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계·동물

디딤돌 2006. 4. 8. 11:28
 

2003년 3월 29일, 문규현 신부를 비롯한 성직자 4분이 역사적인 삼보일배의 첫발을 떼고, 그 이튿날이다. 세계 최대를 예고하는 33.5킬로미터 중 70퍼센트 정도가 진행된 새만금간척사업의 외곽 제방공사는 행정법원의 중지명령으로 멈췄으나 제방을 위해 밑동까지 깎인 해창산은 이미 처참했다. 해창산을 8천년 이상 마주보던 갯벌에는 전국의 환경단체가 세운 수십의 장승이 매립을 막으려 모였고, 갯벌과 해창산 사이를 가로지르는 30번 국도 변에는 잘 깎은 한 쌍의 장승이 팻말을 맞들고 있다. 질식할지 모를 새만금갯벌과 그 갯벌에서 가녀린 숨결을 고르는 백합이 영원토록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에서 2000년 어린이날에 세운 것이다.


장승들이 지키는 갯벌을 출발한 삼보일배 행렬은 탐욕과 어리석음과 분노를 반성하는 세 걸음을 뒤로 오체투지, 즉 양팔과 양다리와 이마까지 차디찬 아스팔트 바닥에 부비며 서울로 향할 것이다. 이틀 째 계속되는 성직자의 삼보일배를 말없이 뒤따르며 오체투지에 맞춰 고개를 숙이던 참가자들은 하늘이 어둑해질 무렵 인근의 계화도 간척지로 갔다. 뜻을 같이 해왔던 주민의 집에 모여 함께 저녁 먹고 잠도 청해야겠지만, 무엇보다 생업 잊고 매립을 막아내려 애쓰는 주민들에게 감사해야 했다. 모닥불을 켜고 둘러앉아 막걸리를 기울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주꾸미가 수북이 나온다. 맞다. 3월말은 주꾸미의 철이지!


설악산국립공원과 연한 점봉산, 원시림이 울창해 이 땅의 생태학자마다 보존을 외치는 곳이다. 일제가 군수용으로 나무를 대거 베어내고 625전쟁 통에 더욱 황폐해진 산하는 헐벗은 민중에게 따뜻한 잠자리와 밥을 보장하느라 급기야 벌거벗었지만 점봉산 숲은 보존되었다. 그만큼 점봉산은 깊고 거칠다. 그 점봉산으로 이어지는 양양 남대천에는 가을이면 연어가 잊지 않고 찾아온다. 점봉산 계곡이 모천인 까닭인데, 언제까지 보존될 수 있을지 연어는 알지 못한다. 계곡을 가로막으며 점봉산을 파헤친 양수발전소가 연어의 방문을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북한산과 도봉산 사이를 잇는 작은 고개 우이령, 그 고개를 넘어 무장공비가 내려와 1968년 이래 통제되었건만 어느 날 갑자기 아스팔트도로로 확장한단다. 자동차가 질주하는 도로는 동물의 통행을 막아 생태계는 단절된다. ‘로드킬’을 피하지 못하는 동물들은 근친교배에 의존하다 악성 유전자가 축적되면 몇 세대 버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말 터. 그래서 우이령보존회는 발벗어나섰고, 절박한 행동으로 지켜낼 수 있었다. 그 우이령보존회에서 점봉산과 연어를 보존하려고 앞장섰다. 점봉산은 제자 앞에서 보존 외치는 생태학자나 몇 명 안 되는 주민만의 산이 아니다. 탐방객은 물론, 댐과 하구언으로 막힌 강에서 자취를 감춘 연어도 양양 남대천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녹지자연도는 0에서 10단계로 나눈다. 자연이 없는 시가지는 0단계, 25년 생 이상의 자연림은 8단계다. 8단계부터 개발행위가 제한된다. 9단계는 50년 이상인 자연림이고 10단계는 수십 년 된 자연림이 울창한 숲에서 주로 발견되는 고산습지가 해당된다. 12줄기의 계곡에 차디찬 물이 사계절 풍부하고 20곳이 넘는 늪이 분포하는 산이라면 당연히 보존해야 한다. 경상남도 양산시에 위치한 천성산이 그렇다. 환경부가 생태계보전지역과 습지보전지역으로 묶을 수밖에 없었던 천성산은 3개의 단층대가 지나가면서 암석을 흔들어놓아 곳곳에 파쇄대가 형성돼 있다. 산세가 비록 좁아도 계곡에 맑은 수량이 넘쳐흐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전문가들은 증언한다. 그 천성산에는 멸종 위기에 처한 꼬리치레도롱뇽을 비롯한 수많은 동식물이 자신의 생명을 의탁하고 있다. 지율스님이 산감으로 있는 천년고찰 내원사의 신도와 천성산을 찾는 시민들도 그렇다.


교통비 더 들여 20분 빨리 도착한 만큼 승객은 부산 친구를 반갑게 만나거나 쉬지 못한다. 느림을 혐오하는 산업사회는 일을 20분 더 요구할 따름이다. 산을 우회하지 않고 터널을 뚫으려면 길이를 최소화해야 옳다. 그런데 20킬로미터 가까운 터널로 천성산 줄기를 꼬치 꿰듯 종축으로 뚫어야 할까. 철도공단에서 내세우는 최신공법은 돌이나 물이 터널 안으로 떨어지지 않게 파쇄대를 관통할 수야 있겠지만, 억겁의 세월을 지킨 천성산의 계곡과 늪은 보존될 수 있을까. 터널의 콘크리트는 기껏해야 200년을 견디겠지만 사람보다 먼저 깃든 천성산의 꼬리치레도롱뇽은 어떻게 될까. 지율스님은 도롱뇽으로 상징할 수 있는 자연의 생명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다.


소송은 성인만 가능하다는 법리는 20년도 안 된 기업에게 기회를 준다. 기업은 무조건 성인인가. 기업을 성인인 변호사가 대리하는 까닭이란다. 그렇다면 새만금간척사업지역에 8천년 이상 살아온 백합과 주꾸미를 비롯한 숱한 어패류의 생명은 누가 보호해야 하나. 억겁의 성상을 지킨 점봉산의 연어, 열목어, 어름치를 비롯한 숫한 생명은 누가 지켜주어야 하나. 점봉산 이상 오랜 풍상을 감내하며 꼬리치레도롱뇽과 계곡산개구리를 비롯한 숱한 생명들을 품어온 천성산은 누가 보존해야 하나. 사람보다 먼저 이 땅에 깃든 자연의 생명들은 무생물인 기업과 달리 법리를 몰라야 하나. 우리 법원은 우이령보존회에서 점봉산의 생명을 대리한 소송을 외면했다. 18세 미만인 다음세대들과 환경단체가 새만금간척사업 갯벌에 서식하는 생명을 대리한 두 번의 소송에 이어 지율스님과 40만 명이 넘는 도롱뇽의 친구들이 천성산이 품은 생명을 대리한 소송도 거듭 외면했다. 이 땅의 법원은 원고가 될 자격이 없다는 빛바랜 법리를 들고 나온다. 이른바 ‘당사자 적격’이다.


염소 방목을 막아 하와이 섬의 희귀 새 빠리아의 생존권을 지키고, 캘리포니아 숲의 벌채를 막아 대리석무늬바다오리의 번식권를 보장한 성과는 사람이 자연의 권리를 대리하는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거대한 나무와 우는토끼의 소송을 받아들인 외국의 법원들은 당사자 적격 따위를 운운하기 않는다. 자연을 대리하는 사람의 의견을 듣고 충실히 심리한다. 영어가 익숙하지 않아 국제법원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면 담당법관은 몹시 억울할 것이다. 그런데 돈 많은 기업에 각별한 우리 법원은 아직도 자연을 대리하는 소송을 외면한다. 우리의 법리는 언제나 생명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환경미디어, 2006년 5월호)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06. 1. 20. 16:31
 

천성의 제단을 한 가냘픈 비구니가 오르려한다. 버들가지 같이 바싹 마른 몸은 얼마 남지 않은 제단을 향해 마지막 숨을 고른다. 그를 부른 천성의 영원한 아름다움을 가슴에 간직한 채, 즐겁고 편안하지만 절실한 마음으로 제단을 바라본다.

 

곡기를 끊은 날을 따져 무엇하리. 안적암의 시리도록 찬 물에 살아온 도롱뇽과 꼬리치레도롱뇽, 내원을 스치는 한 줄기 바람결에 ‘살려 달라’ 애절했던 작은 메뚜기, 천성을 적시는 무제치늪, 미타암 숲을 이리저리 수놓는 동고비와 쇠딱따구리, 이 땅에서 건강하게 사라가야 할 아이들의 맑은 눈동자마저 저당된 오늘, 스님의 단식은 기간의 크기를 헤아리는 세속의 천박함에 어떤 의미도 구하지 않는다.

 

“한 마리의 도롱뇽, 한 비구니의 목숨을 건 사투가 아니라 죽어가고 있는 이 산하와 병들어 가고 있는 우리의 아이들”의 생명을 생각하는 지율 스님은 자연의 원리에 순응하지 못하는 우리의 죄악에 대해 반성하며 어쩌면 마지막이 될 단식을 수행한다. “과학이라고, 발전이라고 부르는 지식과 문화에 의해 고통받고 있는 어머니”의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건다. 아이들의 꿈을 들여다볼 수 있는 땅, 생명의 역사와 문화가 되살아나는 땅을 위한 ‘초록의 공명’이다.

 

그이가 단식하는 깊은 뜻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는 속세의 중생들은 목숨을 거는 지율 스님을 극단적이라고, 근본주의라고 몰아치며 외면하지만, 그들은 스님의 손가락만 바라볼 뿐이다. 스님은 왜 단식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헤아리지 않았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5번이나 약속했고 그 약속을 계속 파기한 정부를 탓하지 않고, 파기된 약속이 무엇인지, 스님은 왜 그 약속을 당부했는지, 살피지 않았다. 갱신되는 단식 날짜를 선정적으로 꼽는 언론과 마찬가지로, 스님의 손가락만 바라보는 이들은 개발과 속도를 여전히 숭상한다. 하지만 천성산의 뭇 생명과 약속한 스님은 자신의 마지막 선택 앞에서 고요하다. 만류하는 이들의 마음까지 품어 안으며 흔들리지 않는다.

 

사회학자의 진단과 같이, 한 비구니가 막기에 너무나도 막강한 ‘토건국가’의 ‘개발동맹’, 그 구조적 산물인 고속전철은 시민들의 토론은 물론 전문적 연구도 거치지 않았다. “토건업과 정치권이 유착하여 세금을 탕진하고 자연을 파괴하는” 국가답게 법을 우롱한 엉터리 황경영향평가를 바탕으로, 정부의 거듭되는 약속 파기를 기반으로, 억겁세월의 풍상을 견뎌온 천성산은 스님의 염려처럼 우리 세대에 그 아름다움과 생기를 잃을 것이다.

 

지율 스님의 생명이 스러진다고 토건국가는 사업을 중단할 리 없지만, “폭풍우 치는 바닷가의 판잣집”처럼 스러질 위기에 있는 천성산의 아픔을 스님은 외면할 수 없다. 비현시적 투쟁으로 규정하며 고개를 돌리는 환경운동가들의 이성과 관계없이, 거대한 자본의 탐욕스런 톱니바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천성산과 제2 제3 천성산의 고통을 법정에 호소한 스님은 자신의 생명을 던져 중생을 살리고자 십자가를 지고 천성의 제단을 오르려 한다.

 

지율 스님의 단식 수행을 두려워하는 철도공사는 공동조사 약속을 위반하며 스님을 비난하는 책자를 전국에 배포하고 인터넷 공간에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지만, 스님은 체념하지 않았다. 근거 없이 편집된 30조 국고 손실의 허구를 앞세워 스님을 협박한 개발동맹에게 굴종하지 않았다. 팔과 다리에 마비가 오고 회복하기 어렵게 시력이 약화된 스님은 우리 곁을 곧 떠날지 모르는데, 속세에 남은 우리는 이제 무슨 일을 어떻게 받아야 할까. 자신을 이해하는 이의 손을 잡으며 마지막까지 맑고 밝은 정신을 보여준 스님의 영혼을 우리는 어떻게 맞아야 하나.

 

지율 스님은 도롱뇽으로 표현한 우리 자연의 가녀린 생명을 지키려고 다섯 차례 단식 수행하고, 3천배 기도하고, 삼보일배에 나서며 ‘초록의 공명’을 우리들의 가슴에 울렸다. 천성으로 표현하는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과 초록으로 표현하는 다음 세대의 생명을 살려내려고 제 생명을 천성의 제단에 바치려 할 때, 제단 아래 있는 우리는 스님이 가슴에 품은 고통을 안아야 한다. 초록 내일을 위해 이제 우리가 공명할 차례다. (프레시안, 2006.1.21)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저도 지율스님의 단식에 대한
뉴스를 듣고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어쩌지 못했답니다
개발이라는 이름 앞에서
어쩌면 그렇게도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사람들이 많은지....
그것이 곧 부메랑으로 우리들 삶의 터전을
앗아간다는 것을 어찌 알지 못하는 것인지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디딤돌 같은 분들이 더 많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고 공생공존하는 그날이 언제나 올지..
디딤돌님과 함께 하시는 모든 분들의
건승을 빌고 싶군요

 
 
 

환경일반·개발

디딤돌 2006. 1. 2. 19:24
 

최악의 과학사기극을 뒤로 2006년이 밝았다. 사기 논문을 쓴 황우석 교수는 아직 진정한 사과를 회피하며 실체도 없는 원천기술 재연을 갈구하지만, 특허 없는 원천기술은 공허한 자기변명이다. 첨단과학의 연구는 혼자 수행하지 않는다. 황우석 교수는 연구보다 정치를 했다. 원천기술이 있다면 황우석 교수보다 그 연구팀이 가지고 있고, 이제까지 나타난 조사결과를 볼 때 특허가 인정될 정도의 줄기세포 생성기술은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치명적인 생태계 파괴와 환경오염이 누적되면서 나타나는 수많은 질병은 지난 수백 년 동안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어머니 지구에 저질러온 패륜행위에 대한 피치못할 부메랑인데, 반성할 줄 모르는 인류는 더욱 개선된 문명으로 치료하겠다며 오만을 떤다. 수억 년 이어진 유전자를 돈벌이를 위해 교란하고 자궁에 깃들면 태어날 생명을 멋대로 죽이는 생명공학이 그렇고, 계속되는 기상이변에도 그치지 않는 개발행위가 그렇다. 지구온난화를 에어컨으로 극복하기 위해 이산화탄소를 막대하게 배출하는 화력발전소와 후손에게 방사선을 내뿜는 핵발전소를 추가하는 모습을 보라.

 

“말랐든 말든 상관없다”는 한 네티즌은 도롱뇽이 멸종하든 말든, 경부고속전철을 그냥 밀어붙이라고 한다. 공동조사 최종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문제없음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공사를 재개한 철도공사는 터널을 뚫어도 한 방울의 물도 마르지 않을 것으로 근거 없이 예단한다. 공사구간에 물이 조금만 줄어도 공사를 중단하겠다고 약속한 철도공단은 계곡의 물이 전에 없이 말라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천성산 생명들에게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다고 약속한 지율스님의 단식은 다시 시작돼 어느덧 120여 일, 지율스님의 목숨이 경각이든 아니든, 천성산을 종축으로 뚫어 빨리 부산까지 가고 싶다는 일부 네티즌들의 언어폭력에 화답하는 철도공사는 자신의 약속위반을 언급하지 않은 채 언론에 공사재개의 합리화를 천명하고, 철도공사의 주장만을 왜곡보도하다 항의 받은 기득권 언론은 정정 보도를 은근슬쩍 구석으로 숨기는 비열함을 광고주에 과시한다. 감리단장이 지율스님을 비난하는 인터넷 카페를 은밀히 지원하다 발각되고도 사과조차 거부한다. 파멸로 가는 속도에 충성하며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마저 외면한다.

 

새만금의 공사재개를 허락한 행정법원은 어떤 생명을 옥죌까. 우리 다음 세대를 건강하게 이어가야 할 후손이다. 편서풍 지대 서편 바다에서 수천 년 이어온 갯벌은 육지의 물을 정화해 콩팥이요, 수많은 어패류의 산란장이니 자궁이고, 식물성플랑크톤이 산소를 무한히 생성해주니 허파다. 그 덕분에 우리 조상이 살아왔고, 우리에게 이어 내려와 우리도 건강을 유지한다. 새만금 일원에 갯벌이 건강한 덕분에 풍성한 이 땅에 첫 발걸음을 옮긴 조상부터 당대의 우리까지, 자연은 우리에게 온갖 먹을거리를 농한기 없이 베풀어주고 지구온난화를 막아주었다. 이렇듯 갯벌에 삶을 기댄 조상의 문화와 역사가 주저리주저리 열린 갯벌은 후손의 생명을 지켜주는 터전인데, 자본의 한시적인 이익을 위해 질식사시켜도 무방한가. 인혁당으로 몰아 판결 직후 인질을 사형에 처한 역사만이 법정살인이 아니다. 이번 행정고등법원의 판결도 후손의 처지에서 볼 때 법정살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오염된 물, 안심할 수 없는 먹을거리, 악취와 미세먼지로 가득찬 공기는 아토피를 양산한다. 아토피는 값비싼 한약이나 연고제로 해결할 수 없다. 공기정화기와 유기농산물도 한시적이다. 그 혜택은 돈을 지불하는 동안에 한해 나와 내 가족의 좁은 공간에 적용될 따름이다. 근본대책은 천성산에 물이 마르지 않아 도롱뇽과 사람이 어우러질 수 있는 생태계를 복원하고, 정수기 없이 안심할 수 있는 물, 개구리와 뱀과 산새들이 농작물에 붙은 곤충과 공생하는 농촌, 은하수로 덮이는 파란 하늘을 회복하는 일이다. 노동자들이 혹사당하지 않아 작업장사고를 줄이고, 자동차보다 자전거, 자전거보다 보행자가 우선되는 도시 곳곳에 새들과 다람쥐가 흔한 숲이 우거지면 교통사고도 획기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질병원인인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 과로와 스트레스, 도로의 안전성과 작업장의 민주주의 회복으로 줄기세포가 불필요한 사회로 건강해질 것이다.

 

고속전철은 서울과 부산 사이를 빠르게 연결한다고 주장한다. 덕분에 조국산하는 발기발기 찢어졌다. 산이 뚫리고 계곡이 막혀 바람도 물도 수많은 생물들도 제 길을 잃어버렸다. 억만년 이어왔던 우리의 삶이 말살됐다. 조상부터 면면히 이어왔던 정신도 속도에 의해 압살됐다. 사람의 삶은 온전할 수 있을까. 다섯 번이나 긴 단식에 들어간 지율스님은 그걸 염려한다. 제 생명을 내놓으며 늦기 전에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고 거듭 수행에 나선다. 지율스님을 잃으면 천성산 도롱뇽만 위기에 빠지는 게 아니다. 우리의 생명도 경각에 달린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반성할 줄 모르는 사람도 생태계의 산물이 아니던가.

 

문명이 추구하는 속도는 휴식을 몰아낸다. 부산에 빨리 도착한 대가로 일을 더 해야 하는 사람들은 피로와 스트레스를 피할 수 없다. 거금이 들어간 고속전철이 망하지 않으려면 승객이 많아야 하고, 비싼 비용을 물은 그 승객들은 더 많은 일에 몰려야 한다. 생태계도, 환경도, 고속전철도, 승객과 역무원도 모두 지친다. 자원은 거덜나고 생명은 경각에 달린다. 그래서 늘어나는 질병은 대부분 치료가 어렵다. 불치병과 난치병은 늘어나는데, 생명공학이 치료해줄까. 아니다. 후손의 생명을 재료로 삼는 생명공학은 사람의 생명을 단축시킨다. 파멸을 향해 빠르게 인도한다.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1999년은 이미 지나고 21세기도 꽤 지났다. 조상들이 보는 기준에서 지금 우리는 이미 멸종했어야 옳은지 모른다.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왔던 조상 덕에 오염된 땅에서 덤으로 병치레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돌이키기 어렵게 늦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죄 없는 아이들이 생글생글 웃으며 자라나는데 삶을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다. 북미원주민들은 7대손의 처지를 먼저 생각한다는데, 자식 키우는 우리는 파멸의 속도를 늦춰야 한다. 스스로 옭아맨 문명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내일의 건강한 환경과 삶을 물려주어야 한다. 선조가 우리에게 그랬듯, 우리도 후손에게. 그 길만이 나를 위한 대안이고, 후손에 대한 반성이다. (환경미디어, 2006년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