻잔을 기울일 수 있는 사랑방이 여기 저기 마련돼 있다.

 

배다리에서 창영초등학교를 지나 도원고개로 이어지는 우각로는 인천시에서 가장 유서 깊은 근대문화를 품고 있다. 인천의 삼일독립운동 발상지인 창영초등학교는 1907년 개교한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이고 인근의 영화초등학교 동명초등학교, 그리고 영화여자상업고등학교는 1894년 한국 최초로 건립된 사립학교다. 지금도 사용하는 일대의 건물은 인천유형문화재로 등록돼 보존되어 있다. 도원역은 1987년 3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역사를 펼친 시발점이 아닌가.

 

지난 4월 10일, 원로 영화배우인 황정순 선생을 비롯한 인천지역의 문인과 200여 시민이 창영초등학교에 모여 ‘배다리 문화선언 선포식’을 개최해야 했다. 중구 신흥동 삼익아파트에서 동구 동국제강까지 이어지는 폭 50미터의 산업도로가 2011년 완공을 목표로 하필 배다리 우각로를 관통하겠다고 벼르기 때문이다. 미처 저항하지 못한 주택과 상가를 밀어내 황토가 드러낸 공사현장을 턱 밑까지 밀어붙인 상태에서 여보란 듯 공사를 멈추고 있는 산업도로에 대해 배다리를 기억하고 보전하려는 시민들은 ‘중구 동구 관통 산업도로 무효화 주민 대책위원회’로 뭉쳤고, 공사 강행에 저항하며 반대의 논리와 당위성을 알리는 행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천 생활문화사의 원형질인 배다리를 훼손하고 말살하려는 인천시의 태도를 반역사적이고 반문화적이며 비민주적이라고 지적하는 배다리 문화선언문은 시민의 체취가 깊이 배어 있는 배다리 일대를 적극 보호 보존하는 일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역사와 문화적 소명임을 강조하면서 후손에게 물려줄 귀중한 문화 자산으로 가꾸는 활동을 다양하게 전개할 것을 대내외에 천명했다. 나아가 그를 위한 인천시의 현명한 결단을 요구하면서 앞으로 전개될 모든 도시개발에서 인간적 삶의 가치에 기초한 도시철학과 문화적 상상력을 최대한 반영하는 발상의 전환을 촉구했다.

 

지역에 뿌리내리려는 시민이라면 마땅히 취해야 할 논리요 행동이다. 고층건물과 자동차가 질주한다고 어디 도시가 속도와 목표가 미덕일 수 있는가. 주권은 시민에 있지 않은가. 유서 깊은 도시를 잠시 돌이켜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듯, 도시는 보존된 역사와 문화, 시민들의 정주의식에 자부심을 가진다. 아무리 돈이 가치를 전복하는 세상일지라도 조상의 얼이 깃든 지역에 개발의 삽날을 들이대는 행정을 후손이 용납하지 않는다. 배다리를 관통하는 산업도로는 조상은 물론이고 후손에게 모멸감을 준다. 문화와 역사가 보전될수록 정주의식은 싹트고, 뜨내기 공간일수록 강호순 사건과 같은 사이코패스는 빈발한다. 지방자치단체가 지향해야 할 도시는 어디에 있어야 바람직하겠는가.

 

배다리 문화선언문을 채택한 시민들은 배다리 일대를 ‘배다리 에코뮤지엄’으로 조성하자고 제안한다. 그를 위해 헌책방 거리와 인천시 지정유형문화재를 포함한 우각로 일원의 골목을 보전하고 도로 예정 부지를 역사 문화 테마파크로 가꾸자는 것이다. 그를 위해 산업도로 통과 구간의 지하화를 요구하는데, 더 좋은 대안도 가능하지 않을까. 아예 시민이 모여드는 녹지로 조성하자는 거다. 턱까지 다가온 도로는 광장으로 활용하고 황토가 드러난 부지에 나무와 잔디를 심어 배다리 에코뮤지엄으로 연결하면 어떨까. 속도와 목표를 추앙하는 산업도로가 인천에 뿌리내린 시민들이 모여드는 녹색광장으로 열릴 것이다. (경향신문 인천판, 2009년 4월 ?일자)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8. 12. 26. 15:29

 

백화점 명품매장을 구경한 적이 없어 그런 곳을 어슬렁거리는 소비자의 행태를 짐작하지 못하지만 명품이라는 벼슬을 쓴 물건은 이웃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평범한 시민의 행복과 무관하다는 생각이 든다. 품질보다 상표, 실용보다 과시를 위해 만든 물건은 익명사회에서 천박한 가치를 잠시 발할 뿐, 개성을 속속 깊이 이해하는 이웃이 서로 배려하는 공동체에서 거추장스러울 것이다. 소비자의 자극적 취향에 배타적으로 봉사하는 고가 상표의 물건은 위화감을 촉발할지언정 사회에 대한 연대나 책임의식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 팔면 끝인 물건일 뿐이다.

 

한 경제학자는 일반 시민이 느끼는 소득과 행복의 상관관계를 전한다. 소득이 미화 1만 달러까지 오르는 동안 행복은 대체로 비례하지만 1만 달러를 넘으면 행복은 정체되고, 소득이 4만 달러를 넘어서면 오히려 행복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필요보다 과시, 과시보다 질시가 소비를 부추기는 까닭이란다. 명품이 그런 천박한 소비를 부추길 텐데, 최근 도시축전을 준비하는 인천은 온통 ‘명품’ 타령이다. 명품이라. 역사와 문화가 이웃 사이에 숨 쉬어야 하는 도시는 과시를 목적으로 하는 상품인가. 아니면 도시는 한낱 투기장이고 시민은 고작 익명의 소비자인가. 투기장이 된 도시에서 시민의 정주의식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먹고 튄다고 해서 이름붙인 이른바 ‘먹튀현상’은 헐값으로 인수한 은행을 고가로 팔고 나가면서 세금 한 푼 내지 않은 외국의 투기자본에 한정되지 않는다. 익명의 도시에서 먹튀현상은 아주 자연스럽다. 투기 목적으로 거래되는 아파트가 대개 그렇다. 프리미엄을 노리는 전매가 횡행하는 분위기에서 실수요자의 고충은 배려되지 않는다. 먹고 튀면 그만이다. 주택경기라는 게 대개 먹튀현상을 기반으로 유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다. 교통이나 학군의 차별성은 물론이고 수려한 조경이나 따사로운 햇살은 주거보다 프리미엄의 조건일 따름이다. 그런 주택에서 마음 따뜻한 이웃을 만나기 어렵다.

 

주거시설이 오래되면 많은 주민은 재개발을 원하는데, 기준은 단연 부가가치다. 재개발할 때 포함되는 공간이나 시설은 소통과 거리가 멀다. 내 집의 가격이 상승되는데 기여할 것인가를 세세하게 따진다. 건물의 수명과 관계없이 다세대주택과 저층아파트는 고층으로, 고층아파트는 초고층을 지향한다. 부식된 배관이나 구식 전기통신 설비를 교체하거나 건물의 내부를 수선하면 얼마든지 더 지낼 수 있건만 그건 고려 대상이 아니다. 유명 건설회사의 상품명이 아로새긴 명품 아파트로 재개발하길 바랄 뿐이다. 재개발하면 떠날 수밖에 없는 세입자의 고충은 물론 아랑곳하지 않는다.

 

익명의 사회는 범죄에 온상을 제공하니, 은행은 물론이고 현금지급기와 아파트 주차장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야 안심이 된다. 그렇게 감시가 번득이지만 범죄는 줄어들지 않는다. 옆 사람의 숨소리가 들리는 지하철이든, 옷깃이 부딪히는 양판점의 지하 식품매장이든, 민원인이 몰리는 관공서든, 눈에 띄는 이는 대개 낯설다. 건물이 높은 만큼 그늘이 깊은 회색도시가 그렇다. 위아래는 물론 앞집과 인사가 없는 도시의 주거공간도 마찬가지다. 익명의 사회에서 마음 터놓고 지낼 이웃을 만나기 어렵다. 이해관계에 따라 이리저리 몰리거나 아예 외면하는 사람들은 서로 눈길 주기 두려워한다.

 

싫든 좋든 수많은 시민들이 머물 수밖에 없는 곳이 도시라면, 소통을 배려하는 생태적 공간을 곳곳에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시민들은 자신이 사는 도시에 관심과 애정을 갖고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비로소 마주보게 된다. 더 근사한 상품이 출시되는 순간 가치를 잃고 마는 명품보다 역사와 문화가 보전되는 도시에서 시민은 정주의식을 배양하게 된다. 그를 위해 시민들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한다. 꽁꽁 닫힌 아파트에서 마음 맞는 이에 은밀히 인터넷으로 접속하기보다 실제 공간에서 이웃과 반갑게 만날 수 있는 도시라야 시민들은 숨쉴만하다. 바로 생태도시다.

 

뒷골목에서 서로 외면하는 사람들은 나무가 우거진 숲이나 잔디가 펼쳐진 녹지에서 눈길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하게 된다. 아이나 애완동물이 매개하여 두 번, 세 번 눈인사 나누면 친해지고, 친해진 이웃은 직장이나 아파트, 월급 높낮이나 아파트 평수를 비교하기보다 같은 취미나 관심사로 끈끈한 우정을 유지한다. 도시 곳곳에 마련된 녹색공간도 시민의 훌륭한 소통공간이 된다. 그런 공간이 많은 도시일수록 범죄 발생이 적다. 마음을 나눌 이웃이 자랑스러운 시민은 정든 도시를 떠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도심에 녹지가 풍부할 뿐 아니라 시민에게 텃밭을 저렴하게 임대해주는 유럽의 많은 도시들이 그렇다. 그런 도시의 시민들은 자긍심을 주는 자신의 고장을 명품이라며 과시하지 않는다.

 

거품이 꺼지면 부담으로 남는 주거공간을 공동체로 가꿀 방법을 찾았으면 좋겠다. 투기를 조장하는 건설업체의 감언이설에 속아 창문너머 냄비 주고받던 다세대주택을 허문 자리에 세입자 내쫓는 고층 아파트를 일사분란하게 세우기보다 세입자도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소통공간으로 꾸밀 방안을 머리를 맞댄 이웃들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논의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무척 어렵고 고단한 시간이 흐를지라도 세입자는 물론이고 다음세대도 당연히 포함된 이웃이 제안한 다양한 의견을 함께 검토하고 수정하면서 합의에 이른다면 그 논의과정에 참여한 주민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어 열린 공동체를 가꿀 수 있을 것이다.

 

그 가능성의 확산을 위해, 누구라도 앞장서서 시범적인 공동체를 구상하고 발표하고 실행에 옮겼으면 좋겠다. 초고층이나 고층아파트는 이미 틀렸다. 수명도 남았거니와 명품이라 거들먹거리는 재개발은 소통하는데 관심이 크지 않을 것이니 일단 생각은 접기로 하자. 헐어내야 할 정도로 낡은 아파트나 다세대주택부터 떠올려보자. 주민들은 고층아파트에 비해 잘 알고 지낼 뿐 아니라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조금이나마 도와주려 노력해왔을 것이다. 그들 스스로 자신의 마을을 소통이 활발한 공동체로 바꾸면 어떨까. 가족과 부부의 개인공간을 배려하면서 이웃과 어울리는 공간도 어느 정도는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 노력하기에 따라 난방과 전기와 물 소비를 줄이거나 효율화하는 도시 공동체로 얼마든지 승화할 수 있을 것이다.

 

텃밭과 녹지는 물론이고 작은 도서관과 회의실을 겸한 식당과 놀이터와 노인정을 두루 갖춘 마을을 만든다면 이웃사촌이 생긴 아이들은 제 방에서 더는 컴퓨터게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텐데. 사소한 일로 낯붉히며 싸우는 이웃은 줄어들 텐데. 정주의식이 높아진 시민들은 이사 가고 싶지 않을 텐데. 천박한 명품을 과시하기보다 개성을 배려하는 이웃을 자랑스러워할 텐데. 그 모든 게 모이면, 참여로 한층 끈끈해진 공동체에서 민주주의는 꽃을 피울 텐데. (작은책, 2009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