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인간

디딤돌 2011. 5. 10. 01:23

 

요즘 참 편리한 세상이다. 굳이 은행에 가지 않아도 입출금이 가능하고 공휴일이든 오밤중이든 매장에 가지 않아도 마음에 드는 옷이나 물건을 주문할 수 있다. 이제 지갑을 놓고 왔다며 회비 면제를 요청하는 얌체도 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지만 잔고가 부족한 게 가상공간에서 확인되는 순간 현실공간의 참여가 거부당하는 일이 발생하게 생겼다.

 

인터넷은 언뜻 양방향으로 열린 공간처럼 보이지만 의외로 폐쇄된 공간도 많다. 그런 곳에 접근하려면 비밀번호를 정하고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해커들이 어떻게 기업이나 정부 요로에 접근하는지 알 턱이 없는 일반 시민들은 그래서 비밀번호의 지뢰밭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가 많다. 인터넷 뱅킹을 비롯해 편의를 보장해준다는 수많은 인터넷 쇼핑몰의 전자결재 수단들이 대개 그렇다. 가끔 찾아가는 경우, 십중팔구 비밀번호를 잊어 찾느라 성가신 절차를 밟아야 한다. 첨단기술이 요청하는 피할 수 없는 덫이다.

 

문자를 사용하면서 기억력을 잃었고 주판과 계산기를 개발하면서 계산능력이 손상된 사람은 노래방 기계를 보급하며 십팔번을 잃었고 내비게이션을 장착하면서 스스로 길눈을 어둡게 만들었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휴대전화에 친지의 번호를 저장한 뒤 가족과 집 전화번호가 아리송하게 된 것을 넘어 술 취하면 집 현관 열쇠번호까지 잊게 되고 말았다. 야심한 시각, 흐느적거리며 자기 집 현관에서 번호판을 한참을 더듬던 기억, 많은 이가 공유할 것이다. 지나가는 이웃이라도 있었다면 도둑으로 오인될 뻔했던 아찔한 기억이다.

 

비밀번호 따위를 잊는 첨단기술의 덫은 애교에 불과하다. 인터넷으로 자질구레한 물건을 구입하고 결재하는 시민들은 특별한 일을 일으킬 도리가 없겠지만, 뜻밖에 일상생활에 지장이 클 만큼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지난 412일 발생한 농협 금융전산망 마비를 보자. 국가정보원과 공조수사를 한 검찰이 뚜렷한 근거도 없이 규정한 북한이 7개월여에 걸쳐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하고 실행한 새로운 차원의 사이버 공격여부와 관계없이, 농협에 계좌를 열고 온라인으로 예금을 입출금하던 이들은 자신의 의자와 상관없이 잔고 없는 가난뱅이가 되어 경제활동이 한동안 봉쇄되고 말았을 것이다.

 

지난 36일 북한은 경기도 서북부 지역의 위성항법장치(GPS)의 전파를 교란했다고 관계자가 발표했다. 2만 킬로미터 상공의 위성에서 발사되는 GPS 신호는 지상에 도달하면 휴대전화의 100분의1 정도로 미약해 간단한 장비로 쉽게 교란할 수 있다고 전문가는 전한다. 실제 2003년 이라크 군은 미군의 GPS를 교란해 민간시설을 오폭하게 만들었다는데, 휴대전화의 오빠 믿지응용프로그램을 설치한 젊은이의 혼선과 오해보다 자칫 우리 어선이 북방한계선을 넘어가 나포되는 위기를 맞을 수 있었다. 그뿐인가. 훈련 중이던 아군의 포탄이 엉뚱한 곳으로 떨어질 수 있었다.

 

아무리 철두철미한 방어 장치를 갖춰도 자연 재해 앞에 속수무책이 되는 최첨단의 덫도 여러가지다. 가깝게 일본 동북부 지진에 이은 쓰나미와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수소가스 폭발의 후폭풍을 보라. 수십 년 유기농업을 정착시키려 애를 써왔던 농부의 자살도 참으로 애처롭지만 이이폰으로 지구촌의 여유 있는 계층에 선풍적 인기몰이를 하던 미국의 전자회사 애플에 생산 차질이 생겼다지 않는가. 일본에서 생산하는 플래시메모리 공급 중단으로 아이폰과 아이패드의 생산량 위축돼 우리가 반사이익을 얻는다 해도, 그건 잠깐이다. 그 여파는 돌고 돌아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1995년 일본 고베의 한신대지진은 톱니바퀴 물리듯 돌아가는 세계 물류에 한동안 지장을 초래했고, 투기세력의 조정이 있었겠지만 얼마 전에 있었던 리비아 민중의 시위로 국제 석유가격이 잽싸게 올랐다. 지구온난화에 이은 기상이변이 만든 러시아 식량위기는 시카고 곡물선물시장의 투기세력을 들쑤셔 공급가격을 치솟게 만들었고, 그 여파로 아프리라 세네갈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최첨단 예보장치를 가진 투기세력들은 이미 예상했을 것이다. 자국의 잉여 농산물로 바이오디젤을 만드는 최첨단 공장을 정부 보조금을 받아 경쟁적으로 세우는 자본도 옥수수 수입국의 비명을 예견하지 못했을 리 없다.

 

지난 달 미국 중부 평야지대를 휩쓴 사상 최악의 토네이도는 하필 일본 완성차 공장을 뜯어냈지만 우리의 현대나 기아차 공장을 용케 비켜갔다고 한다. 덕분에 일본의 4월 신차 판매고가 절반으로 급락한 반면 우리 차들은 절반 이상 늘었다는데, 태평양 상의 라니냐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예년에 없이 토네이도를 강력하게 만든 지구온난화는 시간이 갈수록 심화되기만 하는데, 빈도와 강도를 거듭 경신하는 미국의 토네이도가 다음에도 현대차와 기아차 공장을 비켜갈 거라 확신할 수 있을까. 더욱 강력한 토네이도가 내습해도 끄떡없게 개축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른바 디지털 치매를 피할 수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어떤 세력에 의한 디지털 감시의 눈초리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는 세상을 살고 있다. 건물과 마을 어귀마다 설치된 폐쇄회로 카메라뿐이 아니다.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거나 문자를 띄우든, 신용카드로 결제를 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든, 빅브라더는 언제 어디서나 개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두루 감시할 수 있다. 대리운전 전화 후 성가시게 오는 안내 문자는 애교에 불과하다. 아무리 일상을 건전하고 무미건조하게 지내도 뜻하지 않은 범인의 용의선상에 오를 수 있다. 범인과 같은 버스를 탔다는 걸 경찰청의 중앙컴퓨터는 안다. 그뿐인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알리바이도 위변조될 수 있는 세상이다.

 

우리는 항상 건전하고 무미건조하게 살 수 없다. 또한 언제나 맑은 정신과 부릅뜬 눈으로 세상을 분간하며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디지털 치매 세계에 예외는 없다. 치매에 접어든 노인은 딜리트하고 말 첨단일수록 기술은 다수의 소외를 양산한다. 빅브라더가 지역에 있는지 중앙에 있는지에 따라 소외의 범위는 다를 테니 전자칩이 삽입된 여권을 가진 이의 기록은 미국의 중앙컴퓨터가 관리할 게 틀림없는데, 정부는 앞으로 전자집이 삽입된 주민등록증을 발급한다고 한다. 중앙 컴퓨터가 당의정으로 제공하는 편의에 길들여진 민중은 첨단기술의 덫에 겹겹이 갇히는 셈인가.

 

이미 최첨단 감시의 덫에 손발이 사방팔방으로 묶인 처지에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도 사지와 정신이 멀쩡하다면 더욱 교묘하게 현혹하는 최첨단의 강요에 가능한 만큼이라도 저항할 필요가 있겠다. 신용카드의 수를 줄이거나 현금을 사용하고, 구형 휴대전화를 고집하다 버리고, 현관을 열쇠로 열거나 아예 열어놓는 행동이다. 중앙의 편의에 중독된 민중끼리 살아가려니 현실에서 고문처럼 어려운 일이겠지만 첨단기술의 치명적인 덫을 인식한다면 빠져나갈 고민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조금이라도 더 자연스러운 삶으로 돌이켜 보자는 거다. (지금여기, 2011.5.?)

 
 
 

공동체·인간

디딤돌 2005. 7. 23. 17:22
 

 덥다. 에어컨 시원한 은행이나 관공서에 앉아 쉬고 싶지만 앉아있을 때만 시원하지 밖으로 나오면 더 덥다. 이럴 때 펄펄 끓는 삼계탕으로 온몸에 흠뻑 땀을 내면 보신도 보신이지만 무더위가 시원해진다. 이열치열이다. 텔레비전을 보니 어떤 삼계탕 식당은 가마솥에 백 마리가 넘는 닭을 넣고, 작은 닭들은 모두 같은 크기의 뚝배기로 들어가 손님상에 나온다. 닭에 뚝배기를 맞추는 게 아니다. 뚝배기 크기에 닭을 맞췄다.


과학축산은 용도별로 닭을 획일화시켰다. 평당 몇 마리를 계사에 넣고 온도를 어떻게 맞춰 어떤 사료를 어느 정도 주면 며칠 만에 같은 크기로 출하할 수 있는 삼계탕 병아리를 품종개량해서 축산농가에 판다. 그런 병아리는 돌림병은 물론 축사 비닐이 바람에 찢겨 비바람이 들이치는 사고로도 몰살될 수 있다. 예측 가능한 생육을 위해 닭의 유전적 다양성을 위축시켰기 때문이다. 어디 닭뿐이랴. 농산이든 축산이든 과학농업은 첨단으로 갈수록 유전적 다양성과 거리가 멀다.


‘탄저병 걸리지 않는 고추’가 나왔다는 보도가 나왔다. 탄저병이 동네에 돌면 넓은 고추밭의 모든 고추들이 거의 한꺼번에 망치는 까닭에 농가는 그 특별한 고추 종자에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다. 전엔 그 정도가 아니었는데, 탄저병이 돌면 왜 고추들이 모조리 망가질까. 종자회사에서 판매하는 종자는 조건만 맞으면 소출이 높지만 유전적 다양성이 없다. 그러니 환경변화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산비탈 가득 심는 감자도 마찬가지다. ‘냉해 안 걸리는 감자’에 고랭지 밭주인들은 귀가 솔깃하지만 유전적 다양성이 없는 한 환경변화에 취약할 것이다.


냉해 안 걸리는 감자나 탄저병에 걸리지 않는 고추는 생명공학으로 유전자를 조작한 이른바 ‘최첨단’ 종자다. 냉해나 탄저병에 강할지 몰라도 다른 식의 환경변화엔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경험보다 종자회사가 요구하는 경작법에 순응해야 한다. 그래야 잘 못 되었을 경우, 나중에 보상이라도 제대로 받을 수 있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은 소비자들이 아주 싫어한다. 유전자조작 콩으로 만든 두부만 외면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종자회사는 최첨단 종자가 어떻게 제조되었는지 일체 공개하지 않는다. 첨단을 강조하지만, 첨단일수록 유전적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탄저병이 돈다고 모든 고추가 다 죽지 않는다. 살아남은 고추끼리 가루수분하면 탄저병에 이길 종자를 농부들도 찾아낼 수 있다. 조류독감이 돌 때 죽어 널브러진 사체 더미 사이를 겅중겅중 뛰며 텔레비전 뉴스 카메라를 피해 돌아다니는 병아리를 이용하면 조류독감에 이길 병아리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자나 병아리를 기업체에 의존하는 한 농가는 피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문가를 동원하는 종자회사는 어려운 용어를 늘어놓으면서 경작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피해보상이 어렵다는 주장만 내세울 것이다.


종자든 병아리나 송아지든, 생명체는 제 땅과 오랫동안 어울린 것이어야 건강하다. 유전적 다양성이 많아 환경변화에 강하다. 농업도 축산업도 마찬가지고 농부도 그렇다. 종자회사에서 첨단을 강조할수록 위태롭다. 농업은 땅에서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땅을 죽이는 최첨단 농작물에 익숙한 생산자와 소비자들에게 질병이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흙살림, 2005년 8월호)

재밌네요...닭에 뚝배기를 맞추는 게 아니다. 뚝배기 크기에 닭을 맞췄다. 이 한마디 외에 더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네요, 현재 과학 기술의 지향점을 표현하기에는...